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1장,1-14절;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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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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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들 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누군가처럼 되지 않으면 진정으로 누군가를 알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엎드려 기어 다니던 아기가 걸음을 걷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두 발로 걷고 있는 부모의 모습을 제대로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과 똑같이 십자가를 짊어져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버리고 순종해 보지 않으면 순종하시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으면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만 물고기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물가에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평생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노련한 어부였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른쪽에 그물을 던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지금은 매우 겸손합니다. 어부였던 그가 그물질을 하는데 누구에게나 순종할 수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순종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무엇보다 순종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순종을 통하여 순종의 달인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우리도 이렇게 십자가의 순종을 실천해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그만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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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신앙생활을 하며 순종적으로 일할때 무엇을 얻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겸손하지 못하였을때 잃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고 겸손하고 순종적으로 일할때 무엇을 얻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예수님처럼 사는 그만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에서 현재 나는 얼마만큼 예수님을 알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과 함께 나만의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더욱더 알게된 계기가 있다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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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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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예수님께 사랑받던 제자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받던 제자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요한 사도라고 알려졌지요.
복음을 보면 호숫가에 서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사랑받던 제자인 요한 사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먼저 간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또한, 나머지 제자들이 고기가 가득 찬 그물을 끌고 나왔을 때, 그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린 사람도 베드로였지요.
여기서 베드로가 늘 앞에 나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수위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자 권위는 베드로에게 집중된 것입니다. 반면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요한 사도가 늘 나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법과 질서를 상징하고, 요한은 사랑을 상징한다 하겠습니다.
법과 질서가 없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고 애덕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반면 사랑이 없는 법은 형식에 흐르며 사람을 질식시키지요. 오늘날에도 법의 정신은 외면한 채 그저 법 자체에만 매달리는 일이 있지요.
우리는 법이나 질서를 찾는다고 사랑을 외면해서는 안 되고, 사랑을 찾는다고 법과 질서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내용이라면 법은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요. 따라서 이 두 가지, 법과 사랑을 공존시킬 때 진정 우리의 삶은 더욱 의미 있어질 것입니다. (출저: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213
5월4일[부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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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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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BQ-weTAsbo
[서울대교구 오석준 레오(생명위원회 사무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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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손수 따뜻한 아침 밥상을 차려주시는 주님!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다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습니다. 제발 그냥 좀 지나가 주면 좋겠는데, 물어봅니다. “뭐 좀 잡히나요?” 어떤 분은 더 사람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잡은 고기를 가둬놓은 망까지 꺼내 쳐다봅니다. 큰 놈으로 몇 마리 건진 날은 어깨가 으쓱하지만,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못 건진 날은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 보면 은근히 화까지 납니다.

제자들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밤새 티베리아스 호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단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말을 건넬 힘도 없어 다들 묵묵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 손나팔을 모아 외칩니다.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 심기는 더 불편해졌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누르며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포인트를 딱 잡아주시면서 조언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제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나? 우리는 이 바닥에서만 경력이 30년인 전문직 어부들이야!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어 정말!’ 그러나 포스와 위엄이 잔뜩 느껴지는 그분의 말씀에 압도된 제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눈치 빠른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알아차리고 수제자 베드로에게 보고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던지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채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힌 물고기를 몇 마리 갖고 오라고 하시고는 손수 숯불을 피우셔서 노릇노릇 맛있게 굽고, 빵도 꺼내놓고서는 크게 외치십니다. “와서 아침을 들라.”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스승님의 초대 앞에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참담한 실패의 밤을 보낸 허기진 제자들 앞에 손수 빵과 물고기를 대령하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조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 텐데, 그날따라 단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뭘 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 상태에서 임재 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 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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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RPJTJWNu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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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하면 좋은 것, 두 가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 많은 물고기를 잡고는 그분을 보러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자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당신 양 떼를 잘 치라는 사명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무엇이 좋을까요? 두 가지 큰 이유를 말해보려 합니다.

2003년 4월 26일, 등산가 ‘아론 랠스턴’은 유타 블루존 캐니언 좁은 틈에서 360kg 바위에 오른팔이 눌린 채 127시간을 버텼습니다. 물 350mL와 무딘 멀티 칼뿐인 그는 탈수, 저체온, 환각에 시달리며 헬멧 카메라로 “엄마, 아버지, 사랑해요. 내 인생을 내 방식대로 살게 내버려 두셔서 고마웠어요.”라며 유언도 남깁니다.

환각 속에서 그는 장차 태어날 아들을 한쪽 팔로 안고 뛰노는 미래를 보았고, 그 비전이 “살아 돌아가 가족을 다시 껴안겠다.”라는 결단을 품게 합니다. 다섯째 새벽, 바위를 지렛대 삼아 팔뼈 두 개를 부러뜨린 뒤, 힘줄과 신경을 무딘 칼로 끊어냈고 20m 절벽을 외팔로 하강하여 10km를 걸어 우연히 만난 관광객 가족에게 구조되었습니다. 병원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자 그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저를 ‘팔을 자른 남자’로 여기세요. 그런데 웃으면서 그랬다는 건 아무도 모르실 겁니다.”

사랑은 웃으며 나에게 필요한 중요한 것을 자르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세상 집착 때문에 자르지 못하는 것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론 랠스턴은 자기 팔을 자르고는 기뻐서 “내가 팔을 잘랐다!”라고 연신 외쳤습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여자와 헤어지고는 “자유다!”라고 말하던 남자 주인공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 나를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사라지면 그만한 자유도 없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달려오는 여자 친구를 보고는 배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세상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고통이 집착으로부터 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기쁘게 자기 팔까지 자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좋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나의 양 떼가 생긴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양 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맡겨지는 것입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남자 주인공이 자기 꿈까지 포기하게 만든 여자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자녀들 때문에 물론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목숨을 바칠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요한 바오로 2세는 돌아가시기 직전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내가 이 세상에서 돌보아야 할 양 떼가 없고 그래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나는 어떤 존재가 됩니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서 나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살 의미도 없어지고 무기력증의 고통으로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살고 싶어지고 열심히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양 떼는 나의 집착이 되지 않지만, 동시에 내가 목숨을 바칠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 유일하게 찾아온 동생에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고 말하며 죽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예수님만을 사랑해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은 갈등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친구를 사귈 것인지, 수백 년 동안 집착해 온 반지를 훔칠 것인지. 그는 결국 반지를 선택하여 외로운 죽음을 맞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줄 호빗들을 사랑했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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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른”과 “꼰대”는 나이는 비슷할 수 있지만, 태도와 사고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른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 꼰대는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른은 젊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경험을 나누되 강요하지 않고, 조언이 필요할 때만 건넵니다. 과거의 방식을 절대 기준처럼 내세우지 않으며, 세상이 변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배우려 합니다. 직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반면 꼰대는 자기 말만 옳다고 생각하고, 대화가 아닌 설교를 합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세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나이나 지위를 내세워 복종을 요구합니다. 제가 아는 어른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자주 여는 사람.” 저도 60이 넘은 나이에 후배 사제들에게 ‘꼰대’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말을 듣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보십니다.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돌보아라.”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 번이나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같은 수의 질문으로 베드로의 실패를 용서하시고, 사랑의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이라는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많은 순례자가 이 성당 안 바위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다. 바로 그 바위 위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저도 그 성당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가브리엘 신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 말씀을 실제 삶으로 살아낸 두 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분은 대구의 김장하 선생님입니다. 평생 한약방을 하시며 돈을 벌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쓰지 않고, 수많은 가난한 학생과 이웃을 위해 장학재단과 복지재단을 만들고 수백억 원을 기부하신 분입니다. 본인은 단칸방에서 검소하게 사시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요, 남을 위해 살 때 가장 행복합니다. 자기만 알고 살면 결국 외롭고 불행해져요.” 그 장학금으로 공부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문형배 헌법재판관입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공부하던 문형배 재판관은 김장하 선생님의 도움으로 꿈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훗날 성공한 뒤,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김장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건 나의 것이 아니야.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너에게 나눈 것뿐이다. 이제는 네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 문형배 재판관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법의 정의를 지키는 어른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판결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며, 공정하고 흔들림 없는 판결문을 낭독했습니다.

이 두 분은 말로 사랑을 외치기보다는, 삶으로 사랑을 증명한 진짜 어른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명령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않고, 우리 곁의 누군가를 돌볼 때, 진짜 부활 신앙이 시작됩니다. 내 자녀, 내 가족, 내 일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눈을 넓혀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 약한 이들, 외로운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어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돌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께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그분의 양들을 돌보는 발걸음도 함께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진짜 모습일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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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방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저마다의 특성에 따른 맞춤식 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자 토마스에게, 그가 말한 대로 그의 손가락과 손을 당신의 꿰찔린 상처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20,25-27 참조). 그런 예수님께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하고 대답하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도 맞춤형으로 다가가십니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하고 자신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그러자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 하고 대답합니다. 다른 이보다 더 사랑한다고 장담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그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번의 질문으로 세 번 배반한 베드로를 고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사명을 맡기시는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치유와 화해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드로에게 사명이 맡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함께 바라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세 번의 문답을 통한 치유와 화해의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베드로에게 거듭 당부하십니다. 많이 사랑받았으니 더 많이 사랑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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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진실과 증거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이 증언은 이미 분노와 미움을 초래하였었다. 회개를 위하여 외치는 진실의 소리가 다른 이에게는 미움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21,1-19: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 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만나 고기잡이 기적을 이루는 장면(요한 21,1-14)과 그리스도의 모든 양떼에 관한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장면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고 보고하고 있다(요한 21,1.14). 그리고 고기잡이 기적이든, 수위권 부여든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고기잡이는 교회론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밤새도록 애썼으나 헛수고만 하여 포기한 제자들(3절)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풍성한 고기잡이를 이룬 것(7절), 153마리의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11절), 고기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11절)이다.

고기잡이 기적은 선교사명을 암시한다.(루가 5,1-11 참조) 그 유사점을 보면, 어부들이 밤새껏 한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상황이 바뀐다. 그물을 가득히 채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만이 사도적 활동의 결실을 이룬다. 오늘의 고기잡이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없이 하는 공동체의 노력(헛수고)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노력(풍성한 결실)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선교는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만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153이라는 숫자는 ‘신비스러운 완성’을 뜻하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현존’하심으로 결실이 비롯된다. 비록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조직하는 임무가 있지만(3절) 그들의 성공은 그리스도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이렇게 제자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에서는 베드로의 사목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는 이미 고기잡이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어린양들과 양떼들을 돌볼 직무를 맡기시고(15-17절)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으로서 교회의 구원의 모든 활동에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신다. 베드로가 갖는 권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권위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파스카 선물’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봉사직은 사랑의 능력에서 비롯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사랑 안에 성장하게 되어있다.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세 번이나 배반을 했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목직과 봉사직은 더 큰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16.17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목직을 부여하시면서 그의 순교에 대해서도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19절)

베드로의 봉사직 사목직과 목숨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자기의 뜻을 중요시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데서 완전한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W. Marxen). 베드로의 직무와 다른 모든 직무는 오직 예수께서 하신 바와 같이 먼저 고통과 십자가상의 죽음의 직무가 되어야 부활의 직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직무가 되리라는 것이다.

제2독서: 묵시 5,11-14: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묵시록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상징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모든 만물이 경배를 드리는 천상전례를 묘사하고 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12절). 이 어린양은 흠숭을 받으시는 분으로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시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13절). 그러므로 오늘도 영원한 파스카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신분을 취하심으로써’ ‘주님’이 되신다(필립 2,7-11참조).바로 이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길이다.

제1독서: 사도 5,2732.40-41: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통하여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들과 같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하며 예수님의 부활의 진실을 전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29절)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일지, 시련의 길일지 모르나 아마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하고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삶을 청하면서 우리도 진리를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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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15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3)

1)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는 ‘그물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사도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사람을 낚는 어부들’입니다(마태 4,19). <사도는,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바다에서 구해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주님의 일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들인 어부들을 부르실 때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루카 5,4-6)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고기잡이 기적’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부르심’을, 또는 ‘부르심을 재확인해 주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3) 루카복음에서는,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은, 먹고사는 것이나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바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또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성령을) 받기도 전에 성급하게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시도한 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없이, 또 성령의 도우심도 없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했다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실패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4) 복음서에 사도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일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다가 실패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마르 9,18) 그때 사도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라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9,28-29)

사도들이 기도를 하지 않아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힘’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도는 사도 직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늘 기도하면서 주님의 힘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5) 루카복음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라는 말씀과 요한복음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6).” 라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깊은 데’와 ‘배 오른쪽’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걸어가는 길,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그 길과 삶은 허무에서 벗어나서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길과 삶이고, 자기 자신도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길과 삶입니다.

6) 사도들이 잡은 물고기 숫자 ‘153’은 충만함, 보편성, 완전함 등을 상징합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이 숫자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그보다 더 큰 일’은 ‘더 위대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더 멀리 가서,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할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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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괜찮아, 와서 아침을 먹자>

요한 21,1-19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예수님과 베드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괜찮아, 와서 아침을 먹자>

당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벗들

제 살길 찾아 당신을 버리고
옛 삶으로 돌아간 벗들

익숙한 옛 삶에서
실패하고 낙담한 벗들

당신의 말씀에 따라
옛 삶에서 새 결실을 맺은 벗들

다시 살아난 당신을 마침내 알아보고
부끄러움에 당혹해 하는 벗들

당신은 누구십니까
차마 물어볼 수조차 없는 벗들

벗들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시고
벗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시며

벗들을 따뜻하게 품으시고
벗들과 당신을 하나로 이어주시며

벗들에게 새 삶을 열어주시고
벗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벗들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부르시는 말씀

‘괜찮아, 와서 아침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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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배상원 로마노 신부님]

<사랑의 타이밍(Timing)>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이와 비슷하게 적시적기(適時適期), ‘인생은 타이밍’이란 말이 있지요. 이렇게 모든 일에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들 공감하실 것입니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때, 쉽게 찾아오지 않는 기회의 순간들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지요.

내가 사랑의 언어나 선물로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타이밍, 상 대방이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거나 더욱 기쁘게 받을 수 있는 그 최선의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위해서는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지요. 그 기다림은 지루하기도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상대방이 깨닫게 하려면 그가 맞이할 시련과 고통, 실패와 좌절을 묵묵히 지켜볼 때도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그렇게 가르치십니다. 당신의 참된 사랑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말이죠. 거친 풍랑에 기진맥진 시달리게 하시고, 의심하여 바다에 빠져들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내버려 두시며, 다락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밤새도록 애쓰고 아침이 되어 포기할 즈음에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시고, 고생하여 허기진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차려놓으십니다.

그렇게 극적인 순간에 당신이 누구이신지, 또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신 후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베드로를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 나 사랑해?” 이 말씀은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했어도 이렇듯이 널 향한 나의 사랑은 변함없어. 괜찮아. 그렇게 너도 나를 사랑해줘’라는 의미이지요. 주님의 특별한 선택과 사랑을 받은 베드로가 죄책감을 떨쳐내고 다시 교회의 반석으로 주님을 충실히 따를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듯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더 깨닫게 하려고 주님은 우리에게 종종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오묘한 타이밍에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당신께서 베푸시는 사랑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그 주님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우리도 다른 이에게 아주 기막힌 타이밍에 진정한 사랑을 베푸는 사랑의 사도들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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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정형준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아가페, 아가페, 필리오)하느냐?” 라고 세 번에 걸쳐 같은 듯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필리오, 필리오, 필리오)라고 세 번 같은 고백을 하지만, 처음에는 즉각적이고 거침없던 베드로의 고백은 두 번째, 세 번째에서는 처음의 당당함이 점점 사라지고 서운함이 묻어나는 분위기를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고백 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원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 번 모두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아르니온-갓 태어난 양-나보다 수준 낮은 이) 돌보아라.” “내 양들을(프로바티온-성장하고 있는 양-나와 수준이 비슷한 이) 돌보아라.” “내 양들을(프로바톤-성장이 다 된 양-나보다 수준 높은 이) 돌보아라.”

대체로 우리는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경원시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대합니다. 또 나하고 비슷한 사람은 경쟁 상대로 생각합니다. 비슷비슷한 사람끼리는 참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질시나 굴종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사랑하면 할수록 사실은 더 많은 사람과 부딪치게 됩니다.

첫째,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요한 21,1) 사랑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찾아가게 합니다.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찾아가는 것은 아부이거나 굴종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둘째, 사랑은 필요를 채워 주는 것(요한 21,9-13) 밤새 애썼는데도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주님은 몸소 아침을 준비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요한 21,15-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은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 베드로는 주님께서 ‘아가페’ 라 물으시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필리오’로 물으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리오 사랑은 아가페 사랑으로 자라 십자가 순교로 증거됩니다.

이렇게 주님은 복음의 마지막 결론처럼 사랑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누군가 사랑이 뭐냐고 물어온다면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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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인의 행복, 놓치지 마세요>

오늘 요한 사도는 그날 제자들의 명단에서 두 명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함으로 우리 모두를 그 자리에 초대합니다. 주님 곁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제자들의 겸연쩍었던 마음이 눈에 선하고 손수 음식을 건네주시는 주님의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요한 사도의 이야기가 무척 포근한데요. 티베리아스 호숫가를 비추던 아침햇살, 그날의 햇빛도 1억5000만 킬로미터를 내달려 그 소박한 해변의 식탁을 비추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비추고 있는 눈 시린 봄볕에도 주님의 사랑이 묻어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꽤 오래, 그날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그분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껏 옛 삶으로 회귀하는 못난 모습이 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들의 마음을 전폭적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주님을 향한 그리움은 ‘딴짓’에라도 몰두해야만 견뎌낼 수가 있었을 것이라 싶은 연민이 고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본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탓이라 싶고 이제 더는 주님과 함께할 수 없다는 ‘별리’의 괴리감이 그들의 마음을 허하게 했을 것이라고 편을 들게 됩니다.

때문에 베드로가 불쑥 “고기 잡으러 가네”라며 딴청을 부린 것도 가라앉아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던 의도라 짐작합니다. 서로서로 아리고 쓰린 속을 감춘 채로 ‘괜찮은 양’ 아무렇지도 ‘않은 양’ 허세를 부리던 중이었기에 모두가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를 따라나서며 고기잡이에 동행했을 것이라 이해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 마음에는 신학생 시절에 들었던 강론이 맴을 돕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거푸 똑같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오래 마음에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그 강론을 들었을 때, 덜컥 마음이 내려앉던 기억도 생생한데요. 세상살이를 고작 스무 해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때, 이미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도 더, 서른 번이 아니라 삼백 번도 더, 주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마음을 앓았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셨을지 꼽으며 진심으로 영혼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과연 무엇이라고 답을 드릴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떳떳하고 진솔하게 사랑을 고백해 드린 적이 도대체 있기나 한지를 돌아보며 스스로의 허물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많이 주님의 호소를 외면했는지, 딴전을 피우며 무시하고 모른 척했는지 울음이 터질 것도 같았습니다.

어쩌면 ‘믿음의 순수’일 듯도 하고 아직 삶의 때가 덜 묻었던 덕일 듯도 하지만 그 무거움과 자책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아니라는 걸 여러 해를 지내서야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오늘 주님의 물음은 우리를 매우 곤란하게 합니다. 차라리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코린토1서 13장에의 정확한 답을 베껴서 백 점을 맞을 것도 같은데, 굳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거푸 하시니 “뻔히 아시면서 무엇이 더 궁금하시냐?”고 되물을 것도 같습니다. 다 아시면서 “왜 자꾸만 물으시냐?”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을 것도 같고 뚱한 표정으로 주님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방법을 깨우친 믿음인이기에 주님의 질문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수월하고 편안한 안락을 추구하는 부활이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놓여있으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나아가는 일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친 진리의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고난 없이 부활로 건너뛸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으며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상태로는 결코 부활의 열매만 달랑 딸 수가 없다는 걸 입으로 달달달 외울 수 있고 머릿속에 좌르르 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사랑도 용서도 화해도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로 표현하며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일에 머물러 지난 허물을 탓하며 우울해합니다. 주님 앞에서 쩔쩔매는 것이 참회의 삶인 양 오해합니다.

정녕 주님께서 통탄하실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모두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지은 어떤 죄도 깡그리 없애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모든 사람이 항상 기쁘고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좋은 축복, 귀하고 복되며 고귀한 은총을 빠짐없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인 까닭입니다.

하여 오늘도 그날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뜻과 동떨어져서 딴짓에 몰두하며 ‘헛수고’를 하는 우리 이름을 간절히 부르십니다. 부디 이제부터는 다시, 또, 새로이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속내를 헤아려 드리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다고 믿습니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 4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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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 17)

생명의
시작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생명의 소리를
전하고 생명에
동참하는
생명 주일입니다.

하느님께
주신
참생명은
참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올바른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생명의 삶을
중심으로
충실히
걸어가는
삶입니다.

참된 사랑은
생명의 가치를
우선시합니다.

이렇듯이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생명의 존중이며
생명의
공생입니다.

전지구적인
생명공동체는
힘의 원리에
입각한
경쟁과 파괴를
멈추고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하여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새롭게
거듭나는
사랑이며
회개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회개를 통해
가장 복된
생명이 됩니다.

우리들의
의식과
존재방식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일체감이
바로
생명존중의
기본입니다.

생명의
한 가족이라는
이 체험이
진정한 부활의
체험입니다.

생명처럼
부활이 있고
부활은
생명처럼
약하고 여린
생명을 돌보고
보살피는
사랑입니다.

부활의 당부
말씀이며
부활의 본질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생명이며
생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생명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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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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