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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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복음: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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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해 봅시다.
2. 나는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으며,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3. 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예수님처럼 용서와 구원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무엇이 예수님의 시선과 멀러지게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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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함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마태16,24)공관 복음서 3곳 모두 기록된 이 귀절은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직접 지시기 훨씬 전에 하신 말씀이다. 당신도 아직 지어보지 못한 십자가를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교훈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정황상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일까하는 의구심도 들게하는 상황이다. 어찌됐든 이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길 즉 고난과 역경의 길’이라는 뜻으로 바로 이해되어질 수 있고, 사실 그런 의미로 많은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에게 해설해주고 훈화해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희망과 용기와 기쁨의 길이 아니고 고난과 고통의 길이 된다는 의미로 가르치셨단 말인가? 나는 절대로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요 훈화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보기에 좋구나!”라고 하신 하느님께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닌 죄인을 만들었소”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부정적 논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역사의 현실로 다시 들어오셔서 ‘예수님 따르는 길은 고통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교회를 보신다면 이는 당신에게 얼마나 모욕적인 망언적 가르침인지 생각하실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괴심하고 분하다고 생각이 드실 것이다. 당신은 희망과 용기와 기쁨의 삶을 말했지만 그 후계자들은 같은 가르침이라도 어쩌면 그렇게 부정적이며 힘들며 어렵고 고통스러운 뜻으로 받아드리고 가르치는가 그 실망과 분노가 어떠하실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의미를 고통이나 역경이라는 뜻이 아닌 “운명”이라는 뜻으로 받아드린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뜻으로 변하게 된다. 즉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의 운명을 지고 따라와야한다”고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운명이 다르다. 그 운명의 설계자는 하느님이고 운영자는 그 사람 자신인 것이다. 내가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내가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 재벌집이 아닌 평범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것, 키가 작은 것, 얼굴이 평범한 것 등등 …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진 사실들은 내게 주어진 운명인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 운명 안에 하느님께서 내게 마련하신 행복이 있다는 뜻이다.피그미 족이란 아프리카의 작은 부족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몸집을 가진 부족이다. 그들은 밀림 숲 속에서 사냥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험한 환경에서 무엇보다도 강한 힘이 있어야 다른 부족의 침입으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약육강식의 밀림의 법칙이다. 당연히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신을 저주하며 원망할 것이다. 이외로 이들은 “어쩔 수 없죠, 신께서 저희를 작게 만드셨으니” 라며 자신들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작은 몸집으로 날렵하고 빠르게 그리고 특별한 사냥도구를 개발하여 어느 덩치 큰 부족보다 전투나 사냥에서 우수한 결과를 만들어내며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 고난의 길이 아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드리고 사랑하는 길이라면 그것은 곧 희망의 길이요 용기의 길이며 기쁜 삶의 길이 될 것이 자명하다.
우리 인생의 삶의 현장은 믿는 이에게나 안 믿는 이에게나 즐거울 수도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과 절망의 늪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 믿는 이와 안 믿는 이들의 차이가 된다는 것이다. 생활이 부유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된다고 ‘행복하다’라고만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고 ‘불행하다’라고만 생각할 수도 없다. 힘들고 어려운 삶일지라도 행복하게 사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 행복과 불행은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가 된다
.Amor fati(운명을 사랑함)는 가수 김연자씨가 불러 얼마 전에 히트치며 대한민국을 ‘아모르 파티’의 물결로 적셔 파티를 사랑하라는 격려로 알려진 문구이다. 그러나 ‘아모르 홧띠’는 의외로 깊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철학적 의미를 가진,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심오한 가르침을 주는 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릭 니체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에서 인용된 문구이기도 하다.‘자신의 십자가’를 ‘고난과 불행’이 아닌 ‘자신의운명’으로 생각함에서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신승재 배드로)
♣복음말씀의 향기♣ No4346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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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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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A6K52pDWeg
[춘천교구 이일환 바오로(연봉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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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 억울할 때는? 십자가를 바라보셔야만 합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피정에 오시는 분들 뵈며 참 많은 것을 느낍니다. 처음 오실 때에는 세상 행복한 얼굴들입니다. 오랜만에 야외로 나오셔서 그런지 다들 소녀 시대로 돌아간 분위기입니다. 깔깔, 호호, 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입니다.
그러나 고백성사나 신앙 상담 차 한 분씩 마주 앉으면, 분위기는 완전 반전입니다. 다들 고민거리가 한 보따리씩입니다. 그간 겪어온 고통, 그간 짊어지고 온 십자가는 대하소설 열권으로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도 고통과 십자가를 원치 않지만, 그 누구도 고통과 십자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참으로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인 고통과 십자가를 이고 지고 살아가며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주님께서 어렴풋이나마 해답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정말 중요한 숙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십자가가 지닌 제대로 된 의미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십자가가 담고 있는 신비를 깨닫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나면 참으로 놀라운 은총 뒤따르는데, 그것은 바로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인,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신앙인, 무거운 삶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 파악이 이루어진 사람의 하루하루는 매일이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삶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경이로운 일상으로 변화됩니다. 매일 만나는 주변 사람들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상으로 거듭납니다.
십자가에 높이높이 매달리셨던 예수님, 사람들은 그의 몰골을 보고 기막혀했습니다. 너무나 끔직해서 혀를 내둘렀고, 치를 떨었습니다. 다들 철저한 실패의 인생으로 단정했습니다. 완벽한 패배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예수님께서 매달리셨던 십자가는 더 이상 실패와 절망, 낙담과 좌절의 자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는 인생 종치는 자리, 삶이 끝나는 막장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보다 십자가는 새 인생이 시작되는 희망의 자리, 쇄신과 거듭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새 출발의 자리, 작은 죽음을 통해 더 큰 생명을 획득하는 은총의 자리, 한 사람의 희생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축제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이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람들은 곧 도래하실 메시아에게서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모습은 다름 아닌 능력의 메시아였습니다. 권능의 메시아, 힘의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 암울한 현실로부터 해방시켜줄 승리의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모습,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낮은 자의 모습,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이의 모습, 결국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리신 가장 슬픈 모습의 메시아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최종적인 열쇠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살아가시면서 신앙의 의혹이 들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해나가시면서 여러 가지로 이해 안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정말 억울한 일,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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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zKb_tPnZ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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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선택적 예언이다>
이번 주일은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냅니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핵심입니다. 이 십자가 현양 축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날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구원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 구원의 핵심이 되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인간은 본래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탈출기에서 당신을 ‘나다!’로 표현하십니다. 우리 안에 ‘나’가 있는데, 당신을 ‘나’로 표현하시니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 짓눌린 상태의 상징적인 모습이 탈출기에 나옵니다. 우리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옛 자아인 ‘파라오’의 명령에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존 욕구, 곧 탐욕-성욕-지배욕으로 우리를 종살이시킵니다. 이 욕망 때문에 고생하며 죽어간 이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언’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시어 파라오의 뱀을 물어 죽이는 또 다른 뱀을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뱀으로 변하여 파라오의 뱀을 잡아먹습니다. 광야에서 이 상징은 더 완전한 예언이 됩니다. 바로 구리뱀을 장대에 매다니 뱀에 물렸던 이들이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구리뱀은 어떻게 내 안의 뱀의 독을 없앨 수 있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예언을 ‘성취하고 실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마치 죽지 않는 구리로 된 뱀처럼, 당신을 죽이셨지만 부활의 영광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덕분으로 이제 뱀의 예언이 십자가의 예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예언을 성취하면 구원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을 성취한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구리뱀의 예언 자체가 예수님께 구원이 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예언은 우리 안에서 성취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믿음과 구원은 그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예는 영화 ‘매트릭스’만 한 것이 없습니다.
네오가 믿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SF로 그린 영화입니다. 네오는 모피어스에 의해 자신이 선택된 자, 바로 ‘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네오는 잘 믿지 못합니다. 모피어스에게 훈련도 받지만, 점프 프로그램에서는 언제나 땅에 고꾸라지고 맙니다. 그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믿음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네오는 예언자를 찾아갑니다. 예언자 오라클은 “넌 ‘그’가 아니야. 미안하구나, 얘야.”라고 말합니다. 이는 정말 ‘그’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아직은 그 믿음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을 해 줍니다. “모피어스는 널 너무나 굳게 믿고 있어서…. 널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거야. 너는 선택을 해야만 해.
한 손에는 모피어스의 생명이, 다른 한 손에는 너 자신의 생명이 달렸지. 너희 중 한 명은 죽게 될 거야. 누가 죽을지는 네게 달렸어.”
네오는 모피어스가 스미스 요원에게 붙잡히자, 오라클의 예언이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선택’을 합니다. 모피어스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로. 모피어스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네오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매트릭스의 규칙을 서서히 무시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믿는 만큼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마지막 시험대에 오릅니다. 스미스 요원과의 최후의 대결에서 네오는 총에 맞아 심장이 멎고, 그의 생체 신호는 끊어집니다.
트리니티는 죽은 네오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오…. 난 더 이상 두렵지 않아. 오라클은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고 했고, 그 남자가 바로 ‘그’가 될 거라고 했어. 그러니 넌 죽을 수 없어. 넌 죽을 리가 없어. 사랑해.”
트리니티의 입맞춤과 함께, 멎었던 네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매트릭스 안에서 쓰러졌던 네오가 눈을 뜹니다. 이 ‘부활’의 순간, 네오는 마침내 모든 의심을 떨쳐냅니다. 그는 더 이상 매트릭스를 현실로 보지 않고, 그 본질인 녹색의 데이터 코드로 꿰뚫어 봅니다.
스미스 요원들이 쏘는 총알은 그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총알들을 허공에 멈춰 세웁니다. 이때의 네오는 더 이상 ‘믿는’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는’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완벽하게 깨달은 ‘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모세입니다. 네오는 모세의 예언을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입니다. 오라클은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느님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예언을 성취한 십자가에 달린 네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십니다. 그래서 트리니티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에서 해방하실 분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도 나에게는 여전히 ‘예언’입니다. 이 예언을 나에게 그리스도처럼 실현해야 합니다. 저도 사제로 불림을 받았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고 계심을 믿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생애는 그분의 뜻에 그리스도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기로 선택합니다. 이 ‘선택’이 믿음을 주었습니다. 바로 신학교 들어가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 성령을 받음이 곧 나 자신의 죽음이요, 새로운 정체성으로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분께서 나를 사제로 부르셨음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작은 죽음으로 많은 이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내가 먼저 하나의 예언으로 실현시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예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듯, 그분 십자가의 예언은 나에 의해 성취되고 실현될 때 그것이 나의 구원이 되고 이웃의 치유가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내 뜻을 못 박아보십시오. 이건 선택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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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절에 다니던 시어머니가 착한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며느리는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시부모님에게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며느리는 할머니에게 성당에 같이 다니자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위해서 기꺼이 성당에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다녀온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성당에 안 가련다. 절의 부처님은 풍채도 좋고, 황금색으로 멋진데, 성당의 예수님은 삐쩍 마르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잖니. 어째 성당의 예수님은 그리 불쌍해 보이니.” 생각해 보니 할머니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대부분 종교의 창시자들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를 십자가에 높이 매달은 모습으로 믿는 종교도 없습니다. 비록 문제가 있더라도 더 멋진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가시관의 예수님을 믿을까요?
문병란 시인은 ‘희망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한고비 지나면 구름 위 태양은 다시 뜨고/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 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시련과 좌절의 표상인 십자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첨탑에는 십자가가 있고, 성당의 제단 뒤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괴로웠지만 행복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교회는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냅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형벌의 도구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해야 할 일을 알았고, 최선을 다했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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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였습니다. 게다가 이 여정은 양식도 물도 부족하고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 해방의 여정을 후회하고 불평하며 주님을 원망하였고, 주님께서는 이들의 죄에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이 장면만 보면 우리는 하느님을 벌하시는 분이시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오늘 독서 전체의 틀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지 않았다면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불 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통회할 수 있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느님께 뱀을 치워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시며,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1,8)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뱀이 없어지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지만, 하느님께서는 뱀을 바라보는 것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따라 우리 죄와 그에 따른 결과를 마주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원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며, 우리는 죄인인 우리 자신의 모습과, 죄에 대한 그 값을 치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사랑하시는 나를, 또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그 값을 치른, 구원된 나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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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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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요한 3,13-17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사람의 아들이
모든 것을 비우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십니다
믿는 이들이
모든 것을 비우고
사람의 아들 안에서
내려옵니다
사람의 아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땅에서 하늘을
이루십니다
믿는 이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이룹니다
사람의 아들이
살리려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하늘로
오르십니다
믿는 이들이
살리려 십자가에 달려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오릅니다
사람의 아들이
정의와 평화와 살림으로
새 하늘 새 땅을
여십니다
믿는 이들이
정의와 평화와 살림으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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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1)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 희생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9,13-15)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에게 해방과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해서, 인간들 대신에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바치신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해방과 구원과 생명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 사도가 ‘메시아는 예수님’이라고 증언하는 설교를 하자, 사람들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도 2,37-39)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회개해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세례를 받은 후에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회개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일도 아니고, 남이 대신 해 줄 수도 없습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헛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인데,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믿음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만 ‘믿음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생활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합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믿는다는 말만 하지 말고,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하고, 하면 안 되는 일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능동적인 회개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벽에 걸어놓은 십자고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 그냥 장식품이 될 뿐입니다.
2) ‘십자가 경배’는 십자가라는 ‘물건’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도 없고,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도 없고, 믿음을 실천하는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십자가라는 물건 앞에서 현세적인 복이나 빌고 있다면, 그것은 미신이고 우상숭배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구리 뱀’은, 처음에는
회개와 구원’의 상징이었는데(민수 21,4-9), 나중에는 우상숭배 대상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히즈키야는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아비인데 즈카르야의 딸이었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2열왕 18,2-4)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십자고상, 성상들, 성화들, 성물들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
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사람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실 수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루카 18,27) 하느님께서 들어오라고 허락해 주셔야 하고, 누군가가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곳에서 오신 분만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인데, 여기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즉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삶으로’ 실천하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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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주어질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하고 고백했습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에‘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심판보다는 구원을 앞세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삶에 있어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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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영식 사도요한(제기동성당 주임) 신부님]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떠한 삶을 추구하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악을 보며 왜 가만히 계시는가? 왜 처단하지 않으시는가? 하느님은 과연 존재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돈과 권력, 욕망을 좇으며 거짓과 위선을 추구하고, 폭력과 살인,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며, 극심한 이기주의로 나의 인권은 중요하게 여기고 타인의 인권은 무시하는 현실을 마주할 때, 이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질문이 하느님에 대한 편협하고 왜곡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 해보게 됩니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완전한 존재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 정의, 자비는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생각 속에 갇혀 있을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믿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평생 겸손하게 묻고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분과 친밀함 안에서 인격적 만남을 이루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 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 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랑과 정의가 공존하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는 것이고 구원이지, 파멸과 처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그 악을 폭력과 파괴라는 악으로 되갚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사랑과 정의가 공존하는 자비라는 선의 길을 묻고 찾으며 추구해야 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러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떳떳하게 정의를 실현하셨고, 사랑으로 감쌌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고,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길이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비참하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참된 행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기중심적인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하게 끊임없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묻고 찾으며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서울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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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 십자가를 현양하는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35년 무렵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경배하면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하게 되는데, 629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오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되었습니다.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모든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어지는 다음날은 십자가 아래 가장 가까이에서 아들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지냅니다.
오늘 요한복음 3장의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신학’을 잘 보여줍니다.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려면, 오늘 제1독서의 민수기 구리 뱀 이야기를 새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여기서 보잘것없는 양식이란 ‘만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매일 아침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앉으면, 백성들은 집으로 가져가 ‘기적의 음식’을 먹었습니다.
‘만나’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광야생활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나는 ‘눈과 입으로’ 체험하는 매일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이 지겹다고 합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광야에서 날마다 돌보아 주셨음에도, 그들은 오히려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시어 벌하셨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모세를 찾아가 하느님께서 살려주시기를 기도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모세는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라고 명령하십니다. 불 뱀에 물린 이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에 구리 뱀이 높이 들어 올려졌듯이 이제는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들어 올려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에게 구리 뱀의 역할을 합니다. 죄를 지은 우리가 그 죄의 독성으로 쓰러질 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영혼의 생기를 얻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해방이 왔고 구원이 왔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미움이 생길 때,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랑과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십자가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찾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욕심이 생길 때,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끊어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증표요 인류 구원의 보증입니다. 이 십자가의 진리를 삶을 통해 증거하며 온 세상에 전해야 하겠습니다. (생활 속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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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본당 신부에게 하루 휴식은 월요일 새벽 미사 후의 시간입니다. 저 역시 온전히 쉬기 위해, 월요일만큼은 약속을 잡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종종 어쩔 수 없이 모임에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모임이 중요하기에 빠질 수도 없습니다. 이때 기분이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당연히 좋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일주일 중에 하루 쉬는 날인데, 굳이 이날 모임을 해야 하냐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막상 모임에 참석하고 나서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모임 전에는 짜증이 나지만, 모임 후에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지향은 대부분 편안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 힘들어하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 불편함을 실패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편안하고 쉬운 삶을 성공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 안에서 보면, 불편함을 피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일단 뛰어들었을 때, 더 좋은 상황을 맞이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더 발전된 ‘나’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뇌는 게을러서 편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려 합니다. 문제는 이를 선택했을 때, 당연히 더 나은 상황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당 가는 일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굳이 가야 하나 싶고, 하루의 편안함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보다 불편함을 선택하면서 얻는 기쁨이 훨씬 큽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행복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스마트폰을 보고, 또 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 가장 편안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마트폰에 빠져서 하루를 보낸 뒤에, “오늘 좋은 하루였어.”라고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삶을 보낸 뒤에야 “그래도 잘 산 하루였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굳게 믿을 때, 우리의 죄와 상처는 치유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고,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듯,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구리 뱀을 본 사람만이 살아난 것처럼, 주님을 보고 주님을 믿는 사람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를 위해서도 반드시 주님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보다 다른 것에 더 집중합니다. 진정한 편안함은 주님 안에 있는데, 그냥 순간의 만족이 진짜 편안함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주님을 선택하고 따르는 것을 영원한 불편함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진정으로 편안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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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감사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지난 9월 11일에 ‘원장좌 수도원’, 곧 ‘모원 예속 수도원’에서 ‘자율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수도원이 창설된(2016.4.10) 지 약 9년이 지났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우리는 오늘 감사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많은 사연과 함께 훌쩍 지나갔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이 기억납니다.
어느 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불러, 산골에 살고 있는 어느 여인의 영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천사는 혼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너 혼자서 돌아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 여인은 너무나 불쌍해서 도저히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어제 나무에 깔려 죽었고, 이제 막 쌍둥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데려오면 그 갓난아이들은 누가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차마 그 여인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질책하며 다시 천사에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속히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하늘나라에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할 수 없이 산골로 내려가 여인의 영혼을 빼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천사의 날개가 떨어지고, 천사는 그만 땅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천사는 지상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신발을 사러 구둣가게에 왔습니다. 천사는 두 아이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입니까?”
그러자 부인은 “아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6년 전의 일이었지요. 이 애들의 아버지가 숲 속에서 나무에 깔려 죽고, 어머니까지 느닷없이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젖먹이 아이를 기르고 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갓난아이들을 나에게 부탁했지요. 그런데 그 다음 해 그만 내가 낳은 아이가 죽게 되었고, 결국 그래서 이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 되어 버렸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사람은 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거야.”
바로 그 때 천사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천사는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이 날, 이 자리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특별히 오늘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 네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십자가는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보다 의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는 일은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남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이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당하는 일입니다.
셋째로,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넷째로, ‘십자가’는 ‘벌어지는 일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만들지 않은 일들이 마구 벌어져 다그쳐옵니다. 오히려 만들고 계획하고 꾸몄던 일들은 무색하리만큼 우리를 비켜갑니다. 반면에,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바로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끌어안고 응답하는 일이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입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패배이지만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는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삶을 전환시키는 혁명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저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규칙서 머리말 30 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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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