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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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37-4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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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대림 시기를 맞이하여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뜨겁게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시대의 종말에 관한 이사야의 환시를 들려줍니다.
세상에는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지만 끊임없는 갈등도 많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평화를 멀리하고 많은 슬픔과 불행과 함께 고통을 자아냅니다.주님께서는 화해를 이루시는 분, 평화의 사자로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하느님의 뜻, 곧 구원과 평화, 정의와 사랑의 길을 알려 주시러 오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전하는 이사야는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하고 초대합니다.제2독서에서 바오로도 똑같은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잠이 아니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절박합니다.
육과 육이 주는 쾌락을 따르지 않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밤이 물러가고 새날이 밝아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없음을 지적하시며 그분의 오심을 깨어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는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대의 징표에 관심 없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거나 실천하려는 마음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쾌락에 젖어 살았던 홍수 이전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보인 행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우리는 각자의 본능과 사악한 경향에 휘둘리지 말고 올바른 방향, 곧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언제 와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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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영적으로 민감한(깨어있는) 사람의 모습과 둔감한 사람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우리는 늘 깨어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3. 내가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그 은혜를 주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신자가 되어가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나는 받은 은혜(영광)를 주님께 어떻게 드리며 생활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주님께 돌려드리지 못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돌려드리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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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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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삶 안에, 그리고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어느새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새로운 눈을 뜨고,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준비한 사람만이 그분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큰 희망이 없는 순간에 다가오셨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던 조그만 백성은 하느님을 말씀이요 재판관으로 맞이하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세상에 종교적 영적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고, 이처럼 보잘것없고 미천한 백성이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채고 따르는 것은 신앙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의 오심을 알아차리고자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시각으로 깨어 있으면 부르심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노아의 시대에 홍수에 휩쓸려간 사람들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삶은 점점 더 정형화되어 가고 ‘컴퓨터화’되어 갑니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계획된 삶에서 삶의 여백은 점점 줄어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휘저으러 오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423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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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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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NTjYXzWBkA
[서울대교구 안승태 요셉(창5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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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다림의 참된 의미!>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고 우리는 또 다시 대림시기의 출발점에 서있습니다.
저녁 식탁에서 한 형제가 이제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데, 공동체 차원에서 뭔가 절제하고 보속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갑자기 다들 알쏭달쏭해졌습니다. “뭐지? 대림 시기에도 그랬었나? 아닌 것 같은데, 맞나?”
물론 교회 역사 안에 그런 흔적이 있었습니다. 중세기 교회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대림절 동안 사순절 못지않게 속죄와 단식, 금육과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단죄와 심판을 위한 날이 될 것이라 믿었기에, 대림절 동안 참회와 속죄가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습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쁨의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대림 시기는 한 달간 지속되는 단기 영성 학교입니다. 이 기간동안 교회는 신자들에게 희망에 찬 기다림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물론 대림절 동안 육화 강생의 신비와 구세주 하느님의 지극한 겸손에 깊이 감사하며, 그에 합당한 성찰과 준비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성경 말씀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될 회개와 보속에로의 초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림 시기에 더 강조되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강생하신 놀라운 사건 앞에 경탄하고 기뻐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라는 은혜로운 대축제를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시기가 곧 대림 시기인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말 마디 그대로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관건은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간절하게, 또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잠깐이지만 유학 생활을 할 때의 기억이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짓 것,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우리나라 항공사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또 다시 다가온 이 은총의 대림 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 시기, 우리는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 첫째 주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네신 행동지침을 마음에 담고 은혜로운 단기 영성 학교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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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jXIZXVqP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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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깨어있지 못한 핑계를 댈 수 없다>
영화 ‘아폴로 13호’를 보셨습니까? 달을 향해 가던 우주선의 산소통이 폭발하여, 우주비행사들은 차가운 우주 한복판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합니다. 그들이 살아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지식이나 경험, 혹은 “살고 싶다”는 의지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구에 있는 **’휴스턴 관제센터’**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관제센터가 “전원을 끄라”면 끄고, “켜라”면 켰습니다. 그들은 우주선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관제센터는 모든 데이터를 보고 생환 경로를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비행사가 “내 생각은 다른데요? 내 방식대로 살아볼래요.”라며 지시를 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영원한 우주 미아가 되어 소멸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그곳에 보낸 이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것, 그것만이 나중에 살아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것이 생존의 법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닥치기 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을까요? 누구나 자기 뜻을 따라 사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바로 ‘관제센터(창조주)’의 지시에 귀를 닫은 것입니다. 오직 노아만이 하느님의 뜻(방주 건설)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지시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미 어둠이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분, 나를 다시 부르실 분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있음’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의무를 잊고 “나는 몰랐다, 죄 없다”며 핑계를 댑니다.
임언기 신부님이 만난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간암 말기로 임종을 앞둔 분이었는데, 30년 이상 냉담 중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주려고 십계명과 칠죄종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도와주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이 포기하고 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천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 죄 없어!”
그는 정말 죄가 없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세상의 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떳떳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주의 뜻(주일 미사, 기도, 사랑)을 30년이나 무시하고 산 것, 관제센터와의 교신을 끊고 제멋대로 산 것 자체가 가장 큰 죄임을 그는 몰랐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것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거룩해 보이는 성인들도 이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위대한 성서학자 성 예로니모는 꿈속에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당당했습니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거짓말 마라!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 추종자다. 너는 성경보다 로마 문학을 더 사랑하지 않느냐!” 그는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따르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고 전율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수녀로 20년을 살았기에 구원은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환시를 통해 본 ‘자신이 갈 지옥의 자리’ 앞에서 그녀는 경악했습니다. 봉쇄 구역에서 사람들과 잡담하며 세속적인 즐거움을 누렸던 그 미지근함이, 곧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만날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부끄러운 체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 주님께서 신학교로 부르시는 것을 느꼈지만 저는 거부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쾌락이라는 ‘제 뜻’을 따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건방지게 “확실한 표징을 주시면 믿겠다”며 버텼습니다.
어느 날 새벽, 술기운에 성당에 올라갔는데 성모상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고꾸라져 벌벌 떨며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내가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는데 거룩한 분을 만난다면, 그것은 반가움이 아니라 공포구나.” 진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 제 양심은 제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분 앞에서는 것이 죽을 만큼 두려웠던 것입니다.
제가 비로소 주님을 만날 용기를 낸 것은 신학교에 입학한 후였습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그분의 뜻에 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성체를 영하는데 주님께서 제 영혼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너는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다~ 주었다.”
제가 제 고집을 꺾고 관제센터의 지시(부르심)를 따르려 했을 때, 비로소 다 주시는 주님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듣고 따름만이 그분을 만날 유일한 준비요, 깨어있음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결코 ‘갑자기’ 오시지 않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했을 때 홍수가 났듯이, 우리가 그분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여 준비되었을 때 오십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거창한 영웅이 되고 싶었으나, 수녀원에 갇힌 처지를 핑계 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거창한 업적이 아니다. 바닥에 떨어진 핀 하나를 줍더라도 사랑으로 줍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수녀에게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고, 짜증 나는 소리를 참아내며 ‘작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내 뜻을 꺾고 하느님의 뜻(사랑)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이 살기 위해 관제센터의 지시에 온 신경을 집중했듯이, 우리도 살기 위해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입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 지시를 따를 때, 우리는 죽음 너머의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여 주님을 웃으며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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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반가운 모임이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 모임입니다. 이번 모임은 주문진 성당의 행정공소에서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던 동창 신부님이 지난 인사이동 때 행정공소로 파견되었습니다. 공소 신자는 20명 남짓 된다고 합니다. 마당에 있는 닭과 강아지가 우리를 반겨 주었습니다. 1982년에 입학했으니 어느덧 43년이 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이야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신학생 때 이야기로 돌아갔습니다. 한 친구는 저와 함께 매점을 운영했습니다. 한 친구는 힘들 때 함께 여행을 다녔습니다. 한 친구는 제게 지지 연설을 부탁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해 주었습니다. 한 친구는 20년 전에 캐나다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한 친구는 같은 본당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추억이 많습니다. 한 친구는 친척이 달라스에 있어서 지난여름에 다녀갔습니다. 한 친구는 제가 3년 동안 주일 저녁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한 친구는 휴가를 같이 다녔습니다. 이렇게 한명 한명 반갑게 옛 추억을 나누며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친구들의 얼굴에서 지난 34년의 사제 생활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 주일’입니다. 세상의 달력은 아직 1달이 남았지만,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아침 4시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잠에서 깨어났기에 지금 이렇게 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깨어난 모든 생명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존과 종족의 보존입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이 살아남은 ‘적자생존’의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깨어남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어남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갈 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영적인 ‘깨달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선물처럼 주어지는 깨달음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 벅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치열한 성찰과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7년간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을 이웃에게 전하였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완고해진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의 기적은 이방인이었던 시렙다의 과부에게서 일어났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치유의 기적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서 일어났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알았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찾아라.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들의 꽃들을 보아라. 저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을 때는 낙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2026년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겸손과 온유로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선물처럼 받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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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노아 때처럼 갑자기 올 것이니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준비하고 있어라.”(24,44)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깨어, 무엇을 준비하라는 말씀일까요?
절의 처마 밑을 보면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이 있습니다. 이 풍경은 물고기 모양인데, 물고기가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곧 물고기는 잠들지 않고 늘 깨어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참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이끄시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을, 그 간절한 기다림과 평화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모두에게 품위 있게 살아가자며 흥청대는 술잔치와 방탕, 다툼과 시기와 같은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로마 13,12), 곧 “주 예수 그리스도”(13,14)를 입으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삶을 살면서도 한 발짝 물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 그분의 눈길과 행동 방식을 익혀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날마다 성경 읽기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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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1. 서론: 주님의 오심과 교회의 기다림
대림 시기는 오심의 신비(mysterium Adventus)를 기념하는 전례 시기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오심”을 고백한다. 첫째, 역사 안으로의 오심(강생, incarnatio), 둘째, 은총 안에서 매일 우리에게 오심, 셋째, 영광중에 다시 오심(재림, parousia).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오셨고, 또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신다. 매일의 오심을 거부하는 자는 마지막 오심에 놀랄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95,14) 따라서 대림의 ‘깨어있음’은 단순히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매일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맞아들이는 적극적 신앙의 자세를 뜻한다. 교리서(524항)는 대림의 영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교회는 매년 대림 시기를 지내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기다림을 되새기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와 희망을 새롭게 한다.”
2. 복음의 핵심 구조: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노아의 시대를 회상시키며, 불시의 심판과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하신다(마태 24,37-39).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일상의 평범함 속에 하느님의 징조를 알아보지 못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은 죄악에 빠져 살면서도 평화를 즐겼다. 그들은 멸망의 날이 오기 전까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다. 영적 잠은 육신의 잠보다 더 위험하다.”(Homiliae in Matthaeum, 77,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라.”(로마 13,11) 촉구하신다. 이 “잠”은 단지 게으름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에 대한 무관심, 세속적 안일함, 영적 무감각을 의미한다. 깨어있음은 따라서 신앙의 실천적 태도이다. “하느님의 뜻을 일상에서 식별하고 실천하는 능동적 준비”이다.
3. 노아의 방주와 구원의 표징
노아의 방주는 성경 안에서 구원의 상징이다.(창세 7,11-23) 오리게네스는 노아의 방주를 교회의 예형(typos Ecclesiae) 으로 해석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의 표지이다. 물 위에 떠 있는 방주처럼, 교회는 세상의 격랑 속에서 믿는 이들을 품는다. 방주 밖에는 구원이 없었다.”(Homiliae in Genesim, 2,4) 대림의 기다림은 곧 교회 안에서 구원을 준비하는 삶이다. 교리서(845항)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통하여 온다.”
4.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이 구절은 단순히 선택의 무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본질이 드러남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날에는 인간의 마음에 숨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겉으로는 함께 있었으나, 마음은 함께하지 않았던 자들이 구별될 것이다.”(Sermo 93,3) 심판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는 형식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 드러나는 사건이다. 교리서(678gkd)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종 심판은 인간의 행위와 마음의 비밀을 드러낼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응답한 사람은 생명으로 들어가고, 거부한 사람은 스스로를 정죄한다.”
5. “깨어있어라.”: Vigilantia의 신학
예수의 명령 “깨어있어라.”(42절)는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영적 주의력을 의미한다. 교리서(2730항)는 이렇게 말한다. “깨어있음은 마음의 순수함을 지키는 행위이며,.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유혹을 분별하는 태도이다.” 교부들은 깨어있음의 의미를 “사랑의 긴장 상태”로 이해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잠들지 않는다. 깨어있는 마음이란 사랑으로 타오르는 마음이다.”(Sermo 254,3) 이 사랑의 긴장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향한 교회의 영혼 태도이다. 사목 헌장(39항)은 이 긴장을 종말론적 희망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세상 안에서 이미 그 하늘의 씨앗을 키운다. 대림의 기다림은 이 희망을 실천하는 교회의 사명이다.”
6. 바오로 사도의 권고: “지금은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로마 13,11)
바오로는 대림의 신학을 요약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고,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이미와 아직 아님’(already–not yet)의 신학이 바로 대림의 시간성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밤은 이미 물러갔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이유는 우리의 눈이 감겨 있기 때문이다.”(Homiliae in Romanos, 23) 이 깨어남은 도덕적 결단이며, 성화(sanctificatio)의 길이다. 교리서(2849항)는 “깨어있음”을 유혹을 이기고 선을 실천하는 은총의 협력으로 본다.
7. 결론: 매일 오시는 그리스도
대림의 기다림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매일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훈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안에서, 성사 안에서, 이웃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공동체적 사랑 안에서 매일 오신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로 마무리하자. “그대가 그리스도를 매일 맞이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마지막에 오실 때 그대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9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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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마태오 24,37-44 (깨어 있어라)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벗을 위하여 기꺼이 제 목숨 내어놓는
보잘것없지만 위대하고
자신을 감추지만 환히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을 섬기며
다툼과 시기 가득한 처절한 경쟁에서
제 살 길 찾기 위해
무기 삼아 그리스도를 몸에 두른
거룩한 척하지만 속되고
고상한 척하지만 천박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추악한 어둠이 지배하는 광란의 시간에
희망의 새벽을 맞으려
여린 몸 아낌없이 작은 빛으로 사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기나긴 밤과 찰나의 낮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탐욕과 무관심 가득한 암흑을 탐닉하면서
오히려 섬김과 돌봄의 빛의 자녀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억압에 대한 굴종이
평화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불의한 권력을 꾸짖고
억울하게 짓밟힌 이들을 일으켜
정의로운 평화를 보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이가 더불어 함께하는 삶보다
가진 이들의 안락과 평안을 위한
버려진 이들의 침묵과 사라짐을 강요하는
평화라는 이름의 죽임을 즐기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 말해지는 때에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느껴지는 때에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고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야 할 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주님을 모신 성전에서
주님을 모신 성전으로서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에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일하시는 세상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할 성전으로서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아우러지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
같이 들에 있던 두 남자가
하나하나 갈라지듯이
함께 맷돌질 하던 두 여자가
하나하나 갈라지듯이
천하고 낮은 곳에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증언해야 할 때
살림을 위한 죽음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
그리스도인은 갈라질 것입니다.
언젠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불현 듯 다시 오실
지금 여기 삶의 순간순간 불쑥 오시는
사람의 아들께서
기쁘게 품에 안아주실 그리스도인과
슬픈 낯으로 밀어내실 그리스도인으로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나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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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찾고 계십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37-44)
1) ‘대림시기’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회개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다린다.’ 라는 말의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이곳에 안 계신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또 이 말 때문에 누구든지 무의식중에, 예수님을 지금 이곳에 안 계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우리의 믿음과 모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그리고 ‘승천’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나라로 가신 일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 지금 이곳에, 즉 어디에서나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시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회개하는 시기입니다.
2) “나는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다.”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 텐데, 몸이 떠나지 않았더라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떠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잠깐이라도 딴 생각을 하고 딴 마음을 품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일이 많습니다. 성인 성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8-19.24)
세속 안에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에 속한 것들에게 오염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오염된 물속에 있으면 그 물에 젖을 수밖에 없고, 흙먼지가 많은 곳에서 지내면 흙먼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시기’는 그 오염물을 씻어내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를 찾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대림시기’에 우리가 할 일입니다. <물론 ‘대림시기’가 아닌 때에도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3) 38절의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 일 자체가 ‘죄’는 아닌데, 그런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외면하거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39절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여기서는 대홍수가 닥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처음부터 계속 회개하라고 가르쳤는데도 듣지 않으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4)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과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말씀을 합해서 단순하게 표현하면 “회개하여라.”입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그날은 곧 온다. 그러니 ‘지금’ 회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은 틀림없이 곧 온다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곧 오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이 위험한 어떤 응급 상황에서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을 생각하면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단 몇 초 차이로 누구는 죽고, 누구는 목숨을 건지는 일이 흔히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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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나를 기다리시는 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탄생하셨고 실제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계시니 그날을 경축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있었고, 자기들만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오시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자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미사 때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날이 준비된 사람에게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날입니다. 속량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루카 21,28)
오늘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 정 철 –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님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을 당당히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예비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당을 찾게 된 동기가 이웃에 사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부의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자녀에게 일직 신앙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전교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 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히게 하여라.”(마태 5,16)
셋째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던 그 기쁨을 기다립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밖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입니다.
“님은 내 안에 계셨지만, 나는 님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시고, 감실 안에서 당신을 조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당신 앞에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 합니다. 나보다 먼저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끝 날, 종말이 언제 오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는 그분이 계신데…그날을 대비하여 지금 깨어 준비하면 됩니다. 그날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날, 영생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