오늘의 묵상
신자로서 살아가다 보면 오늘 복음과 비슷한 상황이나 질문과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선과 진리,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기가 힘들 때, 미사에 참여하는 것에 싫증이 날 때,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충실함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악이 우리를 에워싸고 공격할 때, 의혹과 불신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따르거나 어떤 신을 경배합니까?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릅니까? 아니면 그분을 두고 떠납니까?
복음의 가르침이 딱딱하고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참아 낼 수 없을 듯할 때, “누가 이 모든 것을 생활 규범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단지 성인이나 어리석은 사람밖에 없고 나는 둘 가운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우리는 갖가지 신들과 통치자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돈과 권력, 쾌락과 성, 교만과 이기주의, 허영과 아름다움, 번영과 소비주의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하며 생명의 말씀을 주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들 삶 안에서 우리의 공허함을 채워 주고, 만족시켜 주고, 실현해 주는 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것이 복잡한 가운데 개개인은 오늘날 자주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안팎으로 긴장에 눌려 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분, 그리스도만이 참으로 우리를 구해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끝없이 저물지 않는 충만한 삶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다른 신들을 선호하는 세상에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두려움 없이 떳떳하게 되새겨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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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유 재산권에 한계를 긋는 것이 희년에 관한 레위기의 법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땅을 구입하더라도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값을 지불하고 땅을 샀다 하더라도, 오십 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직전까지만 그 땅을 임대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땅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기 소유의 땅을 돈을 받고 완전히 팔아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 땅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이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명합니다. 분명 이웃의 사유 재산권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땅은 다릅니다. 이집트 탈출을 체험한 이스라엘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땅은 삶을 다시 시작하려면 꼭 필요한 마지노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지파, 가문, 가정이 살아가도록 주신 땅을 다른 사람이 영구히 차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주신 땅! 재력과 권력과 폭력을 동원하여 그 땅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이웃의 생존을 위협하고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농경 사회가 아닌 오늘날에도 이웃의 삶을 위협하면서까지 나의 재산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모두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하고 배려해야 하겠습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