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장,1-15절;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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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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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빵의 기적 이야기에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담겨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군중에게 나누어 줄 빵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셈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세상의 논리를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임을 표징을 통해 일깨워 주십니다. 수많은 군중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인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을 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는 성경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었는지, 우리가 흔히 알 듯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의 기적의 결과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빵의 기적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빵으로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라, 군중이 빵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충만함으로 가득 찼고 함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충만한 영광을 맛본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겸손과 온유, 인내심과 사랑, 평화와 일치를 말하며 깊은 영적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행복은 내 배를 불리고 내 행복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례와 믿음으로 묶여 한 분이신 주님과 성령을 섬기는 교회 안에서 저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 일치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일치는 신앙인이 성령께 받은 가장 큰 선물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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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앞에 놓여진 문제를 인간적으로 물질적으로 풀려고 하지는 않는지 묵상해 보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노력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최근에 있었던 사건/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해결이 되었나요).

3. 나는 세속이 주는 행복으로 인해 주님과 멀어진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보고 만약 세속이 주는 행복이 신앙생활과 상충(대립)된다면 어떻게 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신앙과 상충되는 이 모든것을 조금 포기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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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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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살기 위해서 먹는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음식을 두고 이런 장난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이 실례같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이른바 ‘맛집 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저마다 성향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아니면 죽기 위해서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먹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 가지 모습의 빵을 떠올려 봅니다. 한 가지는,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저 혼자 숨기고 먹는 빵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족하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 내어놓은 아이의 빵입니다. 빵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빵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초라한 빵이 아무 소용없다는 포기와 절망은, 다만 살기 위해서 먹는 빵일 뿐입니다. 반면에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내어놓은 아이의 빵은 작은 봉헌임에도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깃든 빵입니다. 그 빵을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빵을 먹고 있습니까?
우리는 또 다른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기 위하여 먹는 빵이 아니고, 그것만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빵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죽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내어놓고 봉헌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그 빵은 인간의 생명을 버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택하게 이끌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 성체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하였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하여 먹는 것조차도 또한 누군가를 살리고자 먹는 것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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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일반적으로 음식을 준비할 때 대부분의 주부들은 양을 조절하여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로 음식의 양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확히 계산하여 준비하는 것이 주부의 마음일 것입니다. 혹시라도 음식이 모자라면 덜 먹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주부는 이와는 달리 생각합니다. 음식은 남아야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명절이나 잔치 음식은 많이 장만하여, 찾아오는 이들에게 싸 주기까지 하는 것이 넉넉한 인심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지지하시는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도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과연 빵은 남았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전하는데, 먹고 남은 조각만 해도 열두 광주리입니다. 열두 광주리, 충만한 양을 뜻합니다. 남은 것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 빵을 먹은 이들이 배고픔만 간신히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가득 채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징을 본 이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인간의 기다림이 남김없이 충족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먹는 이들에게, 당신께서는 배를 채울 빵만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분명 빵의 기적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기적은 더 위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육 생명의 근원이시고, 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그분께서는 우리를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시나이다”(화답송 참조). (출저: 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932
7월28일[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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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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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iqksNahUt4
[원주교구 김정하 야누아리오(청소년사목국 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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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엘리사 예언자는 기적의 예언자로 유명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만 14번인데, 기록되지 않은 기적들도 숱하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행한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과 자주 겹칩니다. 요르단 강물 위를 걸어서 건넌 기적, 죽은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적, 나병환자를 치유한 기적, 그리고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인 기적 등입니다.

기적하면 빼놓은 수 없는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낙마하고 눈이 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뀌게 되는데, 이는 기적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그에게 엄청난 능력을 선물하십니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이 터치만 해도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습니다.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추락사한 청년 에우티코스를 소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더 큰 기적을 행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는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힘차게 주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환한 얼굴로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 4장 1~3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직전 안드레아 사도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고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복음 6장 9절)

안드레아 사도는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 그분이 지니신 권능에 대한 신앙이나 확신이 부족했습니다.그는 아직도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분이나 탁월한 랍비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 세상 만물의 주인이 예수님이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적은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 기적으로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이제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더 이상 죽었던 사람이 되 살아나고 죽어가던 사람이 순식간에 정상화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또 다른 누군가가 행할 기적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이자 사도들인 우리 각자가 행할 기적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삶과 죽음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억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초 긍정 마인드로 살아가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오늘 교회는 어르신들과 조부모님들을 각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간 소홀했던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영육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노인에 대한 배려나 존경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시대를 한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럴수록 더 큰 그릇, 더 큰 거목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댈 생각 아예 접고, 더 당당하고 더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의 삶도 멋지고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들 앞에 보여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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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YKT1xWiN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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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면 반응하라>

오늘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많은 숫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양인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히 감사로 아버지께 당신의 존재를 어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감사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가르는 시발점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절로 가지게 된 것을 잃어가기 때문에 짜증만 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을 믿는 우리는 다 잃어도 모든 것을 받은 것이기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게 됩니다.

제가 몸에서 촌충이 나온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평택 장에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약을 파는 아저씨가 저를 부르더니 약을 하나 먹고 자리에 앉아 있으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있으니 엉덩이가 간지러웠습니다. 다시 나오라고 해서 팬티를 내려보라고 했는데 이내 길고 흰 촌충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발로 밟았는데 그 안에 새끼들이 수없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내 몸에 저렇게 많은 벌레가 살며 피를 빨아 먹고 있었는데도 왜 난 저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본래 혼자 살아남으려 하는 자는 더 큰 존재에게 발각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본인이 잡아먹힙니다. 진화론은 이와 같습니다. 반응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의 세상을 지배하는 신은 파괴의 신입니다.

영화 ‘더 사일런스’(2019)에 외계 종족들이 쳐들어왔는데 그것들은 눈은 없지만, 청각이 발달하여 있습니다. 소리를 내면 바로 죽임을 당합니다.  본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수들을 많이 본 박효진 장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사형수들은 결국엔 똑같이 두려움에 떨거나 오줌을 지렸다고 합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고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SBS 꼬꼬무 37화에서 ‘임신 거부증’에 걸린 한 엄마가 신생아 둘을 냉동실에 넣어 죽인 사건이 나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엄마는 임신을 거부하였고 태아들도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길쭉하게 늘여 배가 많이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마치 기생충처럼 어머니 뱃속에 머물다 나왔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두 영아를 살해하였습니다.

사실 한 몸에 기생충도 있을 수 있고 태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둘이 다른 것은 하나는 엄마가 주는 모든 것에 반응한다는 것이고 하나는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는 하늘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믿는 하늘은 더 사일런스에 나오는 외계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아는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미소 짓고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자기도 몸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진짜 소멸의 세상에서 생성의 세상으로 넘어오는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처럼 감사의 반응을 실현할 도구는 십일조입니다.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러나 소멸의 법칙에 속한 자가 됩니다. 이 버튼은 그냥 반응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기가 처음에 엄마, 아빠라고 했을 때 부모는 그동안 한 모든 고생을 잊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140년이 지났는데도 몸이 전혀 썩지 않고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남아있고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성모님께 순종하여 그러한 생명을 지금도 얻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순종도 없습니다. 이런 현대의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주님께 반응하는 이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려면 반응하십시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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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성당이나, 사찰에 다니는 것이고, 미신은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 때문에 변했기 때문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변화 시키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메뉴를 선택합니다. 커피, 콜라, 물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자판기가 돈을 먹고,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짜증을 냅니다. 자판기를 흔들기도 하고, 자판기를 발로 차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는데 힘든 일이 생기면,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다가오면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물질의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표징이 생깁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는 걸까요? 그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 그분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 그분이 중풍병자를 걷게 하신 것, 그분이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신 것을 믿는 걸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도 믿음이 아닌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빵을 많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믿음은 아닙니다. 사회복지와 믿음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사회복지는 공동선의 실현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고백한 ‘사도신경’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신경을 같이 외워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계심을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아멘” 나의 믿음이 ‘무엇 때문에’라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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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오늘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2열왕 4,44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2열왕 4,43)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 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만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요한 6,31-33.49 참조), 장소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때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4절)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이시다.’하고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제1 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탈출 16,20) 예수께서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éo(11절)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 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절)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다.(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생각하고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에페소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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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이가 가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인원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이 가져온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자루를 바라보며 엘리사의 시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두 배부르게 먹고도 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며, 이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음식으로 빵의 기적을 이루셨고,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십자가 죽음으로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믿음과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영혼에 생명을 나누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미사 때 선포된 하느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봉헌하고,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더불어 가족과 이웃에게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생명의 빵”이 되는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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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빵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1-7)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1)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빵의 기적’을, “군중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자비”로 해석하고 그렇게 기록했는데,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신 일로 해석하고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군중은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고, ‘메시아를 찾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거나 믿고 싶어서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뭔가 새로운 기적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따라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려고 따라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군중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군중이었는데, 전반적으로 ‘믿음의 방향’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심으로써 바로 그 ‘믿음의 방향’을 바로잡기를 바라셨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은,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을 계시하려고 의도적으로 실행하신 기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작정하셨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군중의 배고픔과는 상관없이.>

2)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에서 중요한 말은 ‘어디에서’입니다. ‘어떻게’나 ‘무엇으로’ 라고 묻지 않으시고, ‘어디에서’라고 물으신 것도 의도적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정답은 “주님에게서”입니다. 주님에게서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 은총을 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필립보 사도에게만 물으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이야기에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필립보, 베드로, 안드레아 사도는 모두 ‘벳사이다’ 출신으로서 같은 고향 사람들이었고(요한 1,44),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벳사이다에서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세 사도가 뭔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은, “저 군중을 모두 먹이는 것은, 저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제자들이 ‘이백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는 빵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면 당연히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뒤의 51절에 있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는 말씀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으로’ 드러내신 ‘계시’이고, ‘빵의 기적’은 ‘표징으로’ 드러내신 ‘계시’입니다.>

3) ‘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긴 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라는 말에서 ‘그 예언자’는 모세가 예고했던 예언자인데(신명 18,15), 당시 사람들은 그 예언자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빵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자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약속했던 ‘그 예언자’ 라고, 즉 메시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쁜 지도자’를 버리고 ‘좋은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군중을 탓할 수만은 없지만, 예수님을 세속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의 기적’에 대해서 말할 때, “믿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빵’으로 주신 주님을 믿어야 한다.”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생명의 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받아먹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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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보기에 불가능해 보이거나 매우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변화되기도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폭력을 사랑으로 되갚는 이들 때문에 세상에 평화가 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이기심을 선의와 자비로 뒤덮는 이들 때문에 세상이 따뜻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믿게 된 제자들도 스승님이 먼저 시작하신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기꺼이 동참하였습니다. 세상에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모진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세상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습니다. 그 수많은 계란들 덕분에 이 땅 위에 교회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이라는 카펫이 깔린 꽃길을 마다하고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으려는 수많은 계란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그런 계란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빵의 기적, 사랑의 표징을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주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수많은 군중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오늘날 우리 상황으로 비유하면 추석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당신을 따라다니느라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배까지 곯아가며 고생하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기신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아무도 걱정하지 않으며, 모두 함께 배불리 먹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일으키실 그 기적이 그저 놀라운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당신 제자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스승님께서 군중들의 배고픔과 고생을 당신 일처럼 여기며 안쓰러워 하신 것처럼, 이웃의 배고픔과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며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하신 또 다른 의도는 우리가 빵을 구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참된 빵은 세상에서 돈을 주고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선사해주시는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물으신 것이지요. 또한 그 질문 안에는 당신 자신을 우리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 ‘표징’이자 ‘암시’처럼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먹여살리시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철저히 이성과 합리라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숫자라는 물질적인 기준으로 계산한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천만원이라는 큰 금액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는데도 그저 한 없이 모자랄 뿐입니다.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기는 커녕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로 만드는데도 수 천만원이 깨지는 상황이니, 그들을 제대로 먹이려면 대체 얼마가 필요할 지 선뜻 계산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거액을 자기들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핑계로 그런 자기 모습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둡시다’. 자선과 나눔을 주저하며 나중으로 미루는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가 없어서 못나눈게 아니라 베풀 마음이 없어서 못나누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일단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자리를 잡고 앉게 하십니다. ‘어차피 안된다’는 실망감에 좌절하여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당신 곁에 단단히 자리를 잡게 하시는 것이지요. 부족하고 약한 인간의 논리로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늘어나는 것은 걱정과 한숨 뿐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땐 복잡한 생각이나 계산은 다 접어두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에서조차 당신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반드시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 하나만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선택이지요. 내가 그런 믿음으로 주님 곁에 자리를 잡으면 바로 그곳이 기적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내가 순명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바로 그 실천이 놀라운 기적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너무 밝아서 주님의 뜻을 몰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지만,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으면 ‘주님,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제 전부를 드렸으니 부족한 부분은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차고 넘치도록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수 천명의 군중이 먹기에 터무니 없이 모자란 양이었지만, 걱정하시기 보다 먼저 감사의 기도를 바치시며 부족함을 하느님 손에 맡기셨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아버지의 선한 뜻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실행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는 시편의 내용처럼 하느님께서 몸소 이스라엘 백성을 배불리 먹이신 것이지요.

사람들이 얼마 안되는 음식을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 두 광주리가 가득찼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이 너무도 풍부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필요와 부족함을 충만히 채우고도 남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다만 그런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기꺼이 그분 뜻을 따르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내 것을 지키겠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내 삶에는 아무런 기적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외로움과 고독으로 바짝 말라비틀어지고 말겠지요. 그러나 감사와 순명으로 먼저 주님 뜻을 실천하면 그 실천이 은총의 마중물이 되어 내 안에서 기쁨과 행복이 펑펑 솟아나게 만들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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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성문 사도 요한 신부님]

<나의 소중한 빵과 물고기>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많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리고 모두 먹고도 남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안드레아의 태도에 주목해 봅시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이 말을 하는 안드레아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체념과 미련이 공존했을 것입니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과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체념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10)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에 따라 뭐라도 한 제자들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덕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

예수님께서는 체념을 넘어서 희망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을 가장한 체념입니다. 체념은 믿음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보리 빵 다섯 개보다는 많지 않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보다는 쓸만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얼마나 더 큰 기적을 일으키실까요?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체념 그 너머로 가야 합니다. 내 부족한 빵과 물고기로 뭐라도 하다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의 도구로 써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소중한 빵과 물고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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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재호 베드로 신부님]

<생명력 넘치는 고목(古木)>

와인의 역사가 오래된 지역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널리 사랑받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늙은 포도나무’(Vieille Vigne)입니다. 수령이 최소 40년에서 길게는 100년이 훌쩍 넘어가는 고목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고급스럽고 깊은 맛을 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포도 알갱이가 더 크고 풍성하게 열리는 쪽은 어린나무입니다. 하지만 어린나무에서 촘촘하게 열린 알갱이들은 인접한 큰 알갱이에 가려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얕게 산발적으로 뻗은 뿌리로 양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도 없습니다. 이에 반해 오래된 나무는 몇 안 되는 자신의 작은 포도 알갱이들에 집중하며 충분한 볕을 쪼일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여러 지층으로부터 다양한 광물을 흡수합니다. 늙은 포도나무가 겉모습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가치를 더 크게 인정받는 이유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치를 결정짓는 이와 같은 기준이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합니다. 외관상 남들보다 크고 많고 싱싱해 보이는 것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 내가 받아들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쉽게 외면하고 내 입맛에 맞고 편한 이들만을 적당하게 상대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이 외면당하고 세상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이미 고목이면서 또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거목이기도 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늘 초대하십니다. 특히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고자 2021년부터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오늘로 네 번째를 맞는 이날을 통해 큰 위로의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늙어버린 때에 내던져지는 존재’(제4차 주제 성구, 시편 71[70],9 참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역사적 고목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수액이 많고 싱싱한 나무’(제2차, 시편 92[91],15 참조)로 우리를 맞아들이고 변모시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에(요한 8,58) 그 누구보다도 고목이신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살인 생명의 빵을 먹이신 뒤에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고 하신 말씀은 구약의 이집트 탈출과 바빌론 유배 때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하느님 의지의 연장입니다.(신명 30,3; 이사 11,12; 예레 31,10 참조)

이제 당신의 몸을 나누는 일에 참여한 모든 것들은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고 그분께 붙어 가치를 보장받습니다. 이렇게 주님이라는 생명나무(창세 2,9)에 붙은 나무들은 저승 깊은 곳까지 모든 이들에게 뻗어 있는, 뿌리 깊은 십자가 고목으로부터 성체라는 양분과 성혈이라는 수액을 나눠 받으며 진정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세계 조부모와 노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과 우리 모두가 참포도나무의 가지(요한 15,1-5)로 초대되어 좋은 소출을 낼 수 있길 바랍니다. 고목의 가치를 망각한 채 세상 사람들이 집착하는 어리고 화려한 모습으로 설익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빛과 생명을 주시는 분과 일치하여 가치 있는 열매를 맺고 제공할 줄 아는 좋은 포도나무가 될 수 있기를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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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현수 토마스신부님]

<불가능을 넘어서는 믿음의 힘>

배고픈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라고 하신다. ‘우리’보고 ‘나’더러….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무려 오천 명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 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하고 물으신다. 수많은 군중에게 먹일 빵 걱정에 필립보에게 물으신 것이다. 필립보는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말이 200데나리온이지 어마어마한 액수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포도원 일꾼의 하루치 일당(마태 20,1-16 참조)이니, 200데나리온은 200명분 일당으로 지금도 매우 큰 돈이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빵을 살 만한 그런 큰 돈도 없었지만 설령 돈이 있었어도 빵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변에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대형 마트 또는 빵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필립보의 답변은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로만 끝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기서 하나, 혹시 ‘나’는 필립보처럼 상식이라는 핑계로 당연히 고민해야 할 사항을 회피하거나 지나치지는 않았나? 혹 해야 할 사항을 합리성으로 포장해 포기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았나? 과연 위기 탈출은?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하고 말하였다. 수많은 군중을 먹이기에는 이것으로 불가능하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입장이 앞서 필립보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그나마 적지만 음식이 있다는 정도가 다를 뿐.

여기서 둘, 혹 ‘나’는 어떤 가능성에도 눈감은 채 안 된다고만 생각하고 고집 피우지는 않았나? 혹, ‘나’는 하기 싫어 핑계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닌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는데,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예수님은 그 적지만 소중한 음식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으로 장정만도 5천 명을 먹이셨다. 그리고 먹고 남은 음식 조각이 12 광주리에 가득 찼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필립보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도 불가능하다고 완곡히 말했던 일들을 차고 넘치도록 만들어 내심이 반전이다.

실증적 사고에 이미 익숙해 있고 현대 과학에 더 많은 것을 기대며 사는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가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믿어 고백하는 우리는 이 상황을 다르게 대면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가능을 넘어 그것으로 완벽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고백해야 한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희망의 신앙이라고 믿는다. 그분은 불가능을 희망의 가능성으로 바꾸는 우리의 태도를 보시고 그분은 결과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우리는 일상에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많다. 하고자 하는 방법을 찾기 보다 안 된다는 핑계를 찾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작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내어 맡기고 그것으로 결과를 완벽하게 만드시는 분에게 의탁하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예수님은 바로 떠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 하자 혼자서 물러가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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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뉴스에서 본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2020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주에 살던 70대 노인이 자기 반려견과 함께 호숫가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속에서 악어가 나타나 반려견을 물고 다시 호수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 노인은 본능적으로 호숫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어의 입을 벌려서 반려견을 구해냈습니다.

사실 악어의 치악력, 치아의 악력 즉 무는 힘은 엄청납니다. 사자, 호랑이, 곰, 하마 등을 제치고 모든 동물 중에서 제일 강력합니다. 그런데 팔 힘만으로 악어의 입을 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어떤 분일까요? 평소 몸 관리를 잘한 보디빌더일까요? 아니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저 강아지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 노인에게는 엄청난 에너지가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히려 도망가는 데 급급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 ‘사랑하는 마음’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자동차에 깔린 자녀를 보고서 자동차를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도 뉴스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랑의 힘이 별것 아닌가요?

주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때인데도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주님과 함께함으로 인해 영적으로는 충만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배고픔으로 힘든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배불리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보리 빵은 당시 가난한 이들이 먹는 아주 싼 음식이었고, ‘물고기’로 번역된 그리스 말도 조그만 물고기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들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가엾이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주님의 사랑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주님을 통해 커다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에도 우리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기에만 급급하면서 열매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활동을 우리의 사랑 없음으로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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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기적을 낳는 사람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느끼려면 그만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시길 바랍니다.

열왕기를 보면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빵 스무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시종에게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2열왕 4,42-44) 믿음에 따르는 기적입니다.

우리 삶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러한 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보잘것없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는 너무 부족해!’라는 생각을 접고, “나누어 주어라” 는 말씀만을 기억할 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낳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게 하려고(탈출 4,2-5),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마태 11,4-6)서 또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마르16,20)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반으로 당신의 능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비로운 것을 아무리 많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적의 체험은 특별한 체험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더 큰 신비한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다져진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영혼의 양식입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기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또는 성모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하느님을, 성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복음을 보면 필립보는 빵을 살 돈을 걱정했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인 자기 생각으로 바라보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계신 주님을 간과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계산을 먼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비로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리빵 다섯 개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찼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가능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적어도 모두를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아도 내놓을 수 없다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적어도 전체는 항상 부분보다 많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부분은 모두보다는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한 아이가 건네준 빵과 물고기를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많든 적든, 크든, 작던, 상관없습니다. 주어진 모두를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모두를 전적으로 하늘에 맡기면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듯이 주님께서는 생명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가끔 로또복권 구매하시나요? 언젠가 40대의 젊은이는 1등에 당첨이 되어 상금이 23억 원이나 되었는데 세금을 제외하고 18억 원을 수령했습니다. 그런데 흥청망청 다 쓰고 5년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로또 당첨자 3명 중 1명은 5년 내 파산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외국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 알콜 중독, 마약, 도박 등 행복보다는 불행한 삶을 사는 이가 더 많습니다. 저도 로또복권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는데 당첨이 안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헛배가 부르면 안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2코린 9,6) 하고 말합니다. 은총을 심는 이는 은총을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둡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것이라도” 하고 사랑을 담아 내놓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기적을 낳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풍요와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배고픔에 지친 사람들이 빵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또 배고프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빵을 먹은 현상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이 사건을 통해 가르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능력을 지니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여 각자 삶의 자리에서 나눔의 기적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더더욱 미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성체의 형상으로 끊임없이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으로 살찌우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영성체할 때마다 사랑의 실천을 다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급하게 주님의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며 기적을 쫓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님처럼 사랑하고, 주님처럼 섬기고, 주님처럼 내어주는 삶을 살아 삶의 터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기적을 낳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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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길>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눈길>

그분은
보셨답니다

당신을 찾아온
기댈 곳 없는
가엾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당신의 고운 눈길을
타고 건너와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그분은
보셨답니다

당신을 찾아온
보잘것없지만 귀한
벗들이 보고 있는

지치고 주린 벗들
차마 물릴 수 없는
따스하고 넉넉한 품을

늘 그렇게
곱게 간직하고 있는
당신 스스로를

그들은
보았답니다

고단한 삶의 여정에
빛바랜 꿈마저 사라진
퀭한 눈길로

무언가 있으려나
실낱같은 바램
애써 그러모아

다만 그분만을
뚫어지게

그들은
보지 않았답니다

그분의 고운 눈길이
머무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그분의 따스한 마음이
품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그분의 애틋한 부르심이
울리는 그 곳에 있던
스스로를

한 아이가
보았답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저 멀리 그러나 바로 곁에서
나를 보고 계시는
그분을

여느 사람들과 달리
그분이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를

그분이 바라보시니 그분처럼
그분을 바라보니 그분처럼
어느덧 새로 피어난
스스로를

그분은
보셨답니다

한 아이가
그분처럼
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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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소용없는 것을 소중히 쓰시는>

빵의 기적 얘기는 네 복음에 다 나오는 얘깁니다. 그런데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점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조금 더 다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공관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공관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역할을 뭉뚱그려서 얘기하는 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필립보와 안드레아 사도가 특별히 거명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안드레아 사도의 언급입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아이를 등장시키고 안드레아 사도는 다른 곳에서처럼 사람을 주님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복음 다른 곳에서 그리스 사람들을 주님께 연결시키지요.

그렇지만 안드레아 사도는 반신반의하는 거 같습니다. 이 작은 아이의 이 적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 이 적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고 묻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겠다고 생각했으면 아예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자기 생각에 인간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주님께 가면 어떤 가능성과 소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나 소용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아이를 데려온 것입니다.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처럼 반신반의의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반신반의의 우리 믿음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 것입니다. 반신반의란 적어도 완전 불신보다는 반만큼 믿은 것이기 때문이고, 인간에게는 완전 불신이지만 주님께는 믿음을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보면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고 그래서 믿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뭣이든 소용이 있기에 하느님께는 믿음을 둘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무도 없고 아무 가진 것이 없어도 창조하실 수 있으시기에 주님께서는 안드레아와 아이를 빵의 기적의 협력자와 도구로 삼으시고, 인간의 눈에는 소용없을 그 적은 빵과 고기를 아주 소중하게 쓰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소용없을 것이 하느님께는 소용이 있고 소중합니다. 그래서 아무것 없이 창조하실 수 있고 인간의 아무 도움 없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나든 남이든 인간의 협력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능력이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여기 아이와 엄마가 있습니다. 혼자서 요리를 다 할 수 있는데 자녀에게 요리를 가르치려고 이것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엄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사랑을 아이가 배우고 사랑 실천의 기쁨을 아이가 알게 되도록 혼자서 해도 되는데 아이와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데 오늘 우리의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가진 것 없어도 빵의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믿게 하시기보다 가진 것 없어도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치시고 당신 사랑을 더 느끼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진 것 없고 소용없는 저희를 소중하다고 하시고 당신 사랑과 은총의 도구와 협력자로 쓰시는 주님, 오늘 특별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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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요한6,1-15)

<작음의 기적!>

오늘 복음(요한6,1-15)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약 2천만 원 정도)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고 마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용 없어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빵의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빵의 기적이 전하는 메시지는 첫째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용없어 보이는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성체성사의 기적’을 상기시켜 줍니다.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니 그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씀이 성체성사를 떠오르게 하고, 합당한 자세로 성체를 받아모시고 다시 부활하는 ‘미사의 은총’을 상기시킵니다.

몸과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성체를 받아모시면, 내가 변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맞이하는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나의 작은 나눔, 작은 봉사, 작은 기쁨, 작은 손길과 사랑을 그들에게 나누어 줍시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에페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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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 12)

버려진 삶이
우리를
구원하듯
버려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버려진 것에서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
됩니다.

버려진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버려진 곳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져
조각난 것들을
긁어모아 하나로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성장하는
우리자신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성체성사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으는
공동체입니다.

남은 조각을
끌어안는
연민이
우리의
공동체를
살립니다.

경이로운 삶은
남은 사랑의
조각을 모으는
여기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우리의 약함을
우리가 끌어안는
것입니다.

끌어안음이
성체성사의
길입니다.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성체성사의
길입니다.

노인의
주름에서
사랑과 지혜를
배웁니다.

성체성사의
가슴이
우리의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속한
기도가 있고
봉헌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남은 조각을
모으니
모든 것은
진심어린
감사의 조각이
됩니다.

기도하시는
감사의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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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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