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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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5-15.19ㄴ-26.39ㄱ.40-42
그때에 5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9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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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여인의 반응은 차가웠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영적인 물에 대해 차근차근 말씀하시자 여인은 마음을 조금 엽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대화가 조금 진전되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전환을 모색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이 말씀에 여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조금 뜨게 된 여인은 자신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벽에 부딪히고는 자신들은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장소보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깨달은 여인은 물동이마저 버립니다. 자신 안에 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여인은 자기의 내면으로부터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는 그 안에서 자신의 부족함, 죄악마저 스스로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평소에는 다른 이들의 결점, 조그만 티끌만을 보다가 마지막에야 자신의 커다란 들보를 발견하지요. 처음부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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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나누기
1.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과 마을 사람들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무엇인가? 그 ‘샘물’을 찾기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3. 예수님은 왜 남에게는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퍼주며 정작 자신은 ‘목말라’하며 돌아가실 수 밖에 없었을까?
4. 예수님 시대의 유다 사람들 처럼 2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성, 인종, 민족, 피부색, 출신지를 가지고 차별과 편가르기를 하는 오늘날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5. ‘사마리아 우물가’로 오셨던 예수님이 만약 오늘날 ‘세상의 우물가’로 오신다면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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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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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믿음의 점진적인 발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아 갑니다. 생명수와 진실한 예배에 관한 대화는 여인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합니다.
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여인을 통하여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알고 고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믿음의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죄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믿음은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확고한 믿음에 다다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해해 갑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또 믿음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들이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이에게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522
3월8일 [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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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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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FCR242Yzi8?si=CR-P4if-Woj06esS
[수원교구 최황진 라파엘(마도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사순특강●
행복의 울타리 I 상처와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 진짜 행복해지는 법 (서울 암사동성당)
https://youtu.be/tdZqp_QZOws
[청주교구 김웅렬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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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끝도 없는 갈망을 영원히 채워주실 분, 주님!>
꿈많던 어린 시절, 꽃 같던 청춘 시절, 우리 모두 잔뜩 기대했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이 마치 멋진 드라마에 등장하는 특급 주연배우의 인생처럼 탄탄대로가 펼쳐지길…내 삶이 고급진 인테리어 잡지 화보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 전개되길….
그러나 막상 다가온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대와는 너무나 상반된 경우가 많습니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은 결코 내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 절대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배워갑니다. 희망 사항과는 달리 우리네 인생은 마치 퀴퀴하고 후질구레하며 어두컴컴한 뒷골목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 결코 호화롭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따스하고 환한 햇볕이 드리운다거나 멋진 무지개가 뜨는 순간은 한순간입니다. 대부분의 순간은 비참과 슬픔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야만 합니다. 얼마나 더 굴욕을 견뎌내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는 참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잔뜩 기대했던 결혼생활에서의 기대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대낮에 물을 길으러 몰래 공동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때는 햇빛이 가장 강렬한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대체로 근동 지방에서는 정오 무렵, 너무나 뜨겁고 건조하기에 가급적 외출을 삼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필 정오 무렵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정오 무렵 우물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아낙네들은 한풀 더위가 꺾인 저녁 무렵 우물가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시간 거기서 여성 특유의 잡담과 뒷담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그들의 시선, 그들의 입방아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다섯 번이나 남편을 교체했던 사연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내면의 상처가 깊었던 것입니다. 남자로부터 받은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컸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여인은 혹시나 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사마리아 여인은 기적처럼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의 채워지지 않는 죽음과도 같은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여인은 서서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끝도 없는 갈망을 영원히 채워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야말로 제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동반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릇되게 살아온 삶에 대해 질책하지도 않습니다.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놔주십니다.
그렇다고 그냥 방임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자극도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 격려도 하십니다. 천천히 인내롭게 과정을 밟으면서 그를 영원한 구원의 샘물로 인도하십니다. 참된 동반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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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OfBcPvX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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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를 주시기 위해 물을 청하시는 이유>
교우 여러분, 사순 제3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물가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밀당’ 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한낱 피조물인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고 청하십니다. 온 우주의 물을 만드신 분이 물 한 바가지의 봉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기막힌 구원 전략이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우리에게 왜 ‘봉헌’과 ‘순종’이 축복의 필수 조건인지 일깨워주는 명백한 역사적 실험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968년부터 1982년까지 미국 정부는 뉴저지와 덴버 등지에서 ‘부의 부정 소득세 (Negative Income Tax)’라는 대규모 사회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노동의 의무(봉헌) 없이 일정 금액의 현금을 무상으로 지급한 것입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수천억 원의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수혜자들의 이혼율은 40% 이상 급증했고 노동 의욕은 감퇴했으며 공동체는 급격히 와해되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수혜자들의 심리 변화였습니다. 처음에는 “정부가 우리를 돕는다”며 감사해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지원금을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이 종료되거나 지원금이 조정될 때, 그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내 돈을 뺏느냐”며 정부를 향해 분노를 쏟아냈고 불평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갔습니다.
이와 비슷한 비극은 미국 인디언 원주민 거주구역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과거의 잘못을 보상한다는 명목으로 인디언들에게 막대한 무상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이나 봉헌 없이 주어진 이 돈은 독이 되었습니다. 자립 의지는 꺾였고, 거주구역 내 알코올 중독률과 자살률은 전국 평균의 몇 배를 상회하게 되었습니다. 무상 지원이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정체성을 앗아가는 ‘문화적 학살’이 된 셈입니다.
이것은 ‘봉헌 없는 베풂’이 인간을 축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 한 바가지, 십일조, 선악과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가 진짜 은총을 주시는 분인가’를 잊지 않게 하려는, 즉 우리가 은혜를 모르는 괴물이 되지 않고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상속자’로 남게 하려는 하느님의 지혜로운 사랑의 전략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목이 마르셨을까요? 물론 육신으로는 그러셨겠지만, 영적으로는 그 여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냥 공짜로 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공짜로 받으면 소중함을 모르고, 누가 갑인지 모르며, 순종할 줄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청하십니다’. 여인이 가진 아주 작은 ‘물 한 바가지’를 요구하심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열고 그 빈자리에 영원한 생명을 채우려 하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비극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셨지만, 딱 하나 ‘선악과’는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인 ‘순종’을 봉헌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다 생명나무를 잃었습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이 든 물동이는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욕망인 ‘선악과’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생명나무의 실과인 당신 자신(성체)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물을 좀 다오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요한 4,10) 믿음의 핵심은 ‘누가 주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은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면 봉헌은 ‘세금’이 되지만, 주인이 누구인지 알면 봉헌은 ‘사랑’이 됩니다. 이 봉헌은 사실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에게 바친 ‘십일조’로 표현됩니다. 십일조는 모든 축복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이며, 축복을 담기 위한 필수적인 그릇입니다. 과부의 헌금이 그러했듯, 그것이 나의 전부일 때 하느님 또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세계적인 비누 회사 ‘콜게이트’의 창업자 윌리엄 콜게이트(William Colgate)의 실화입니다. 그는 아주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었습니다. 16살에 고향을 떠날 때, 한 경건한 이웃이 그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윌리엄, 네가 버는 첫 1달러에서 10센트를 떼어 반드시 하느님께 바치거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네 사업의 동반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그는 뉴욕의 한 비누 공장에 취직해 첫 주급을 받자마자, 당장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소중한 돈인 10센트를 떼어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불콩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은총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기 위해 기쁘게 봉헌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순종을 보시고 엄청난 마중물로 응답하셨습니다. 사업이 번창할수록 그는 십일조를 2/10, 5/10로 늘려갔고, 말년에는 수입의 전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렸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 세상 전체를 맡겨주셨습니다.” 윌리엄 콜게이트는 마중물을 청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했고, 자신의 작은 봉헌을 통해 하느님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상속받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여러분의 ‘선악과’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이것만은 내 거야”라고 꽉 움켜쥐고 있는 그 물동이는 무엇입니까? 이번 사순 시기, 주님께 그 물 한 바가지를 기쁘게 드립시다.
내가 주님께 십일조와 순종의 물을 부어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집착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을 터뜨려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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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일곱 가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그중에 ‘목마르다’라는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목말랐을까요? 십자가를 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세 번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렸으니 물을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마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목마른 것은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르셨던 것은 ‘진리’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거짓과 위선’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과 발전’이라는 욕망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분노와 원망’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2026년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도 ‘목마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부부를 체포해서 미국의 법정에 세웠습니다. 명분은 ‘마약’의 유통이라고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매장량이 많은 베네수엘라의 ‘석유’에 대한 욕심입니다. 미국의 정유회사가 베네수엘라에 가서 석유를 미국으로 가져오게 하겠다고 합니다. 베네수엘라의 국민이 잘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이민세관국의 직원들이 불법 이민자를 조사하고, 체포하고, 감금하고, 추방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무고한 미국의 시민이 총격받아 사망했습니다. 불법 이민자를 찾아 체포하려는 ‘실적’에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그런 과정에서 불법이 자행되고, 그런 과정에서 소중한 생명이 죽었습니다. 오바마, 클린턴 전직 대통령도 이민세관국의 폭력과 불법을 비판하였습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를 갖겠다고 합니다. 명분은 ‘미국의 안보’라고 하지만 그린란드에 매장된 지하자원에 대한 욕심입니다. 미국은 강하고, 미국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고, 미국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러나 이런 욕심은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마르기 마련입니다.
2026년 사순 제3주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목마르다’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트럼프 대통령처럼 ‘재물’에 대한 목마름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을까요? 현명한 스승은 배고픈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현명한 스승은 배고픈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준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없어도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물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그물은 교회(敎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교회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알려 줍니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참된 행복의 길을 안내합니다. 참된 행복의 길은 자비를 베푸는 겁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겁니다. 옳은 일을 행하는 겁니다.
두 번째 그물은 성사(聖事)입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표징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위로받습니다. 혼인성사는 성가정의 축복이 됩니다. 견진성사는 신앙을 굳건하게 합니다.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의 봉사자가 선별됩니다. 교회의 봉사자로 선별된 사제는 독신과 순명 서약을 통해서 교회의 신앙을 선포하고, 보존할 사명을 받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성사의 표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시는 겁니다.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은 늘 감사하면서 살게 됩니다. 감사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차원의 감사를 드리면서 사는지 돌아봅니다.
첫 번째는 만약에 감사입니다. 만약에 아들이 대학교에 합격한다면, 만약에 복권이 당첨된다면 감사드리는 경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감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때문에 감사입니다. 좋은 결과가 생겼기 때문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건강검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승진했기 때문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이런 감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감사입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큰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음을 감사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 성인은 바로 이런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식들의 생사를 몰라도 감사드렸습니다. 온몸에 부스럼이 생겼어도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감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양식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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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안동교구 김재형 베드로 신부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유독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한결같은 태도를 보이고 한결같은 말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감정에 따라 말투나 행동이 쉽게 바뀌지 않고, 늘 같은 마음으로 있습니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습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만으로도 위로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는 이러한 자세가 스며 있습니다. 바로 서로를 향한 믿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물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된 대화는, 그 고을의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결실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온화한 태도와 부드러운 말투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여인의 진심 어린 경청과 영적 갈망은 예수님을 알아 뵙는 은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리하여 여인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고, 그분을 증언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가족과 이웃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요?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솔직히 드러내는 고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깊이 새기며 실천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 속에서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인 오늘, 한결같은 태도와 말투로 하느님과 가족과 이웃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면, 하느님께서 메마른 우리 영혼을 적셔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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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4,5-42: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1. 광야의 목마름과 인간의 구원 갈망
사순 시기 제3주일의 중심 주제는 “목마름과 생명”이다. 탈출기(17,3-7)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메마름 속에서 하느님께 불평한다. 그들의 목마름은 단순한 신체적 갈증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의 부재에 대한 영적 갈망이었다. 바위에서 솟은 물은 단순한 자연적 생명의 회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백성과 계약을 새롭게 하시는 표징이었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바위에서 솟은 물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바위이시다.”(694항 참조; 1코린 10,4) 즉, 사순 시기의 ‘목마름’은 죄의 사막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원천으로 나아가라는 초대이다.
2. 예수님의 갈증: 인간을 찾으시는 하느님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하시며 여인에게 먼저 청하신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목말라 하신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한다. “주님은 마셨으나, 물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을 원하셨다. 그분은 물을 청하셨지만, 그녀에게 성령의 샘을 주고자 하셨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XV,11.30) 하느님은 인간에게 필요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을 갈망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청은 단순한 대화의 시작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의 자리로 불러 올리시는 사랑의 움직임이다.
3.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이해를 점차 끌어올리신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14절) 이 물은 곧 성령을 가리킨다. 요한 복음은 나중에 명확히 밝힌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9) 교리서는 성령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내적 샘’이다. 성령의 은총은 믿는 이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된다.”(2652항)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의 말처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채워질수록 더 커진다. 샘물은 마실수록 더욱 마시고 싶게 한다.”(Vita Moysis II,239)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끝없는 생명과의 친교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4. 영과 진리 안의 예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성전
예수님은 여인에게 예배의 본질을 새롭게 가르치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24절)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짐 산의 대립을 넘어, 그리스도 자신이 새로운 성전임을 선포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이제 더 이상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통해 참된 예배를 드린다.”(Homilia in Ioannem XXXIII,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론적 전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는 성전의 벽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 안이다. 그분이 “진리”이시며(요한 14,6), 그분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살아 있는 예배자로 변화시키신다.
5. 선교의 샘: “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갔다.”(28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즉시 물동이를 버리고 달려 나간다. 그녀의 변화는 복음을 체험한 자의 본질적 응답, 선교적 삶을 보여 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세속의 욕망을 버렸음을 뜻한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내적 샘에서 솟는 물을 마셨다.”(Homilia in Ioannem XV,30) 그녀는 과거의 부끄러움 속에서 새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은 즉시 복음의 증언으로 흘러넘친다. 이것이 사순절의 목표이다. 단순한 회개를 넘어, 하느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인간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6.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34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양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의 사명은 곧 구원의 선포이며, 그분은 우리를 그 사명에 참여시키신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명을 함께 완수한다.”(2825항) 따라서 복음 선포는 신앙인의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내적 샘물이어야 한다.
7. 결론: 그리스도, 우리의 샘이시며 성전이시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신앙 여정의 모형이다. 우리의 삶 속에도 여전히 광야의 갈증, 관계의 메마름, 진리의 목마름이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은 바로 목마르신 예수님, 인간을 갈망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외적인 샘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 안에 “솟는 샘”(14절)을 두시며, 그 샘은 성령의 은총 안에서 끊임없이 새 생명을 흐르게 한다. 이제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세상의 갈증 속으로 나아가,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42절)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선교자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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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네, 목마른가?>
요한 4,5-42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자네, 목마른가?>
자네, 목마른가?
타는 목마름을 풀어줄 샘은 앞에 있다네.
그러니 지치고 힘겨운 발걸음일지라도
또 한 걸음 내딛겠나.
자네, 목마른가?
지난 어느 날 달콤하게 목젖을 적시던
단물 생각이 간절한가?
그래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자네, 목마른가?
목만 축이면 되겠는가?
푸르러야할 삶을 사막처럼 만드는
온갖 추악과 불의의 굴레는 견디겠는가?
자네, 목마른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도 목말랐다네.
그래서 물 좀 넉넉하게 마실 수 있는
억압과 착취의 땅을 그리워했다네.
자네, 목마른가?
나도 어느 날 땡볕아래서 목말랐다네.
낯선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했다네.
그 여자에게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고 싶었다네.
자네, 목마른가?
사마리아 여자도 목말랐다네.
민족적 천대, 노동의 힘겨움, 여섯 남자의 굴레
육체의 갈증보다 더 간절한 삶의 갈증이 있었다네.
자네, 목마른가?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는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다네.
과거를 딛고 샘을 향해 앞으로 나섰다네.
자네, 목마른가?
나도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목말랐다네.
협잡, 모욕, 배신, 학살이 빚어낸 목마름,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마름이었다네.
자네, 목마른가?
무엇이 자네를 목마르게 하는가?
해갈하기 위해서 무엇을 갈망하는가?
갈망하는 바를 얻고자 지금 어디로 향하는가?
자네, 목마른가?
영원한 생명의 샘을 건네줄 나와 함께
일상의 굴레와 안락의 유혹을 끊어버리고
힘차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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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물’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요한 4,13-19)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신 분”이라는 ‘계시’(가르침)이고,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그리고 묵시록 21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묵시 21,6-7)
그런데 이 말씀들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과 사실상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배고프지 않음’과 ‘목마르지 않음’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뜻합니다. 반대로, ‘배고픔’과 ‘목마름’은, 아직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 등을, 또는 고통스러운 인생살이 등을 뜻합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입니다. 육신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걱정할 일이 없는 부자라고 해도 영혼의 배고픔과 영적인 목마름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에서 우리를 완전히, 또 영원히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
2)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의 갈증’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즉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남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도 상징적인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물론 그 여인의 실제 사생활을 나타낸 말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뜻은 같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냐?”로 해석되고,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는,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로 해석됩니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은, “너는 여러 종교를 전전했지만”으로 해석되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는, “지금 네가 속해 있는 종교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니”로 해석됩니다.
그 여인은 참된 구원의 길을 알려 주는 종교를 찾아서 여러 종교를 전전하지만 ‘참 종교’를 만나지 못한 채로 계속 구원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대교를 겉으로만 흉내 낸 것이었고, 올바른 신앙이 아닌,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22절에 있는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이라는 말씀은 그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인생의 갈증’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면서 여러 종교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고, 종교가 아닌 어떤 학문이나 사상 등을 찾아다니는 경우도 많습니다.
3) 우리는(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로 등록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성사는 신앙생활의 시작일 뿐입니다. 신앙의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2베드 2,20-21)
신앙생활은, 갈증을 해결해 준다고 끈질기게 속이는 ‘가짜 생명수들‘의 유혹에 맞서 끊임없이 싸우는 생활입니다. 사순 시기는 그런 ‘가짜 생명수들’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저항력’을 키우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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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생명의 물’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필요한 은총을 얻길 희망한다.
예언자는“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2-3) 선언한다. 물은 구원이요, 하느님의 은총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시는 은총의 양식이다.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요한 5,1이하)을 볼 수 있다. 물은 치유하고 깨끗하게 하는 정화의 물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4,14)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머물고 행하게 될 때 그 안에 영원한 생명, 구원이 있다. 신앙인이 영적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듣지 않으면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성경에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22,17)고 기록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의 물을 거저 받아라.’는 말씀은‘공짜로 받으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큰 기쁨이다. 그런데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은 언제나 실제적이며 유효한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우리가 핸드폰을 다루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것처럼 성경을 대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실제로 우리가 언제나 마음속에 하느님 말씀을 간직한다면 어떠한 유혹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떠한 장애물도 우리를 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내부, 혹은 외부에 있는 매일의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을 보면, 유다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상종을 하지 않던 때인데 한 여인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에 관해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4,15) 하고 청하였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상종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함께 지냈다는 것은 벽을 넘은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등진 사람은 많았지만, 예수님께서 등을 돌리시고 포기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절망하는 여인을 찾아 나서 그의 영혼 갈증을 해소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위로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목이 타는 우리에게 오신다.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아 욕구불만과 정서불안, 우울증, 정신적인 아픔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성체성사로 다가오신다. 그렇다면 우리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양식을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청하면서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벽을 넘어야 한다.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멀리했던 사람들, 상처를 받았다고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나만의 울타리, 편견과 오해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사람이 바뀐다.
어디서 주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깨어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든 주님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미사성제를 통하여, 성체조배나 기도를 하면서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영성체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영양소다. 매일 섭취해야 하는 양식이다. 구원의 생명수다.
노래 한 곡 기억해 보자!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 하리라.(반복)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신다. 따라서 우리에게 알맞은 축복을 더 해 주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행하는 가운데 행복하길 바란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41,10).
“주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보호하시고 지켜주소서.”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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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마음이 열려있는 이들의 만남>
어느 순간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 번쯤 해 보셨을 겁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입어보니 뜻밖에 괜찮은 옷, 무관심하다가 나중에야 재미를 느끼게 되는 영화나 드라마, 반복해서 듣다 보니 매력적인 음악 등등이요.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은 사실 마음이 열려 있어야 더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를 떠올리면 누군가는 고약한 냄새를, 누군가는 아름다운 노란빛을 먼저 생각하는 법이니까요. 사람이 부정적인 시선에만 머물고 있다면 전체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먼저 좋은 점을 마음에 담고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실로 인생은 아름다움의 향연이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을 들르셨어요. 사실 사마리아는 유다인들에게 무시무시하게 천대받던 지역이었답니다. 기원전 8세기에 순수 유다인들이 살던 사마리아 지역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했는데, 아시리아가 유다인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타민족 간 혼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에요.ㅜ이는 혈통을 중시하던 유다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말을 섞는 것조차 금지할 정도로 경멸했는데, 북쪽 갈릴래아에서 남쪽 유다 지역까지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사흘밖에 안 걸리는 길을 그보다 두 배나 되는 먼 길로 돌아갈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이 들어가시네요. 그리고 한 여성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유다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여인을 깊이 존중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 역시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영원한 생명의 물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마리아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 장면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주님의 사랑과, 이를 받아들이는 이의 열린 마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에요. 이처럼 하느님과 하는 소통은 열린 마음이 있을 때만 가능하답니다. 기도드리고 청한다면 그것을 받기 위한 마음도 열려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종종 우리의 마음은 닫혀 있곤 하지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개인의 일들에 대한 당혹감으로 마음의 자물쇠를 채우고 있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위로의 신호를 보내심에도 깨닫지 못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는 하느님께 얼마나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어요. 오늘 2독서가 이야기하듯, 우리는 믿음 덕분에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며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겠죠?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닫힐 리 없고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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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신부님]
<말씀을 듣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어느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에게 물었습 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한 아이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지 못하고 있자,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너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니?” “네, 가고는 싶은데…. 엄마가 주일학교 끝나면 집에 바로 오라고 하셨 어요.” 웃음을 주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말은 듣지만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 얼마나 엉뚱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물’은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는 은총(4,14 참조)이었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목마를 때 갈증을 해소하고, 육체적 생명을 유지해 주는, 문자 그대로의 ‘물’로 알아들었습니다. (4.11-12.15 참조)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 듣지 못한 채 엉뚱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란단다. 나를 믿고 내 말을 따른다면 행복하게 될 거야.” “네. 당신을 믿고 따르겠으니 이제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는 사랑과 친교에서 비롯되는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시지만, 우리는 물질적 소유와 세속적 성공과 같은 덧없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이기심이 낳은 독점욕, 지배욕, 집착을 사랑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정의 위에 세워지는 평화를 바라시지만, 우리는 불의에 대한 침묵과 갈등의 은폐로 이룬 위선적 안정을 평화라 착각하기도 합니다.
주님 말씀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 어리석음과 나약함에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신 말씀을 잘 알아들을 때까지 끊임없이,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의 영적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4,15 참조)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인 예배 문제로 화제를 돌렸습니다.(4,19-20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몰이해 앞에서 불쾌해 하지도 않으시고, 대화를 멈추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관심사에서 시작하여, 다시 영과 진리에 대한 주제로 대화로 이끄셨습니다.(4.21-26 참조)
진리를 이해하는데 더딘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인내와 사랑에 의탁한다면, 주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며,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는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로마 5.2 참조)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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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1982년 김지하 시인은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내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작금의 현실이 그렇지 않지만, 타는 목마름이 어찌 민주주의만이겠는가? 인생이란 멀고도 험한 길을 가다 보면 자주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인정과 관심, 환대와 보살핌의 목마름)에 직면하게 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신앙의 여정 곧 내적 여정엔 더더욱 영혼의 타는 목마름(=사랑과 생명을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을 느끼고 느껴야만 합니다. 목마름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목마름의 절박함으로 울부짖다 보면, 마침내 목마름은 해갈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독서의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의 어제와 내일을 보여 주는 안내인이며 길잡이입니다.
제1독서 탈출기의 사건은 바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기 이전에, 사막 횡단 여정을 통과해야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오랫동안 핍박과 착취 속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 분명 이집트와 그 종살이에서 벗어난 감동과 감격으로 밀어닥친 여러 어려움을 잘 참고 견디어 왔지만, 사막이란 혹독한 상황 앞에서 그들은 차츰차츰 주어진 막막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피부로 느끼면서 불평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사막에서 목마름은 생명과 직결되는 고통이었기에 그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17,3)라며 모세에게 불평을 터트립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그들처럼 지도자에게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고 모세 역시 별다른 묘안이 없었기에 하느님께 나아가 백성의 소리를 전달하며 부르짖자, 하느님께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17,6)라고 응답하십니다. 일부러 하느님을 시험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절체절명의 다급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순간 진정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나 할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런 순간 하느님을 향하여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간절한 울부짖음의 순간이 바로 영적 목마름의 순간이며 이런 목마름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영적 투쟁은 치열하고 심각해지겠지만 바로 이 순간이 바로 하느님을 향한 내적 정화와 단련의 시간입니다. 이런 절박함을 통한 깊은 내성內省을 통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발가벗겨진 순수한 신앙과 화장이 지워진 민낯’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게 됩니다. ‘마싸와 므리바’의 본뜻은 시험과 다툼이고, 마싸와 므리바는 장소 이전에 바로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숨겨진 영적 상태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17,7참조) 이런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내적 투쟁을 겪을 때 진정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만나고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있음과 하심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시기에(4,34참조) 사마리아의 시카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지치시고 시장하셨기에 우물가에 앉으셨는데 그곳으로 아빠 하느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이끌었습니다. 이미 다섯 명의 남편들과 더불어 살아왔기에 타인과 의미로운 관계를 맺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 그 시간에 그곳에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 때든지 그분이 우리에 앞서 그 시간 그 자리에 먼저 와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4,7)라고 청하였지만, 그 여인의 눈에는 자신이 타인에게 항상 차별을 받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목마른 한 존재로 보여 지지 않고 종교와 인종 그리고 성의 차별의 덫에 빠져 주님의 청을 거절합니다. 우리 역시도 삶을 살아오면서 누군가가 우리의 인정과 사랑과 관심이 필요할 때 그들의 절박한 간청을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하지 않았는가를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반성해야 합니다. 그 여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깊은 내면에 있는 사랑에 대한 갈증과 생명에 대한 목마름을 꿰뚫어 보시고 또한 아버지께서 이 여인을 당신에게 이끄신 뜻을 깨달으시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4,14)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이 지금 그 여인 앞에 있어야 할 이유를, 그리고 나에게 물을 좀 다오, 라고 한 까닭을 밝히십니다. 그녀의 처지는 바로 지금 우리의 처지이고 그녀는 바로 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4,15)
닫히고 부서진 마음으로 살아온 그 여인이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그녀의 마음에 부어지기”(로5,5 참조) 시작하자 영원한 생명을 채워주신 하느님께 대한 예배 장소를 질문하는데 이 또한 우리를 대신한 절대적이고 궁극적으로 필요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게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4,21~23)하고 언약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영’(4,24) 이시기에, 영이시고 진리인 예수님 안에서 아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사람은 누구나 외부의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 영혼 안에 내주하시고 내재하시기에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아빠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로5,5) 영과 진리 안에서 참된 예배를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똑같은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길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 일은 우연도 필연도 아닌 오직 사랑의 사건, 곧 은총의 사건이며 이를 체험한 사마리아 여인이 단지 예수님을 선생님에서 그리스도로 호칭이 변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린 최초의 복음 선포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난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듣고-체험한 그 사랑과 생명을 함께 나누도록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아빠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예수님은 그런 아버지의 뜻 곧 사마리아 여인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사랑과 생명에 목마른 모든 이를 다 당신께 이끌도록 우리를 구원의 선포자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마음에 간직할 은총을 청하면서 감사송을 들어 봅시다. 『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시면서, 이미 그 여인에게 친히 신앙의 선물을 주셨으며, 또한 거룩한 사랑의 불을 놓으시려고, 그 여인에게 신앙의 갈증을 느끼게 하셨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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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름다운 만남>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장면’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결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빈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 사마리아 여인과 자신을 내어주어도 결코 다할 수 없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샘솟는 물을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렇게도 목말랐던 이 여인은 이제 마침내 일곱 번째 남자, 완전한 사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마른 두 영혼의 만남, 이 아름다운 만남은 곧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드러내 줍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사랑과 생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영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여기 ‘양주 올리베타노 수도원이라는 우물’에 물을 기르러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샘솟는 물’을 마시겠다고 이 ‘거룩한 미사’에 함께 모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고 청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때는 십자가에서처럼 우물가에서도 정오 무렵이었습니다.(요한 4,6) 그리고 우리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요한 4,23)
바로 이때가 서로 상종하지도 않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전 휘장을 찢으신 때요(마태 27,51),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과 몸을 쪼개어 오시는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요한 4,10) 아느냐?
이 질문은 ‘대체 무엇을 목말라해야 하는지?’, ‘그것을 채워줄 자가 누구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첫째 주제는 ‘하느님의 선물’, 곧 ‘생수'(요한 4,10.11)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생명과 탄생의 시작을 드러냅니다. 창조 때는 물 위에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우주의 질서를 세우셨고, 노아의 홍수는 죄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요르단의 물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물’인 ‘생수’를 마시는 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바로 이 ‘물’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구원의 물이요(요한 19,34 참조), 제1독서에서 예표된 호렙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생명의 물이요(출애 17,6),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는 영이며 진리이신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오늘 복음의 둘째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4,25)라고 말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로마 5,1)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제,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 장면을 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은 신앙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참으로 이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했듯이,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 4,42)
이처럼 만나는 이를 믿는 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 이만큼 아름다운 만남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만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우물에서의 만남이요, 또한 십자가에서의 만남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서의 만남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 중에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이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일’, 아니, ‘모든 일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일’, ‘하느님이 내 안에서 샘솟게 하고 그 물을 이웃에게 퍼주는 일’, ‘이웃들과 함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하는 일’, 그리고 ‘영과 진리로 아빠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몸소 실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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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주님!
빈 물동이의 목마름으로 샘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당신을 만남이 믿는 일, 사랑을 고백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주님!
십자가의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게 하소서.
당신을 만남이 몸을 쪼개는 일, 장벽이 무너지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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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례받은 자매님께서 “신부님! 세례받은 후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냥 기쁘고, 사람들이 다 좋아 보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책에서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세례받은 이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므로, 여기서 ‘자기 삶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더 이상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모든 이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무수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서 모든 생명의 참된 중심이신 그분 주위에서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긍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쿠르트 코호, ‘죽음에서 생명에로’ 중에서)
아마 이 글의 내용을 앞선 자매님께서 체험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아집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늘어나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협조자가 아닌, 경쟁자가 되었을 때 당연히 편안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면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만이 자기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된 한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과 혼혈되었다고 해서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랍비가 길에서 여자와 말을 섞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장 뜨거운 정오 무렵에 물을 길으러 온, 상처 많고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물을 청하는 것 같지만, 사실 여인에게 믿음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은 경계 밖의 사람에게도 열려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물이 나옵니다. 야곱의 우물물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른 현세적인 만족인 쾌락, 물질, 사람에 대한 집착 등을 의미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과 구원의 은총입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 물이 다시 목마른 것처럼, 인정받아도 또 허전해지고, 많이 가져도 또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 사랑받아도 불안하게 되고, 성공해도 또 공허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목마릅니다. 인정에 목마르고, 위로에 목마르고, 성공에 목마르고, 관계에 목마릅니다. 이런 목마름에서 벗어나려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십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 여인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향한 호칭의 변화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호칭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사람’이라고 했다가, 호기심과 존중의 마음이 생기면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의 숨겨진 과거(다섯 남편)를 꿰뚫어 보는 영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라면서, 세상의 구원자로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우리 내면에 자리한 ‘깊은 갈증’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성취, 물질, 타인의 인정이라는 유한한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목말라하는 우리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도 먼저 다가오셔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기쁘게 지금을 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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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는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주님의 말씀과 진리, 그리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다가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의 선물인,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 다다랐을 때, 주님께서는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탈출기 17,5 -6)라고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썩어 없어지는 빵과 물을 주셨으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가 단지 육체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로 여겼으나, 곧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생명수를 마시게 되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그 생명수를 갈망하게 됩니다.
생명수와 같은 주님의 말씀과 진리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얻습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서 5,2,5)
주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갈망 할 때 우리는 보이는 인간 삶의 현실과 일 너머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적 갈증을 느끼는 우리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는 야곱의 우물에서 두레박을 내리십니다. 우리를 목마르지 않게하는 영원한 샘물을 퍼 주십니다.
사순시기는 목마른 우리의 영적 갈증을 주님께서 풀어주시는 시기입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5)
고단한 삶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찾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께서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사순시기는 영과 진리의 샘물이신 주님께 푹 젖어 아버지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며, 야곱의 우물가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갈망하는 시기입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한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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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우리의 삶에는
늘 어떤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채우려 하고,
성취에서 찾으려 하고,
더 많은 것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창조된 존재이기에,
하느님과의
친교 없이는
완전한 충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도
그 근원적 목마름을
완전히
채워 주지 못합니다.
생명의 물은
우리가 스스로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렇듯 구원은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참된 충만은
더 많이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