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7장, 31-37절;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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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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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더듬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지만,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놀라워하지 않습니까?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이러한 군중의 외침은 오늘 제1독서와 연결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자기 자신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는 많이 알고 있고,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취라는 굴레에 빠진 상태이지요.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해방이 주어진다면 지금까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보고 듣고 즐기게 되지 않을까요? 아울러 다른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는 그런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치유 행위는 우리에게 더 넓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귀를 생각하게 하지요. 하느님의 목소리, 세상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열려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주님과 이웃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정신적 귀먹음이 세상의 많은 비극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신앙적으로 귀먹은 상태에 있다면 주님께서 “에파타!” 하시며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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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예수님을 만나 다시 들을 수 있게된 사람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신앙적으로 “다시 듣게” 된 경험이 있었는지 묵상해 보고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오늘날 어떤 것이 ‘앞 못보게 ’ 하는지 ‘못 듣게’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는 와서(come) – 보고(see) – 따르는(Follow)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 어디쯤 와있을까요?

5. 살아오면서 내가 지니고 있던 ‘단점’과 ‘장애’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 이였을 수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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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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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열정은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하느님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믿음을 키워 가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곧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그의 귀를 열어 주시고 묶인 혀를 풀어 주십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 세상 것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믿음을 키워 올바른 말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말씀을 가로막는 것들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을 귀여겨들음으로써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귀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입으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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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습니다. 유아 세례 예식 중에 신앙의 귀, 마음의 귀를 열어 주는 ‘열려라(에파타)’ 예식이 있는데, 이때 사제는 엄지손가락으로 세례 받는 아기의 귀와 입을 만지며 “주 예수님,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셨으니, 이 아기도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귀머거리나 말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을 동시에 만났을 때, 매끈하게 차려입은 사람 쪽으로 눈길이 쏠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야고보서는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참신앙인은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않는다고 충고합니다. 사람 차별, 이것이야말로 일부러 들으려고 하지 않고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인 우리가, 교회가 하늘 나라의 씨앗이요 누룩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훌륭한’ 일들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귀먹은 이를 듣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기는 어렵겠지만, 금가락지 낀 이들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더 갖고 먼저 마음을 기울인다면, 우리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도와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 실현을 앞당기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과 귀를 활짝 열어 주시어 우리의 삶이 주님을 찬미하며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의 귀에 살짝 대고 간청해 봅시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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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974
9월8일[연중 제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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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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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4PO2rYbKaE
[서울대교구 박정우 후고(도림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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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손을 집어넣지? 왜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주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 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쉽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존재 자체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허물투성이면 허물투성이 그대로, 죄인이면 죄인인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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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GdLU4GIq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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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사람이 뻥 뚫린 사람이 되는 방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을 더듬는 이에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방식은 당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당신 침을 손가락에 묻혀 그의 혀에 대고는 숨을 내쉬시며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어떤 사람이 열리지 못한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섬에, 여자 주인공은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 타인에게 열려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가 갑갑하게 닫힌 사람인지 활짝 시원하게 열린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원작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거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에서 시골집으로 대피한 네 남매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루시는 우연히 그녀를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데려다 주는 옷장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남매는 모두 나니아에 입성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마녀와 아슬란이라는 사자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니아에 한 번 들어가 하얀 마녀를 만난 에드먼드는 마녀의 약속에 유혹받아 형제들을
배신합니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가장 소외당하였다고 여기고 마녀의 헛된 약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녀의 약속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녀의 손아귀에서 구해온 것은 아슬란입니다.
아슬란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에드먼드를 구합니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마녀는 군대를 이끌고 아슬란의 군사들에게 진격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자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아슬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진실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악의 세력과만 대화가 통하였습니다.혀도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슬란의 죽음으로 그는 해방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힘센 왕이 자기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세워진 한 채의 오두막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지친 손님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도둑질하거나 그 집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으셨을 때 돈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며 살다가 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부를 자랑해 왔는데 망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겁냈습니다. 점집에도 갔다가 결국 성당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창피한 게 없어졌습니다.  성당으로 가서 바로 화장실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게 되기 때문에 더는 내가 무언가를 잃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명동성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자기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들이 열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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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의 주인공인 파흠은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어느 날 아주 싼 값에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파흠은 그 소문을 따라서 원주민이 사는 동네를 찾았습니다. 정말 원주민들은 단돈 1,000원에 원하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 출발해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면 그만큼의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지고 싶었던 파흠은 해가 뜨면서 걸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습니다. 걷다보니 어느덧 해가 지려했습니다. 파흠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더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방향을 돌려 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해가 지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뛰고 또 뛰다 파흠은 마을에 도착하면서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많은 땅을 원했지만 결국 파흠이 묻힌 땅은 ‘반평’에 불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시애틀’ 추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에게 땅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시애틀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우리 땅을 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땅을 팔수는 없다. 땅은 우리 어머니이며, 우리는 그 어머니의 일부분이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우리에게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잠든 곳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백인들은 땅을 소유물로 여기지만, 우리는 땅의 일부이다. 모든 나무와 바위, 강물, 숲의 소리조차 우리 민족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이 땅은 우리의 영혼을 품고 있기에, 그 어느 곳에도 우리 영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우리의 신성한 유산이다. 백인들은 자연을 파괴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돌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판다면, 그 대가로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 달라는 약속을 받아야 한다. 백인들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고, 그 땅의 신성함을 존중하며, 그곳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하늘과 땅, 나무와 물이 모두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이 땅 위에 우리의 영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땅을 사려했던 주지사는 원주민 추장의 깊은 성찰을 존중하며 도시 이름을 ‘시애틀’로 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파타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뜻은 ‘열려라’입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에파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년 넘게 전쟁 중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땅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와야 하는데 러시아는 2년이 넘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는 반대로 러시아의 땅으로 진격했습니다. 1,000킬로가 넘게 진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의 땅에서 종살이 했던 민족입니다. 나라 없이 2,000년을 방황하던 민족입니다. ‘홀로코스트’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이런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은 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착촌을 만들고, 이웃 사람을 내 쫓고 있습니다.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민병대는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사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에게도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에파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에도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과 미신은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신은 나의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땅을 빼앗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대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고, 하느님 때문에 희생하고,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변하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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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31-37: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을 때, 군중들은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라고 경탄한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다시 듣게 된다는 사실들은 진짜 기적적인 사실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마침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놀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짜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셔서 해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로 알아듣고자 했다. 이것은 적어도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을 쓰면서 가졌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귀먹은 반벙어리 치유의 의미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경청하려고 한다면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33-34절) 예수님의 이 행위들은 마술사들이 행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구원 능력이 당신 인성을 통해 병든 이의 인성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여기 나오는 한숨은 희랍어 원문으로 신음을 낸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심을 뜻하며,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은 당신의 기적의 힘이 바로 하늘에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 오늘의 귀먹은 반벙어리의 모습은 이것이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면 신앙을 통해 자신들 안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말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집전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례자의 귀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님,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열려라!” 하는 그 행동과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을 변화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생활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세례에 충실한 것이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사실이다. 귀먹은 것이 치유되어도 또다시 귀먹을 수 있고, 그래서 계속 언어장애인이 될 수 있다. 언어장애인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언어장애인이 되지 않는가? 즉 주님의 말씀을 깨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포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복음의 반벙어리 이야기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복음에 대해 병들어있는 사람의 이중적인 불행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먼저 복음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지 않는 신자는 그 복음을 말로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생활로 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비록 육체적인 눈이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뜨이는 일은 없을지라도 마음의 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뜨이고 있다. 그리고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나 살아있는 시체의 죽어있는 영혼은 다시 살아난다. 또한 귀먹은 육체의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나 닫힌 마음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에 활짝 열린다. 그래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고 악하게 살던 사람들이 착하게 살고 순종하지 않던 사람들이 순종하게 된다.”(훈화 88)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공동체는 귀먹은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이 부자들은 환대하고 아부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겼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 23,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그러한 신자들은 복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거짓된 신앙이다.

마지막 구절을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보 2,5)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잘 따른다면 그 말씀은 반그리스도적인 것을 분별하게 해주며 공동체 안에서 차별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하느님 앞에 참된 부자는 믿음을 갖고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상속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의 길이기 때문에 가야 할 길이 끝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우리의 귀먹음을 주님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맡겨 항상 새롭게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이제는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도 다시 주님께 치유를 받고 다시 일어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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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신 일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 예언이 선포된 때에는 비현실적인 꿈이었습니다. 뜨거운 땅이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이 샘터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희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는 것도 머나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마르 7,37)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기적들을 이루시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이제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됨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방식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통치나 권력은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10,42)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에서 그 답을 말하여 줍니다.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 2,1). 우리가 눈먼 이의 눈을 열고 귀먹은 이의 귀를 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가, 그분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그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느님의 통치를 우리가 실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로막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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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말을 ‘제대로’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1) 귀를 먹었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을 상징하고,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듣고 싶어도, 또 들으려고 해도, 여러 가지로 막혀 있어서 들을 수 없는 상황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이 곧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되어버린 것은,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 탓입니다. 목자로서 일해야 하는 자들이 목자가 되어 주기는커녕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전해 주지는 않고 성경과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독점하고서 사람들을 억누르는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상황입니다.(마태 23,13)

2) 예수님은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예수님께서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은,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일들’을(기적들을) 통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상 당신의 ‘온 삶’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분이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이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이고, 그 실천의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3) “에파타!”(“열려라!”)라는 말씀은, 장애를 치유하신 말씀인데, ‘막힌 귀’와 ‘묶인 혀’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이제 ‘말씀’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전하는 일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못 듣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안 듣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을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말을 안 하는 것’은 죄입니다. <들으면 안 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하면 안 되는 말들을 하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신앙인은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말씀’을 받아서 세상에 전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ㄱ)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4) 요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물론 일부 개인의 문제이긴 하지만, 하느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하느님 말씀처럼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자들은 권력자들과 기득권층 편에 서고, 나쁜 권력과 나쁜 기득권층을 향해서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고, 예언자 흉내를 내면서, 교회의 진짜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이라면, 귀가 막혀 있고 혀가 묶여 있어서 그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러는 것은, 주님께 큰 죄를 짓는 일이고,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일입니다.

5) 37절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새로운 창조자” 라는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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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일회 빈첸시오 신부님]

<소통은 원래 안 되는 것이 정상>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통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잘되리라 착각하며 산다. 소통은 서로 꾸준한 믿음의 신뢰와 타협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소중한 결과물이다. 소통에 대한 우화가 있다.

소와 사자는 서로 사랑을 하여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소와 사자를 아는 동물들은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며 결혼을 반대하였다. 주변 동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소와 사자는 신혼의 달콤함을 갖고 살았다. 소는 자기가 좋아하는 풀 가운데 가장 맛있게 보이는 마른 풀을 뜯어다가 사자에게 주었다. 사자는 풀을 먹기 싫었지만, 소가 좋아하는 것이고 소가 갖다준 것이기에 매일 먹었다. 그리고 사자도 소를 위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를 잡아다가 소에게 주었다. 소도 사자가 좋아하는 것이니 먹기 싫었지만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와 사자의 집에는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소는 사자에게 왜 자기가 좋아하는 풀을 먹지 않느냐고 불만을, 사자도 소에게 왜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불만을 말했다. 이렇게 서로 투덜거리더니 결혼 초에는 잘 먹었던 것을 이제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주는 것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은 매일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소와 사자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서로 최선을 다했다. 소는 풀을 열심히 뜯어다가 사자에게, 사자도 고기를 열심히 잡아다가 소에게 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소와 사자는 한 가지가 빠졌다. 살면서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보았기에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소는 풀을 먹어야 살고, 사자는 고기를 먹어야 산다는 것을 몰랐다. 서로의 소통이 없었다. 소와 사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나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이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투덜거리게 된다. 남편은 아내를 향해, 아내는 남편을 향해 서로 자기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소통의 부재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상대를 인정해 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청각장애인을 치유하실 때 그에게 구체적 행동을 취하신 것은 장애인으로서의 아픈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에게 변화의 힘을 준 것이다. 가족 간의 아픔과 상처도 서로 자기만 옳다고 생각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을 인정하면 변화가 일어난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소통의 첫 출발이다.

부부간에 서로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판단을 중지해야만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서로 대화를 할 때 나 자신의 판단이 들어가게 되면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가 없다. 내가 판단을 중지하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때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에파타”로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았듯,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먼저 열어 놓아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겠다. 이것이 소통이 잘되는 방법을 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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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남기 우르시노 신부님]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합시다!>

아기들이 말하는 것을 배우는 방법은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와 말투 패턴을 따라 하고, 자주 듣는 단어와 문구를 반복하는 법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즉 “엄마” 또는 “아빠”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듣는 아기는 결국 그 단어를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린아이 때부터 산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면 아무리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동물들의 소리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만나시고, “에파타” “열려라!”(마르 7,34)하시며 막힌 그의 귀를 열리게 해 주시고, 묶인 그의 혀를 풀리게 해 주십니다. 이 치유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귀가 열리고 그다음 말을 하게 됩니다. 말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귀가 먼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신 순서는 귀가 먼저이고 그 다음 혀입니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귀가 입보다 먼저이고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먼저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듣지 못하면 제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귀를 치유하시고 그 다음으로 혀를 치유하십니다.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마르 7,33)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바로 귀먹고 말 더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해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는 주님을 통해서만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 나오듯이, 구원의 하느님이 오실 때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5)는 말씀이 실현되는 순간!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믿음을 키워 올바른 말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 말씀을 가로막는 것들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음으로써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귀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입으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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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종주 베드로 신부님]

<사랑해(海)>

어느 신부님께서 미사 강론 시간에 신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신자들이 한참 고민하자, 신부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습니다. “그 바다는 바로 ‘썰렁해(海)’입니다.” 신부님께서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바다는 어디일까요?” 신자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을 찾으려 애쓰자 신부님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바다는 바로 ‘사랑해(海)’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모두의 마음이 항상 따뜻한 사랑의 바다 같기를 바란다며 강론을 마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한 자매님이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남편이 고민하며 답을 하지 못하자, 자매님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럴 때 당신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잖아요.”라고 했지요. 남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그만 “고마해”라고 외쳤답니다. 자매님이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말은 “사랑해”였는데 말이지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 말을 잘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식이, 부부는 서로가, 친구나 동료들은 각자가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말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지위나 재물 같은 외적인 요소를 활용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런 방식은 결국 사람들 간의 소통을 어렵게 만들고 상대방의 말을 더 듣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마르 7,32)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신체적인 치유를 넘어,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귀먹음’과 ‘말 더듬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치유를 받아야 할 귀먹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려 하거나, 자기도취에 빠져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어 모든 이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그들이 기뻐할 일을 하며,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고 돕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러한 섬김의 삶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말을 더욱 잘 듣고,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며 모든 이의 종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6)는 제1독서의 말씀처럼 나날이 새로워지는 삶이며 영적 세계에 눈을 뜨는 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를 섬기고, 기쁨을 나누며, 마음을 열어 서로 이해할 때, 그때에 비로소 우리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고마해’가 아니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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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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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나이 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탄식이 실제 우리 삶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돈과 연관된 세상의 것만 더 크게 부각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이 많은 세상인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는 사랑의 반대편을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관심은 자기가 아닌 국가가 또 교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 속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허름한 마구간에서 시작해서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하셨고, 또 공생활 중에도 늘 가난 속에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제자들이 자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은 지극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했던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 역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창녀 등과 같은 소외된 사람에게도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 뒤의 행적을 이렇게 복음은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3.34)

손만 얹어주셔도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하셨을 텐데,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발라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지저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면 전혀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갓난아기의 아빠 엄마는 아기의 똥을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늘 사랑으로 다가가셨던 주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과 행동을 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었을까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향한 관심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이런 관심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또 함께하는 유일한 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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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는 은혜>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몸소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십니다. 이 시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당신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창세1,27.2,7). 따라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제대로 말할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눈을 통해서 마음으로 읽어야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하려는 정성이 있을 때 어느 순간 살아있고 힘이 있는 능력의 하느님(히브4,12)을 체험케 됩니다.

신자들이 세속적인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가 많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복음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또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룹모임에 가보면 자유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한다 해도 내 바람만 얘기하고,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말씀 나누기에도 입을 꼭 다물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했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침묵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밖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노력하지 않은 채 그냥 세상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전혀 말씀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가 귀먹고 말을 더듬는 반벙어리입니다. 세상 것을 즐기는 시간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끄럽습니다.

성경을 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비판 정신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때에 문법을 따지지 않듯이,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에 영양가를 분석하지 않고 먹듯이 성경을 읽으시길 바랍니다”(알베리오네 신부). 일반 소설책은 밤을 새워 읽지만, 성경이나 신심 서적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시간을 내십시오. 그만큼 은혜로울 것입니다.

귀먹었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빵의 기적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알아듣지 못했고, 호숫가에서 자기들을 구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의 치유 과정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환자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따로 불러낸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배려입니다. 무엇보다 안정시킬 수 있는 곳이요,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자주 한적한 곳에 머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쉬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습니다. 손가락은 창조하는 도구입니다. 내가 너를 치료해 주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말을 못 하는 이들은 자기의 의사 표현을 손으로 합니다.

3).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는데 유다교에 있어서 침은 안질에 특효가 있는 치유로 여겼습니다. 당시 관습적인 치유행위 입니다. 우리도 벌레에 물렸을 때 침을 바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4).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빵을 보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오늘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기도하면 연민의 정과 측은한 생각으로 기도하겠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면 전능하신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신뢰를 갖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는데 거센 파도를 보자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걸었지만, 파도를 볼 때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5).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 숨을 얘기합니다. 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르15,34), 절규하며 기도하는 그 아픔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숨은 절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희망입니다.

6). 열려라! 에페타! 이 말은 부활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려라’는 말씀은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귀먹은 반벙어리에게 이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은 믿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려있는 만큼 빛이 들어오고 은총이 열매 맺게 됩니다. 시편에서는 “ 너 한껏 입을 벌려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주리라”(시편 80,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시려‘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의 영적 감각이 열리고 건강한 영혼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치유 결과를 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음을 똑똑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귀와 입을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제대로’라는 말은 ‘올바르게’, ‘정확하게’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입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조용한 곳을 찾아 침묵 속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항상 열려있어야 합니다. 에파타! 열린 사람은 감사와 찬미로 제대로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신 다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람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고 반벙어리 고쳐주셨다는 얘기만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소리만 퍼질 것을 경계하셨습니다.‘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는 것은 ‘보시니 참 좋더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다시 회복시키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정화하여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듣고 말해야 할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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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함으로써>

마르코 7,31-37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그리함으로써>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들음으로써
말 못하는 이가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함으로써
귀먹은 이가
듣게 하는 것입니다

보임으로써
볼 수 없는 이가
보게 하는 것입니다

스밈으로써
느낄 수 없는 이가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품음으로써
외로운 이가
함께하게 하는 것입니다

먹힘으로써
배고픈 이가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나눔으로써
가지지 못한 이가
갖게 하는 것입니다

돋움으로써
시들어가는 이가
푸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끎으로써
멈춰선 이가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섬김으로써
보잘것없는 이가
어엿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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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동시에,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대수도원>과 연합회의 주보성인 축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사실, “성모성탄 대축일”인 오늘로부터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accapatulatio)됩니다. 이토록,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기쁨도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머니의 그 은총과 축복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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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악감정으로부터의 탈출 ; 사랑의덕>

세상에는 가난과 병마, 불합리한 상황. 전쟁의 고통 등 여리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늘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연민’의 감정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후원을 하거나 사회적 번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가까운 이웃들에게는 그러지 봇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죽. 회사, 본당 공동체 안에서 겪게 되는 갈등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하며 미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어렵게 느꺼집니다. 하느님을 선기며 주일을 거륙하게 지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한 원수. 미움의 대상은 도지히 용서할 수 없을 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농반해야 하며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요한 1서 4,20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아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리한 인간적 갈등 앞에서 지는. “그래도 무조건 원수를 용서하고 화해하십시오.”라는 실천 불가능한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적인 사랑의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고 화해하는 것이 가징 최종적인 것이 되어야 하겠지만 용서와 사랑에는 일종의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점은 원수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용서와 화해를 동의어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는화해가 아닌, 악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짓입니다. 화해와 사랑은 그 이후의 결실입니다.

한편, 용서의 반대말은 악감정’이며 그 열매는 증오와 미움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왜 그토록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셨는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앙심과 분노가 가득해져 오히려 불행해집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힘담, 증오, 원망. 험오. 이 일마나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 주는 것들입니까?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원수와 나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그를 잘 돌보아 주세요. 제가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해주세요. 서로 악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러한 기도를 올밀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보듬어주실 것이며 끝내 이웃과 화해할 기회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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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 146,1-2)

지금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파푸아뉴기니는 흥분의 도가니속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3일간 사목방문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도 열렬한 환대중에 꿈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어제 강론처럼 오늘도 교황님의 소식을 알림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인구 1천50만명의 파푸아뉴기는 전체 인구의 약 26%가 가톨릭 신자이며, 70%는 개신교를 믿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어제 교황님이 파푸아뉴기니 곳곳에서 나눈 연설 제목을 소개합니다. 88세 고령이지만 정신은 영원한 청춘이요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빛나는 희망의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정의감, 친근함, 연민 그리고 부드러움을 지니십시오.”
“용기, 아름다움 그리고 희망의 증인이 되십시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시오.”
“교회의 선교는 우리의 기술이 아닌, 성령의 활동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미래를 지닙니다.”
“파푸아뉴기니 가톨릭 신자들은 멜라네시아계(96%) 파푸아인 정신으로 그들의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파푸아뉴기니 어린이들이여, 타오르는 사랑의 빛으로 사십시오.”
“교황님의 방문은 학생들에게는 큰 꿈을 꾸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목 하나하나마다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꼭 10년전 2014년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이 기적처럼 10년후 이맘때쯤 동남아시아 3개국과 오세아니아의 파푸아뉴기니를 찾은 것입니다.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향력이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고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늘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믿음의 삶, 희망의 삶, 사랑의 삶, 즉 신망애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나눕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초적 정서가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서에 365회 나온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바위판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로부터 귀향과 행복을 노래하며 이들의 희망과 믿음을 북돋웁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며 믿음의 삶을 살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이런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살 때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둘째, “열려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열려라의 아람어 “에파타!” 어감도 힘차 좋습니다. 닫힘에서 희망의 열림입니다. 닫힌 우리를 열어주시어 희망의 기쁨을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닫혀 불통일 때 온갖 죄요 병입니다. 마음도, 귀도, 입도 열려야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오늘 복음을 통해, 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실낙원은 복락원이 되고 새로운 창조의 구원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희망의 그때를 노래하는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인 이사야 예언자요, 그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가 상징하는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똑같은 파스카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열려라!”

복음의 귀먹고 말못하는 이가 그러했듯이, 우리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의 치유기적을 목격한 이들과 함께 더할 나위없이 놀라서 고백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 구나!”

그대로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매번 되뇌던 말씀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 마지막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이요 우리들인지, 하느님 향해 활짝 열린 희망의 삶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셋째, “차별하지 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별하지 않는 사랑이, 편애하지 않는 사랑이 하느님 다운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잘 반영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선생님은 여기 좋으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생각을 지닌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들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을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을 닮은 이들은 결코 차별하지 않으며 자발적 가난으로 믿음의 부자가 되는 길을,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길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삶, 하느님께 이웃에 활짝 열린 희망의 삶, 차별하지 않는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사랑의 삶”을, 바로 참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이방인을 보살피시네.”(시편 146,8-9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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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들어야지 말하고 들은 대로 말한다.>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이 어떻게 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언하는 책이고 그래서 오늘 첫째 독서도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벌어질지 묘사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오늘 복음은 이런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표시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인데 아주 짧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그 의미가 매우 풍부하고 깊습니다.

우선 오늘 치유 받은 사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라는 점입니다. 무릇 말 더듬는 이는 혀가 짧아서 더듬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말을 하지 못함은 성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줍은 성격이기에 못하거나 신학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들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른 귀는 열려서 그 말은 듣지만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아서 듣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다른 귀는 열리고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말의 홍수란 말이 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면 거기에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듯 말의 홍수가 나도 그 말들에 의해 우리가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말들이 많습니까? 방송으로 치면 갖가지 티브이 방송이 있고, 자기 손안의 방송인 스마트 폰 시대에 온갖 유튜브 방송이 있습니다.

이런 말의 홍수와 방송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듣고 골라서 듣습니까? 아니면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립니까?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화방이 없었고 그래서 저는 만화를 못 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엿장수가 앞뒤 뜯어진 만화를 가지고 왔는데 저는 고물을 가지고 엿을 사 먹지 않고 그 만화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만화를 보고 또 보고 그야말로 닳도록 보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제가 뭘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아실 겁니다. 말들을 끊지 않으면 그 수없는 말들에 의해 영적 감수성을 잃거나 무디어집니다. 이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귀에 이어폰을 달고 살다가 청력이 잃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데리고 온 사람들을 놔두고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아주 더러운 짓을 하십니다. 그의 귀에 당신 손을 대시고 그의 혀에 당신 침을 발라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듯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도 고쳐주실 수 있지만 따로 그러니까 은밀히 만나주시고, 한마디 말씀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행위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도 따로 불러내실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지금?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데, 오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마음 무디지 않고 깨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귀에다 대고 ‘에파타’, 열려라! 하시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가 열리겠습니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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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에파타! 곧 열려라!”(마르7,34)

<들음의 은총을 청하자!>

오늘 복음(마르7,31-37)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예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

나는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있는가?나는 귀가 열려있고, 입이 열려있는 하느님의 자녀인가?

만약 내가 삶의 자리에서 신앙인답지 않게 살아간다면, 예수님처럼 그리고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성모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귀먹고 말 더듬는 신앙인, 영적인 농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월8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올해는 주일에 밀려 기념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마리아의 위대함’은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머뭄’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겸손’과,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던 ‘따름’에 있습니다.

저의 모습이나 저의 경험으로 볼 때,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들음의 은총을 청합시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신앙인이 됩시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성모 마리아의 머뭄과 겸손과 따름을 따라가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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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 35)

예수님께서는
인격적인
친교로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을
변화시키십니다.

무엇을 놓치며
살고 있는 지를
알게 됩니다.

인격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단기적인 처방이
아니라 장기적인
해법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살게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자신을
찾습니다.

우리자신을
표현하게 됩니다.

숨겼던 아픔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할
용기가 생깁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니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풀립니다.

우리 삶의
치유란
아픔을 모르는
삶이 아니라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삶이
치유입니다.

에파타!가
우리 삶을
응원하는
파이팅으로
여겨집니다.

건강한 삶은
건강한
소통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답답함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수 있는
건강한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나누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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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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