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4장,12-26절;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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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6.22-26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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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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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가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하며 예수님과 동참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활동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희생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과 가까워 졌다, 하나가 되었다”라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보고 성체와 성혈을 정성스럽게 모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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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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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세의 계약은 짐승의 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로 암송아지, 염소와 황소를 희생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신약의 계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짐승의 피를 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가 되시고 속량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 중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고통과 수고를 그리스도 안에서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포도의 즙처럼 우리가 흘리는 땀과 피는 주님 대전에 아름다운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죄악을 저지를 때마다 반복하여 짐승들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는 단 한 번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속죄와 친교의 제물을 바칠 수 있습니다. 짐승의 피로는 완전한 속죄와 친교의 제물을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바치는 미사성제로 완전한 계약이 지속되며 우리는 그것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봉헌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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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랑하여 부부가 된 사람들도 서로 다툽니다. 작건 크건 다툼이 한 번 일어나면 두 사람을 다시 결합시켜 주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입장을 조정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물며 적대적인 사람들이 화해하는 일은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결단을 내려 크게 양보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서로의 관계를 건강하고 충실하게 유지하려면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면 계약을 맺을 때 피를 뿌린 모양입니다. 계약을 깨뜨리면 피라도 흘리겠다 또는 반드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면서 피를 흘려서라도 서로의 관계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다짐합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때 소를 잡아 그 피의 절반을 제단에 뿌렸습니다.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도, 상상하면 섬뜩할 만큼 장엄한 광경입니다. 이스라엘은 비장한 각오로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게 되면, 그들은 다시 하느님께 속죄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손상된 관계를 회복해야만 했는데, 히브리서가 고백하듯이, 이 제사는 늘 되풀이되어야만 했습니다.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계약의 피를 쏟으십니다. 동물을 잡아 그 피를 뿌리시며 계약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계약의 피”를 부으십니다. 이제 더 이상 이 계약은 깨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희생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미 다 치르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강생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대신 대속하시는 하느님의 속죄의 어린양이 되셨으며 당신 몸과 피를 몽땅 내어 주시는 생명의 빵, 사랑의 성체성사가 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신비가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압축됩니다. 곧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생각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 서로 참고 인내하면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려면 어쩌면 날마다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거의 늘 아픔을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먹히는 빵, 자신을 떼어 주는 삶, 그래서 하나의 성체성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876
6월2일[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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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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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es4rp-BOto
[춘천교구 현광섭 프란치스코(효자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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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체는 우리를 낫게 해줍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에 성체성사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복자 카를 라이스너 신부님(1915~1945)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생몰 연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분은 아우슈비츠 못지않게 악랄했던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분의 사제로서의 삶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24살 부제품을 받은 라이스너 부제는 부제품 받자 마자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건강했던 그는 거기서 꽤 긴 기간인 4년간 버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전을 목전에 두고 몸이 점점 약해지고, 결핵에 걸려 쓰러집니다.

부제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죽는 것은 아무 미련도 없지만,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첫미사를 봉헌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고 안타까움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이스너 부제는 한 가지 지향을 두고 간절히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얼토당토 않은 청이라 여기시겠지만, 혹시라도 제게 사제품과 첫미사의 영광을 주실수는 없겠는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부제의 간절한 청이 하늘에 도달했습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는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갇혀 있었는데, 그 중에 주교님도 한 분 계셨던 것입니다. 부제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주교님이 부제가 누워있는 방을 찾아와서 사제품 주신 것입니다. 1944년 12월 17일이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했던 라이스너 사제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소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병세가 깊어진 부제를 보고 군인들은 그를 가스실로 보내려고 했는데, 병세가 너무나 심각해진 것을 본 군인들는 강제 수용소 밖으로 내보내 굶겨죽이기로 했습니다.

들것에 실려 밖으로 나가던 부제는 자신을 싣고 나가던 군인 두명에게 자신이 겪었던 그간의 일들을 말해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제가 되었지만, 아직도 미사를 단 한번도 드려본 적이 없다. 죽기 전에 미사 한번만 드릴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겠냐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독일군들도 신자였습니다. 그들은 카를 신부를 수용소 밖으로 데려가지 않고 병원의 침실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미사 도구들을 챙겨다 주고 첫미사를 봉헌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죽기 일보 직전 병원 침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카롤 신부는 단 한번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습관처럼 봉헌하는 미사가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 가장 간절한 소원이라는 것, 기억하면, 우리의 미사가 더 간절해져야겠습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 카롤 신부의 그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한다면 그 미사가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성체성사의 그리스도여! 저는 당신없이는 그 무엇도 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저는 그 무엇도 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그리스도여! 당신은 저의 안식처요 집입니다! 성체성사의 그리스도요! 저는 오직 당신께만 속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미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미사에 대한 최우선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성체는 우리를 낫게 해줍니다.
성체는 우리를 예수님과 일치시켜줍니다.
성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는 방식을 알게 해줍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형제들에게 자신을 쪼개어 내어주는 능력을 선물합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선으로 악에 대응하는 역량을 키워줍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자신을 벗어나 밖으로 나갈 용기를 부여합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이웃의 약함에 고개 숙이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눈물을 닦아주며, 모든 이에게 희망과 기쁨의 빵이 되어주는 교회입니다.
매일 예수님께로 돌아갑시다. 성체성사로 돌아갑시다.(프란치스코 교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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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R720ZJP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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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왜 계약을 피로 맺으시는가?>

성체 성혈 대축일은 항상 삼위일체 대축일을 잇습니다. 성체·성혈의 신비가 삼위일체 신비를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삼위일체이십니다. 오 헨리 단편소설『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남자는 아내를 위해 시계를 팔아 빗을 사고 아내는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의 시곗줄을 선물합니다. 빗과 시곗줄은 자신이 가진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주고받음이 사랑을 완성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혼자서는 사랑일 수 없습니다. 아드님과 둘이 계셔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주고받는 선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성령도 아버지와 아드님과 같은 분이신데, 그 내어주는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운반할 자격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폭발물 운반을 맡기는 어른은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사랑의 선물 교환으로 하나가 되면 자녀가 탄생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사랑의 선물로 부모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아이는 태어나도 자신이 개인지 고양이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신다는 뜻은 우리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체를 영하고 계속 ‘인간’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인간의 본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계속 돈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세상 집착에서 자유롭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얻기 위해 미사에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라고 하십니다. 계약이라면 양쪽의 의무과 권리가 들어있습니다. 만약 내가 집을 사려고 한다면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그러면 돈을 줄 의무와 집을 받을 권리가 생깁니다. 그럼으로써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가 생깁니다.

그런데 관계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행하다 음료수 하나를 사기 위해 들른 가게주인과는 깊은 관계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매일 출근하면 월급을 주는 사장과는 더 깊은 관계가 맺어집니다. 만약 일을 하는 척하며 돈만 받아 간다면 나중에는 관계가 깨어집니다. 깨어지는 것을 넘어서 고발당하게 됩니다. 나는 피를 흘리는데 상대는 그이 비견될 수 없는 작은 것만을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1년이 365일이라 배우자가 364일만 나에게 충실하고 하루는 바람피워도 허락하는 배우자가 있다면 그 사람과 혼인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혼인은 ‘피’, 곧 ‘생명’을 내어놓기로 한 계약이기에 단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가장 완전한 계약입니다.

그렇다면 뭣 하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계약을 맺는 걸까요? 한 청년에 의해서 암소 아홉 마리를 받은 아내는 처음엔 자신이 그 가치에 합당하지 않다고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 남편에게 그만큼 내어놓지 못하면 부담 때문에 계속 같이 살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남편이 주는 계약의 피에 합당한 것을 내어놓기 위해 노력하다가 정말 남편이 원하는 아내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우리와 계약을 맺으시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대전 ‘성심당’은 몇 개 안 되는 직영점으로 수백억의 순수익을 올리는 대전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창업주 임길순 암브로시오는 흥남 철수 때 살려만 주시면 일생을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당일 팔리지 않은 모든 빵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며 그 계약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과 더 친밀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당일 너무 많은 빵이 소진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빵을 더 만든다고 합니다.

더 목숨을 건 계약이라야 더 완전한 일치가 일어납니다. 미사는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내가 성체성사로 하느님이 되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계약 조항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도 이웃에게 그 믿음을 주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 못하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성체를 영해도 소원하기만 합니다.

전혀 나의 의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성체를 영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피의 계약이 나를 정화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분께 더 합당하기 위해 사랑에 목숨을 걸 결심하고 파견받아야 진정 미사에 참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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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443년 지금부터 581년 전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표현하기 쉽고,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문자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때 이미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아들 수양대군에게 한글로 된 책을 만들게 했습니다. 1447년 아들 수양대군이 만든 책의 제목은 ‘석보상절(釋譜詳節)’입니다. 책의 내용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중요한 것은 자세하게, 그렇지 않은 것은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인 조선시대에 불교의 부처님을 주제로 책을 쓴 것은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은 이미 1000년 동안 불교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1447년에 발표하였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은 부처님의 자비와 덕이 하도 커서 마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춘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한글의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한 작품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 감사드립니다. 세종대왕 역시 한글이 널리 보급되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식사를 ‘최후의 만찬(Ultima Cena)’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그림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체성사’가 되었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할 때,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은덕이 천개의 강에 비추는 것처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 성체를 받아 모시면 우리의 몸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지난 5월 5일에 본당에서는 ‘첫 영성체’가 있었습니다. 18명의 어린이들이 생애 처음으로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이렇게 매일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내어줌’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재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공평하지 않게 만드신 것은 ‘흐름’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강약, 고저, 장단’이 있습니다.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공기도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구름도 비가 되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립니다. 사람의 피도 끊임없이 흘러야 생명이 유지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흘러야 하고, 그렇게 흐르는 세상은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돈도 흘러야 경제가 살아납니다. 사람이 사는 이 세상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한 나라의 것들이 강한 나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것들이 부유한 사람들에게로 흐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긴 곳에서 짧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나라,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나라, 사막에도 샘이 흘러 꽃이 피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공부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해서 자기만 잘살고, 잘 먹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출세해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 오천 명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지만, 혼자서 오천 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오천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시면서 어떻게 해야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잘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잘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잘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또한, 우리도 이웃을 잘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꽃입니다. 꽃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버려요. 그래도 나는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답니다. 가을이 되면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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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4,12-16.22-26: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찬미를 모두 동원하여도 그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부속가 2절에 “정성 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 능력 부족하다.” 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화 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취하셔서 우리를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포도주를 축성하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라고 선언하실 때, 이 말씀은 제1독서의 모세의 선언,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약이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계약을 맺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되신다. 성체성사는 그러기에 새로운 계약인 것이다.

복음의 앞부분은 희생제물로 바쳐지고 그것을 먹어야 하는 파스카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파스카 양은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그리스도 행위의 예고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행위의 재현이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봉헌하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루카는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축복양식의 이 말씀은 희생제물을 바치며 거행했던(탈출 24,5) 시나이산에서의 계약(탈출 24,8)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분명히 희생제사(레위 1,5.12.15; 3,2. 8.13)에 항상 연결된 죽음의 행위를 연상케 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성체성사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돌아가심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은 당신의 몸이 창에 찔려 피가 완전히 다 쏟아진 성금요일에 입증된 죽음의 상황의 재현이다. 이 모든 것은 희생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창에 찔리는 고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사랑의 봉헌을 통해 자신을 바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현존”일 뿐 아니라, “희생”이다. 예수님께서 갈바리오 산 위에서 바치셨고 오늘도 당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감싸시며 성사를 통해 신비스럽게 재현하시는 바로 그 “희생” 자체이다. 이러한 것으로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느끼게 되는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피”로써 새로운 계약을 맺는 “희생”으로서의 성체성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구약의 사제직과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물질적인 희생제물을 봉헌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악에서 해방하시어 당신 자신과 더불어 “영원한 상속 재산”(히브 9,15)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이 상속 재산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써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가 되심으로써 보증하셨던 영원한 생명, 구원이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통해 성사적 표징 안에서 미래의 “유산”을 차지하고 있다.

이 유산은 서두에 말했듯이,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며, 그래서 참 아들딸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성사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화 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면,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는 성체성사를 열심히 거행하며, 합당한 준비로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수난의 기념이며, 옛 계약의 완성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증거”(Opuscolo 57)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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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을 들려줍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동물을 반으로 가르고 그 피를 제단과 사람들에게 뿌렸습니다. 이스라엘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과 법규를 충실히 지킨다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탈출 19,5-6 참조) 복을 내리신다는 계약입니다.(탈출 20,6; 신명 30,16 참조) 이 계약을 체결하고자 모세는 소를 잡아 번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제단과 백성들에게 뿌립니다.(탈출 24,4-6 참조)

제2독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는 제사였음을 알려 줍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옛 계약(구약)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새 계약(신약)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중개가 아닌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대사제’를 통해서, 불완전한 제물인 동물의 피가 아닌 흠 없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완전한 제물’이 되시어, 당신의 피를 십자가라는 제단과 우리 위에 흘리시며 맺으시는 ‘완전한 계약’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신앙의 성조들이 맺은 계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이 단 한 번의 십자가 희생 제사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 제사는 날마다 성찬례 안에서 되풀이되어 기억되고 재현됩니다.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려고 ‘몸’과 ‘피’를 내주신 주님의 깊고 진한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도 다른 이에게 몸과 피를 내주도록 재촉합니다.(2코린 5,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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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마르 14,22-26)

1) 성체성사는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시는 성사입니다. 주님께서 먹이신다는 말에서, 이제벨의 박해로 목숨이 위험할 때 엘리야 예언자가 체험했던 일이 연상됩니다.

“(엘리야는)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4-8)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하소연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직접 음식을 준비하셨고, 먹이셨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입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직접 먹이신 일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임무를 맡기기만 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맡기신 그 임무를 우리가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면서 끊임없이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그런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신앙인으로 살아갈 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힘을, 즉 주님의 생명력을 날마다 받아먹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 기도는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을 도와달라는 기도만은 아니고, 물론 그것도 포함해서, 하느님 나라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또는 그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 있는 ‘일용할 양식’은 육신을 위한 양식이면서 동시에 영혼을 위한 양식이기도 합니다. <영성체는 ‘일용할 양식’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꼭 ‘일용할’(‘오늘 먹을’) 양식만 청하는가? 평생 먹을 양식을 청하면 더 좋지 않은가? 그것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으면 우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일’은 주님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내일의 삶’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3) 십자가도, 성체성사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큰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그리고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19-21)

이 권고는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라.”라는 권고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에는, “우리는 형제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눈에 보이는 형제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4)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1요한 4,8) 따라서 인간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가득 찬 나라이고, 사랑으로 완성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어쩌면 지옥은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사랑만 없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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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기흠 토마스 신부님]

<“그리스도의 몸”, “아멘”>

미사 때마다 사제의 축성 기도를 통해 빵과 포도주가 참으로, 실제로, 실체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해 친히 머물러 계신다는 믿음이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입니다. 오늘 교회가 이 대축일을 특별히 제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입니다.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직접 보고 느끼며 기도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큰 사랑과 흠숭의 표현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성화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성체신심 행위는 완전한 기도입니다. 미사는 공동체가 함께 하는 기도이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적인 만남을 원하시지만, 개인적인 만남도 원하십니다. 더 가깝고 친근한, 더 사랑할 수 있는 관계, 개인의 기도, 주님께 대한 개인적인 일치는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게 이끌어줍니다.

셋째, 성체와 성혈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만찬을 거행하시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당신의 행위와 말씀을 계속하라고 하셨음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심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는 단순한 믿음의 변화가 아니라 참되고 실제적이고 실체적인 변화, 즉 먹고 소화된 음식이 갖가지 양분이 되어 살과 피로 되듯, 모신 성체로 주님과 하나가 되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으로 파견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할 힘과 지혜와 용기, 영적인 에너지를 충만히 받아 그 소명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먼저입니다. 움켜쥔 손으로는 그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듯이 ‘나’라는 존재가 가득 차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분은 자기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시점부터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나아가 성체성사의 기원이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하셨던 최후의 만찬인데 이 만찬은 다름 아닌 공동체 형제들의 식사입니다.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성체 성사의 나눔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실제적인 이 신앙의 신비를 더욱 뜻깊게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통찰력과 믿음을 통해 이 신앙의 은사가 깊어지는 데 마음을 열어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나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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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최상진 야고보 신부님]

<거룩하신 분이 내 안에 오시어…>

본당에서 아이들이 일정 기간에 첫영성체 교리를 마치고 첫 번째로 영성체할 때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참신하고 예쁜지 천사처럼 보입니다. 미사 중에 어르신들이 주름진 손으로 정성껏 성체를 모시는 모습을 보면 ‘주님께 향한 믿음이 이토록 크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봉성체 때에 한복을 단정하게 입으신 채 미사보를 쓰고 기다리시고, 성체를 영하시고 만족하신 듯 행복해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중에 가장 거룩한 것이 천상 양식인 성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께서도 ‘성체는 바로 나를 지탱해 주는 음식이기에 성체 없이 나의 봉헌 생활은 하루 한 시간도 지탱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체를 내 안에 모시면서 주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첫영성체 때에 얼마나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기다리고 설렜는지, 영성체 후에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드렸는지, 그때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언제나 첫영성체 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정성껏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되새겨 보는 것이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 당신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어 여리고 가장 작은 모습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와 하나가 되고자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순간이며, 기적을 넘어서는 신비, 곧 신앙의 신비라 하겠습니다. 이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순간은 없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내 안에 오시어 그분의 거룩함으로 우리 자신도 거룩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이 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는 하나의 빵을 나누어 모심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체성사의 전제이자 열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어 주고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이루기를 바라십니다.

누가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삶이 힘들고 지쳐있는 이들, 희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망의 늪에 빠져있는 이들, 질병에 시달리며 아픔과 적막함 속에 있는 이들, 대화할 상대가 없어 고독과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이들,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는 이들, 끼니를 걱정하며 굶주리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나누며 누구나 인간다운 품위를 누리도록 함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의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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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대성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멈추어 하느님 나를 알라”(시편 46,11)

살다 보면 때때로 자신이 가엾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필시 그러할 인생임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홀로 무언가를 조용히 바라보며 잠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픈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꼭 어떤 큰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삶이 아니라 할지라도 저마다의 영혼에 놓인 살아낸 삶의 무게는 비로소 모든 것에서 자신을 떼어 놓고 무언가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자신에게 넘어져 본 사람만이, 간절히 하느님을 찾고 부르게 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그 자신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기에, 이 자기연민은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죄와 고통으로 말미암았다 하여도, 하느님께 못 드릴 게 없는 삶임을 깨닫게 하고, 종국에 하느님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게 되니 가히 복되다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 주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나의 못남도, 못됨도 부끄럼 없이 드러낼 수 있고,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연민이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에 그 뿌리를 두게 될 때, 우리는 신앙의 참된 삶의 자리로서 이 자기연민을 통해 자신을 멈추고 하느님을 바라볼 줄 알게 되며 나아가 영적인 위로와 위안을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느님을 앙망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침묵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의 믿음의 성조들, 예언자들, 그리고 왕들, 신약의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오로, 성교회의 여러 성인성녀들, 그들 모두도 그 믿음의 시작은 우리와 같이 자기연민에 쌓인 가난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 숙여 절망치 않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희망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유약함에 빠져 스스로를 비관하지 않고,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진정 자신의 영혼을 슬퍼할 줄 알고, 무엇보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느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그 영혼에 남을 때, 비로소 우리는 돌아온 탕자로서 다시 하느님을 뵈옵는 기쁨에,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고,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리고 매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은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과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바라보게 하고, 깨닫게 하며, 그렇게 살게 합니다. 이제 우리도 서로에게 그 몸이 되고, 그 피가 되어 함께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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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늘날, ‘무엇과의 전쟁’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빈곤과의 전쟁…. 그런데 이렇게 선포하기는 하지만,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이긴 적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졌음’을 통계에서 파악됩니다. 미국에서는 수시로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처음 선포했을 1980년대는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이 30만 명 정도였지만, 2004년에는 210만 명으로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질병과의 전쟁으로 항생제를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고, 모든 전염병에서 인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많은 전문가가 입을 모아 항생제의 남용과 무분별한 사용으로 슈퍼 박테리아(항생제 내성균)가 생겨 전염병이 폭발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분쟁과 전쟁에서, 당사자들은 늘 이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긴 것 같지만 이 역시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로 평화를 가져온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이 또 자기 생활 터전을 잃은 상처가 과연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줄까요? 이기든 지든 상관 없이, 전쟁하는 순간에 진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이 항상 어리석은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만함을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이기는 길이고, 진짜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만 홀로 남는 것을 과연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우리를 위해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되며,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우리는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사랑의 반대편만을 바라보면서 가짜 사랑을 가짜 평화를 그리고 가짜 희망을 좇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그 순간에 커다란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가 아닌 신기루와 같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진짜가 바로 우리의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체성사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 진짜가 무엇인지, 진짜 우리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와 성혈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좇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진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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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계약의 피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보증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적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성체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성체로 그분께서 오시는 이유는 또 하나의 천국,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한 사랑의 양식인 성체로 몸과 마음이 풍요로워지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사랑 자체이며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성 베드로 알칸다라)

따라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리고 “성체는 우리의 보약입니다”(성필립보 네리). “영성체는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우리의 나약함을 치료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매일의 빵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가롤로 보르메오)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성 안토니오 클라라렛) 오늘 복음에서 “받아라”는 말씀에 주목한다면, 받았으면 그에 걸맞은 삶이 이어져야 합니다. 또한 “계약의 피”는 당신께서 어린양처럼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몽땅 내어주시는 성체를 모심으로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지만, 미사는 하느님의 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은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으시길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영성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혹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체송가’를 보면 “선인 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 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라고 했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모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사랑에로 이끄는 구체적 성체의 기적은 이탈리아 란치아노에서 일어난 기적을 많이 얘기합니다. 8세기 중엽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한 수사신부가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성사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가? 의심하였는데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 변화를 위한 축성을 마친 순간 빵이 살아있는 살로, 포도주가 살아있는 피로 변하게 된 사건입니다. 너무도 귀한 성체를 조심하여 깊숙이 보관한 것이 아마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12세기가 지난 지금도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성혈은 다섯 개의 핏덩이로 되어 있습니다. 1970년과 71년에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였는데 그 결론은 이 기적의 피는 ‘진짜 피와 진짜 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은 심장 근육이며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처리를 한 흔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부패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1973년에 세계 보건 기구에 검사 결과를 제출하여 다시금 핵 의학 등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어 연구했지만 결국은 성체의 기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성체성사 안에서 만나는 예수님 사랑.참조)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이 기적의 성체와 대면할 때 믿는 이뿐 아니라 깊은 편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경외심과 존경을 품게 되는 것은 그분이 살아계심을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성체 기적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보이는 표징입니다. 우리 믿음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모두 성체께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란치아노 성지 방명록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추기경 시절에 기록한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욱 더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서 희망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그 기도를 함께 올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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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마르코 14,12-16.22-26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성찬례를 제정하시다)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십자가의 길 바로 앞에서
최후의 만찬이 조촐하게 거행됩니다.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 이전에
주님은 지극히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심으로써
기꺼이 기꺼이 죽으십시다.

당신의 살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에
살점 후벼 파는 쇠갈고리 달린 채찍도
사랑이신 주님의 처참한 길을
멈출 수 없습니다.

당신의 피를 남김없이 뿌리시기에
손과 발 꿰뚫는 대못도
옆구리 깊게 찌른 창도
생명이신 주님의 영원한 삶을
앗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빵이 살아 계신 주님의 몸이 됩니다.
포두주가 살아 계신 주님의 피가 됩니다.

빵이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주님의 피로
왜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릅니다.

믿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아멘!
다만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살과 피로 먹힘으로써 살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삽니다.

주님은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살아계시고
우리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제 살기 위한 게걸스러운 먹어치움이 아니라
벗을 살리기 위한 고결한 먹힘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가난한 벗들 배불리는 아름다운 나눔으로
억눌린 벗들 일으키는 정의로운 희생으로
버림받은 벗들 품에 안는 따뜻한 함께 함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받아먹고 마시어
또 하나의 성체와 성혈이 되어
미련 없이 아낌없이 먹힐 때
오직 그렇게 먹힐 때에만
아멘은 진정 아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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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은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특별히 박사 과정 동안 제가 받았던 느낌은 지식이 쌓여간다기보다 하루하루 저 자신이 소진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온종일 쓴 논문의 양이 성에 차지 않거나 어떻게 논리를 전개해야 할지 막혀버리면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막혔답니다. 무엇보다 저를 힘들게 한 것은 이 과정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다는 막막함이었어요. 한 마디로 그 시기의 저는 하루하루 불행하고 불안했지요.

그 과정을 거쳐 공부를 마치게 됐을 때 저는 알 수 있었어요.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저 자신이 보잘것없어 보일 때, 주저앉고 싶을 때 저를 지탱해 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어머니의 기도와 신자분들의 응원, 함께 공부한 동료들의 마음까지 수많은 도움이 있었답니다. 만약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저는 결코 공부를 마칠 수 없었을 거예요.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어요.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살까요? 당연히 우리는 밥을 먹고 살죠. 하지만 그 밥은 단순히 쌀로 지은 음식물이 아니에요. 거기에는 농부들의 땀과 정성이 깃들어 있고, 벼가 자라도록 햇빛을 비추시고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어 있답니다. 더구나 그 쌀을 매만지며 깨끗이 씻고 불에 앉힌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스며들어 있지요. 우리는 한 그릇의 밥으로 나날이 생명을 이어 가고 있지만그것은 한 그릇의 밥이 아니라, 한 그릇의 사랑과 정성이예요.

결정적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특별히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랍니다. 하느님은 죄로 죽어 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어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의 밥이 되고자 하셨어요. 그래서 미사 안에서 주님의 몸을 모시는 사람은 다시 살게 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세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살릴 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바로 이것이랍니다. 한 조각의 밀떡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 한 잔의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되는지 우리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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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사의 은총과 축복>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을 맞이하여, 17년 전 2005년 10월 어느날, 불암산 가슴을 활짝 열고 주님께서도 미사를 드리신다는 황홀한 느낌에 영감받아 쓴 “온 세상 제대로 삼아”란 시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도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불암산 가슴 활짝 열고
온 세상 제대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으시고
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 들어 올리신
주님의 찬란한 태양 성체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 주님의 태양 성체 모시고
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복된 우리들이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태양 성체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사랑의 성월같은 6월 예수성심성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에서 나와 사랑안에 살다가 사랑에로 돌아가는 우리 인생입니다.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오늘 6월 첫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이듯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체성사의 은총과 축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이런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하는 가난한 영혼들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 괴로움으로 사경을 헤맬 때 생각나는 신부님!”
“내일 비어있는 날, 신부님 생각만 났습니다. 내일 꼭 뵙겠습니다.”
“다정하신 신부님처럼 아버지도 잠깐 제가 잠들었을 때, ‘우리 따알’하고 미소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서서히 숨이 떠났어요.”

지난밤 받은 가톡 메시지들 역시 하느님 사랑을 목말라하는 참 가난하고 사랑스런 영혼들의 고백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치유의 사랑을 찾는 영혼들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사랑의 성체성사를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가난한 영혼들입니다.

“높이 오르고 싶다면 일상의 바닥부터 한 걸음씩 쌓아나가라.”<다산>

높이 오르는데 매일미사 은총보다 더 좋은 사랑의 수행은 없습니다. 신앙의 평생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에 매일미사는 못하더라도 매일미사 전례문은 꼭 렉시오디비나하기를 권합니다.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어 지식을 밝힘에서 앎이 지극한 단계로 나아가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에서 세상을 평안케 하는 단계로 나아간다”<다산>

역시 매일 정성스럽게 거행하는 미사를 통해 깨닫고 실현되는 진리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 그리스도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이 초대송으로 시작된 오늘 하루입니다. 이어지는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이어지는 시편도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이어 무려 24절까지 계속되는 성체송가가 성체성사의 무한한 은총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성체성사적 삶’ 하나만 있을뿐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은 하나하나 거룩한 ‘주님의 감실’이 됩니다. 그러니 이런 형제자매들을 함부로 대함은 성체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좌우간 성체성사의 신비안에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교회의 신비, 생명의 신비, 인간의 신비등 모든 신비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신비에 대한 답이 성체성사안에 다 있습니다. 평생을 공부해도 초보자 신분을 벗어날 수 뿐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사제서품후 35년 동안 매일미사에 강론을 해왔지만 여전히 힘들어 초보자의 마음으로 겸손히 하루하루 삽니다. 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안에 계신다.”(가톨릭교리서;1324항)

“한마디로,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성체성사와 일치하며, 성체성사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확인해 준다.”

성체성사없이 살수도 없거니와 참사람이 되는 길도 없다고 감히 고백합니다.

바로 이 지극히 거룩한 미사인 새계약의 제사를 실제 집전하는 분은 제2독서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새계약의 중개자이자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탈출기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을 완전히 능가하고 완벽히 보완하는 교회의 새계약의 성체성사가 오늘 복음에서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말그대로 찬미와 감사의 희생제사요, 화해의 제사인 성체성사임을 깨닫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한몸의 일치를 확인하는 성체성사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사랑의 선물인 성체성사 은총이 부단히 공동체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또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삶 모두의 뿌리에 성체성사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저절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찬미와 감사의 은총에 감격하여 드리는 다음 고백기도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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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개인가? 자녀인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은 요한의 서간에 나오는 말씀인데 저는 이 말씀으로 모든 신비와 의문을 해결했습니다. 이 말씀이 말하자면 모든 존재와 활동의 원리입니다.

모든 존재는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고, 모든 존재는 이 사랑의 원리에 따라 창조되었고, 모든 활동도 이 사랑의 원리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옳고 그래야지만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실 뿐 아니라 그 사랑을 우리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보여주십니다.

첫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육화이고 성탄입니다.
두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주님의 공생활입니다.
세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네 번째로 보여주신 것이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시지 않고,
특히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는다고 불만입니다.

안 보여주시는 겁니까? 우리가 못 보는 것입니까?

사랑은 사랑할 때 보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그 사랑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보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 사랑을 싫어하고 미워하거나  다른 사랑을 사랑할 때는 그 사랑이 보이지 않겠지요?

다른 하나는 믿을 때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을 때 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것임을 믿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되듯 주님의 성체와 성혈도 우리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것임을 믿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여기 선교 협동조합 월례회 미사를 봉헌했고, 성체와 성혈 대축일 특전 미사로 봉헌했는데 참석자가 많지 않아 부속가 중에서 마음에 와닿은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천사의 빵 길손 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 마라.”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고 이것을 가지고 나눔을 더 했는데, 성체를 개에게 주면 그것이 개에게 성체일지 밀가루 덩어리일지 물었습니다.

모두 성체가 개에게는 성체가 아닐 것이라고 답했고 맞는 대답이지요. 이때 저는 덧붙였습니다. 우리도 성체를 성체로 믿지 않고 영한다면 우리도 개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성체와 성혈은 한 번의 육화로 하느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고, 한 번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끝나지 않고, 매일 반복되고 계속되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인데 관건은 그것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영하고 그 사랑을 받겠지만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은 영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랑도 받지 않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지, 성체와 성혈은 개의 양식이 아닌 천사의 양식이고 자녀인 우리의 길손 음식인지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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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14,22.23)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오늘 복음(마르14,12-16.22-26)은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이요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요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열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미사)를 제정하셨습니다.

“받아 먹어라.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렇게 제정된 성체성사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직자들의 손을 통해서’ 계속 거행되고 있고, 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모두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믿겠다고 약속한 사람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고, 나도 너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약속의 실현’이 바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복음화 사명의 본질’입니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입니다.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예수 성심과 하나가 되기 위한 달’입니다.
‘예수 성심’은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성체와 성혈’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많이 받기 위해서 미사에 자주 참석합시다! 미사를 잘 준비하고, 미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합시다!

‘이것이 바로 오늘 강론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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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QoUBrdZRT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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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 22)

오늘도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빵이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삶을 반성합니다.

마음을 옮기면
우리에게는
살이 되고
피가 되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성체 성혈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나눔이 되고
신비로운
만남이 됩니다.

사랑을 찾지
못한 우리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성체 성혈로
보여주십니다.

성체 성혈은
우리의
사랑을 다시
살립니다.

사랑은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의 방식은
언제나
모든 생명을
건네시는
성체 성혈의
방식입니다.

자꾸만 자꾸만
밥이 되고
빵이 되고
음료가 되고
생수가 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성체 성혈의
지향은 사랑의
일치입니다.

우리가 좋으면
하느님께서도
좋으십니다.

사랑하는 일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밥상을
차리십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성체 성혈이라
부릅니다.

성체 성혈을
통하여
우리 또한
어느 누군가에게
빵이 되고
식수가 되어야 할
사랑의 나눔입니다.

사랑은
어느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나눔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은
성체 성혈의
아낌없는
사랑입니다.

아낌없는
이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아낌없이 주시는
성체 성혈을
받아 먹으며
사랑을
닮아갑니다.

사랑을 받아
먹은 사람은
그 사랑을
실천합니다.

성체 성혈은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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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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