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6장,1-15절;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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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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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빵의 기적 이야기에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담겨 있습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굶주린 군중에게 나누어 줄 빵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셈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세상의 논리를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임을 표징을 통해 일깨워 주십니다. 수많은 군중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인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먹고 남긴 조각을 모았을 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는 성경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었는지, 우리가 흔히 알 듯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의 기적의 결과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빵의 기적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빵으로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라, 군중이 빵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충만함으로 가득 찼고 함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충만한 영광을 맛본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몸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겸손과 온유, 인내심과 사랑, 평화와 일치를 말하며 깊은 영적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행복은 내 배를 불리고 내 행복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례와 믿음으로 묶여 한 분이신 주님과 성령을 섬기는 교회 안에서 저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 일치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일치는 신앙인이 성령께 받은 가장 큰 선물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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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앞에 놓여진 문제를 인간적으로 물질적으로 풀려고 하지는 않는지 묵상해 보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세속/신앙/인간/물질)를 어떻게 풀려고 노력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행복으로 인해 배고픔을 잊은적이 있었는지 이야기 묵상해보고 만약 이 행복을 주는 것이 신앙생활과 상충된다면 어떻게 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신앙과 상충되는 이 모든것을 조금 포기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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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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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살기 위해서 먹는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음식을 두고 이런 장난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이 실례같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이른바 ‘맛집 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저마다 성향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아니면 죽기 위해서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먹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 가지 모습의 빵을 떠올려 봅니다. 한 가지는,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저 혼자 숨기고 먹는 빵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족하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 내어놓은 아이의 빵입니다. 빵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빵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초라한 빵이 아무 소용없다는 포기와 절망은, 다만 살기 위해서 먹는 빵일 뿐입니다. 반면에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내어놓은 아이의 빵은 작은 봉헌임에도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깃든 빵입니다. 그 빵을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빵을 먹고 있습니까?
우리는 또 다른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기 위하여 먹는 빵이 아니고, 그것만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빵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죽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내어놓고 봉헌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그 빵은 인간의 생명을 버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택하게 이끌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 성체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하였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하여 먹는 것조차도 또한 누군가를 살리고자 먹는 것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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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일반적으로 음식을 준비할 때 대부분의 주부들은 양을 조절하여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로 음식의 양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확히 계산하여 준비하는 것이 주부의 마음일 것입니다. 혹시라도 음식이 모자라면 덜 먹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주부는 이와는 달리 생각합니다. 음식은 남아야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명절이나 잔치 음식은 많이 장만하여, 찾아오는 이들에게 싸 주기까지 하는 것이 넉넉한 인심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지지하시는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도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과연 빵은 남았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전하는데, 먹고 남은 조각만 해도 열두 광주리입니다. 열두 광주리, 충만한 양을 뜻합니다. 남은 것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 빵을 먹은 이들이 배고픔만 간신히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가득 채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징을 본 이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인간의 기다림이 남김없이 충족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먹는 이들에게, 당신께서는 배를 채울 빵만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분명 빵의 기적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기적은 더 위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육 생명의 근원이시고, 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그분께서는 우리를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시나이다”(화답송 참조). (출저: 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