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위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경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길지 않게 한다.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축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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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평신도 주일, 사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합니다. 그동안 제 삶을 채웠던 교만과 허세와 자만을 꺼내어 보여드립니다. 내면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진득이 묻어있는 모든 불순물을 주님께 깡그리 봉헌합니다. 지금 저는 현대의학이 해석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하며 알쏭달쏭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처음 수술을 받고,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주님께로 더욱 의탁하며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 생각과 다른,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몸을 혹사했던 많은 날과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제 몸의 온갖 장기와 세포들이 힘들게 힘들게, 저를 지탱시켜주기 위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티어줬다는 걸 느꼈습니다. 스스로 힘을 자신했던, 자신의 건강을 뽐냈던 갖은 행위들이야말로 스스로의 약함을 숨기려는 오만, 주님께서 주신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마구 부려댄 교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습니다. 사제의 체면보다 사제의 권위보다 훨씬 무거운 인간의 무지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열했습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이 미련함에 오래 울었습니다. 아직 병명조차 아리송한 병과의 싸움이 진행 중이지만 매일 몸에게 사과를 건네며 지냅니다. ‘미안타’, ‘애썼다’라고 용서를 청합니다. 아니, 몸을 선물해주신 주님께 사죄드리며 몸을 아끼고 사랑하겠다 다짐합니다. 무릇 삶은 완만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삶에는 모든 것을 뒤엎는 소용돌이가 존재합니다. 그 요란한 소용돌이 앞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권태롭고 단순하여, 시시하게 느껴지는 그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바로 지금, 제 모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때문에 늘 다른 삶을 꿈꾸고 추구하려 합니다. 지금보다 나은, 현재보다 우월한 자신의 모습을 위해서 지금을 낭비합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성녀 카타리나는 “시간을 기다리지 마세요. 시간은 당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도 지금, 즉시 실천해야 하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용서해야 하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성경 공부나 신학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분을 봅니다. 물론 틀리지 않고 그릇된 생각도 아닙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온통 자신의 것을 비우고 주님의 것으로 채우는 작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지식’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삶과는 동떨어져, 허무를 향할 위험이 큽니다. 더해서 거룩한 하느님의 것을 이용하고 소유하려는 유혹에 걸려들 소지도 다분합니다. 심지어 신앙과 기도조차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도구로 오용할 위험이 따릅니다. 지금 제 몸은 깊이 앓으며 우리 영혼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으로도 결코 채울 수 없으며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오직 거룩한 하느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진리를 몸부림치며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의 한계에 주저앉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약하고 모자랄지언정, 주님 안에 머물며 당신의 평화를 누리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 그림자에 영혼이 젖어, 자기만족과 자기성취와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립니다. 마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주님을 향한 최선인 양, 힘을 소진하는 것이 주님의 기쁨인 줄 오해합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며 때로 으스댑니다. 이 죄인이 그랬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정열적으로 주님의 뜻을 살아낸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은 그분께 거룩한 것이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삶에는 지루함도 분주함도 없었고 신경과민도 없었습니다. 자기과시를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자화자찬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값지게 살았습니다. 온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삶에서 본받아야 할 모범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저는 이제서야 그분의 멋진 성심을 본받아서 그분의 복음을 살아낼 꿈을 꾸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크신 그분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만 제가 가진 힘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용당할 줄 알면서도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예수님처럼,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을지라도 맞서지 않는 아량을 지녀 살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삶이야말로 복음을 제대로 온전히 살아내는 단 하나의 방법이기에, 딴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 합니다. 하여 하루가 저무는 저녁,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가슴을 치며 불순종의 허물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더 자주 그분을 닮으려 애쓴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쫓아, 성인들을 본받아 믿음과 사랑을 살아보니, 정말 좋고 너무 기뻤다는 고백을 올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의 은총에 매료되시어,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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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며, 여러분은 ‘평신도의 사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지금까지 신앙 안에서 가장 기쁘게 봉사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아직 없었다면 나를 신앙 안에서 성장시킨 평신도의 본보기(누군가)는 있었나요? 그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3. 신부님 묵상에서처럼, 우리는 때로 건강이나 지식, 능력에 의지하며 교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일상 속에서 ‘주님의 것으로 비워내고 채우는’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4.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우리 신앙 안에서 어떤 ‘정화’가 필요함을 일깨워줍니까? 내 마음과 삶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장사하는 집’과 같은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치워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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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03
11월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평신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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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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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sPl142fmdA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 담당 이낙희 이냐시오 신부님 집전 / 강론: 현재우 에드몬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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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계 제도 안에 성직자·수도자들은 평신도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 있고, 평신도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이나 세상은 속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혁신한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은 1중대, 사제나 수도자들은 2중대, 평신도들은 3중대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게 아니라며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교회의 위계 제도, 다시 말해서 주교직, 사제직이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신도들 역시 성화의 길로 불림받았음을 명백히 강조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저는 늘 확신합니다. 신분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흙탕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한 송이 청초한 연꽃처럼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끝도 없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거룩함을 갈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들은 이미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께서도 간절히 열망한다면, 거룩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신다면, 세상 안에서 충분히 봉헌 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수행하고 계시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못지않은 성직을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께서 매일 행하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을 향한 봉사의 현장에서, 짜증 내면서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봉사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미 성화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 한 명 한명이 다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다.’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어떤 위대한 주교님이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보다도 훨씬 고귀한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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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G-wTqTNd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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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과 평화와 나는 하나다>
성전과 평화와 나는 하나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 성당’이자 ‘머리’가 되는, 최초의 성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느님의 집’을 기념할까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집’에 의해 형성됩니다. 신학적으로 ‘집’이란, “지금 나에게 최고로 평화를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품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술병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성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 곧 ‘자존감’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브룩스’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는 50년이라는 세월을 쇼생크 교도소 안에서 보냈습니다. 50년 만에 ‘자유’를 얻어 가석방이 결정되자, 그는 기뻐하는 대신 공포에 질려 절규합니다. 칼을 들고 동료를 위협하며 발버둥 칩니다.
“제발 나를 내보내지 말아 주시오!” 그에게 자유는 주어졌지만, 세상에 그가 마음 둘 ‘집’은 없었습니다. 그가 잠시 머물 숙소는 있었지만, 그의 영혼이 에너지를 회복하고 참된 평화를 얻을 ‘집’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짜 ‘집’은, 역설적이게도, 50년 동안 살았던 ‘교도소’였습니다. 산속의 짐승들에게도 옹달샘이 필요하지만, 천적의 위협 없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그들만의 ‘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브룩스는 나오기는 원했어도, 세상에 자신의 ‘굴’, 즉 새로운 ‘집’을 마련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차가운 여관방 벽에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Brooks was here)”이라는 쓸쓸한 유서를 남기고, 교도소라는 ‘집’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라는 지옥의 ‘집’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은 인간의 모든 자존감을 파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문득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함께 있지 못했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아내’라는 ‘사랑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훗날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그때 ‘사랑’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 가장 높은 목표임을 깨달았다. …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빼앗긴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그녀의 미소를,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원과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에게 ‘집’은 아우슈비츠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는 세상이었습니다. 그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는 존재, 그의 ‘아내’가 곧 그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이 거친 환경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다시 ‘쇼생크 탈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인공 ‘레드’ 역시 브룩스와 똑같이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똑같이 가석방되었습니다. 그 역시 브룩스처럼 혼란스러웠고,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이라고 쓰인 그 방에 머물게 됩니다. 그 또한 브룩스와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레드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친구’, 앤디가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늘 대화하며 희망을 나누던 그 친구가 그의 ‘집’이 되어 주었습니다.
브룩스에게는 돌아갈 교도소 외에 아무런 ‘집’이 없었지만, 레드에게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라는 새로운 ‘집'(목표이자 평화)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친구’라는 집을 찾아 태평양의 작은 해변으로 떠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평화를 주는, 나의 진짜 ‘집’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집은 ‘통장 잔고’일 수 있습니다.
잔고가 늘어날 때 평화를 얻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나 ‘아내’일 수 있고, 어떤 분은 ‘술’이나 ‘운동’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궁극적인 ‘집’이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들의 집은 부모입니다. 다리 밑에서 살아도 부모만 있다면 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은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줄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으로는 세상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집으로 삼는 자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위대한 집은 ‘하느님의 집’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집 안에서조차 ‘돈’과 ‘명예'(상거래)를 그들의 더 큰 평화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집’이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정화하셔야만 했습니다. 모든 집은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로부터 탈출하여 쉬는 곳입니다. 그 집의 주인이 부활하신 분이시라면 그 집에 사는 이들은 죽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아래 있으면 무조건 부모가 받아줄 줄 알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된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1912년 타이타닉호의 침몰과 함께한 이시도르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메이시스 백화점의 소유주였던 이시도르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아이다에게는 당연히 구명보트의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곁을 지키던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비싼 모피 코트를 벗어주며 보트에 태워 보낼 만큼, ‘물질’이라는 집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이 그녀를 재촉했지만, 아이다는 구명보트에 오르기를 단호히 거절하고, 남편 이시도르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긴 세월을 함께 살아왔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이다에게 ‘참 평화를 주는 집’은 구명보트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하느님이라는 영원한 ‘집’에 머물렀기에, 이 세상 가장 큰 ‘집'(타이타닉)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생명’이라는 집착을 넘어서 타인에게 생명을 양도하면서도 죽음 앞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생존을 의탁하는 집이 있고 그 집과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면 이시도르와 아이다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나 세상 것에 의탁하면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이 자기 정체성에서 오는 자존감에 있습니다.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토록 세상의 쾌락과 명예라는 ‘집’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참된 ‘집’을 찾고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에,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머물기)까지 평화를 누리지 못하나이다.” (고백록) ‘쉼’, ‘머무름’, ‘평화’. 이것이 바로 ‘집’의 본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요한 20,19) 이 평화를 주시는 분,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할 ‘집’이신 그분께서, 지금 바로 저 ‘감실’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삶이 힘든 데 왜 찾아오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지쳐 있으면서, 평화 그 자체이신 당신의 ‘집’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각자 자신의 본당(성전)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성체조배’를 하십시오.
성체조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참 집’이신 주님 앞에 조용히 ‘머무는’ 연습입니다. 그분의 평화를 내 마음 깊이 새기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그 ‘집’을 내 안에 품고 사는 사람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하느님의 집을) 당신 안에 모시고 당당하게 엘리사벳에게 걸어가셨던 것처럼, 이 세상 누구도, 그 어떤 절망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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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달라스 교구에서 마련한 피정에 다녀왔습니다. 피정의 주제는 ‘영적인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은 깨달음에서 출발해 열정과 정화를 거쳐, 마침내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영적인 여정에는 고통의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파멸의 신호가 아니라 성숙으로 초대하는 신비의 문입니다.
피정 중 가장 마음에 남은 말은 “하느님을 용서할 수 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처음엔 낯설게 들렸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건 익숙하지만, 하느님을 용서한다는 발상은 도무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에는 원하지 않았던 고통이 찾아옵니다. 성실히 살아왔는데도 병과 시련이 닥치고,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을 용서한다’라는 말은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대신, 그분께 다시 다가가는 또 다른 방식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당뇨로 한쪽 다리를 잃은 자매님, 기억을 잃어가며 손끝도 움직이지 못하는 형제님. 그분들의 침묵 속에는 깊은 신앙의 울림이 있습니다. “하느님, 왜 나입니까?”라고 말하는 대신 “하느님, 이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하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신앙의 형상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하신 순간처럼 말입니다.
십자가 요한 성인은 인생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불렀습니다. 그 밤은 단순히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 은총이 새벽처럼 스며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의 밤을 통과하신 후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썩음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신앙의 깊이는 어둠 속에서 더욱 단단해집니다. 우리 본당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말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48년 전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지금 아름다운 성전과 공동체는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싹튼 믿음의 결실입니다. 돌 하나하나, 벽돌 한 장마다 눈물과 기도가 스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총의 흔적입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그 대성전의 의미는 단순히 건축의 위대함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참된 중심은 돌과 벽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의 숨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이 말씀하신 성전은 당신의 몸, 곧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 사랑이 머무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제도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와 사랑이 메마른 영혼, 관계의 단절, 공동체의 무관심에서 비롯됩니다. 성직자는 섬김의 본을 보이는 발 씻김의 예수님을 닮아야 하고,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또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기도 합니다. 성당의 벽돌이 모여 하나의 집을 이루듯,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살아 있는 돌’입니다. 서로 다른 돌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성전을 이루듯, 우리의 다양함이 교회의 풍요로움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섬기고 봉헌하는 삶을 통해, 우리를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거룩한 건축물로 세워 가십니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그 잎은 시들지 않으며 과일은 끊이지 않는다. 그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처럼 성전에서 흘러나온 은총의 물이 우리의 삶에도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심을 기억합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이 봉헌 축일은, 벽돌의 축일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봉헌 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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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어 봉헌한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만큼 웅장하지는 않지만, 가톨릭 교회의 오랜 역사와 전통 안에서 교회 일치의 구심점 구실을 톡톡히 한 성전이지요. 오늘 우리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전은 겉으로 보이는 건물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이라는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시는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그렇게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 교회, 곧 하느님의 성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사도들을 바탕으로 지금도 지어지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한편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사도직을 크게 강조하면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야말로 세상을 복음화하는 참된 주역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위로와 공동체의 돌봄에만 기대고, 한편으로는 사제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교우들의 모습을 볼 때 조금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 복음을 실천하고 복음화에 앞장서는 주역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한국 천주교회는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아가다, 신앙이라는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높이 치켜든 평신도들이 키워 낸 교회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다 팔아, 목숨까지 바치며 그 보물을 지켰습니다. 신앙 선조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우리 신앙이 왜 그리 귀하고 소중한지 새롭게 발견합시다. 그리고 그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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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 라떼란 대성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
오늘 우리는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4년에 세운 로마의 첫 공적 성당이며, 교황의 주교좌 성당이다. 정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로마와 온 세상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 이 칭호는 단순히 건물의 위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 일치의 표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이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돌로 지은 건물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곧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새롭게 자각하기 위함이다.
2. 제1독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
예언자 에제키엘은 오늘 제1독서에서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다. “그 물이 흘러내려 아라바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그 물이 되살아나고, 그곳에 사는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8-9)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하느님의 생명과 은총이 온 세상에 흘러넘치는 표징이다. 죽음의 바다도 이 생명의 물을 만나면 살아난다. 성 이레네오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그리스도에게서 솟는 생명이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새 생명을 낳는 성사(聖事)의 원천이다.”(Adversus Haereses IV,33,2)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곧 세례와 성체의 은총이 교회를 낳고, 오늘의 라떼란 대성전처럼, 세상 안에서 생명을 흘려보내는 살아 있는 성전의 샘이 된다.
3.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의 건물, 하느님의 성전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고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는 기초 외에는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1코린 3,9.11)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3,16) 즉 교회의 기초는 사람이나 제도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 살아 있는 돌들(1베드 2,5)이다.
성전은 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모인 신자들의 일치된 삶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한다. “성전이란 금이나 대리석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이다. 하느님께서는 돌벽보다 사랑의 마음 안에 더 기꺼이 머무신다.”(In 1 Cor. Hom. 8,6)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전은 외적인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공동체 안에 세워진 영적 성전이다.
4.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그곳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집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터로 변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분노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신다. 그때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2,19) 이 말씀은 당신의 몸, 곧 그리스도 자신을 참된 성전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그분의 몸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난다. 그분의 부활로, 옛 성전은 폐지되고, 새롭고 영원한 성전이 세워졌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장소, 새로운 성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신비를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성전을 허물고 다시 세우신 것은, 당신의 몸을 부활시키신 것이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다시 세워지신다.”(In Ioannem Tractatus 10,13)
5. 우리 자신: 성령의 거처가 된 성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을 때, 그 성전의 벽돌은 바로 우리 각자가 되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다(1코린 6,19). 성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마음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성전의 금벽도 그분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Hom. in Ez. II,1,3) 따라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마음은 어떤 성전인가? 거기에는 하느님이 머무시는가, 아니면 장사꾼의 욕심이 자리 잡고 있는가?” 성전의 참된 정화는,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롭게 하는 일이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그분의 은총이 흘러 나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 봉헌’의 참된 의미이다.
6. 맺음말: 살아 있는 성전으로 봉헌된 우리
라떼란 대성전 봉헌 축일은 돌로 된 건물의 기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다. 에제키엘의 환시처럼, 우리 안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가 세상을 새롭게 하게 하고,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 성전이 되며, 복음의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성전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축일의 핵심이다.
“주님, 저희 안에 당신의 집을 세워주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을 머금은 성전이 되어, 세상에 생명을 흘려보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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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요한 2,13-22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20)
하느님을 계시게 하고
벗들을 있게 하니
우리는 비로소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벗들을 믿으니
우리는 비로소
믿으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희망하고
벗들을 희망하니
우리는 비로소
희망하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벗들을 사랑하니
우리는 비로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하느님을 살리고
벗들을 살리니
우리는 비로소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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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윤지종 미카엘 신부님]
<우리 자신이 거룩한 집이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중의 하나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세워 봉헌한 것으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2년이나 먼저 세워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입니다. 이렇게 의미깊은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맞아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유명한 성전 정화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매년 과월절이 되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월절 축제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든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비둘기나 양, 황소나 암소와 같은 동물들과 이들을 파는 상인들도 함께 성전에 몰려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쳐야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주위는 이러한 희생동물들을 파는 장사꾼들로 북적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제물용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에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까지도 들끓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기 위한 성전이 완전히 시장터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을 돈벌이 하는 장터로 전락시킨 데에는 성전을 관리하는 종교지도자들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상거래를 묵인하거나 허용함으로써, 많은 이익들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광경을 보시고 굉장히 분노하십니다.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울화통을 터뜨리십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성전을 사랑하셨고 아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시는 자리이자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끼고 사랑하셨던 성전은 단순히 하느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라고 만들어 놓은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들어가는 성당 건물만이 성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더 소중히 여기시고 더 사랑하신 성전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그 어떤 아름다운 성전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 안에 머무르시고, 하느님과의 만남 역시 그 어떤 장소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우리들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집, 곧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집이고, 성전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성전, 당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시면서 지켜내신 성전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거룩한 집답게 단장을 하고 기도하는 집인 성전답게 지켜나가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안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혹 장사꾼 같은 모습이나 강도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입을 함부로 놀려 남을 험담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서슴없이 해대고, 자기 욕심 채우기에 급급해 하고 있는 장사꾼 같은 모습이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그만 일에도 쉽게 화내고 불평해대며, 폭언을 일삼고, 남을 못살게 구는 강도 같은 모습이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설쳐대고 있는 장사꾼들을 있는 힘을 다해 몰아내십시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머무르는 성전인 여러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강도들을 채찍을 들어서라도 내쫓아버리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죽을 각오를 하고, 여러분 안에서 설쳐대는 온갖 잡상인들과 싸우십시오.
하느님의 성전인 여러분을 강도들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단단히 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이 보시고 분노하시고 울화통을 터뜨리는 그런 성전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흡족한 아름다운 성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성전은 성전다워야 합니다. 시장터나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안에 남아있는 잡상인들과 강도들을 하루빨리 몰아내십시오. 그리하여, 진정으로 하느님의 영이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성전의 모습을 되찾으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진정으로 주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성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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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치리아코 신부님]
<사랑·기도로 지은 하느님의 집>
+육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에 대한 수식어는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 ‘로마의 4대 성전의 하나’, ‘모든 교황님들의 착좌식이 있었던 성전’ 등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00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 되었던 로마 제국의 박해가 끝나고 세워진 성전이라는 의미는 감격 그 자체입니다. 끔찍하고도 잔인했던 로마 제국의 박해는 서기 313년 밀라노 관용령에 의해 끝나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도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280?~337)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310~314년 재임)에게 자신의 라테라노 궁전을 선물로 주며 함께 성전까지 지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감개무량합니다.
이 같은 성전이 324년 ‘실베스테르 1세’(314~335년 재임) 교황에 의해 봉헌되었을 때, 그 현장에 있던 수많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313년 밀라노 관용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지 불과 11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역사가 우리 한국 땅에도 있었습니다. 1784년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의 세월 동안 길고 모진 박해 끝에 한국천주교회 첫 신앙의 모태인 명동(당시 명례방)에 명동 대성전이 봉헌된 것입니다.
1898년 명동 대성전이 봉헌되었으니, 신앙의 자유를 찾고 12년 만의 환희였던 것입니다. 전국의 모든 신자들이 힘을 모아 건립한 대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따지고 보면 라테라노 대성전이나, 명동 대성전만 그러한 감격을 누렸겠습니까. 전 세계의 무수히 많은 성전들이 모두 그 같은 기쁨과 감격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통하여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뀔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라 하십니다. 그것은 성전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여 처음 건립할 때에는 마음가짐이 분명 달랐습니다.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성전 건립 기도> 중에는 이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온갖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주님의 뜻을 소홀히 했나이다.”
처음 성전을 건립할 때엔 욕심과 오만이 없었습니다. 이는 영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립 후에는 다툼과 오만, 분열과 욕망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육의 성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허물라 하신 것입니다.
+영의 성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장사꾼들을 보시며 불같이 역정을 내시고 성전을 허물라 하셨을 당시 유다인과 제자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아가 허물어진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 하셨을 때는 더더욱 이해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셨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예수님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자주 우리에게 육의 성전이 아닌 영의 성전, 마음의 성전을 강조합니다. 이를 사도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우리말에 ‘더럽다’라는 말은 ‘덜없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비워진 상태로 있어야 하는데, 무엇인가가 남아 있을 때, 그 상태가 더럽다는 뜻이 됩니다. 깨끗이 설거지를 하였는데 설거지통에 오물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우리는 더럽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 안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미련과 욕망의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그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마음 역시 더러운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마음 안에 영의 성전, 하느님의 성전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다시 성전 건립 기도 안에서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저희가 힘을 모아 주님을 예배할 새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룩하여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고자 하오니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소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분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이며,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전은 소중하고 귀한 하느님의 집입니다. 성전 건립 때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 같은 성전이 건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나눔과 눈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그 고귀한 성전에 걸맞는 영의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탐욕과 착취의 장사꾼집이 아닌,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생명의 영혼들이 모이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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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전으로 교회에서 가장 역사 깊은 성전이다. 이 성전은 320년경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건립하여 교회에 기증하였으며, 324년에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성전이 되었다.
1843년 이후 교회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교황성하께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이 성전에서 집전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시는 듯하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예수님께서 폭력을 휘두르실 정도이므로 예수님의 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복음 안에 예수님께서 폭력을 행사하시는 대목은 이 대목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성전은 곧 하느님을 보여주는 하느님의 집이다. 성전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하며,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장사꾼들이나 환전상은 순례자들을 부당하게 속이거나 폭리를 취함으로써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둑과 강도, 사기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켰다. 그래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진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성전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성전을 가꾸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성체가 모셔진 성전이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는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성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말씀하셨다.(21절)
사도 바오로도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17)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임을 분명히 했다.
더욱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1코린 6,19-20)라고 말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서 주님의 값진 피로 사신 것이다. 당신의 성전으로 쓰시기 위해 사신 것이다. 하느님의 성전에는 하느님만이 어울리며, 하느님만을 모셔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에 그 어떤 우상도 모실 수 없고 모셔서도 안 된다.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2코린 6,16)
오늘 성전은 하느님을 보여주고 만나는 하느님의 집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성전이 하느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줌으로써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성전이 되도록 하자.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사신 하느님의 성전임을 생각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살자. 재물, 지식, 힘 이외에 그 어떤 우상도 내 안에 둘 수 없음을 생각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모시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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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차바우나 바오로(서울성모병원 영성부장) 신부님]
<신자분들, 앞으로 오세요!>
미사가 시작되고 신자분들께서 분포하신 모습을 보면, 몇몇 용감한 분들이 앞자리에 앉으시고 대부분은 옆쪽이 나 뒤쪽에 앉으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은 제대를 중 심으로 둥글게 비어있는 형태를 띱니다. 신부 입장에서는 기왕 미사에 참례하러 오신 분들이 제대 가까이 앉아 주 시길 바라는 마음에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만, 왠지 모 르게 앞자리는 어렵게 느껴지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황폐한(?) 앞자리를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 다. 원자력 에너지는 놀라운 풍요를 가져다주기도 하지 만, 때로는 대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사고 가 나면, 폭발한 노심은 주변으로 방사선을 뿜어내며 접근 하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방사선의 진정한 무서 움은 그것이 냄새도, 소리도, 색도, 촉감도 없이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음에도 인체 내부로 침투해 DNA 구조를 파 괴하고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도 방사선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은 총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으나, 그 힘은 인간 의 내면 깊숙이까지 들어와 영혼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 놓습니다. 복음은 만져지지 않으나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은총이 폭발하는 제대 가까이 가면 내 영혼이 바뀔 것 같은, 그래서 나 자 신이 아니게 되어 버릴 것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참된 성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인간의 탐 욕으로 더럽혀진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손수 깨부수십니다. 더 나아가 당신의 소중한 성전을 송두리째 허물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를 겪습니다. 그리고 하느 님의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된 사람은 송두리 째 파괴되고 무너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 과정은 아 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된 사람 은 삶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그 봉헌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드리는 행위를 넘어,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이 된 사람은 예수님처럼 주변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스스로를 봉헌한 사람 안에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 서 신앙인의 힘은 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성전이 된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힘을 끊임없이 퍼뜨립니다.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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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성공한 사업가의 책을 읽다가 망하는 사람과 망하는 기업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공통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하고 건방지다.”
건방지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되는데, 무시라는 말은 없을 무(無)와 볼 시(視)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볼 수 없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누군가를 무시한다는 것은 ‘앞이 안 보인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에 판단할 수 있는 지표도 없고, 따라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기에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무시당했다는 사람을 또 누군가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무시’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시당하고 있다면서, 똑같이 무시한다면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무시하는 것은 이 메시지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를 망하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무시’라는 단어를 자기 삶 안에서 지워야 합니다. 대신 눈을 뜨고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랑’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삶을 성공의 삶으로 분명 이끌어줄 것입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베드로 대성전이 건립되기 이전에 교황님께서 거주하신 공간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이라는 영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라테라노 대성전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 안에서 한 몸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도 ‘하느님의 성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으로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장사하는 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예수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하면서 진정한 성전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의 삶,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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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모든 생명이 자라는 곳, 모든 것을 살게 하는 기쁨과 평화의 자리입니다. 생명의 물이 넘치는 곳,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을 지어 봉헌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지어 주님께 바치는 일이 아닙니다. 성전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그 모든 자리에 하느님께서 함께 머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란 저마다의 성전을 지어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헛된 욕망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 안에 성전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관점에서 오늘 축일의 의미를 깨닫고 되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 축일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28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던 로마 제국의 잔인했던 박해가 313년 밀라노 관용령 선포로 끝난 지 11년 후 324년에 당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라테라노 성전 봉헌을 시작으로 세상의 모든 성전을 주님께 봉헌할 때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정성, 그리고 기도로 성전을 건립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라.”(2,1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모든 성전은 성도들의 온갖 정성을 쏟아 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했지만, 막상 건립 후에는 다툼과 오만, 분열과 욕망, 탐욕과 착취가 가득 찬 타락한 육의 성전이 되어버렸기 성전을 허물어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성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며, 그 성전에 하느님께서 머물지 아니하고, 하느님께 진리와 영으로 예배드리지 아니하며, 기도의 집이 되지 못하면 그 성전은 한갓 빈껍데기와 같은 건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착취로 가득 찬 장사꾼의 집이 아닌,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 찬 생명의 영혼들이 모이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입니다. (루19,46참조)
이런 관점에서 오늘 축일의 독서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모두 성전에 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드는 이들을 향해 성전을 향한 열정에서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시면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하신 성전은 부활 이후 “당신의 몸”(2,21)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으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게” (2,22) 됨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말씀으로 성전의 의미가 건축물이 아닌 사람의 몸과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되는 발판이 마련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맥락에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3,16-17)하고 고백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람이 곧 성전이라는 관점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도 교회를 건물이 아닌 신자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 내렸습니다. 공의회 이전 신자들은 성전이나 성당이라고 하면 단순히 교회 건물만을 생각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 모임, 믿는 이들 모임 자체도 교회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대한 개념도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몸을 모시고 또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주님의 성체를 모신 다음엔 우리 몸이 바로 움직이는 감실이다, 라고 해도 결코 영성적으로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전인 우리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답을 오늘 제1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47,1~2;8~9,12)는 이렇게 아름다운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솟아 흘러나옵니다. 이 물은 흘러나오면서 점점 그 양이 많아지는데, 그 물이 닿는 곳마다 온갖 생명(생물+물고기 등)이 우글거리며 살아나고, 온갖 과일나무도 자라나 숲이 번창하며 온갖 것들이 살아납니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됩니다.”
바로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예수님 말씀으로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우리 역시 생명의 물과 같이 되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통하여 우리로 말미암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생명과 사랑으로 변하고 마침내 풍요로운 결실맺도록 하는 역할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건물이며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의 다음 가르침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우리의 이 성전, 우리 각자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