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살기 위해서 먹는가? 먹기 위해서 사는가?” 음식을 두고 이런 장난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이 실례같지만, 굳이 답을 해야 한다면 이른바 ‘맛집 투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저마다 성향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가톨릭 신자라면 적어도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아니면 죽기 위해서 먹습니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어떻게 먹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먹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하여 두 가지 모습의 빵을 떠올려 봅니다. 한 가지는,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우고자 저 혼자 숨기고 먹는 빵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족하고 초라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 내어놓은 아이의 빵입니다. 빵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빵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초라한 빵이 아무 소용없다는 포기와 절망은, 다만 살기 위해서 먹는 빵일 뿐입니다. 반면에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내어놓은 아이의 빵은 작은 봉헌임에도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이 깃든 빵입니다. 그 빵을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살리는 빵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빵을 먹고 있습니까?
우리는 또 다른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살기 위하여 먹는 빵이 아니고, 그것만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빵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죽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내어놓고 봉헌하고 희생하기 위해서 먹는 빵입니다. 그 빵은 인간의 생명을 버리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택하게 이끌어 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몸, 성체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자신을 죽이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택하였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하여 먹는 것조차도 또한 누군가를 살리고자 먹는 것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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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일반적으로 음식을 준비할 때 대부분의 주부들은 양을 조절하여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로 음식의 양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확히 계산하여 준비하는 것이 주부의 마음일 것입니다. 혹시라도 음식이 모자라면 덜 먹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주부는 이와는 달리 생각합니다. 음식은 남아야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명절이나 잔치 음식은 많이 장만하여, 찾아오는 이들에게 싸 주기까지 하는 것이 넉넉한 인심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지지하시는 듯합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도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과연 빵은 남았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전하는데, 먹고 남은 조각만 해도 열두 광주리입니다. 열두 광주리, 충만한 양을 뜻합니다. 남은 것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 빵을 먹은 이들이 배고픔만 간신히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가득 채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징을 본 이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인간의 기다림이 남김없이 충족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요한 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빵을 먹는 이들에게, 당신께서는 배를 채울 빵만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분명 빵의 기적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성체성사의 기적은 더 위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육 생명의 근원이시고, 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그분께서는 우리를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시나이다”(화답송 참조). (출저: 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