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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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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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세상이 어둠으로 덮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가 빛이 나타나고 조그마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옵니다.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빛이 이제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한 사람에게서 바로 옆 사람에게, 또 그 사람은 자신의 옆 사람에게 그 빛을 전합니다. 어둠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곳이 이제 모든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조그마한 빛으로 환히 밝혀집니다. 얼마 뒤에 있을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거행할 ‘빛의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위의 작은 이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 이기적인 무관심으로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자신이 더 얻고 많이 가지고자 누군가를 짓밟고 뭉개며, 이 과정에서 써먹은 거짓과 술수는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분열과 분쟁은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약하지만 한 줄기의 빛으로 어둠을 이겨 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만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나누어 받고 그 빛대로 살아갈 때, 그리고 그 빛을 한 사람씩 나누어 가질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점차 밝아집니다. 나 혼자만 밝아진다고 좋아하기보다는 그 빛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환히 밝아질 것입니다.
어둠을 이겨 내는 방법은 오직 그 방법뿐입니다. 누군가는 그리스도의 빛을 손안에 받았지만, 어둠이 좋다며 그 빛을 꺼리고 외면합니다. 어떤 이는 빛을 받았지만, 빛을 어떻게 전할지 몰라 함지 속에 넣어 둡니다. 또 다른 이는 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시다며 갓을 씌워 빛을 가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러 빛으로 오셨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 빛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곧 심판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갈라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금 심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들여다 봅시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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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지금 당신의 마음에 가장 어두운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이 어두운 부분이 왜 생기는지 이야기 해보고 앞으로 어디에 신뢰를 두고 걸어가야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빛을 온전히 반사하는지 묵상해보고 내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와 빛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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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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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사순 제4주일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교회는 희생과 단식을 하며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미리 알려 주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주일에는 사제도 보라색 제의 대신 기쁨을 나타내는 분홍색 제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
바빌론강 기슭에서 시온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사람들,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키루스왕의 칙령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사랑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유배의 고통 중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화와 치욕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치욕적인 죽음을 맞으실 때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죽음과 생명, 낮춤과 올림의 역학이 함께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류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셔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하늘 높이 올라가시어 닫혔던 하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풍성한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사순 시기의 재계는 십자가의 비움을 향해 걸어가는 행위인 동시에 영광의 행진입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92
3월10일[사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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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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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PJwNbby5MM
[광주대교구 장민준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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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관심은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용서와 자비, 구원과 영생에 맞춰져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오늘따라 왜 이리 눈물겹고 은혜롭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인생길 돌아보면 어찌 그리 굽이굽이 수치스러운 죄와 타락과 방황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나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엄청나게 큰 보속과 무시무시한 처벌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제 생각은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있던 하느님 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정해진 율법 조항에 의거해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뜻밖에도 이 땅에 강림하신 메시아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심판하실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권한은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용서와 자비,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인류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을 향해 기쁜 얼굴로 다가서는 이들에게는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끝끝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을 멀리 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빛을 등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단죄와 심판의 도마 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크지만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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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MBjz-Gq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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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도약: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의 필연성 이해>
인간은 집과 같습니다. 집은 그 주인에 의해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는 무엇을 주인으로 삼고 삽니다. 문제는 그런 주인을 모셔 놓고 살다 보니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든 만들어진 것의 반드시 만든 자의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계명’입니다. 자동차가 핸들과 거꾸로 움직이면 큰일입니다. 고쳐질 수 없다면 폐기 처분 되는 게 당연합니다. 인간이 창조 된 게 맞는다면 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지옥 보내느냐고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인간 답도록 당신 창조 목적인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잘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도 십계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어야만 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하고 당신을 믿는 이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책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평생 모은 것을 일시에 날려버릴 아들에게는 물려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높고 험준한 산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두 아들이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열 개의 비석을 찾아서 그 길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두세 개의 비석을 지난 뒤 지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형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동생은 비석에 새긴 글씨가 옅어지는 것을 눈치챕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위해 비석을 새기며 지쳐갔던 것입니다. 이 말에 형도 여덟 번째 비석까지는 갔지만, 결국 편한 길을 택합니다. 동생도 형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검붉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피까지 흘리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의심한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올라 아버지를 만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형은 불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누구든 무언가를 만들 때 그 안에 땀과 피를 섞습니다. 손흥민 선수도 아무리 축구를 좋아해도 아버지의 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자녀에게 힘을 주려 하는데 자신은 편히 쉬며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뜻은 항상 부모가 자기를 위해 흘리는 피에 대한 ‘감사’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지만, 마음 안에서는 여전히 ‘내가 이렇게 많이 봉헌했는데 주님이 주시는 것은 고작….’ 이라고 불평했습니다. 이때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나’가 내 안의 불평 불만인 ‘나’를 죽이기 위해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영적으로 몹시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실에 들어갔는데 어느 축일을 위해 들여온 성상을 보았습니다.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를 표현한 성상이었습니다. 성녀는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 때문에 그런 상처를 받으신 것에 비해 주님께 아주 조금밖에 보답해 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분 앞에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성녀는 다시는 주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9,1 참조)
민수기에서 뱀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이었습니다. 십계명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믿음의 부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뱀을 보내시고 그 치유 방법으로는 또 다른 뱀이 장대에 달리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함으로써 우리에게 오시는 은총의 선물은 우리 안에 자아라는 뱀에 물린 죄의 독이 눈물로 빠져나와 치유되는 열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도 기둥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면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는다면 그 수난 때문에 항상 ‘감사’의 감정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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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짧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있습니다. “Life is not about waiting to pass the storm. It is about learning to dance in the rain.” 참 멋진 말입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우에서라도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지점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전환점입니다. 바오로는 이제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환점(turning point)’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전환점의 사례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입니다.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은 뱀으로 변한 사탄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같아지고 싶었던 교만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금지했던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은총도 함께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늘 전환점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양을 치던 모세는 이제 새로운 사명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탈출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파스카’입니다. 이집트의 모든 맏배가 죽는 재앙을 내리시는데 집 앞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맏배는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파스카란 ‘넘어간다. 건너가다, 지나간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파스카를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다면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저의 삶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1986년 1월 저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는데 인사 담당 장교가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신학생인 것을 알았고, 인사 담당 장교의 아들도 신학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제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성당에서 근무하니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미사에 빠질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고 하는 강원도로 갔는데 저는 경기도 용인으로 갔습니다. 꽃길만 같았던 성당 생활은 3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잔디밭에 영양제를 주라고 했는데 대충 주었습니다. 성당 의자를 닦으라고 했는데 대충 닦았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부님께서 용산으로 출장 가면서 제게 부대로 들어가서 지내라고 했는데 제가 그것을 어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성당 군종병 생활을 마치고 인사처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끄럽고, 속이 상한 일이었지만 돌아보면 제게는 참 잘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리고, 남은 군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장미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선포됩니다.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칙령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키루스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도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에 있었던 전환점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순간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지금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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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4-21: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오늘은 기쁨의 장미주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어렵고 힘든 결실을 촉구하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심판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빛으로써 세상에 보내 주셨다. 이 빛을 피해 숨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역대기 하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를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권고를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비탄에 찬 간절한 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약속의 하느님께서는 키루스의 해방칙령을 통해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신다. 이것으로 바빌론 유배가 끝난다. 이 마지막 키루스의 해방칙령이 오늘을 기쁨의 주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복음에서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심판의 주제가 전개되고 있다. 그 심판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심으로써 드러난다. 인간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 속에 살 때,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 반대로 그 사랑의 선물에 대해 문을 닫을 때는 자신 안에만 있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먼 사람이 되고,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는 때, 어둠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둠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나를 심판으로 이끄는 것이다. 높이 들리심이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들리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높이 들릴 수 있다.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것은 오직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새로 남이란 오로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높이 들릴 수 있다. 예수께서 수난이 가까웠을 때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하신 것은 당신 사랑의 힘을 확인시켜 줄 뿐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 앞에서 높이 들리신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 어떤 면에서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느님의 사랑이 심판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이고,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담보로 우리 인간의 구원을 택하셨다. 인간에 대한 심판은 바로 이 사랑의 위대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빛을 거절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생명까지도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심판의 선포는 바로 인간 자신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빛을 외면할 때는 자기 자신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에 대해 그 빛을 탓할 수는 없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19-20절). 우리의 행실이 드러날까 봐 빛을 멀리하는 것, 심판을 피하려고 빛을 멀리하는 것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심판이 된다. 빛을 멀리한다는 것은 어둠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단죄받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1요한 4,16 참조)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의 아집과 오만불손한 자만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보다는 해방의 행복한 결과에 주안점을 두고 기쁨으로 초대한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4-6) 이처럼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은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가까이하는 삶이 되어 높이 들리신 주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과 더불어 변화될 수 있는 삶을 바치기로 하고, 또한 이 사순시기가 우리가 높이 들리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로 되어야 한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광, 구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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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사순 제4주일에 강조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입당송)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순간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내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임을 확인한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외면에도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유배하던 유다인들을 해방하여 준 페르시아 임금의 칙령이 사실은 하느님의 조처였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한결같고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복음에도 잘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며 되풀이하던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시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려고 구리 뱀을 들어 올리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해야 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배상하거나 속죄하는 것은 사랑할 때 나오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를 대신해서라도 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라는 표현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난 주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렇게 십자가는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가 됩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을 ‘올려다보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날마다 ‘위’로부터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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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