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6-8.19-28

복음밥

겸손신부 마진우

8분: 10:20 ~ 18:20

강론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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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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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파견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정체를 묻습니다. 군중이 요르단강에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는 종교 운동에 대하여 지도자들이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단호히 고백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기 에, 요한은 명확한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그들의 둘째 질문은 “엘리야요?”입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올 엘리야’라고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었지만 부인합니다. 겸손한 요한은 자신을 위대한 신앙의 영웅인 엘리야에 비기지 않습니다.
셋째 질문은 “그 예언자요?”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 따라 모세가 예언한 그 메시아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요한은 역시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넷째 질문은 “당신은 누구요?”입니다. 신원을 밝히라는 요구에 요한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하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우리도 신앙인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질문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며, 그분을 충실히 따르면서 사람들을 그분께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갇힌 사람들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자유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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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현재 나는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나의 삶의 의미가 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예수님이 나의 삶의 의미가 되는 모습에는 어떤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세례요한과 같은 겸손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보고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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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대림 시기의 세 번째 주일을 ‘가우다떼 주일’이라고 합니다. “기뻐하여라”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늘 미사 입당송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환호는 단식과 금육 또는 이와 유사한 신심 생활로 지금보다 회개의 시간을 더 길게 보냈던 예전부터 불리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몸소 사람이 되시어 오신 주님을 맞이하려고 고행하던 교회가 더욱 힘을 내고자 기쁨의 주일을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대림 제3주일에는 이처럼 기쁨이 스며 있습니다. 이 기쁨의 근거는 오늘 복음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는 유다인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내 뒤에 오시는 분”께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둠에 있던 사람들을 비추신 참빛으로, 사람들을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분께서 곧 오신다는 희망이 기쁨의 참된 근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출현을 알리며 구원의 기쁨을 선포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야가 경험하는 기쁨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모두 하느님의 인간 구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구원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 삶의 기쁨의 근거를 참으로 깨닫는다면,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권고한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07
12월17일[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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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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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VT23wpsAgY
[수원교구 황규현 보니파시오 신부님 집전(여주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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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대림시기 말씀의 전례 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는 대림시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이정표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벌써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이러다가 아무런 준비도 못한채 성탄을 맞이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동안 세례자 요한의 말씀들, 그의 삶과 죽음을 잘 묵상해보는 것도 아주 좋은 성탄 준비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보니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팍팍한 인생이었습니다. 힘겹고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또한 고독하고 슬픈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자 요한은 소년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황량한 불모지 밖에 없는 광야로 들어간 이유는? 조만간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실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영적 생활에 충실하고자 초간단 미니멀리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삶을 살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으로 가는 에너지를 모두 차단시키고, 그 에너지를 깊이있는 기도생활에 투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례자 요한의 외양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낙타 털옷 한조각이었습니다. 최고급 낙타 털옷이 아니라 길가다가 만난 죽은 낙타의 가죽을 벗겨 대충 만든 옷이었습니다. 가뭄에 콩나듯이 식사를 하셨는데, 먹기가 만만치 않은, 제대로 정제도 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거친 광야 생활은 그 자체로 죄와 타락, 금전과 우상 숭배로 얼룩진 유다 지도층 인사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요 도전장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남다른 기대감을 안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시면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을 깔끔히 정리하시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썩어빠진 무리들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시리라 믿었습니다.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께서 세례자 요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 증인인 세례자 요한은 뛸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광야로 들어가 쌩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 같아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분위기를 유심히 살펴보니, 정작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떵떵거리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압제는 여전했습니다. 헤로데 역시 변화되기란 글렀습니다.

세례자 요한 스스로를 바라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써 교육시킨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넘긴지 오래였습니다. 한 때 이스라엘 전역을 들었다 놨다 하던 세례자 요한이었는데, 지금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평생토록 공들였던 그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에 세례자 요한은 무척 슬펐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며 탄식을 터트렸을 것입니다. 지하감방에 갇혀 있떤 그는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1장 3절)

보십시오. 그토록 위대한 세례자 요한도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 역시 죽음 일보 직전 까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역시 예수님을 통해 변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였습니다. 백성들이 메시아를 통해 기다렸던 것은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이었습니다. 식민 통치의 종식이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신 바가 없습니다. 틈만 나면 되풀이하신 말씀은 그저 사랑하라는 말씀,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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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LJRnGakP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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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으로 태어나는 인간>

대림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무엇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까요?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구세주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면 그분이 오셔도 무시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은 왜 필요할까요? 그분 없이는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말하기 이전에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며 모세에게 예언된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은 메시아께 가는 ‘길’과 같다고 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러나 요한의 정체를 알려고 온 이들은 ‘길’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이렇게 따집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이르는 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을 감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고 놀라지 말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그분께 가는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려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자로 완성되어 태어난 것일까요? 그러나 여자는 자녀를 낳고 키울 때 완성됩니다. 그래야 모성애도 알고 자기 몸에서 아기를 먹일 살과 피와 같은 젖도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남편이 없었다면 아이가 태어날 수 없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남편을 존중하지 못하는 아내 밑에서 자란 아이는 엄마도 공경할 줄 모르게 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 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2-23) 여자가 남자라는 구원자를 만나야 여자로서 완성되는 것처럼, 사람도 하느님을 만나야 완성됩니다.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듯 인간은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여 자기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있듯,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신을 찾으면 됩니다. 우리의 양식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은 신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라틴어 단어 겸손(humilitas)은 ‘흙’(hum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흙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위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자기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만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고 태양이 비추니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에게 “나는 하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할 때 흙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첫째 날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아기에게 빛이 들어오면 부모를 찾게 됩니다. 처음엔 자기를 바라보는 부모를 구별하지 못하다가 점차 그와 자신을 구별하게 됩니다. 둘째 날 궁창이 창조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같은 물인 줄 알았지만, 나는 땅의 물이고 하늘의 물이 존재하는 것을 압니다. 셋째 날은 자기를 하늘의 물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물을 바다로 밀어내고 마른 땅이 나옵니다. 그러고는 하늘에서 비를 받아 땅에서 풀과 나무들이 자라게 합니다. 그러면 땅은 이제 풀과 나무가 하늘을 알아가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이때 비로소 땅이 완성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성모 마리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잉태한 땅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자기를 완성하여 당신께로 이끄는 길이 되려는 땅에게 주님께서는 참 하늘이 되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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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5년에 개봉되었던 영화이니 어느덧 20년이 되어갑니다.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4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가는 젊은 부부, 경제적인 여유는 있지만 애정이 없는 부부,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드는 아들, 카페를 운영하는 여인과 노년의 사장님의 우정을 잔잔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영화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려는 우리시대의 욕망과 허상을 비웃듯이 ‘사랑, 나눔, 우정’이라는 꽃마차를 타고 가려는 따뜻한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 속의 대사가 있습니다. “초라한 옷이 창피한 것이 아니다. 초라한 생각이 창피한 것이다. 이 세상에 너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놔줄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성탄’에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맞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예물을 준비하고 주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천사의 인도로 들판을 지나 이제 태어난 주님께 경배 드렸던 목동들이 있습니다. 이제 성탄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으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로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윤영주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조상의 묏자리를 잘못 써서 그렇다. 사주가 나빠서 그렇다. 등등 치료 방법도 거의 없고, 질병의 원인도 잘 알지 못했던 근동 지방의 고대인들에게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자식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나’라는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아픔이 마음과 영혼까지 좀먹어 갑니다. 그 때문에 치료는 ‘죄의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기에 현대인들보다 더 자주 성찰하고 참회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더 가까웠고, 주님께 더 많이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늘렸고, 질병의 원인도 알고 있기에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가 적어진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의지적으로라도 더 자주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영성의 안부를 묻는 김용은 수녀님의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언젠가 수녀원에서 마당을 정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몇몇 나무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때 유치원 교사인 한 수녀님은 어린이들과 함께 나무와의 고별식을 거행했습니다. 아이들은 한 명씩 나와 나무에게 이별 인사를 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고, 수고했다는 아이들의 언어로 이별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의식을 통해서 나무가 세상의 일부이고, 자신들도 그 나무와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초월자인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나 사물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과 모든 사물은 연결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습니다.” 이렇게 가톨릭평화신문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비록 그 길에 장애물이 있어도 넘어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좋아하셨고, 한동안 많은 사람이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아 라라 라라라 라라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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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8.19-28: 요한 세례자의 증언과 기쁨

오늘 주제는 기쁨이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비록 자기는 무대 뒤로 서서히 사라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그리스도께로 쏠리게 된다는 사실에서 그의 기쁨이 충만해진다. 기쁨의 동기는 구원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둠의 세력에 질식되고 있는 이 세상에 확신에 찬 모습으로 기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요한의 역할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를 증언해 주었듯이 성탄을 앞둔 우리에게도 그분을 증언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만일 깨어있지 못하고 그분의 신비를 볼 수 없다면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 라는 말을 우리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성탄 성가를 부르고 끊임없이 말구유를 경배한다고 하더라도 깨어있지 못하여 신선하고도 밝은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도 다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을 뵙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요한의 증언은 신앙과 전례에서 계속된다. 그의 증언은 우선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6절)으로서 예언적 사명을 띠고 온 것이며, 또한 그는 빛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그 빛을 증언한다. 증언이라는 의미는 직접적인 인식과 체험 그리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만짐(1요한 1,1 참조)을 전제하므로 역사적이다. 그분은 내면으로부터 파악되지 않으면 절대 인식되지 않는 분이다. 그러기에 증언이라는 것은 항상 상충적인 판단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즉, 진실과 거짓,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옳음을 가리는 심판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요한에게 그의 정체를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심문이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아요? 그 예언자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요?”(21-22절). 그러한 자세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앞으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요한의 태도는 진실하고도 진리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는 엘리야도 모세의 뒤를 잇는 예언자도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예언자로서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23절) 한다.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 희망과 구원, 그리고 회개의 소식을 전하기 때문에 그 소리가 가리키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25절) 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26-27절).

요한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안목으로는 알아 뵙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에도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그분의 위대하심을 증언하면서 청중들에게 그분께 대한 갈망을 일으키도록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자리를 마련해드리고자 하는 겸손한 행위이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의 신비 앞에 요한은 위대한 교육자이다. 이사야는 한 신비스러운 인물이 올 것과 그의 사명을 예고하는데 특별히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 압박받는 이들을 돌보아줄 것이라고 한다(이사 61,1-2). 예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고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이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믿지 않고 죽이려 했다(루카 4,28-30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해석하여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오히려 예수께 자신을 따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분이며,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고,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포로들과 옥에 갇힌 이들을 해방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어 주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다. 얼마나 많은 찢긴 마음들이 이 세상에, 보잘것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뛰어나다는 이들 사이에, 무죄한 사람들과 살인자들 사이에, 가난한 이들과 너무 많은 재물로 질식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예수님은 오셨다. 그리고 성탄 때마다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누구든지 필요로 하는 정신과 육체의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에게 오심을, 우리에게 베푸실 이 해방의 은총은 이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해져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참된 기쁨의 소식이었고, 나에게 혁명적이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혁명적인 것으로 그 마음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기쁨의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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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대림 시기도 어느덧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다가올 메시아의 구실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 말씀이 당신을 통하여 실현되었음을 장엄하게 선언하시며 공생활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루카 4,16-21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 전하신 소식은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알리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이의 마음과 복음을 듣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전례 독서는 ‘기쁨’에 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제1독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메시아의 기쁨을 노래하고(“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제2독서는 같은 소식을 전하여야 할 제자들에게 기뻐할 것을 권고합니다(“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빛’이신 분을 증언하는 기쁨 속에서 사람들을 회개의 삶으로 이끕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을 들은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화답송)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까?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여야 합니다. 소식을 듣는 이들에게 기쁨이 전하여지려면, 먼저 소식을 전하는 이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심전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은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향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그런 이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대림 제3주일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장려하는 자선 주일이기도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랑의 전도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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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홍근표 바오로 신부님(요셉나눔 재단법인 사무총장)]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어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답하면서,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라면서, 오시기로 된 분이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신다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언젠가 훈화 말씀 중에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또 삶의 여정에서는 우리가 만나는 형제자매들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샤를 드 푸코 신부는 나자렛의 가난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사하라 사막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그곳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서 나자렛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고 했던 푸코 신부의 삶은 오히려 우리에게 예수님의 삶과 사랑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해 그를 성인품에 올리셨습니다.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삶에 매료되어 그분의 영성을 따랐던 요셉의원의 선우경식 원장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한평생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가난하지만 때로는 매우 거칠고 말썽도 피우고 직원들에게 우격다짐까지 하는 그런 폭력적인 환자들을 보면서, 그들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한 내용은, 그가 평소 얼마나 그 가난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려고 노력했는가를 엿보게 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며 평생을 헌신했는데, 오히려 그를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선우경식 원장님이야말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코로나로 인한 충격에 많은 이들은 ‘지금이 신앙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 때에도 아주 심각한 전염병이 발병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위기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감염될 수도 있는 죽음의 위험 속에서 이교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이교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파라볼라노이’ 곧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라 불렀습니다. 그전까지 천여 명에 불과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그 후, 10년마다 40%씩 급격히 늘어나면서 로마제국 전체로 신앙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선택에 따라 지금이 오히려 복음 선포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가난과 질병과 외로움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따뜻한 사랑과 자선은 ‘우리 가운데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드러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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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이봉문 요한보스코 신부님(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

<구원의 확실한 표-자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성 요한비안네) “자선을 베푸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위탁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2023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담화문)

‘구원의 확실한 표’를 마련하고,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일상에서 몸소 살아가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아이들의 생일 때면 아이들을 위한 축하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기부하는 사례입니다. 돌 때부터 매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요한이네가, 시온이네가, 유승이네가 그 외 여러 가족이 자신의 자녀들만을 위한 사랑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이웃들을 향한 아름다운 행복동행-기부 나눔을 하기 위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교구 사회복지회를 찾습니다.

아이들의 생일만이 아니라, 축일·새 학년·회갑·칠순·부부의 날·취업·첫 월급·승진 등의 기념, 기일의 고인 기억, 첫영성체 친구들의 감사, 친구들이나 단체 모임 기념 등 기념과 감사와 축복을 담아 개인이나 가정, 단체들이 아름다운 행복동행-기부 나눔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족은 세상을 떠나신 부친의 유지를 기억하면서 유산 중의 매우 큰 금액을 기부해 주셨습니다. 이를 교구에서는 기금으로 적립하여 고인의 이름을 담아 하나의 장학회와 같은 “○○○나눔회”를 구성하였고, 지속해서 고인을 기리는 복지사업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교구의 공식 통합 정기 후원회인 “빵 다섯 물고기 둘” 후원회가 출범한 지 23여 년이 되었습니다. 긴 여정으로 아름다운 행복동행을 해주신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비록 매월 작은 기부일지라도 한 해 동안의 금액을 모으고, 또 여러 해를 거듭해서 모아보면 엄청난 금액의 후원금이 됩니다. 한 개인 개인들의 사랑 나눔 활동이 모여져 교구의 여러 사회복지 사업이 진행되고,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더해가며, 널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전해져 세상의 빛과 소금의 교회로 살아가게 됩니다. 후원과 기부는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소확행동-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동행”이며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더하는 가톨릭광주사회복지회(062-510-2881)가 교구장님의 2024년 사목교서에 담긴 것처럼, 사랑의 나눔 활동에 참여하는 교구민들과 함께,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겪는 가난한 이들과 아름다운 동행을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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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송강윤 모세 신부님(태풍성당 주임)]

<열등감 없는 세례자 요한>

[전지적 참견시점]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영자 씨가 했던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 군부대에서 장병들에게 강연을 하던 도중 이영자 씨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왜 거북이는 토끼랑 질 게 뻔한 달리기경기를 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답은 나중에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영자 씨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열등감, 즉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자신의 부모님은 생선가게를 운영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자기 몸에서 생선 비린내가 나면 어쩌나 하는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 중 누군가가 코로 냄새 맡는 시늉만 해도 자기 몸에서 비린내가 나서 그런 줄 알고 괜히 뜨끔했다고 합니다. 늘 왜곡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보니 냄새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는 일도 많았다는 것이지요.

본인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영자 씨는 강연 초반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하자는 토끼의 제안에 기꺼이 응답했던 것은 콤플렉스, 즉 열등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은 달리기 속도가 느리다는 열등감이 없으니까 토끼가 얼마나 앞서 달려가든, 그저 달리는 일에만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꾸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그 결과 자신이 ‘비교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들먹거리며 잘난 척을 합니다. 반면 자신이 ‘비교 열위’에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을 과대 포장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심하게 위축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열등감’이라고 부르는 증상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에게는 열등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와 그 밖의 위대한 예언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철저하게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이 하느님께 어떤 존재인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역사 안에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자기 뒤에 오실 구세주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분께서 가져다주실 구원이 어떤 모습일지를 알게 되리라는 것을, 바로 그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중요한 소명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기꺼이 자신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갖는 것은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돌아보고, 그분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특별한” 소명에 최선을 다할 때, 참된 행복의 길이 우리에게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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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김민수 레오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누구요?”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거나 자신의 직업을 알려야 하는 상황이거나, 또 자신의 말과 행동의 이유를 밝혀야 할 때, 이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황에 맞게 적당한 답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 상황에서 받게 되는 질문이지만 그 답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 답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똑같이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상의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사는 대림 시기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에서 또 우리가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면서 스스로 회개하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질문할 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답을 말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의 모범적인 대답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은 질문에 대한 요한의 답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의 이 대답은 요한의 정체성과 전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요한의 삶은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바로 빛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증언의 소리로써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고 온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도 요한을 본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인식하며 대림시기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하고 자선을 베푸는 이유는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시고 그분을 향해 나의 온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이번 대립 시기 우리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길 희망해 봅니다. 우리의 모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구세주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기를 또한 희망해 봅니다. 그리고 모두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할 때 서슴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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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윤달수 바오로 신부님(변동성당 주임)]

<더 나은 사람이 되어보자>

대림 제3주일을 보내며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을 반복하여 던지고 있습니다. 이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자신의 신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으며 요르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으로서는 조금은 우쭐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자신을 한없이 낮고 부족한 사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요한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한 가지 역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할수록 덜 나은 선택을 하기 쉽고 부족하다고 생각할수록 부족하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나은데 어찌 더 나아지려 하겠습니까.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이런 노력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는 것 아닐까요?

이러한 의미로 ‘set me free’라는 노래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치려는 길……”이라고 외치는 BTS 지민의 노래는 큰 울림을 줍니다. 대중음악가로는 이미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라있으면서도 미친 듯이 더 노력하겠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는 현시대에서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 하거나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려는 태도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에 만족하거나 이만하면 괜찮다고 안주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이든 어떤 위치에 있든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삶의 태도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는 요한의 겸손한 고백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결연한 삶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는 순간까지 무엇인가를 선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부족한 것을 조금이라도 성장시키는 선택을 무엇이라도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현 순간에 우리는 한 번에 백 걸음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 힘찬 한 걸음을 지금 당장 실천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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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오창근 베드로 신부님(화봉성당 주임)]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늘은 대림 제3주일로 ‘자선주일’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고, 어려운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또 오늘을 ‘기쁨주일’이라고 합니다. 사순 제4주일과 대림 제3주일을 ‘장미주일’ 또는 ‘기쁨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해마다 사순절과 대림절을 지내며 성찰과 반성의 생활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그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가올 부활과 성탄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그 희망으로 열심히 대축일을 기다리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당송에서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필리 4.4)라고 노래합니다. 제1독서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라고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를 듣고, 제2독서에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 하고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듣습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 하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하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예언자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그들의 질문에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아니다.” 하고, 겸손되이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자기에 대해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심지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고까지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고 작은 존재가 되길 원 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었지만 많 은 이들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존경했고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큰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께 희망을 두고,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서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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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님(봉담성당 주임)]

<케노시스(자기 비움), 비움과 채움>

사제의 삶은 ‘채움의 삶’입니다. 곧,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 가는 삶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도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면의 결핍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만, 저의 내면의 결핍은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린 시절 채우지 못했던 ‘컴퓨터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 저는 가장 좋은 컴퓨터를 구매했습니다. 그러곤 욕심이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걸 얻어 비워진 줄 알았던 ‘욕심의 공간’은 어느새 다른 욕심으로 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때로는 핸드폰으로, 스마트 워치로, 패드로 장르만 바뀔 뿐 또 다른 전자기기로 넘어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시작한 ‘유튜브 활동’은 또 다른 욕심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방송장비에 대한 욕구였습니다.

이것저것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자 그와 관련한 짐도 늘어났습니다. 짐은 부피도, 개수도 늘어나며 제 걱정거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간 이동을 해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는 새로운 임지로 인사 발령이 났고, 짐을 싸기 시작하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옷과 책, 방송장비와 각종 전자기기가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갓 사제가 되었을 때는 짐 없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는데, 그때보다 배는 많아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동안 한 번도 손이 가지 않은 옷을 버렸습니다. 사기만 하고 펼쳐보지 않은 책도 정리했습니다. 욕심으로 구입했던 전자제품은 나누거나 판매했습니다. 짐을 비워내기 시작하니 제 마음마저 정리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들과 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이 나의 욕심으로 채워져 있으니,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대림 제3주일 복음에 나오는 요한 세례자는 ‘비움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끊고 광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세례자는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알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채우기에만 급급한 삶이었습니다. 저 역시 ‘욕심’으로 채워진 주변으로 인해, 저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비워내야 합니다. 비워야 비로소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내 신앙의 현실은 어떠할까요? 이상은 현실의 반영입니다. 현실이 준비되지 않으면 이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 신앙적인 요소가 없으면서 신앙인이 되려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신앙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적이지 않은 것들을 비워내어야 합니다. 나에게 불필요한 것을 잘 살펴 비워내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넣는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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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최장원 라우렌시오 신부님(서문동성당 주임)]

<기뻐하라>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쁨으로 표현합니다. ‘해방과 석방을 통해'(61,1-2 참조)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10,10)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이 표현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 소식을 전할 때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도 쓰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 노나니……”라는 표현으로 완성됩니다. 즉 마니피캇을 통해 마리아가 행복으로 가득 차 기쁨의 상태에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 표현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실현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말합니다. 외치는 이는 단지 소리를 지를 뿐이며 소리입니다. 인간은 언어로 말하고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항상 기쁜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소리가 참된 소리인지, 거짓된 소리인지 올바르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항상 참과 거짓 속에서 혼란한 삶을 살 뿐입니다.

그 좋은 예로 유다인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 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라고 합니다. 유다인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의 거짓된 소리를 듣고 세상이 주는 기쁨을 찾으려고 했고, 참되고 영적인 기쁜 소식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의 소리를 전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유다인들은 세상의 소리에 집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왜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이야기할까요? 이 세 가지는 성령의 불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를 항상 기뻐하게 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게 만듭니다. 반면에, 세상이 주는 감각적 기쁨은 기도할 수 없게 만들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기쁨을 간직할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21,22)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자신을 소개함으로써 기다림의 선두 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명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통해(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다시 한번 겸손한 마음을 갖고, 기쁨과 기도와 감사하는 마음을 청하며, 깨어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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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이호용 스테파노 신부님(사직동성당)]

<함께 머무는 기쁨>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주일입니다. 또 ‘가우다테(기뻐하라)’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교회는 이날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 장미색을 사용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음을 알려줍니다. 입당송은 그 기쁨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요즘 많은 분의 얼굴에는 즐거움과 설렘이 가득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월의 특별한 날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게 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사람을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그에게 무엇이 필요하진 않을까, 무엇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이처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대방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가운데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사랑하는 ‘너’만이 남게 되며, 그의 삶에 내가 함께한다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도 이렇듯 사랑으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반복적으로 죄와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있는 우리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시는 가운데, 당신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은총을 받았으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도 사랑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드높이며 주님의 길을 곧게 내도록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점점 더 작아지고 우리에게 오실 주님은 더 커지셔야 함을 삶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의 기쁨을 충실히 준비하려면 내 욕구를 비추는 삶이 아니라 한 번 더 그분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의 사랑을 거울처럼 비추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오늘을 자선주일로 선포하여 그분께서 보여주신 사랑 속에 기쁨을 누리길 권고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다짐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기쁨 가득한 한 주를 계획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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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최강민 알퐁소 신부님(부개동성당 보좌)]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우리는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이 세상에 살아가며,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다.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과 닮아가기 위해 특별히 그분께서 보여주신 ‘겸손’이라는 덕목을 배우고자 하지요. 사실 겸손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 우리로선 수많은 선행과 참된 회개의 생활로 노력을 다하지만, 말처럼 겸손을 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체험하고 또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 저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였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은 ‘겸손’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괜히 잘하면서도 이웃들 앞에서는 못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으셨나요? 드러내지 않는 것이 하나의 겸손이라 생각하시는 분도 더러 계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잘하던 일조차도 이웃들 앞에서는 잘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가만히 있어야 그것이 부르심에 따르는 참된 제자의 모습인 겸손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전해주는 겸손은 앞서 말씀드린 그 의미와 사뭇 다름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존재에 관하여 특별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삶을 통해 나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계속해서 찾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내 삶의 의미를 탐구하며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뜻을 찾고 기다리는 것이 참된 겸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하느님 말씀을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담대히 지켜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며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저 먼 광야로 떠나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는 오늘날 대립 시기를 지내는 우리 모두에게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겸손하게 예언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준비하며 살아갔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실 길을 미리 정리하면서, 자신을 찾아온 모든 이에게 이 길을 걸어갈 합당한 주인이 따로 계심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하느님 말씀을 기다릴 뿐이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하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모습처럼, 사람의 일을 행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인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다짐으로 신앙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며 전해주시는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음성이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려 향해가는 여정. 그리고 이 여정에 함께하는 우리 이웃들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의 참된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곧 우리 곁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일상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를 흠 없이 그리고 겸손하게 생활하고자 노력하고 계셨다면, 어느새 아기 예수님께서 저 작고 아름다운 구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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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서철승 가롤로 신부님(사회사목국장)]

<주변에 관심을 가져 주세요>

다음과 같은 글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어느 주택가 마트에 늦은 밤 어느 젊은 여자가 아기를 안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여자는 초췌한 얼굴에,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고, 또한 아기를 안고 힘없이 걷는 모습에서 경제적인 여유 없이 혼자 애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는 미혼모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 아기 엄마는 아기를 안은 채 진열대에 있는 분유 한 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산대로 가서 분유 한 통과 구겨진 돈 만 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계산을 하던 마트 사장님은 만 육천 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기 엄마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계산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만 원 이외에는 더는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힘없이 돌아서는 아기엄마 뒤로 마트 사장님은 분유통을 진열대 제자리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다가 그 분유통을 그 높은 진열대에서 슬며시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분유통이 찌그러졌습니다. 그러자 마트 사장님은 아기엄마를 불러 세우고는 찌그러진 분유는 형태상 불량품이니, 반값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만 원을 받고 이천 원을 거슬러줍니다. 아이 엄마는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분유통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게주인은 여인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베푼다는 것은 굳이 꼭 큰 노력이나 큰 금액이 아니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글쎄요. 위 이야기가 사실인지 누가 지어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마트 주인의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닮아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저 마트 사장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위해 옆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정한 자선주일입니다. 1984년부터 시작하여 올해로 제40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선 주일은 국내의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의 나눔 실천을 강조하는 날입니다.

토빗기에서는 자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가진 것에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고 자선을 베풀 때는 아까워하지 마라.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너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네가 가진 만큼, 많으면 많은 대로 자선을 베풀어라. 네가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은 대로 자선을 베풀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곤궁에 빠지게 되는 날을 위하여 좋은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이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암흑에 빠져들지 않게 해준다. 사실 자선을 베푸는 모든 이에게는 그 자선이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 바치는 훌륭한 예물이 된다.”(토빗 4,7-11)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나의 노력이나 나의 재능만으로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또한 이웃들의 도움이나 양보,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내가 가진 재화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 아들아,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잠언 3,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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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이원규 라파엘 신부님(화북성당 보좌)]

<하느님 자비의 얼굴>

부제 서품을 한 달 앞두고, 아버지에게서 말기 암이 발견되었고, 두 달 뒤 아버지는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서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간암 4기였습니다.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떠나셨고, 어머니는 치유를 받으셨지만, 이 모든 결과를 떠나서 저와 저희 가족은 한 분 한 분의 기도와 도움과 위로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 하느님의 따뜻한 자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의 장례 미사 때, 문창우 비오 주교님과 마흔 분이 넘는 신부님의 손이 한 몸처럼 성찬의 빵을 축성하시던 모습, 그리고 당신의 일처럼 도움을 주시고 기도해주시던 수녀님들과 교우분들의 마음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대림 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내가 받아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임을 알고, 하느님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이웃에게 내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나누는 실천이 바로 자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선은 단순히 적선(積善, 착한 일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봉헌입니다.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선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고, 동시에 내 이웃과는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 한 자매로,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그가 베풀었던 세례가 자신의 권위와 파워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세례였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크신 하느님께서 죄 많은 자신을 친히 찾아와주시고 온갖 좋은 것으로 자신을 돌보아 주시는 사랑을 요한은 깨달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세례를 이웃에게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당신이 다시 올 때까지 모든 이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8,19)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신 사랑을 나누는 세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세례를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우리에게 당부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대림 시기를 보내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단순한 기다림을 넘어, 당신의 마음, 당신의 사랑을 나누는 삶, 자선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며, 커다란 봉지를 건넨 한 교우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봉지를 열어보니 몇 날 며칠에 걸쳐 들판을 다니고 따오셨을 법한 많은 양의 고사리를 보고 어머니와 제가 너무나 놀라고 감사했던 그 날이 떠오릅니다. 교우분께서 제게 이 고사리를 건네셨을 때 보이신 그 얼굴과 담아주신 그 마음이 바로 제가 보게 된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받은 도움에 감사하며, 오늘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가자고, 파이팅을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없이 베푸신 사랑이 우리 모두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은총이 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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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주보》 말씀 중심의 삶
[청주교구 조중희 가브리엘 신부님(사회사목국장)]

<예수님의 손과 발>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도 중반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은총이며 기쁨입니다. 오늘 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복음 속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대로 참된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참된 기쁨으로 다가오신 주님을 만났었던 옛 여정을 돌이켜봅니다.

시골 본당신부로 있을 때 홀로 사시는 할머니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예수님. 어서 오셔요!’ 하며 대문 앞에서 제게 인사하셨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인사말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 기도를 바치고 성수를 뿌리는 도중 하나의 물건이 유독 눈에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통만 있는 매우 낡은 나무 십자가였습니다. 사연을 여쭤보니 오랫동안 간직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새것으로 들여놓으면 어떠시겠냐는 제안에 할머니께서는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어하는 우리를 위해 언제나 한걸음에 달려와 어루만져 주시곤 하셨잖아요. 이제부터는 제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웃을 어루만져 주고 함께 걸어가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가 건넨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자선 주일을 지내며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고자 하신 촌로(村老)가 떠올랐습니다. 빛처럼 언제나 환하고 밝은 얼굴로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삶 속에서 참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길을 묵묵히 걷고 계신, 어쩌면 이미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버린 할머니셨기에 그분을 통해 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은 언제나 상대방을 위한 베풂을 향해 열려 있었음을 기억하는 가운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 하신 주님 말씀을 따라 우리 또한 그저 ‘남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주는 자선 행위 안에서 이웃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행복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애덕의 실천으로 다가올 성탄을 기쁘게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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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학배 안젤로 신부님(사회사목국장)]

<자선의 시작은 회개로부터>

어느새 기다림의 촛불이 3개가 밝혀집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은 준비되셨는지요?

받는 데는 익숙하면서 막상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때 고민이 많아집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또 내놓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부끄러워집니다. 저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사제로 산 지 어느새 30년이 되고 있는데 이 부끄러움의 반복은 끝이 난 줄 모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교우분이 선뜻 큰 기부를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중에 뵈었을 때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셨는지 물었습니다. 아주 부끄러워하시며 하신 대답이 저를 더 부끄럽게 했습니다. 피정하시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평생 받기만 하고, 욕심으로 살고, 온통 자신 걱정만 하는 부끄러운 자신을 주님은 늘 사랑으로 지켜주셨음을 알게 되었고, 깊은 회심에 이르렀습니다. 회심은 주님께 대한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하였고, 감사의 삶은 나눔을 결심하는 원동력이 되어 아내와 깊이 의논하여 결정하셨답니다. 기도는 회심을, 회심은 신앙의 기쁨을, 기쁨과 감사는 나눔으로 이어지는 신비가 완성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 갇혀 껍질을 깨지 못한 채 신앙의 빛마저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요? 미루지 말고 회개하여 신앙의 기쁨을 되찾고, 나눔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여 주님 강생의 신비를 사랑으로 완성합시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권고하십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살 5,16-18)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은 진정한 회개에서 시작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자선으로 완성됨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자선주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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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빛이신 예수님>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이 말은,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에 관한 말이고, “예수님은 빛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앞뒤에 “예수님은 빛이신 분”이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마태오복음서에도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빛’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이 말씀들에서 ‘빛’은 희망, 구원, 생명 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신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신 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어둠’은 죄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요한 5,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라는 예수님 말씀과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라는 사도 요한의 말을 합해서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빛을 내는 광원(光源)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아서 빛나는 등불이고, 사람들을 빛이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예수님은 빛 자체이신 분, 즉 ‘광원’이신 분입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한때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오해했었음을, 또는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음을 나타냅니다. 산상 설교에도 빛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ㄱ.16)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은 세례자 요한처럼, ‘빛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받아서 빛나는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며,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부터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등불 구실을 잘하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잘 받는 일부터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이라는 말씀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빛 가운데에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위선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죄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라는 말씀은, 점점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별처럼 빛나라는 말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연상됩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하는 등불은, ‘구원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등불이 되어서 이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해야 하는 신앙인들의 사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8ㄴ-11.13-14) <이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20)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빛을 피해서 더욱더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데,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그 모습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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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펭귄은 새일까요? 아니면 물고기일까요? 작지만 날개가 있는 것을 보면 ‘새’ 같기도 하고, 전혀 날지 못하고 헤엄을 잘하는 것을 보면 ‘물고기’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날지 못해도 분명히 ‘새’라고 합니다. 헤엄을 치면서 물속에 있는 물고기, 낙지, 새우 따위를 먹지만 말이지요. 더군다나 땅에서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에 우리는 우스꽝스럽다고 말합니다.

사실 남극은 너무 추워서 하늘 나는 것이 전혀 도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그래도 풍부한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펭귄은 하늘을 날게 하는 날개를 줄여서 바닷속에서 헤엄을 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겉모습만을 보고서 우스꽝스러운 ‘새’라고 말하지만, 환경에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 놀라운 ‘새’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좋아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돈도 좋고, 세상의 높은 지위도 부러움을 삽니다. 명품이라는 물건들은 멋져 보이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많은 재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것은 지금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물질적인 세속적인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주님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그 판단이 훨씬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성녀가 주님의 가치만을 따랐습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의 복음 말씀에서도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주님으로부터는 큰 인정을 받게 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구세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내가 구세주다.”라고 한마디만 했어도, 사람들은 하느님으로 떠받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가치가 더 중요하기에 가장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자기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항상 맨 끝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롭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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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비록 아니어도>

요한 1,6-8.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 비록 아니어도>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7-8)

빛이 오시네

빛에 앞서
빛이 아닌 나 있네

빛을 닮아
오시는 빛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얼이 오시네

얼에 앞서
얼이 아닌 나 있네

얼을 닮아
오시는 얼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참이 오시네

참에 앞서
참이 아닌 나 있네

참을 닮아
오시는 참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길이 오시네

길에 앞서
길이 아닌 나 있네

길을 닮아
오시는 길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사랑이 오시네

사랑에 앞서
사랑이 아닌 나 있네

사랑을 닮아
오시는 사랑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살림이 오시네

살림에 앞서
살림이 아닌 나 있네

살림을 닮아
오시는 살림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기쁨이 오시네

기쁨에 앞서
기쁨이 아닌 나 있네

기쁨을 닮아
오시는 기쁨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희망이 오시네

희망에 앞서
희망이 아닌 나 있네

희망을 닮아
오시는 희망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주님이 오시네

주님에 앞서
주님이 아닌 나 있네

주님을 닮아
오시는 주님을
온 누리에 드러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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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얼굴 없는 천사>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이 시간 내어주는 삶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사랑의 주님을 만나시길 희망합니다.

자선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한 방법입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받고 소외당한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사랑을 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 내어주는 주님 사랑을 사는 것이 자선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자선을 하되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선을 베풀면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성 암브로시오) 우리 성당 자선함은 언제나 알맞게 채워집니다. 이번 젊은이들의 일일주점 수익금 전액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헌되었습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았습니다.

신명기24장19절에서는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2절을 보면“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4,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라면 자선은 꼭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깝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신명15,10), 기쁜 마음으로(로마12,8)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3)

그러므로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그러나 만약 이만큼 도우면 나에게 그만한 대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그것은 자선이 아니라 장사입니다. 그저 베풀 수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

성탄이 오기 전 자선을 베풀어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의 옷장이나 서랍에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한 가지씩 골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선물을 주고받는데 버림받은 예수님께도 한 가지씩 준비하셔서 나누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배고픈 예수님, 아파하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내 눈썹이 내 눈 가까이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내 코가 눈 가까이 있는데도 또한 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주 가까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들은 보는데 내가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나를 내 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올해도 어김없이 자선함이 비치되어 있고 익명의 얼굴 없는 천사가 금일봉을 넣었습니다. 그는 드러나지 않게 소리소문없이 큰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존경스럽습니다. 생색내기에 익숙한 세상에 천사들은 여전히 감동을 줍니다. 우리도 얼굴 없는 천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1,26).고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지만 여전히 그분을 몰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자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유한준)고 했습니다. 관심을 두는 만큼 보이고 또 아는 만큼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관심 있는 사람은 금방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십시오.(이사61,10)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7-18)

예수님은 어디 계실까요? 1)천당 2)지옥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계신답니다. 온갖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시고자 지옥에 계십니다. 험하고 어려운 곳을 찾아다니시며 어둡고 더럽다고 생각되는 곳, 괄시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바라고 계십니다. 자선을 베풀어 그분의 사랑에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송두리째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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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詩)같은 인생>
-기뻐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사랑하는 모든 분들 만세!”

만세칠창으로 시작하는 대림 제3주일, “기뻐하여라(Gaudate) 주일”로 일명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제의가 가리키는 것처럼 “장미주일”로 불리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첩경의 지름길인 자선을 권장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입당송도 화답송 후렴도 우리를 한껏 기쁨으로 부풀립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4,4.5 참조)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나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12월17일부터는 대림2부의 첫날로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그 아름다운 기쁨의 노래 “O후렴”이 시작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펼치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어제부터 책 제목이 흥미로워 읽기 시작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김상욱)이란 에세이집입니다. 작가의 변도 멋집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 제목이다…그래서 책의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가득한 책이지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의 경이로움을 담아보려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 필자의 마음을 담은 제목이라 할 수 있다.”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시가 인간으로 바뀌었네. 시같은 인생! 참 멋지겠다.”깨달음과 더불어 “시”를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좋을 참 좋아하는 “詩가 찾아왔네!”라는 얼마전 인용했던 자작시도 생각났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바친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시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라네
나 언제나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詩를 사랑하고 섬기듯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나라의 삶이라네.”-

말씀(言)의 절(寺)인 시(詩), 한자 뜻도 얼마나 깊고 멋집니까! 하느님의 참 좋은 시가 예수님이요, 예닮의 여정을 살아가는 이들은 시같은 인생이 됩니다. 시처럼 살고 싶은 것은 이미 예전부터 제가 소망한 삶이었습니다.

-“詩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餘白
종이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
시공時空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隨筆이나 소설小說이 아닌
詩처럼 살고 싶다”-1998.1.24.

어제 아름다운 분이 방문하여 면담고백성사와 더불어 친필로 쓴 성탄카드를 미리 선물했고 즉시 다음의 덕담을 선물했을 때 순간 꽃처럼 기쁨으로, 웃음으로 활짝 환하게 피어나던 그 자매의 얼굴을 잊지 못합니다.

“자매님 자체가 최고의 성탄카드요, 자매님 삶자체가 시같은 인생입니다. 주님의 시같은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주님의 詩같은 아름다운 인생”을 소망할 것입니다. 어떻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그 참 좋은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기뻐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십시오. 바로 대림시기,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의 기쁨이요 주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다 지녔어도 마음에 희망이, 기쁨이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 신자의, 참 영성의 표지가 기쁨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강권하는 제2독서 기쁨의 사도 바오로가 그 모범이요 제1독서의 기쁨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도 우리를 기쁨으로 격발激發케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고백으로 삼아 대림시기 내내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같은 삶입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2.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3.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4.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생명과 빛, 희망과 기쁨을 팍팍 심어주는 시가 진짜 참 좋은 시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시인 이사야 예언자요,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시인인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이사야 예언자를 좋아했는지 알겠습니다. 하느님이 아니곤 도대체 이런 기쁨의 선물, 어디서 받을 수 있겠는지요!

둘째, 감사하십시오.
이 또한 참 신자의,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감사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다 지녔어도 감사하는 마음 없으면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감사의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감사 역시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감사의 발견이요, 이런 감사는 역시 선택이 됩니다. 삶이 선택이고 행복이 선택이듯 감사도 선택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자체가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의 선택과 훈련, 습관의 영성훈련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기쁨의 사도이자 감사의 사도인 바오로의 강권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참으로 감사의 생활화가 일상화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금을 쌓아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혜에, 사랑에 자연스런, 당연한 응답이 감사요, 감사의 표현이 자선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발적 사랑의 자선이야 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얼마전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언이 향기처럼 길이 남아있습니다.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어프(enough)! 충분하다!” 말씀하셨다는 인어프의 사람, 베네딕도 교황은 말그대로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인어프! 충분하다!” 감사하는 행복한 사람을 유혹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인어프(ENOUGH!)! 충분하다!” 늘 잎에 달고 사시기 바랍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 감사한 날입니다.

셋째, 겸손하십시오.
이 또한 참 신자의 표지이자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다 지녔어도 겸손이 없으면 참 기쁨이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듯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겸손한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참으로 맑고 향기로운, 아름답고 멋진 매력적인 삶이 예수님을 닮은 이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겸손의 빛나는 모범이 빛이신 주님을 증언하러 온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 다면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겠습니까? 참으로 세례자 요한의 대답이 통쾌하여 신선한 감동이요 감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도, 엘리야 예언자도 아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바로 우리가 대림시기 기다리는 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거울에 자신을 자주 비춰봐야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겸손한 참나의 얼굴입니다.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을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없는 우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며 날로 예수님을 가까이 닮아갈 때 겸손하고 온유한 참나의 모습입니다.

영혼 건강에 최고의 식食이자 약藥이, 하늘에 끊임없이 보물을 쌓는 삶이, 기쁨과  감사, 그리고 겸손의 삶입니다. 이래야 영혼의 치유는 물론 날로 영혼을 튼튼하게 하니 저절로 육신의 건강도 뒤따릅니다. 이래야 육신한테 끌려가지 않는 영혼 주도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대림시기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당신을 닮아 기쁨과 감사, 겸손의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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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나는 기쁨>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보면 실천 불가능한 권고를 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어떻게 언제나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실제를 보면 어쩌다 한번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도 ‘언제나’가 아니라 ‘어쩌다’ 한 번입니다.

기쁨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누구 덕분에 이루어졌을 때 감사하게 되는 것인데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드물 뿐 아니라 누구 덕에 이루어지는 것보다 누구 땜에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으니 기쁠 일은 적고 감사할 일은 더 적지요.

그러니 그것이 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기쁨과 감사 사이에 기도를 껴 넣고 기도하는 사람만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서를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 밖에선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순 없다는 밀이 되지요. 그러나 이 말도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없지만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다 이루어주셔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엄밀하게 얘기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일치하지 않으면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약을 달라는 우리에게 절대 마약을 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시잖습니까? 그리고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달걀보다 훨씬 더 좋은 성령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말 대로
안 주실 것은 아예 청하지 말고 주실 것을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주시고,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 청을 다 들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애인과 있으면 그 자체로 기쁘고 즐거운 것처럼 하느님 안에 있으면 그 자체로 언제나 기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하느님 그분 자신이지 그분이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 무엇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그리고 보석을 바라고 애인을 만난다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내 바라는 것과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주님을 만나면 참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는 욕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기다리고 만나고 그래서 언제나 기쁘고 늘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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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1,8)

<증언의 삶인 자선!>

오늘 복음(요한1,6-8.19-28)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었고,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입니다.

유다인들이 사람을 보내어 빛을 증언하러 온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1,19.23) 요한은 이 물음에 서슴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 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0.23.26-27)

유다인들은 요한을 두고 ‘그가 혹시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자선(慈善)’은 ‘남을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고 도와주는 행위요, 사랑의 행위(慈)이고 착한 행위(善)로써,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자선은 가엾은 마음으로 가득하셨던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러 오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으로 당신의 자선을 완성하십니다. 자선을 베풀러 오시는 주님의 구체적인 모습이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인 오늘 제1독서의 말씀,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선이 되고, 그래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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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 20)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겸손과 인내를
사랑과 자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배우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대림의
촛불이
하나 더
밝혀졌습니다.

자선은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운
관심의 빛이며
나눔의 빛입니다.

생명들이
돌아가야 할
길은 자선이며
회개의 길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자선 주일
입니다.

자선의 근원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따뜻한 마음의
실천인
자선으로
모든 이웃은
가족이 됩니다.

사람의 향기는
자선의 향기로
드러납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위로와
용기를 주는
자선입니다.

서글픔을
안아주는
자선입니다.

지속적인
자선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선은 단지
물질적인
자선만이 아닌
정신적인 자선도
아울러 함께
동반되어야
합니다.

나누는 사람의
입장보다
받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려의 관점으로
나누는 것이
진정한 자선입니다.

따뜻한 마음의
참된 자선이
아프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세상을 밝히는
밝은 대림의
촛불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따뜻한 기다림은
따뜻한 자선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자선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당신의
모든 사랑을
다 내어주시며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에게
오십니다.

간절하며
진심어린
기도와
자선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희망의 주님을
뜨겁게 기다리며
뜨겁게 나눔을
실천합시다.

자선은 서로를
살리는
희망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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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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