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오 28장 16-20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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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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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려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소명은 그분께서 남기신 가장 큰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기 전에 당신께서 받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권한은 악마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 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주겠다고 했던 세속적 권한이 아니라,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하느님께 직접 받으신 권한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십자가와 죽음을 실천함으로써, 파스카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얻게 될 하늘 나라의 권한입니다.
오늘날의 선교는 내가 가진 진리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개념을 넘어 이웃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전하고,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함께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이 되시어 우리 안에 들어오셨던 하느님의 모습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먼저 다가가고, 먼저 이해하고, 먼저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희생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신앙의 진리를 찾아 나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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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민족의 사도인 바오로는 자신의 직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전교는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 낸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향기가 난다는 것은 외적인 매력을 지닌 것과는 다릅니다. 외모가 아무리 출중하여도, 많은 지식을 갖추었어도, 온갖 능력을 소유하여도 향기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향기는 그 사람의 됨됨이에서 피어오릅니다. 또 향기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령 장미꽃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향기를 내뿜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 낼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님의 존재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 막중한 임무를 그들에게 맡기십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다소 확고하지 않아도 복음 선포의 임무를 그들이 잘 해내리라고 그분께서는 믿으셨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언제나 함께하심으로써 그들이 당신의 향기를 피워 내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향수의 인위적인 향기가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좇아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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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의심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묵상해봅시다. 이와 같은 의심이 우리 신앙생활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각해보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심하거나 주저했던 경험이 있다면, 그때 어떤 마음이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서로 나눠봅시다.

3.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의 특징과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또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피워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나눠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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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오늘의 묵상

오늘의 묵상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려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소명은 그분께서 남기신 가장 큰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기 전에 당신께서 받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권한은 악마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 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주겠다고 했던 세속적 권한이 아니라,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하느님께 직접 받으신 권한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십자가와 죽음을 실천함으로써, 파스카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얻게 될 하늘 나라의 권한입니다.
오늘날의 선교는 내가 가진 진리를 일방적으로 전하는 개념을 넘어 이웃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이웃에게 전하고,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함께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이 되시어 우리 안에 들어오셨던 하느님의 모습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먼저 다가가고, 먼저 이해하고, 먼저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희생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신앙의 진리를 찾아 나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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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씀을 듣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서로 다른 세 가지 시제와 형태로 명확히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는 점을 장엄하게 선언하십니다(과거형). 이어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며 당신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사명을 분명하게 맡기십니다(명령형). 그리고 당신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미래로 이어지는 현재형).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이루는 모든 차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속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행적과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선사하신 구원의 업적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리라는 주님 현존의 약속을 신뢰하며 희망하는 이들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주님 안에서 긍정하는 믿음과 희망하는 자세는 그분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그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사랑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는 보편적 선교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선교 사명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단지 겉치레가 아니라 우리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실존의 방식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삶에서 솟아나 이웃에 전해지는 복음 말씀이 그들에게는 기쁨의 샘이 될 것이며, 우리에게는 존재의 실현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복음말씀의 향기♣ No3651
10월22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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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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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itMBDf-M2E
[제주교구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김기량 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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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요즘 예전에 저희 수도원이나 청소년 시설 주방에서 근무하시던 자매님들의 얼굴이 자주 떠오릅니다. 제가 요즘 동종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똑같은 식재료를 반복해서 씻고 다듬고 지지고 볶고 하다 보면 팔이며 어깨며,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고, 그러다 보니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한의원으로 침맞으러 가고…

한 며칠 침 맞으러 한의원을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모릅니다. 세월의 연륜 앞에 어찌할 도리없이 여기저기 고장 나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얼마나 따뜻이 맞이해주시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병원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침을 맞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간미 넘치는 삶, 극진한 환대의 자세, 진심이 담긴 다정다감한 말 한 마디…이런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이웃 전교의 바탕인지 모릅니다.

전교 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우리 교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며 머나먼 타국으로 건너가, 그 나라 백성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고, 그 나라 땅에 뼈를 묻는 위대한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저처럼 주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서 양떼들에게 전하는 유랑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어깨띠를 두르고 직접 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교회로 초대하는 적극적인 가두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실제 삶 속에서, 자신이 행하는 매일의 직무 안에서, 이웃들에게 감동과 기쁨, 희망과 위로를 선사하는 일상의 선교사, 삶 속에서의 선교사도 필요합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나 단체, 각종 모임에서 기쁘게 희생하고 봉사하십니까? 모임 안에서 이방인이나 걸림돌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겸손한 리더로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서든 조직이 복음적이고 인간적으로 돌아가도록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까? 모임 안에서 친교와 나눔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더없이 비관적이고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크게 칭찬하실 위대한 선교사이십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숱한 도전들과 걸림돌들이 즐비한 여행길이지만, 마치 소풍 나온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걷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역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이웃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요,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선물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느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대상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우리는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억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대상, 우리 삶 속에서 첫 번째 가치가 곧 신앙인 것입니다. 이토록 좋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웃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교 주일인 오늘, 용기를 한번 내보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지금 누가 홀로 외로워하며 울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좋은 선교의 대상입니다. 주변에 누가 갑작스러운 병고나 사고로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시급한 선교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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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tv7QJ4h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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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결국 당신이 만족하자고 하는 거 아닌가요?>

어떤 분이 냉담자 친구를 회두하려고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선교는 결국 당신 행복해지자고 하는 거 아닌가요? 날 위해 지옥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왜 내가 당신 행복을 위해 내 믿음을 바꿔야 하나요?” 염세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랑은 성욕일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자기만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지옥에 가도 좋으니 누군가를 천국에 보내려는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키워주며 아기가 자라는 것을 보고 행복해하는 것은 죄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의 희망으로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은 8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10살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며 튤립 뿌리, 벌레, 음식물 쓰레기 먹으며 생존해야만 했습니다. 나이가 들자 오드리는 모든 일을 접고 아이들에게만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번 결혼했지만,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바람둥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있을 때는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초콜릿을 먹다 어렸을 때 한 군인 아저씨가 준 초콜릿 맛이 떠올랐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녀에게 그때 먹은 초콜릿 맛은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던 그 아저씨의 미소도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당시 유니세프에서 도움을 받은 것도 생각났습니다. 이때부터 오드리는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엄청난 돈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천사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오드리 햅번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도움을 주었던 것일까요? 그 마음 근저에는 자기를 버린 아버지와 닮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초콜릿을 주었던 군인 아저씨를 닮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존경하는 그 아저씨를 닮아가고 있다는 행복이 그 먼 곳의 아이들을 돕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랑은 최고의 투자입니다.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으니까요.” 오드리 햅번도 사랑을 투자로 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받는. 하지만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계속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고 있다는 행복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걷고 싶어 뛰어내렸을 때 베드로는 어떤 만족감을 얻고 싶었을까요? 자기를 바라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는 다른 사도들에게서 기쁨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음에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배 위에 타고 있던 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함께해 주실 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아기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부모의 자녀임을 믿고 싶은데 의심이 간다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처럼 되기 위해 걸음마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부모와 닮아가는 자신을 볼 때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 노력이 부모는 물론이요, 형제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랑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핵소 고지’(2016)는 미국과 일본이 벌이는 전투에서 한 미국 위생병이 혼자 75명을 구해 명예훈장까지 받게 된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데스몬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 나라의 당당한 시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군인이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제칠일안식 교도로서는 총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생병을 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이 다 도망갔을 때 그는 자기가 누구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선교도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려는 마음이 결국엔 선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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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세상에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입니다. “미국 메릴랜드의 한 마을에 남루한 복장의 서적 외판원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더위와 배고픔에 지친 청년은 마을 입구의 한 허름한 집을 찾았는데 한 소녀가 나왔습니다. 청년은 시원한 우유를 한 잔 부탁했습니다. 소녀는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청년이 비용을 지불하려 하자, 소녀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친절을 베풀 때는 대가를 바라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메릴랜드 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병원장 하워드 켈리박사는 의사들을 총동원해 환자를 살려냈습니다. 그 여인은 1만 달러가 넘는 치료비 청구서를 받아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청구서 뒤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날 한 잔의 우유로 모든 비용은 지급되었답니다.’ 우유 한 잔의 친절이 감당 못할 병원비를 대신했습니다. 우유 한 잔의 친절이 한 여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100살의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함께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물론 아브라함도 친절을 베풀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손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친절이 100세 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로 되돌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친절은 자손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도 ‘친절’에 대한 작은 경험이 있습니다.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서 있을 때입니다. 서울 신학교에 수업이 있을 때는 용문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가 정확하고 편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한 자매님이 제게 서울 가려면 어디서 타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마침 서울에 가는 길이기에 저랑 같이 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매님과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불교 신자인 자매님의 남편이 암으로 아파서 요양 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게 기도를 청했고, 저는 기꺼이 기도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베드로로 대세를 받고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자매님은 ‘다도(茶道)’를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좋은 차를 선물해 주었고, 제가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는 성소후원회 임원피정에서 ‘다도’에 대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음차대주(飮茶代酒)’라는 멋진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술을 못 마시는 경우에 술 대신에 차를 마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업 상 술을 마실 경우에도 대신 차를 마시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멋진 말이었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목마른 이웃에게 시원한 우유를 주는 것도 친절입니다. 길 가는 나그네를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친절입니다. 길을 묻는 이에게 기꺼이 동행하는 것도 친절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메말랐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사명은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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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분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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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교활동>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ㄴ-20)

우리 교회는, 선교활동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신앙인들의 ‘기본 의무’ 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들이 선교활동에(복음 선포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명령이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그치면 그만인가?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다가, 각자 알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받으면 되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고하는 활동을 꼭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서 저자가 복음서에 기록해 놓은 다음 말이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이 말은, “여러분이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려 준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불치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서,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약을 병자에게 소개해 주는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심정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인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그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1-2)

<사랑이 없으면 예언은 예언이 아니라 거짓 예언이고, 산을 옮기는 기적은 그냥 속임수일 뿐입니다.> 따라서 “남들이야 망하든지 말든지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지.”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닌 것이고, 그렇게 해서 받는 구원은 구원이 아닌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 없이 자기 혼자만 들어가서, 혼자서만 지내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이야기와 대화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간수가) 그들을(바오로와 실라스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사도 16,30-34)

죄수들을 지키고 감시하는 간수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구원’을 받는 방법을 묻는 상황 자체가 대단히 상징적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몸은 감옥에 갇혀 있어도 영혼은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간수는, 몸은 감옥의 밖에 있어도 그 영혼은 평화도 자유도 안식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선교활동은 그 간수처럼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그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활동입니다. 또 현세적인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도 선교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살여탈권’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은, ‘모든 곳’으로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라는 뜻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지 못하는 국가와 지역이 있긴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그 국가와 지역의 문이 열리기를,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참여는 곧 구원과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믿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활동이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우리가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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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중심 주제는 ‘선교’입니다. 선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마지막 지상 사명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수행하여야 하는 선교의 내용을 ‘제자로 만들다’는 뜻의 그리스 말 동사 ‘마테테위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의 명사형은 ‘제자’를 뜻하는 ‘마테테스’인데,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파견된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까지,확대 적용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도록 열한 제자를 파견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명령과 약속을 통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은 지역과 민족의 장벽을(10,5; 15,24 참조) 넘어 선포됩니다.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예고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방 민족들이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시온산의 성전으로 모여와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곳에서 토라와 주님의 말씀을 배울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심판관으로서 이방 민족을 무력으로 제압하시지 않고,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민족들 사이에 평화를 보증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하도록 초대됩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는 인간의 역사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구원의 대상이면서, 또한 하느님의 계획을 돕는 협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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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조동성 요셉 신부님]

<우리의 사명>

전교 주일은 우리에게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줍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태어난 우리는 각자 삶의 자리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총 속에 살면서 우리 본연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지내는 전교 주일의 핵심 내용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일시적 휴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도 교회는 우리의 의무를 잊지 않고 신앙생활을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지켰습니다. 비록 그 결과와 성과는 미미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 본연의 책임과 의무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열과 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인류 전체의 휴면 상태에서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교회 본연의 사명과 책임을 잊지 않고 주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 성장 발전할 것이며, 우리의 미래는 행복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휴면 상태가 끝난 지금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해 주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8-19 참조) 하고 말씀하십니다.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겪고 이것을 슬기롭게 이겨낸 우리에게 주님의 오늘 말씀은 새로운 힘과 용기를 일깨워 주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의 의지는 주님께 향해 있고 이것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며 본연의 사명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십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이겨낸 우리입니다. 이젠 우리가 힘을 모아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선교의 사명을 다시 묵상해 봅시다. 우리가 힘을 모으고 실천한다면 우리를 방해할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몇 년 동안의 휴면으로 흐트러진 것이 있다면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겨 봅시다.

우리 본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실현해 나갈지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코로나19는 우리가 힘을 모아 하나가 되는 원동력이었음을 밝혀 보이는 기회였다고 주님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오늘부터 시작해 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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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님]

<선교>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교회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십니다. 선교는 교회의 일원인 우리가 세상에 가서 하느님의 뜻과 의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예수님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작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시며 가장 작은 자와 당신을 동일시 하십니다.

‘겸손은 바로 하느님을 전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남들 앞에 나설 때 거만하거나 화려하게 자신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참된 겸손으로 나서려면 ‘기도’라는 동아줄이 성령께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쉬는 것이요, 만족하는 것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원하는 자는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세상에 원하는 바가 적으니 겸손합니다.

겸손과 기도로 하느님을 향해 있는 이들은 이제 예수님처럼 참 하느님을 반영합니다. 하느님 본질을 이루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그분의 또 다른 이름인 ‘사랑’을 품은 사람, 사랑으로 생각하고 나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참된 선교사입니다.

요즘 세상 걱정이 많습니다. 바다와 땅의 생태계는 파괴되고, 기후 온난화는 몸으로 느낄 만큼 심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버려지고 소외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국가, 민족주의는 서로의 이기심을 부추겨 경쟁하고,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며,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의 시간, 인류가 화합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해하는 삶, 한 사람 안에 새겨진 무한한 욕망으로 인하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이 땅은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이 요청되는 시간입니다.

이 속에서 가톨릭 신자,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무장하고, 기도를 양식 삼으며, 사랑의 빛을 등대처럼 비추는 삶이 그것입니다. 비록 반딧불처럼 우리 자신이 작다 하더라도 수백, 수천만의 작은 빛을 비춘다면 세상은 그 빛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는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모시고 사랑의 빛으로 세상에 희망을 심는 사람들 복된 선교사들을 기억합시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저를 벗으로 삼아주셨으니, 저도 예수님을 벗 삼아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사랑하며 살고자 원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벗 삼고 그분이 선사하신 구원의 은총을 사랑의 빛으로 드러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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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세계 최고의 작가 100인이 선정한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고 합니다. 조금은 엉뚱한 이상향의 꿈을 품고 우스꽝스러운 기사가 되어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책에서 돈키호테는 다음과 같은 심오한 말을 합니다. 『행복한 시절, 행복했던 수 세기를 황금시대라 이름 붙였던 이유는 오늘날 이 시대에 높이 평가되는 황금이 복된 그 시기에 쉽게 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사람들은 ‘네 것, 내 것’이라는 두 단어를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었소. 저 성스러운 시대에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지요. 그 누구라도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달콤하게 익은 열매를 아낌없이 주는,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에 손만 뻗으면 되었소이다. 맑은 샘물과 흐르는 강물은 사람들에게 맛 좋고 투명한 물을 충분히 제공해주었지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이를 우리는 기쁜 소식, 복음이라 부릅니다.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민족만이 배부르고 등 따스한 안락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는 게 하느님의 바람이셨습니다. 그 같은 일이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고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웃음이 쏟아진다 해도, 때론 돈키호테 같다는 핀잔을 듣더라도 끊임없이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선포하는 게 아니라 실현 가능한 꿈을 자기의 삶으로 복음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며 실천을 다짐하는 전교주일입니다. 1922년 비오 11세 교황의 교서에 의해 제정된 전교주일은 1926년부터 전 세계 교회로 확장되어, 현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28,19~20)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에 따라 우리는 세상 끝까지,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해외에 파견된 선교사들만의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고 활동하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웃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활동하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교 곧 복음 선포가 교회 본질이라면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증거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여 식민지 통치할 때, 영국군 장교들의 모임에 초청받은 간디는 연단에 올라가 영국군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달린 교회를 짓는데, 당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건물이나 선전 벽보가 아니라 당신들의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시오. 당신들이 믿는 예수가 부당하게 폭력을휘두르며 살인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당신들의 예수가 나약한 여인들을 겁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내 조국 인도를 그냥 놓아두시오! 당신들의 예수가 아니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습니다.』영국군은 교회를 짓고 벽보를 붙이며, 온갖 말로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간디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그릇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인도에 마더 데레사가 갔었지요. 데레사 수녀는 아무 말 없이 가장 가난한 도시 콜카타의 빈민가에 들어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데레사 수녀는 교회도 짓지 않고 십자가도 세우지 않고 벽보도 붙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현대의 복음 선교 회칙 41항을 보면,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친교로 봉헌하고 동시에 무한한 열성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생활의 표양은 복음 선교의 첫째 수단이라고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삶을 사는 것이 전교이며 복음화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것을 사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교가 가능할 것이며 복음화되겠습니까? 우리 삶의 모습이 전교의 기반이며 복음화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기보다는 우리의 행동을 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가르침 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이미 복음화된 것이고 그런 상태가 진정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복음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전 저는 베트남에 파견되어 처음에는 공안들의 감시 때문에, 국제공동체에서 생활하다가 이내 베트남 학생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제가 파견되기 전까지 외국 선교사들은 국제공동체에서, 벳남 학생들은 베트남 공동체에서 생활해 왔었는데, 처음으로 제가 벳남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함께 살면서 저는 제 은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양성자들과 함께 심신 지체장애인 공동체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청소와 환자 목욕시키는 일 그리고 경제적인 지원도 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을 선정해서 학비 지원 사업, 두 곳의 마을에 우물 파주기, 시골 학교에 중고 컴퓨터를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장애인들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학생들을 돌보는 일만이 아니라 앞으로 벳남에서 예수고난회원으로 살아갈 양성자들에게 중요한 교육 기회였고, 복음 실천의 중요성을 자각시키는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살면서 베트남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베트남 형제들과 함께 복음적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면서 실천했던 그 모든 작은 일이 지금은 서품과 서원한 그들을 통해서 계속 실천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나갔다.”(로10,18)

우리는 많은 성인 특히 우리 시대에 마더 데레사 성녀처럼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주변의 이웃, 직장, 모임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작은 사랑을 실천해도 감동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보다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 큰 감명을 주고 영향을 줍니다. 참다운 전교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행복한 삶을 보여주는 게 가장 훌륭한 복음화라고 봅니다. 따라서 복음화와 사랑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화 곧 전교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실천합니다. 주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 자체가 사랑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지닌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주님께로 이끄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우리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의 행복도 더 커질 것입니다. 나만 믿고 구원받는 신앙인이 아니라, 적어도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기도하고 인도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10,15)라는 바오로 사도의 찬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이 닿는 곳에 사랑이 닿는다.”라고 하셨던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입이 하느님을 선포하고, 나의 눈이 사랑을 말하게 하며, 나의 손이 이웃의 손을 잡고서 예수님께 이끌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여러분은 선교사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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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트로트 가수의 이름뿐 아니라 사생활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 1,17)

“말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은 말로 선포된 복음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전파되게 됩니다.” “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합니다. 세례받은 이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에 나서고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이웃에게 어떤 매력을 주고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알고 있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사람이‘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친절, 헌신, 사랑, 희생이 감동이야!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한다면, 이 순간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구역 반모임에서 성경 통독을 합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반응이 다양합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살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계속 이어지고 더 많은 분이 함께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어제는 구역 미사를 봉헌했는데 40여 명이 함께 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 2장 4절에 보면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끌려 그분을 기쁘게 따른다면 다른 이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입니다.”(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같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만함 없이 오직 겸손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해 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거리 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소명 의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19명이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축하드리며 아울러 다시 예비자 모집에 마음을 모아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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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친구 아버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장례식장에서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조문객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제 고등학교 동창들도 참 많았습니다. 상주는 저의 고등학교 동창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던 친구였습니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도 영 시원찮았습니다. 그렇다고 언변이 좋아서 인기 있는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늘 웃었습니다. 화도 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늘 웃으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 웃는 것이 큰 장점이란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그 밖의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어야 장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당시의 능력과 재주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더 크게 자리 잡는다고 합니다. 단순히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에서 얻는 행복은 순간적인 만족에 그칠 뿐 오랫동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 안에서 얻는 행복은 훨씬 더 오래 갑니다.

이런 실험이 생각납니다. 영상을 보여 주고는 여기에 등장하는 배우를 따라 웃는 표정을 지으라는 집단, 그냥 단순히 손으로 입꼬리를 올리라는 집단, 마지막으로 펜을 입에 물고 웃는 표정을 짓는 집단으로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도 변화를 조사했습니다. 배우를 따라 웃는 표정을 지은 사람은 전보다 32% 행복감이 상승했고, 손으로 입꼬리를 올린 집단도 22% 상승했습니다. 그에 반해 펜을 입에 물고 웃는 표정을 지은 집단은 1.8%의 상승에 그쳤습니다. 표정에 따라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웃는 모습을 본 사람도 행복도가 올라갔습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교 사명을 깨닫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면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마지막 당부임을 기억하면, 우리 역시 당연히 지켜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요? 가두 선교를 하면서 알리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도 훌륭한 선교입니다. 즉, 사랑 안에서 행복감을 전달할 때, 주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는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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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마태오 28,16-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사랑>

사랑이신
성부 하느님

사랑이신
성자 예수님

사랑이신
성령

갈림 없는
하나이신

사랑이
부르시어

사랑으로
만드시니

사랑이
되어

사랑이
보내시니

모두가
사랑이 되도록

사랑하러
길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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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선교하는 힘>

최근 사기 혐의로 체포된 특정인의 과거를 문의하는 경찰관의 연락을 받고 수년 전의 지독한 기억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만 했습니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프로그램이었는데, 하루는 어떤 대학생이 개별 면담을 신청하여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정작 어렵사리 마련한 조력의 손길은 거부하며 면담만을 이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상담 과정에서 벗어나 있던 반응이 마음에 걸렸으나, 자신이 경험한 끔찍한 폭행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거니 하며 전문가 수녀님에게 연결시켜줄 방도를 모색했습니다. 마침내 만남이 성사되었고 그날, 대화를 마친 수녀님은 “신부님을 면담자가 아닌 어떠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아요.”라며 진위 판단을 요청하셨습니다. 검증 결과, 이름부터 세례명, 학교, 가족이라며 연락해온 휴대폰 번호들까지 모두 거짓 시나리오로 밝혀졌습니다. 자신의 굴레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짓도 통용된다고 가르치며 많은 젊은이들을 현혹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바로 그 이단 집단의 조직적인 행태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인 양 포장하고 있으나, 자기 세력 팽창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의 거짓 선교는 오늘도 맹렬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복된 소식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며, 우리가 체득한 거룩한 가르침을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희생양이 될지언정 다른 이들을 제물로 삼지 않습니다. 신앙인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 사명은 그래서 힘이 있되 요란하지 않으며 세상 끝날까지 선포되는 하느님의 현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명을 잃어버린 남은 열한 제자를 향한 마태오 복음서 끝자락의 예수님 당부 말씀이 유난히 귓전을 울립니다.(《생활성서》 2023년 10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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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금 여기서라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에 우리의 전례는 당연히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인 제자들 파견 얘기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당신의 평생 과업인 복음 선포를 제자들에게 넘기시는 겁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 파견은 두 단계입니다. 10장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파견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이렇게 다른 민족에게는 가지 말라던 주님께서 이제 마지막에는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파견하시는 건데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첫째 독서 이사야서 말씀처럼 두 단계의 구도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몰려오며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라고 할 때가 올 것이니 “야곱의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며 야곱의 집안을 독려합니다.

그러니까 1단계는 야곱의 집안이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야곱의 집안이 그렇게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모든 민족들이 보고 주님의 집이 있는 산으로 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 예언자의 독려를 야곱의 집안인 이스라엘이 귀 기울여 들었다면 지금 하마스와 전쟁하듯 이웃 민족과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족속은 이제나저제나 그 역할은 못 하면서 선민이라고 자처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너희가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너희가 야곱의 집안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파견하시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며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는 것, 그것은 그리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복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남을 위한 큰 희생이 아닙니다. 행복해서 남 줍니까? 남 주고 자기는 불행한 겁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선포자가 되는 것을 주저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선포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우리가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으로 진정 행복하고 넘치도록 행복하다면 우리는 나만 행복한 것이 미안하고 그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것이고, 그래서 나의 행복을 나누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행복과 평안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 전쟁 중인 나라들의 그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칠 것이고 적어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 큰 행복과 더 큰 사랑 때문에 그들에게 달려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복음으로 진정 행복하고 조그만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라도 민족들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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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삶>
–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시편 67,1)

연중 제29주일이자 제97차 전교주일인 오늘, 우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복음 선포의 삶을 삽니다. 바로 이것이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새롭게 확인하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는 물론 우리 모두의 존재이유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중심의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누구나 예외 없이 복음 선포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교황님은 전교주일 담화에서 “타오르는 마음, 움직이는 두 발”(루카24,13-35참조)을 주제로 세부분에 걸쳐 참 유익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올랐습니다. 선교 활동에서 하느님 말씀은 마음을 밝혀주고 변화시킵니다.
2.빵을 떼어 주실 때에 우리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 사명의 원천입니다.
3.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기쁨으로 우리는 두 발을 떼어 길을 떠납니다. 언제나 밖으로 나가는 교회는 영원한 젊음입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의 삶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 감사와 행복의  복음 선포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삶의 자리, 바로 거기가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널리 알리는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우리의 삶입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꼭 세 번째 강조하는 말마디가 간절함입니다.

“저의 성소는 간절함입니다. 하루하루 수도생활에 전념하게 하는 것도, 날마다 한밤중 일어나 강론을 쓰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입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수도형제들 하나하나의 성소가 간절함이요 이 간절함으로 삽니다. 이 간절함이 무너지지 않고 견뎌내고 버텨내고 감당하게 하는 힘입니다. 이런 간절한 믿음, 간절한 희망, 간절한 사랑, 결국은 주님으로 모아지는 간절함입니다. 이 간절함은 저절로 주님 사랑을 나누는 복음 선포의 삶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어제 써 여러분들과 나눴던 “모두가 다 좋다”라는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사랑과 감사, 기쁨과 행복이 응축된 시입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좋고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좋고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좋고
모두가 다 좋다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삶의 자리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목자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자 자랑입니다. 오늘 복음말미에서 주님 친히 주신 약속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세상 사람들 다 떠나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관상의 제자, 활동의 사도가 되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하는데 결정적 요소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의 삶에 우선적 전제가 주님과의 만남이요 공부입니다. 이래서 파견에 앞서 날마다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를 통한 주님과의 관상적 만남이 절대적입니다. 이사야의 꿈이자 비전은, 환시는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거룩한 모임인 미사공동전례로 부터 실현되고 있습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의 산이 상징하는 바, 어디에서나의 성전입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는 오늘 지금 여기 미사전례의 성전 자리가 영적 시온이요 예루살렘입니다. 주님을 만나 기도도 말씀도 배우고 익혀야 하며 성체도 모셔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일찍이 성 예로니모는 갈파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귀를 열어주어야 성경을 알 수 있고 성경을 알 때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거행하는 성찬례가 교회의 삶과 사명의 원천이자 정점일진대 성찬의 빵을 모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음 이사야의 평화의 꿈은 얼마나 황홀하고 멋진지요! 무엇보다 하느님의 원대한 평화의 꿈을 배우는 우리들이요, 복음 선포의 현장에서 평화의 주님과 함께 평화의 사도가 되어 이 평화의 꿈을 실현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작금의 전쟁의 시대에 얼마나 화급한, 절박한 주님의 평화인지요! 정말 마음 설레어 뛰놀게 하는 아름다운 평화의 꿈, 평화의 이상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은 바로 이런 평화의 꿈을 실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평화를 실천하며 주님의 빛속에 걸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을 배우고 공부했으면 관상의 제자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주님 평화의 사도가 되어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어야 합니다. 주변 모두가 복음 선포의 대상이자 구원의 대상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참으로 복음 선포의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기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관상의 제자로 안주할 것이 아니라 주님 평화의 사도로,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 복음 선포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절로 찬탄을 받을 것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매력적인,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의 빛으로 가득한 복음 선포자의 삶일 것입니다. 끝으로 두 분의 성인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극찬한 다시 소개하는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코입니다.

“미소로, 단순함으로 성 샤를로 형제는 복음을 증거했다. 결코 결코 개종이 아닌, 바로 증거다. 복음화는 결코 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witness), 사랑의 매력(attraction)을 통해 이뤄진다.”

이어 14세기 영국의 신비가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전하는 말씀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깊은 통회와 연민과 함께 하느님을 향한 참된 열망을 지니고 온유해질 때, 하느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그분의 은총으로 드높여집니다. 그때에 죄와 고통에서 플려나 지복으로 들어 올려지고 마침내 성인이 됩니다. 우리는 통회로 깨끗해 지고, 연민으로 준비를 갖추며, 하느님을 향한 참된 열망으로 의로워집니다. 이는 모든 영혼이 천국에 이르는 세 가지 방법입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앞당겨 살게 하는 통회와 연민, 하느님 향한 열망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 자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주님의 사랑의 빛과 향기를 전하는 매력적인 평화의 사도로, 또 통회와 연민과 열망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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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복음화의 본질!>

오늘 복음(마태28,16-20)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사명이 바로 ‘선교(전교) 사명’인 ‘복음화 사명’입니다. 복음화 사명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절대 사명’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복음화의 본질은 단순히 세례를 통해 믿는 이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밀려들리라.'(제1독서)
모든 이의 구원인 세상 복음화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세상 복음화의 대전제는 믿는 이들입니다. 곧 믿는 이들이 먼저 복음화 되는 것입니다. 복음화의 모습은 “성령의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이고,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1테살 5,16-18 참조)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10,14-15)

내가 먼저 믿고,
내가 먼저 기뻐하고,
내가 먼저 듣고,
내가 먼저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가정과 공동체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너와 세상이 복음화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화의 본질입니다.

당당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당당하게 천주교 신자라고 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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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HRB_Pz3w8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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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 19)

복음의 가르침은
가장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복음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진리도 좋은
사람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웃과의 거리를
좁히고
민족과
민족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만큼 진실한 삶의
울림이 관계 안에서
중요합니다.

그래서
전교는 신앙인인
우리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삶의 복음화입니다.

사람들 속에
올바른 전교가
있습니다.

전교는
적극적인
현실 생활에서
착한 만남입니다.

만남은
살아숨쉬는
나눔과 배려로
깊어지며
나눔과 배려로
우리의 생활은
신앙의 생활화가
됩니다.

건전한 생활의
실천이
선교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천주교 신자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화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변질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는
그 본분을 망각하지
않길 바라십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는
먼저 우리들의
정체성을 찾아주며
따뜻한 인간성을
되살리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와
참된 행복을
더욱 뜨겁게
우리가
체험하는 것입니다.

복음화를 통하여
만들어지는
우리들 삶입니다.

인내와 열정이
필요한
전교입니다.

전교의 생명력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게 뿌리를 내린
교회의 모습이며
힘 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작지만
우리의
생활 안에서
만남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기쁘고 진실한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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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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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869
5월26일[지극히 거록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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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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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JIAN1rA_KdU
[서울대교구 은성제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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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합시다!>

강론하기 참으로 힘든 주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올 때마다 지난 시절, 생뚱맞고 엉뚱한 이단 교리를 선포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하느님께도 크게 송구스럽고, 적절치 않은 예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셨을 교우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둘러싸인 하느님, 오묘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언어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가올 때 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틈만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삼위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시작 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찬가’를 부를 때 아주 겸손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서 11장 33~34절)

결국 하느님은 파악이나 결론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신비와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접근 방식 역시 더없이 신비스럽고 심오하며 불가사의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양식과는 완전 다른 초월적·신비적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풍요롭고, 훨씬 조화롭고, 더없이 뜨겁고 극진한 사랑인데,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상호 일치 안에서 통합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곧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4항)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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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XvbFnz-56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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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진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보통 삼위일체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하다 바닷가에서 아이를 만난 예화를 사용합니다. 아이는 조개껍데기로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을 어떻게 작은 웅덩이에 다 담으려고 하느냐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이는 “당신도 인간의 작은 머리로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채워 넣으려 하지 않느냐?”며 반문합니다. 아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단순히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도출하고 끝내야 할까요? 어쩌면 무한한 삼위일체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바다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작은 바다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가 가장 명확하게 계시되는 때는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아버지-아드님-모든 권한).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모든 능력이 성령이십니다. 성령 안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에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아드님께 전해 주시고 아드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써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세례를 베풀라고 하는 말씀에도 ‘그리스도-제자들-성령’의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는 첫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날 때 받는데 이를 위해서는 아담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여 아담이 흘리는 피가 성령입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이뤄지는 성사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믿음’으로 이뤄지는데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받아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세 분이셔야 할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고 사랑만이 창조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최소 단위는 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둘만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선물하는 ‘관계’가 일어나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1 참조) 관계의 기본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데, 하느님은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았다는 힌트를 성경에서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가난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가보처럼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빗을 사고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한 시곗줄을 사서 선물했습니다. 선물 안에는 주는 이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은 성령인데 선물을 무시할 때 관계가 끝납니다. 아내는 분명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감사해서 자녀를 낳게 될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탄생이 ‘아빠-엄마-선물’로 이뤄짐을 알지 못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 삼위일체를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자녀는 부모의 삼위일체 사랑으로 탄생합니다. ‘아버지-어머니-피’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어 길거리 짐승들처럼 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아버지-아드님-성령’ 삼위일체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교회-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받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따라서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는데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도 ‘교회-나-성령’으로 자녀를 낳으라고 파견받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파견받아 엘리사벳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나의 피에 성령을 섞어 내어주며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전해 주는 삶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삶이고 삼위일체만이 사랑이며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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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강력한 하느님 체험은 모세와 함께한 ‘출애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되었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협조자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 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 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 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신다면 본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들도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직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 준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준 것이다. 모범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수도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수도자에게서는 ‘청빈, 정결, 순명’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신자들이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서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과 가정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직자의 겸손, 수도자의 기도, 신자의 회개가 삼위일체를 이루면 본당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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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부활시기가 부활의 가장 큰 결실인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끝났다. 이렇게 부활시기가 끝난 후 바로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모든 구원질서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며,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의 업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 그리고 성령강림의 신비가 발하는 빛들이 삼위일체에서 구원의 업적이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단테는 “신곡” 천국 편 제33곡 85-87에서 내세에서의 상징적인 모험 여행의 결론으로 모든 것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어져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의 책임을 충만히 지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함께 하므로 하느님의 생명에 함께 참여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생명에 신비롭게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아들의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갔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즉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서 부르고 계신 그 이름, “아빠!”를 우리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때문에도 “삼위일체”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새로운 인간”(갈라 6,15; 2코린 5,17 참조)으로 “변화”하고 우리의 생활이 윤리적, 영적으로 변화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항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 성령의 이끄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우리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19절)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그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종속되는 그런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성 삼위께로 가는, 그 신비에 참여하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이 신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하시고 계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19-20절) 이렇게 이루어진 공동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봉헌된 믿음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여 그 생명을 누리는 이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생활의 증거로써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20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성령 안에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은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 확산적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이 완전한 모습이며, 그 사랑은 당신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로, 그리고 아들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진정한 친교를 나누려면,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적인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러 식구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분명하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즉,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 가족 사이에도 진정한 사랑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여럿이라도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것이며,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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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장엄히 선포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중요한 대목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는 수동형 문장으로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일이 아버지에게서 위탁되고 주어진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신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제1독서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늘 인간과 함께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십니다. 더욱이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함께하심’이 ‘예수님과 우리가 공동 상속자’라는 내용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려고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 그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역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인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준엄한 약속으로 마무리됩니다.

육화하신 ‘성자’께서는 구약 내내 인류와 함께하신 ‘성부’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시이시고, 이렇게 성자 안에 성부께서 온전히 드러나셨음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함 때문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사랑을 통한 체험으로 인식되고 확인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의 결정적 신비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선언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지금 내 삶과 주변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의 관계적 신비는 당연히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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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우리가 미사 때 바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리스 신경’에는 삼위일체 신앙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ㅍ말씀하셨나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감사송’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 자체가 어려운데, 위격, 본체, 본성 같은 용어들 때문에 더욱더 알아듣기 어려운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용어들을 다른 쉬운 말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적당한 용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신경이나 감사송이나 교리서에 있는 대로 말하면 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자기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해했다고 착각했거나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이해한 척 하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 신비는 당연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는데, 하느님 체험과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한다고 해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삼위일체 교리는 이해해야만 하는 교리가 아니라, 믿어야 하는 교리입니다. 이해를 못해도, 또는 이해가 안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하느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대상’이신 분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면(묵시 22,4), ‘모든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바로 이 신앙이 삼위일체 교리의 출발점입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5-17)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신앙과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신앙을 하나로 묶고, 다시 성령에 대한 신앙을 합해서,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 용어가 삼위일체입니다.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성경에 없는 것을 믿는다고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데,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삼위일체 신앙은 성경에 아주 많이 표현되어 있고, 고백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가, 또는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삼위일체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18ㄷ-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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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님]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신비>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세 위격을 지니신 한 분 하느님, 즉 하느님께서는 위격으로는 세 분이지만 본체로는 한 분이십니다. 세 위격으로는 온전히 다르면서 동시에 똑같은 하느님을 진술하기 위해 교회는 삼위일체라는 신학용어를 사용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여타의 신앙 진리가 그렇듯 먼저 체험이 있었고 그것을 이후에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셋이면서 하나라는 논리적 모순을 설명하기보다 그 교리가 정식화될 수 있었던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체험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출발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느님을 체험하였던 양상에 있습니다. 유다인으로서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살았던 그들은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체험을 이미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생활을 통해 예수님께서 바로 육화하신 하느님,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아들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그분께서 약속하셨던 협조자이신 성령을 체험하였고, 그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일에 자신들의 목숨조차 내놓을 만큼 충실하였습니다.

그러한 세 가지 모습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던 제자들의 고백과 믿음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전달되었고, 몇백 년 후에 신학자들에 의해 성부이신 하느님, 성자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정식화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였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신비, 곧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신 성부의 사랑, 온전히 성부께 의탁하시며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을 일치시키시며 교회와 세상을 신비로운 섭리와 은총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사랑, 이 모든 사랑이 하나이고 끊임없이 세상과 인간을 향해 흘러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 28,19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하느님 자녀로서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위격이 서로 다른 성부와 성자·성령께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시듯 사랑은 모든 것을 화해시키고 일치시키고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귀하게 바라보게 하고 상대를 진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성호경,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는 영광송 등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우리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때 성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통해 드러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감사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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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조수환 바오로 신부님]

<우리 잠깐 이야기 나눠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8~20)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며 주신 사명입니다. 그 역할은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강의를 듣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주신 삶을 내 삶으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또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삶으로 전달됩니다.

청소년국에서 오랜 시간 소임을 하면서 많은 경우 각자의 하느님 체험을 나눌 때 서로에게 큰 울림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 체험을 나누는 자리가 꼭 피정이나 연수 등의 특정한 프로그램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주일학교에서, 단체에서, 어디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둘 이상이 모인 자리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체험을 나누자고 하면 무엇을 나눠야 하는지, 이것이 맞는지, 틀리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앞서게 됩니다.

예수님 곁에서 함께 지냈던 제자들마저도 더러는 의심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심도 한편으로는 필요합니다. 단순히 의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더 묵상하고, 더 고민해 본다면 세상 끝까지 언제나 함께하시겠다고 하는 예수님과 조금 더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나누는 데 맞고 틀린 것은 없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인격적인 하느님과의 만남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매일 기도하고 성경도 읽으며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만남이 없다면 나눌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디에서든 자연스럽게 하느님 체험을 나누며 신앙의 여정을 함께 걷는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청소년 주일을 맞아 먼저 가까운 가족들과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느님께 감사함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 이번 한 주간 동안 꼭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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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차성현 암브로시오 신부님]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나타나시어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며 약속해 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여러분들과 함께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해주셨던 하느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그렇게 또 함께 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요셉의 꿈을 통해 천사가 알려준 이름이 ‘임마누엘’ 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그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에 오셔서 말씀대로 우리와 함께 사시며 우리를 위한, 특별히 가난한 우리를 위해 병든 이를 고쳐 주시고 죄인을 용서해 주시며 새로움의 희망을 주셨고, 그리고 때가 되자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그렇게 죽으셨다가 말씀대로 부활하시어 다시 또 오늘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버렸지만, 하느님은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도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과 함께면 세상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다 한 것 같기도 하며, 누가 하든 그냥 다 좋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그 믿음 안에 실은 삼위일체 사랑이신 하느님이 그 안에 계셔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우리 신앙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이신 하느님 사랑이 따로따로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이시라는 사랑의 신비를 고백하는 축일입니다. 늘 하나이기를 원하지만 다시 또 늘 그렇지 못한 인간의 사랑과 달리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은 언제나 하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하느님의 그 사랑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그렇게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사랑이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 안에 있게 될 때, 삼위일체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신비로서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만 있어도 세상에 아쉬울 것이 없는데,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하느님 당신도 친히 함께 계셔 주신다 하니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정 이 땅에서 이미 하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5월 성모 성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하느님 사랑 안에 사셨던 성모님이시기에 하늘에서도 그 사랑 안에 계심을 믿으며, 성모 성월의 남은 며칠을 마저 행복하게 보내야겠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성부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성자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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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있었던 갑곶성지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여름 태풍에 쓰러지는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무가 쓰러질까요? 키 작고 약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는 모두 키가 큰 나무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아름드리 거목들이 태풍을 잘 견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키 작고 약한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태풍에는 자신을 낮추고 굽힐 줄 아는 나무만 살아남습니다. 보란 듯이 자신을 과시하는 나무는 쓰러지고 맙니다. 한 그루의 거목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러나 태풍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강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연약해 보이는 볼품없는 풀잎은 어떨까요? 너무 약해서 그냥 날아가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가고 얼마 뒤에 누워 있던 풀잎은 다시 고개를 듭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는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태풍 앞에 고개 숙이는 풀잎만이 살아남듯 주님 앞에 고개 숙이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풀잎의 삶을 기억하고 또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기억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부께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성자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면서, 교회를 성화하고 인도하도록 성령 하느님을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세 위격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치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나의 이웃들과 어떻게 일치하고 있을까요? 혹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이웃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우리 역시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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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빚어 만드셨고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이 시간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계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태양 자체를 성부로, 지구까지 오는 빛을 성자로 그 빛이 따뜻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성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 다 부족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앞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고 목표이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외 아드님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믿을 교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는 삶의 방식을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성부는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성자 역시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아들로 존재합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이시며 성자의 영이십니다. 이렇듯 삼위일체는 하나가 타자 없이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런 다음 성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15). 성령께서도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선포하시고 성부를 드러내십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온전히 성자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서로에게 열려 있는 관대함을, 타자에게 열려 있음을 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도 나와 너, 우리라는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긋고 있는 십자성호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이웃사랑의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더욱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으로서 함께 계신다니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미야 1,6)하며 예언자 직무를 거절할 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미야 1,8)고 하셨고, 모세도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탈출 4,10)하고 직무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 주겠다”(탈출 4,15)고 하셨습니다. 에제키엘서 2-3장에 보면 에제키엘이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며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하셨고 에제키엘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는 할 일을 주시고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눈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을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더욱 다져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커지길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큰 믿음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서로 간의 관계에 이해타산이 끼어들면 힘들어집니다. 나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많이 행하게 될 것이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직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결단을 내리는데 있습니다.”(소화 데레사)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기 코드를 빼어 놓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많은 은총을 주시고자 해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코드를 빼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힘들고 지쳤을 때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고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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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삼위일체>

마태오 28,16-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삼위일체>

당신과 나
나뉘면서 갈림 없는 까닭은
당신 안에 언제나 내가 머물고
내 안에 언제나 당신을 품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다르면서 같은 까닭은
당신 언제나 나만을 드러내고
나 언제나 당신만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홀로이면서 함께인 까닭은
당신 언제나 나만큼 존재하고
나 언제나 당신만큼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구분되면서 하나인 까닭은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요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앞서거나 뒤서지 않는 까닭은
당신 있는 곳이 내 자리요
내 있는 곳이 당신 자리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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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느 날 학부모가 찾아와 저에게 자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그곳에서 화장실에 가지 않고 참고 참다가 얼굴이 노래져 집에 돌아와서야 가까스로 큰일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부끄러워서’, 혹은 ‘뒤를 닦아줄 사람이 없어서’ 라고 하는데 밖에서 볼 일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아이가 귀여워 깔깔대고 웃으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화장실에 가게 되면 정신 차릴 거에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너무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참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힘들까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당연히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선생님들이 도와 줄 텐데 엄마 아빠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그 마음. 다른 사람에게 나의 치부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사실 부모의 사랑만이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덮어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막 유치원에 간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신을 두고 어디론가 간다는 사실에 초조해 하며 목 놓아 웁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면 버려지는 기분이 들고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곧 괜찮아 지는데, 분명 언젠가 부모님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부모님의 사랑과 애정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의 마음 역시 이러한 어린 아이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동안 많은 가르침을 주시며 사랑을 일깨워 주셨던 예수님. 나아가 죽음에서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제는 자신들과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영영 하늘로 올라간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치부를 알고 있지만 사랑으로 이를 덮어주신 분.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므로 메시아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했다는 확신.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은 이제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하늘 위로 올라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자신들을 핍박하는데 이제 예수님이 영영 모습을 감추셨다는 것이 꽤나 두려웠을 법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을 얼마 지나지 않아 용기로 바뀌고 그들은 예수님의 부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 때문입니다. 이 성령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러므로 오히려 충만한 확신으로 전 지역을 향해 선교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조금만 더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해 달아났던 제자들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크나큰 용기를 가지고 한 목소리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각 지역에서 여러 가지 언어로 주님을 선포하며 그리스도교는 퍼져 나가게 되고 그것은 세상에 깊이 뿌리박혀 수 천 년이 지난 현재, 지구의 반대편인 이곳에서도 그 가르침을 전해 받아 같은 모습으로 우리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2020여년이 지났습니다. 2020년. 얼마나 길고 긴 시간입니까? 물론 이 시간동안 우리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평온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가 우리와 함께 해 왔지만 이것을 담아내는 우리 인간은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여러 가지 실수와 한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면죄부 등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끔찍한 잘못 혹은 그릇된 판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오류와 한계 속에서도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모범, 성직자들의 헌신, 신자들의 믿음과 정성으로 이 교회가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돌보심”과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고 “성령의 움직임”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실재하는 거대한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적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끝까지 함께 계시지 않고 그 모습을 감추었는가? 물론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셨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기의 힘으로 화장실을 가 버릇해야 부족한 모습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한계와 오류를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성장하고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아이에게 필요하듯 제자들과 인류에게도 이러한 것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성령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정성입니다. 그리고 이 성부 성자 성령은 같은 본질을 이루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불변하는 실체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러한 교리, 즉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위격을 가지나 동일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기념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대축일을 기념하며 언제나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 그 사랑을 드러내시며 모범이 되어주신 예수님, 이를 우리에게 전달해주심과 동시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성령께 감사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삼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복음 환호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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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
-늘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받으소서”(묵시1,8)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도가 무엇일까요? 날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바치는 성호경 기도입니다. 이 기도와 더불어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도 알게 모르게 날로 깊어집니다. 미사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의 인사로 시작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온몸에 삼위일체 하느님을 각인하며 바치는 이 짧고 강력한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 얼마나 많이 바쳐온 자랑스러운 성호경인지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람임을, 우리 신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기도요, 우리 삶의 방패이자 하느님과의 일치를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성호경 하나로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끄럼없이 성호경을 그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기도를 바치십시오! 저 역시 날마다 기상하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성호경과 더불어 만세칠창을 바치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하는 만세삼창에 이어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이어지는 만세사창, 도합 만세칠창을 바치기 시작한지 9개월이 됩니다. 작년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인 8월15일부터 시작됐고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기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 성무일도시 아침 찬미가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성삼의 그신비는 깊고도깊어 누구도 알아들을 길이없으니 하늘의 시민들은 성삼뵈옵고 드높이 노래하며 기뻐하도다”

하늘의 시민들인 우리 역시 믿음의 눈으로 성삼의 하느니 뵈오며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다고 하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은 공동체 하느님이요, 우리 누구나 만날 수 있는 활짝 열려있는 개방의 하느님이요, 성령안에서 성자의 인도하에 성부를 향한 인생 여정을 살게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우리들이요, 이렇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바로 살아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인 것입니다.

체험으로 이해하여야 할 삼위일체 교리를 머리로 이해하려니 그리도 어려운 것입니다. 죽은 화석같은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라 이미 우리와 하나되어 살고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세 개의 말씀의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모두가 생생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첫째, 살아 계신 성부 하느님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의 모세는 당대의 백성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불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정말 실감나는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당대의 백성들의 체험을 오늘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이렇게 장구한 세월 기적같이 살아온 한민족입니다. 곳곳에 순교성지들 가득한 나라, 순교성인 숫자로도 손꼽힐 순위의 대한민국이요, 하느님을 찾는 구도적 열정은 산티아고 순례지에서도 손꼽힐 순위의 대한민국 사람들입니다. “오늘”부터 하느님 신앙을 새롭게 하여 살아가라는 모세의 말씀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강조되는 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오늘입니다. 오늘 바로 이런 하느님을 마음 깊이 새기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하느님을, 계명들을 잊고 살아온 우리들이요 바로 이것이 재앙의 근원입니다. 늘 새롭게 바로 “오늘” 체험하고 살아야 할 성부 하느님입니다.

둘째, 살아 계신 성자 예수님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열한 제자는 물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자 예수님 말씀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성부 하느님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신명기의 모세와 흡사합니다. 모세를 통해 성부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했듯이, 우리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성부 하느님을 환히 드러내는 성자 예수님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성자 예수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자 예수님의 이 약속 말씀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정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성자 예수님 역시 모세처럼 신신당부하는 바, 우리가 명령받은 바를 잘 배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계명의 실천입니다. 계명의 실천, 말씀의 실천을 통해 풍요로운 하느님 체험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 사랑의 성령입니다. 늘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인도하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참 고마운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성부 하느님, 성자 예수님입니다.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한숨에 읽혀지는 주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복된 신원을 깨닫게 하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로 만드는 성령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값싼 영광, 값싼 은총, 값싼 구원은 없습니다. 그분의 영광에,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 성령의 인도하에 사는 것, 그리고 주어진 계명을 질 지키며 책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자 청소년 주일입니다. 참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아 그 영혼은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한 청춘의 청소년입니다. 성서 곳곳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흔적이 널려 있습니다. 신비가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삼위일체 하느님 교리,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한없는 위로와 평화를 주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충만한 행복을 살 수 있음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렇게 사랑 중에 살고 있음이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사랑의 성령 안에서 성자 예수님을 따라 성부께 이르는 “하닮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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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방 선교회)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 평화방송에서 하신 강론입니다.

<부활, 無에서 비롯된 희망>

텅 빈 무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최초의 암시였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것, 빈 자리를 대하고는 제자들은 살아 있는 말씀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무에서 비롯된 희망, 있음과 없음은 서로의 근거가 되며 함께 살아갑니다. 찻잔의 공간이 차를 담을 수 있다는 존재의 의미를 채워줍니다. 사람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텅 빈 무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는 가능성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미 욕심으로 꽉 채워져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더 담을 수 있을까요? 더 바라지도 않고 더 채우려고 하지도 않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그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한 삶이 행복이고 부활입니다.

빈 무덤이 주님 부활의 가장 중요한 암시이고, 표징입니다. ‘없음 아니면 빔’이 부활의 새로운 삶과 시작의 근거입니다. 무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차원의 희망,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야 말로 부활의 삶입니다. 흔히 부활을 말할 때, 내가 죽은 다음에 이 생물학적인 죽음 이후에 일어날 어떤 부활, 죽은 다음에 삶을, 영원한 삶을 우리는 믿어요. 그런데 아무도 죽은 이후의 삶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죽은 다음의 이 부분은 절대적으로 은폐된 無입니다. 없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없음에서 희망을 찾지 않으며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부활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고독과 결핍 이후에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고백 그 다음에 시작되는 부활의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오늘부터 당장 부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채울 것이 아니라 비워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빈 무덤처럼 만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는 우리 마음을 보지 못한다면 비우지 못할 것이고 비우지 못하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거치면 주검이 됩니다. 몸은 생명체인데 죽으면 물체가 됩니다. 주검은 죄의 죽음에 압도당한 인간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시신이 있다면 죄와 죽음에 압도당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와 죽음에 압도당한 인간의 시신이 없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요. 예수님은 다른 존재로 부활하셨으니까요.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있음에 대해서만 집착하게 됩니다. 있음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불쌍한 중생들에게는 아주 한쪽만 보게 됩니다.

빈 무덤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 마태복음 22, 32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느냐?”(루카 24,5).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 28,10).
빈 무덤에서 희망이 비롯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집착하고 하늘만 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만날 것이다. 그럼 갈릴래아가 도대체 어디인가? 갈릴래아는 회개의 땅이다. 소명이 시작된 곳이다. 그리고 “네”라고 대답한 그곳, 처음으로 전도하고 그곳을 떠나셨던 곳.
갈릴래아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떠나는 곳이다. 먼저 회개하라고 외치던 장소다. 결국 그곳은 ‘내 안이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갈릴래아는 다시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소명이 다시 시작되는 곳, “네, 주님”하고 답할 수 있는 곳입니다.

진작 회개를 위해서 내가 찾아야 할 곳,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는 어느 다른 세상이 아니라 결국 “내 안”입니다. 또는 ‘내 마음’이다 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영성적으로 아주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내 영혼의 갈릴래아에 들어가서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아차리고 통회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다시 살겠노라고 했을 때 들리는 음성이 있을 거예요. 그것은 무엇일까? 아주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의 장소(내 안)’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카타리나야!”할 때 알아차리고 다시 “네, 주님”하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따라 나서는 것, 그리고 그 따라감,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나옵니다. 그 무덤에서 살아있는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돼요. 만약 아직도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 이해가 잘 안되고, 나에게 새롭게 조명되고, 내가 새로 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모르겠다면 그대가 혹시 길릴래아 사람들처럼 저 죽은 다음에 올 부활에 대해서 하늘만 쳐다보면서 아무 일도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빈 무덤에서 출발해서 갈릴래아로 가는 여정, 이것이 노력입니다. 이 영성적인 노력을 통해서 갈릴래아에서 다시 시작되는 여정, 이 갈릴래아는 빈 마음이 될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내 텅빈 마음에, 영혼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그 주님과 함께 떠나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죽음으로 채워진 그대의 빈 마음에 다시 채워지는 생명, 죄가 사라진 그대의 빈 마음에 다시 채워지는 용서, 불의가 사라진 그대의 빈 마음에 다시 채워지는 정의, 전쟁이 사라진 그대의 빈 마음에 다시 채워지는 평화, 증오가 사라진 그대의 빈 마음에 다시 채워지는 사랑.

부활하고 주님을 따라서 걷는 삶은 새벽부터 다릅니다. 눈을 떴는데 내 열리는 눈을 통해서 새벽빛이 들어옵니다. 시나브로 세상을 밝히는 여명을 느낍니다.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 향이 내 후각을 터치하면서 후각 세포가 뇌로 전달하면서 날 얼마나 일깨우면서 행복하게 하는지. 우리의 의식이 다시 깨어나서 아주 마음이 깨끗하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사명 앞에 섰을 때 새 소리가 들리고, 우리 뺨을 살짝 터치하고 지나가는 봄바람도 느껴지지요.
부활의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을 원하고 큰 표징을 찾아다니고 이적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부활의 에너지와 기운으로 주님과 함께 채워나갈 수 있는데, 찬란한 이 오늘을 느끼면서 온 몸과 영혼으로 맞이하고 감사하면서 오늘 스쳐가는 동료들에게 밝게 인사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건네주고 미소를 나누고 하는 이런 것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미션, 미션을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것, 결국 무엇이 남는가요? 결국 ‘다 이루어 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부활의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다 이루었다.” 웃으면서 주님께 예수님처럼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겨드립니다.” 하면서 지구별의 소풍을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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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느님은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고,
세상이 있기 전부터 사랑으로 계시던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세상이 있기 전에도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사랑의 존재이시기에 사랑의 행위를 하실 때 사랑하시는 성부께서 계시고 그 사랑을 받으시는 성자가 계셨으며, 성부와 성자 간에 오가는 사랑이신 성령께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한 분이 셋이 되실 수 있으셨고, 사랑으로 셋이 완전한 하나를 이루실 수 있으셨습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이제는 삼위일체로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삼위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창조로 이어집니다. 이는 남녀의 사랑이 자녀의 출생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靈)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것으로 사랑을 그치지 않으시고, 당신 사랑을 계속하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창조에서 구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고, 낳아놓고 내버려 두는 사랑이 아니라 구원까지 책임지시는 하느님 사랑이며, 이것이 창조 때부터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것이 육화하신 주님이요 임마누엘 주님이시고, 이것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시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이시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성령을 보내시어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어떻게 한 분 하느님이 세 분이 되시고, 세 분이 하나가 되셨는지 골머리 아프게 쓰지 말고, 다만 삼위일체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고 감사할 것입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
삼위일체로 창조하시는 하느님,
삼위일체로 구원하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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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28,19)

<사랑의 신비!>

오늘 복음(마태20,16-20)은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란?’ ‘삼위(三位),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지만, 본성으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라는 교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시키신 교부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두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가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던 ‘아리우스이단’을 단죄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숨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작되고 행해지고 마쳐집니다.

‘성호경, 영광송, 사도신경, 세례식, 사죄경, 미사시작인사, 등등’ 이러한 표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일체 신앙을 삶으로 살아낼 때 이해될 수 있는 참으로 어려운 교리입니다.

‘사랑의 신비!’

‘삼위일체 신앙의 본질은 사랑이며,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각 위격을 향해 내어졌고, 또한 인간 구원을 향해 내어졌습니다.

우리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힘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가정 안에서, 본당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아가페 사랑’을 통해 사랑의 신비를 이루어 냅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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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exiumSuj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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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 19)

사랑은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깨닫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되는
일치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우신
업적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다름 아닌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개별적이면서도
고유한 활동성으로
우리의
참된 구원을 위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구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삶또한
삼위일체의
지극하신
사랑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어제의 신비가
아닌 살아있는
오늘의
신비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 사랑을
닮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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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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