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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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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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저자의 말씀은 참된 신앙인이 향해야 할 중요한 영의 감각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내가 가진 감각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는지에 따라 우리 인생의 가치와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당에 모인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것은, 그들이 듣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란, 사람들이 혐오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소외된 이를 뜻합니다.
영이 더러운 사람은 영이 맑은 사람을 보면 시기와 질투가 납니다. 비교되는 자신을 보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이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분이 나타나셨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영이 달아났고,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하고 칭송하면서도 자신들의 더러운 면도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도 맑은 영을 가진 사람을 보면 왠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고, 서로의 영을 맑게 해 주는 사람들이 만나면 빛이 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더러운 영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성령께 의탁하면 우리는 맑은 영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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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복음/묵상/동영상 강의에서) 이야기 해봅시다.
예)
저는 “XXX”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XXX”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상입니다” 조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우리가 느끼고 있는 우리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는 무엇이 있는지 묵상해 보고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권위 있는 말씀은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시기, 질투, 미움같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지냈던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보고 어떤 계기로 해쳐나올 수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마진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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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신학자 발터 카스퍼 추기경이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에서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가 성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시다.’라는 초세기 신자들의 오래된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성경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대답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하여 전해졌고, 박해 때 많은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안다고 말합니다. 이 더러운 영의 소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더러운 영은 주님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세례성사 때 ‘마귀를 끊어 버리는 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예식에서 우리의 고백은 앞으로 악의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신앙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시고 병자를 낫게 하시는 이적들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압니다. 더 이상 세속의 많은 것에 의지하여 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 그 사랑을 실천하여 참된 신앙인, 자유인이 됩시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49
1월28일[연중 제4주일(해외원조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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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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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AS9ilWC0Rg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 집전(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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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에 베이스캠프로 유명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자주 들르셨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카파르나움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카파르나움 회당은 이미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회당 안에는 예수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더러운 영이 들렸으니, 일단 외양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시달리다 보니 얼굴도 초췌했을 것입이다. 눈동자도 충혈되고 행동거지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다들 그를 슬슬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 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윽고 능력과 권위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말씀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심연 깊숙한 곳에 꽂힙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더러운 영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지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단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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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W9__wTfY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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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말: 고마운 사람의 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말의 권위는 말에 ‘사람을 바꿀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피 흘림 없이 말만 했기 때문입니다.
왜 피 흘림과 함께하지 않는 말에는 권위가 없을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이 성령이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4 참조)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의 권위를 말하다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이 생기게 만드는 감정이 ‘감사’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는 항상 덜 고통스럽고 더 기쁘고 행복한 방향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행동은 ‘옳고 그름’이 아닌 ‘기분’이 좋을지, 나쁠지에 대한 자기 판단으로 이뤄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공부하려다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하셨을 때 안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하게 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저는 저를 기쁘게 하고 싶었습니다. 왜 어머니가 아닌 나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까요?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니 부모가 얼마나 어렵게 자녀를 키우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 이상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우선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감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어떨까요? 사실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에게는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불안’입니다.
불안을 없애주는 대상에게 감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내 안의 자아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아를 기쁘게 하려고 삽니다. 문제는 자아의 정체가 뱀이란 데 있습니다. 뱀의 소굴에 갇혀 지옥을 살게 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 ‘아른힐 레우뱅’의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자아에 봉사하며 살게 되었는지 잘 적었습니다. 레우뱅은 점점 부모와 친구와의 사이가 단절되자 자기 생존이 최우선이 됩니다. 이때 혼자라는 불안함을 해결해 준 유일한 존재가 있는데 자기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선장’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 때 선장은 유일한 구세주가 됩니다. 처음엔 선장에게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문제는 선장은 워낙 잔혹한 존재라 결국 레우뱅은 조현병에 걸려 벽지까지 뜯어먹는 상황에 이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미쳐가는 것도 결국엔 자아에 감사하면서부터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하면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러면 보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문제는 자아는 잔혹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아에게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감사한 존재를 외부에서 찾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아의 말보다 그 사람의 말을 더 따라주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에게서 해방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충고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한상은 자기를 나무란다고 부모를 살해하였습니다. 부모의 말은 옳았습니다. 그런데 박한상은 너무 부자였던 부모가 자기를 키워준 것에 대해 어떤 감사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닌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기만을 기쁘게 해주는 일에서 해방되려면 무조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서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지 않은 사람에겐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불안은 피 흘림으로만 안정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이 희생하였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값지게 살아. 값지게…. ”라고 속삭입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라고 묻습니다.
값지게 살라는 밀러 대위의 말엔 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 피에 감사했기에 그 한마디가 평생 라이언을 변화시켰습니다. 모든 변화는 내가 감사하는 이가 해준 한마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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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다니기 위해서 물속에 있는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은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뒤에서 수고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도록 수고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1년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서울을 신청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쟁 국가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개최 도시는 나고야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1964년에 동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미 개최하기로 했던 아시안 게임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면에서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이 강했고, 우리의 힘은 약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올림픽 유치 위원회의 위원장인 고 정주영 회장은 유치단을 이끌고 독일 바덴바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88 올림픽 개최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던 손기정 선생님도, 당시 독일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차범근 선수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함께 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 유치단은 올림픽 위원들을 만났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선진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지금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곧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의 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을 도와주십시오.” 선진국의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이 개발도상국입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 유치를 하면 이제 곧 여러분의 나라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발도상국이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올림픽 위원들에게 일본의 기술의 상징이었던 ‘소니’ 시계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올림픽 위원들의 방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당시 바덴바덴에 있는 꽃집의 꽃들을 대부분 사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은 ‘시계’로 대한민국은 ‘꽃’으로 올림픽 위원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1981년 올림픽 위원회 사마린치 위원장은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88 서울 올림픽’은 이렇게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 위에서 개최될 수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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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28: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담긴 새로움과 권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권위 있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신명기에서 약속된 모세의 뒤를 이어 봉사할 예언자(신명 18,18)와 연결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빵의 기적 후에 군중들이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라고 하고 있다.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동을 통해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동과 말씀이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르치고 계신다는 사실과 가르치시는 방법에서 시작된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2절) 예수님은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권위 있게 말한다는 사실 때문이다.(참조: 요한 7,15) 예수님께 느끼는 권위는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처럼 타올라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새로운 요구에 근거한다. 새로운 것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이 일치되어 있으며, 우리 신앙인들에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다는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의 말이 즉시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며, 또한 사탄의 세력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회당에서 악령 들린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4-26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사탄의 세력과 격렬하게 맞서신 사건이다. 사탄은 예수님의 말씀 위력에 눌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사탄은 즉시 예수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소리친다. 이 칭호는 후에 베드로 사도에 의해 고백 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9)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인간 생활에 들어오심은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죄스러움을 알게 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케 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탄의 고백을 허락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장벽을 쌓기 때문이다. 사탄은 예수님을 자신의 왕국을 파괴하러 오는 원수로만 느낄 뿐이지, 사랑으로 자신을 기쁘게 복종시켜야 할 주님으로는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신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5절)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악령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 그 사람은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사탄이 그 사람의 인격을 분열시켰다. 사탄에게 매여 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그 사람과 같이 인격이 분열된 것과 같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실천을 통해 치유되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군중들은 깜짝 놀란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27절). 이는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데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사건으로 예수께 대한 관심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나갔다.”(28절)
사도 바오로는 새 교훈으로 동정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영성적이다. 결혼한다면 마음이 갈라질 수 있지만, 동정을 지키면 마음이 갈라지거나 정신이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모든 것과 전 존재를, 사랑을 온전히 주님께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정을 지키는 것은 아내나 남편이나 자기 형제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에게 베풀어야 할 더 큰 사랑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때문에 동정성은 마음을 더 넓게 해 주는 것이지 결코 더 좁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하셨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그분의 권위 앞에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이며 선포자의 역할을 지상과제로 삼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권위가 있게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 그 권위는 다양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가운데 참된 봉사를 통하여 나오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말씀과 업적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따라 권위 있게 복음을 전할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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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율법 학자들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율법 조항에 근거하여, “악령에 들렸으니 저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고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분 짓고,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구분 짓는 것, 이것이 율법 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 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율법 학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위는, 당신 말씀이 악의 지배를 받는 자들까지도 구원으로 이끄는 힘을 가졌다는 데 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말씀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지배하던 악을 떠나가게 만든 것처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악의 지배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다시 생명의 빛을 바라보고, 이렇게 살아온 나 또한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듣게 되는 복음 말씀 안에는 악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여 줄 수 있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여러분을 악에서 구원하여 줄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면서도 구원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엄청난 권위가 담겨 있는 복음 말씀이 나에게도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미사 때마다 듣게 되는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무관심으로 외면하고 있는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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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힘>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여기서 ‘권위’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자신들이 왜 그 힘에 압도당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놀랐다는 뜻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고, 예수님의 ‘신성’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몹시 놀랐지만,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은 예수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시니,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라는 말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는 권위가(힘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읽은 책이 많아서 지식이 많다고 해도, 그 지식을 자랑하기만 하는 것은 잘난 척 하는 ‘교만’입니다. 성경 말씀을 해설할 때에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 해석과 해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 3,15-16) 이 말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경고입니다. 어떻든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정말로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지식 자랑이 아니라 믿음을 증언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힘’이라는 말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가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19.21ㄱ)
그 두 제자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신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로, 즉 ‘메시아’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사형 당해야 했는지,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돌아간 것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힘을) 인간들을 구원하고 인간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때에만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을 상대로 당신의 힘을 과시하신 적이 없고, 또 당신의 힘으로 인간들을 억압하신 적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힘과 권위를 모두 내려놓고,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힘은 ‘구원의 힘’, ‘사랑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는 굉장히 단호하고 엄하게 당신의 힘을 사용하셨는데, 그것들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마귀들과 악의 세력에게는 대단히 무섭고 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3-26)
여기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실제로는 마귀가 하는 말인데, 그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공포심, 적대감, 반항심이 들어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원래 지옥은 마귀들이 형벌을 받는 장소이고, 그것들이 몹시 무서워하는 곳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표현만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모독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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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김태정 베드로 신부님]
<“우리 모두는 한 형제입니다.”>
최근 전 세계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을 겪으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마주하게 되었고, 특히, 지난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의 영향 등으로 가난한 나라들은 더욱더 극심한 식량 위기와 에너지 부족 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토, 12, 26)라는 성경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이 직면한 심각한 도전들을 함께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전쟁으로 인해 500만 명의 인명손실, 학교나 병원, 공장과 도로 등 거의 모든 사회 기반 시설들이 파괴되어버렸습니다. 전쟁으로 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전재 민의 수가 200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굶주림에 직면한 인구가 전체인구의 20~25%나 된다고 하니, 얼마나 피해가 크겠습니까?
물적 손해도 손해려니와, 이에 못지않게 서 로 상대방을 증오하고 복수심을 갖게 되는 분위기가 더 문제입니다.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서로를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 니다.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인류는 한 가족이요, 우리 모두는 한 형제임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서로가 나누면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 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실천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도와준다고 해서 그들이 평화를 찾을 것인지 의문이 드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 나눔이 진정 그들에게 긴급식량, 안정화 사업, 주거, 의료, 교육 등에 지원될 것인지 궁금하신 분들도 계 실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이렇게 지원해주면 그들은 다시금 전쟁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고, 내가 도와준 것이 나에게 공격으로 돌아오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뭐하러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해외에 있는 사람들까지 도와야 하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함께 힘을 모아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실천함으로써 가난하고 취약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더 나은 내일을 선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위에서 설명한 전쟁,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이 번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나온 피해액이 아닙니다. 바로 1950년에 있었던 한국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입은 피해액입니다.
당시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했다면, 과연 지금의 한국이 존재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최빈국에서 경제선진국으로 발전하였고, 세계 GDP 10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나라로부터 받았던 도움입니다. 한국이라는 곳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보내주고, 식량이며 여러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해외 교회의 도움을 받는 교회에서 이제는 나누는 교회로 성장한 우리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은 전 세계 곳곳에 전달되면서 세상의 온도를 조금씩 올려서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나라와 지역에 우선적인 식량지원도 하지만, 미래를 보 청소년들에게 교육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19와 환경문제로 인해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하셨듯이, 손을 내밀고 그들을 어루만지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위로를 받은 그들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도구로 세상을 더욱 밝게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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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승제 판크라시오 신부님]
<내가 만들어 가는 권위>
나의 노력과 수고가 이뤄낸 결실을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나도 수긍하지 못할 일들을 다른 이가 너무 쉽게 인정한다면, 그것은 조금 다르다. 왠지 모르게 조롱당하는 느낌이랄까? 아님, 모욕감이라고 할까?
안식일에 회당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외치는 말은 우리의 신앙고백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바른 신앙으로 무장한 사람이 주눅들 정도이다.
그러나 속지 말자! 극도로 공포에 가득 찬 마귀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발악일 뿐이다. 이렇게 발악하며, ‘나도 당신을 인정할 테니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둬’라는 말이 숨어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허울 좋은 껍데기로 내세우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할지 예수님은 더러운 영이 우리에게 하는 짓거리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마귀의 조롱과 모욕을 모를 분도 아니고 당하고 있을 분도 아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눈이 바로 권위다. 그 눈으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배우고 따르고 내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누가 나를 쉽게 인정해 줄 때 지금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그것이 조롱과 모욕인지도 모른 채 만족하며 취해 있을 때가 더러 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이런 모습을 더 좋은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해야겠다.
깜빡 속을 뻔한 일들이 많은 세상에서 살아간다. 사실 속아 넘어갈 때도 있다. 늘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 약자들 편에서 일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시작했다는 사람들이 참 많다.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그들이 이룬 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똑바로 바라봅시다.
이처럼 내가 만들어 가는 권위는 예수님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이것을 하느님께서 선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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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권지훈 베드로 신부님]
<희망의 씨앗을 나누자!>
2024년 해외 원조주일을 맞아 바치는 매일미사 보편지향기도입니다.
“온유하신 주님,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보호하시어, 생명을 지켜 주시고, 저희는 가진 것을 나누며 인류애를 실천하고 공동선 실현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매년 찾아오는 해외 원조 주일에 바치는 보편지향 기도를 보면 항상 비슷한 내용의 기도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주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도움의 손길을 주시고, 더불어 우리 역시 그 손길에 함께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의 1항을 생각해 봅니다. “열린 형제애는 물리적 근접성을 뛰어넘어 출생지나 거주지의 구애 없이 모든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들은 평온하게 살아가는 듯하지만, 우리 주변과 세상 다른 곳에서는 천재지변, 질병, 가난, 전쟁과 같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굳이 그들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인터넷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당장 하루를 살아가기도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을 어떠한 모습으로 할 수 있을까? 내 도움이 그들에게 약소하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은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관심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성 있는 나눔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나눔의 도움은 일회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모습이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의 축복을 항상 청하고 받듯이 그들도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작은 정성이라도 아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믿음의 씨앗을 가지고 나누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는 작은 겨자 씨앗을 주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표현대로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삶이 바로 이러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의 일도 많이 걱정되지만, 그런 와중에라도 주님의 일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믿음의 삶입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믿음의 씨앗으로 해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 주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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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 것 같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누구는 너무나 먹음직스럽다고 말하지만, 달다고 생각되면 머리부터 아파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께서 너무 맛있다면서 한 입만 먹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것을 싫어하는 제게는 한 입 먹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맛있는 것에 어떻게 손도 대지 않는다면서, 혹시 자기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음식에 대한 선호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보니, 초콜릿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고, 계란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커피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이 커피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 선호도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지금 아파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이 써서 싫다는 아이를 존중해서 약을 주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음식의 선호도가 다른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필요하다면 선호도의 차이가 있어도 억지로 먹게 합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사랑의 선호도도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맛없어 보이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더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랑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것처럼,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최고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악을 없애고,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기 힘들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마귀와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은 항상 그럴싸합니다.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런 사랑의 선호도를 갖춰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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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코 1,21ㄴ-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더러운 영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을
교묘하게 유혹했답니다
당신은 거룩하시니
더러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거룩하신 당신께서
더러운 우리와 상관하시면
당신도 더러워지는 거잖아요
당신은 거룩한 길을 가시고
우리는 더러운 길을 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