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14장, 13-21절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강론:15:40 ~ 28:06)

강론

강론

강론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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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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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에 머물지 않고 허기진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육신적 아픔, 배고픔까지 모두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지요.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다는 점입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셨기에 병자들을 고쳐 주고, 배고픈 군중을 한곳에 모이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제자들은 군중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서 먹도록 했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라고 이르셨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런 관심과 배려가 있으셨기에 빵을 모두 배불리 먹게 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깊어가고, 나눔을 실천하기를 꺼립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공동체는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아픔마저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기에 모든 이가 빵을 배불리 먹은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지요.
이웃과의 관계에서 매사에 깊은 관심을 두는 것이 사랑의 기적을 만드는 출발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길가의 돌이 보석으로 변하는 식의 기적을 바라기보다는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내어 주는 나눔의 기적에 동참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처럼, 힘든 처지에 놓인 이웃을 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출저: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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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예수님 입장에서
– 제자들 입장에서
– 군중들 입장에서

2.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가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하며 예수님과 동참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예수님과 동행하는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활동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희생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과 가까워 졌다, 하나가 되었다”라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보고 성체와 성혈을 정성스럽게 모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예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제대로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이야기 해봅시다.

5.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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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강론,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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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에게 익숙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복음을 오늘 다시 듣습니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구절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길을 보여 주신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남은 조각’이라는 말과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말은 퍽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가득 차다’에서 파생된 명사 ‘충만’(pleroma)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신학생 시절 은사 신부님이 자주 강조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은총의 충만, 곧 차고 넘치는 은총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대개 ‘남은 조각’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조각은 우리의 고통과 분열된 자아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조각이나 파편에서 시작하는 것, 이는 지상에서 지속되는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서간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나는 이는 거울에 비친 세상에서, 조각과 파편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을 예감합니다.
보잘것없는 남은 빵 조각이 주님께서 성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담아 친히 축복하신 구원의 양식을 반영하듯이, 조각나고 상처 받은 우리 각자의 삶은 주님께서 선사하신 충만한 구원을 비추어 줍니다. 남은 빵 조각이 광주리에 모였을 때, 그 빵 조각은 충만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공동체 안에서도 부서진 각자의 삶이 만나고 모일 때 우리의 삶은 주님의 생명을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구원 은총의 작지만 빛나는 표징임을 기억하고 확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성체성사를 닮는 삶입니다. (출저: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