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요한 1장 35-42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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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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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그분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눈여겨보시고’, “무엇을 찾느냐?”며 말을 거시고, “와서 보아라.” 하시며 그들을 먼저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무엇을 찾았고, 무엇을 보았을까요?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제자들의 확신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제자들의 삶은 복음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부르심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도 세례성사와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살면서 때로 하느님을 벗어나 내 몸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셨기에 우리 몸은 하느님께 속해 있고, 사실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륜을 멀리하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훈계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뜨끔해지는 것은 내 양심 속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음성과 달리 내 몸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모순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른 자신들의 속내에 세속적인 영광과 성공에 대한 바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참된 진리를 뒤늦게 깨달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사무엘 예언자처럼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뒤늦게라도 응답할 수 있도록 깨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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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예수님을 따라갔다(37절)”…살면서 많은 결정을 하게됩니다. 우리가 선택의 모든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신앙)에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 우리의 선택에 방해가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라고 하며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일을 성실히 하고 있는 제자들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즐거이 전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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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무엘은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엘리를 찾아갑니다. 엘리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온 사무엘을 보고 주님께서 부르심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주님께 대답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10,17 참조)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뿐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할 때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기도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기도 뒤에 올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기도는, 들을 준비가 된 사무엘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는 시간이며, 그분과 내가 온전히 마주하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사실 우리는 삶에서 인내해야 하는 순간에 많이 부딪힙니다. 좀 더 인내하지 못할 때 주님께 의지하면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찾을 것은 물건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으며,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깨어나는 데 필요한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안에서 무엇인가를 한참 찾다가 문득 무엇을 찾는지 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이를 먹은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찾는 것은 물건이 아닌 예수님이었고, 그분께서 계신 것을 보고 함께 지내며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주님과 머무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집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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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능동적인 기질을 가진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단도직입으로 대화를 텄고 그분과 함께 묵게 되었다. 예수님과 공유했던 시간이 그에게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복음서에는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며 시각까지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이분이야말로 메시아시다!’는 고백까지는 적어도 빛과 어둠을 가로지르는 질곡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을 만나는 여정은 탐험과도 같다. 이끌림만 있을 뿐 정체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현장 체험으로 세계의 몇몇 그리스도인 공동체 마을에 갔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공동체의 사립문을 들어서자 아직도 복음을 해석 없이 따르고 사는 노아의 후예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고백하는 신앙은 무엇이었으며, 사제로서 선포한 것들은 정말 나의 믿음이었는가?
달은 어디에서 보아도 같은 달이지만 창틈으로 보는 모습과 마당에 나와서 보는 모습, 그리고 동산에 올라가 보는 모습은 같지 않다. 깊숙이 들어가는 탐험에는 특별한 세계가 있다. 수도자나 사제의 성소를 바라보는 것도 그와 같다. 전해 듣는 것과, 직접 성소 모임에 참여하는 것과, 들어가 살면서 체험하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주님을 만나는 데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붙잡혀 끌려가는 현상이 나타나거든 몸을 맡겨야 한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성소자는 성소에 뜻을 둔 이들을 벗 삼아 함께 어울리려 대화하고 토론하며 생활과 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유유상종의 공동체다.

♣복음말씀의 향기♣ No3735
1월14일[연중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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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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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541wT8oDfFs
[서울대교구 이영제 요셉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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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통해 과연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언젠가 공동체 차원에서의 큰 행사를 치른 적이 기억납니다. 의미 있고 소중한 행사였지만, 다들 학업과 사목을 병행하는 중인지라, 행사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준비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입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리 뛰며 저리 뛰었지만, 생각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능력은 감안하지 않고 너무 크게 일을 벌인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행사 당일, 너무나 송구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꼭 와주십시오. 와서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라고 외치며 적극적으로 초대했기에, 많은 손님들이 오셨지만, 정작 차린 것도 부실했고, 보여드릴 것도 부족했습니다.

성소 급감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는 이 시대 수도회 본부에서는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들끼리만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지 말고 청소년들에게 외치십시오. 와서 보시오!라고.”

그래서 요즘 저는 적극적인 초대에 우리 공동체를 찾아온 청소년들에게 과연 보여줄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을 주는 그 무엇인가를 준비해놓고 그들을 초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와서 보아라.”라고 적극적으로, 자신감 충만한 목소리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따라 그분이 묵고 계시는 곳을 찾아온 제자들은, 과연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 그분 자체에서 뿜어나오는 강력한 영적 광채를 목격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극진한 환대와 친절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생명의 말씀에 그 오랜 갈증도 말끔히 해소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머무시는 공간이 곧 하느님 나라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잠시나마 예수님과 초기 제자 공동체에서 그 특별한 맛, 지상 천국을 체험했던 안드레아는 형 시몬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세상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수도 공동체, 본당 공동체,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를 통해 과연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와서 보시오!”라는 우리의 초대에 우리 공동체를 방문한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과연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겠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한 성소자가 우리 공동체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딱히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망설임과 공들임 끝에 겨우 한 예비자를 우리 본당 예비자 반으로 등록시켰는데, 우리 공동체가 그에게 건넬 감동과 기쁨이 하나도 없다면 이 얼마나 난감한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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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dh1mj2dx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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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진정으로 만날 때 일어나는 일>

죄의 원인은 한 마디로 ‘불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시러 오신 것이 ‘평화’입니다. 미국에서는 건전하게 살던 청년들이 베트남 전쟁 때 20% 정도가 헤로인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쥐 실험에서도 쥐 한 마리를 가두어두고 일반 물병과 마약이 든 물병을 두면 대부분 쥐는 약물이 들어있는 물병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1970년에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는 쥐가 과연 마약에 중독된 것인지, 환경 탓인지를 고민하여 새로운 실험을 합니다. 그는 인턴으로 일할 때 만났던 한 환자를 떠올렸습니다. 그 환자는 크리스마스 때 쇼핑몰에서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았던 그는 헤로인의 힘을 빌려 무대에서 여섯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독은 중독 자체가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쥐들의 천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놀이기구들과 친구들, 짝짓기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쥐들은 약물이 든 물을 섭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어땠을까요? 미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95%가 자발적으로 헤로인을 끊었습니다. 헤로인으로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제 아주 자명합니다. 천국을 만나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천국을 맛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렵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고 상처 받을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 부르며 묵으시는 곳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묵은 다음에는 동료들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TVING에서 방영된 ‘이재, 곧 죽습니다’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나는 과정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최이재는 대기업 입사 면접을 보러 갈 때 차에 치여 자살을 한 남자가 죽어가며 자신을 부여잡는 바람에 면접을 망칩니다. 7년간 갖은 고생을 하며 다시 도전하곤 했지만, 월세도 내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애인 앞에서도 더는 당당할 수 없어서 헤어지자고 하고 “죽음은 내 고통을 끝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하며 빌딩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지만, 늦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납니다. 자기를 ‘죽음’이라고 말하는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죽음을 한낮 자기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긴 최이재에게 벌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두 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살게 합니다. 다양한 삶을 겪으며 그는 모든 삶은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심지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니 누구도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참함 속에 가장 비참한 한 가장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열한 번째 몸도 빨리 끝내버리려고 도로로 뛰어듭니다. 그때 죽어가며 7년 전의 자기가 걷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손을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저주했던 그 사람이 바로 죽음을 하나의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겼던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는 엄마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엄마가 자기를 키우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리고 자기 죽음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깨달으며 죽음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엄마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만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주님을 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교만하니 사람을 대하기가 두려웠고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의 비참함을 깨닫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신학교는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되자 신학교는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스트레스가 적으니 그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빼앗는 죄는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치고 싶다면 죽음과 같은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분 앞에서 ‘무’(nothing)이 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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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5대(代)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삶이 터전이듯이, 천주교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제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보다 세례명이 더 익숙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 오면 연도를 바치고, 미사에 참례 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은 용서가 되었지만 성당에 가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못할 정도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아이는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을 배우듯이, 성탄 전야 미사, 부활 성야 미사, 판공, 묵주기도는 굳이 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 중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을 하느님이 은총이라며 기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가정은 제 성소의 ‘못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동생은 자연스럽게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2013년 교구장님께서 저를 성소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성소국장의 소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식별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학생들의 모임을 ‘예비신학교’라고 불렀습니다. 예비 신학생들은 중학생부터 만 29세의 젊은이들이 대상이었습니다. 매월 예비신학생들의 모임이 있었고, 신학생들이 예비신학생들 모임을 주관하였습니다. 저는 예비신학생 모임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부르심’이라는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소식지도 발간하였습니다. 성소국에서 주관하는 큰 행사는 ‘성소주일과 서품식’입니다. 성소주일은 해마다 부활 제4주에 있었습니다. 서품식은 해마다 2월 첫째 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5번의 성소주일 행사는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장소도 미리 예약을 해서 올림픽 체조경기장과 고척동 돔구장에서 서품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4분의 보좌 주교님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도 있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큰 소임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입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는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무엘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기는 많은 갈등과 분쟁은 먼저 듣지 않기 때문에 생기곤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3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미리 신경을 쓰는 농부이고, 이를 上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이왕 생겼으면 크게 자라기 전에 뽑아 버리는 농부이고, 이를 中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밭에 잡초가 생겼는데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나중에 추수할 때 뽑는 사람인데 이를 ‘下農’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어떤 농부가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상농이겠지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앙의 농사를 어떻게 져야 할까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밭에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곤 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마음의 밭에 떨어졌으면 곧바로 그 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죄라는 잡초가 자라서 내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그 죄의 무게 때문에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부류의 태도로 신앙의 농사를 져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 부류의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적인 성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들도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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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35-42: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

오늘 전례의 핵심은 부르심과 따름에 관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가 자기의 두 제자와 예수를 만나게 해 주는 장면(35-39절), 안드레아가 주선하여 베드로를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장면(40-42절)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공통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만남은 제자들에게는 특별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던 정확한 시간까지 기록하고 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39절). 이것은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자체가 생애의 결정적인 사건이었고, 복음을 기록하는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절). 요한의 어린양은,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1-28)으로, 고통받는 하느님(야훼)의 종(이사 53,7 참조)으로, 또 날마다 성전에서 어린양의 번제(탈출 29,38-46 참조)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중에도 무한한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의 죄를 쳐 없애고 자신의 희생과 봉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당신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홀로 거룩하신 분,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와의 일치를 보여주셨다. 바로 이분을 요한은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마르 1,7), 자기보다 앞서신 분(요한 1,30)이며,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하면서 제자들을 그분께 보내 드린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간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간다. “‘무엇을 찾느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 ’”(38-39절) 예수께 대한 체험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남에게로 전해지게 된다. 나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는 전하고 싶은 체험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찾느냐?”(38절). 이 질문은 첫 번째 제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던져지는 물음이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항구한 것임을 생각하고, 그 따름의 동기와 내용을 끊임없이 확인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항구한 따름의 태도를 보일 때, 그분의 신비가 우리를 무한히 초월하며, 그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나 그분에 대한 체험이 한계가 있음을 알고 오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만이 우리를 완전한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참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더 그분 앞에 겸손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의 공간을 더욱 넓힐 수 있다. 이런 추구의 노력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를 새로이 확인해줄 것이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으려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동기를 꾸짖으셨다(요한 6,26-27 참조). 그들은 기적을 통해 그리스도를 찾기보다는 기적을 통해 체험했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기보다 그리스도께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그분의 복음을 우리의 취향, 생각, 행동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질문이다. “무엇을 찾느냐?”(38절)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38절).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그분과 친구가 되고 생활, 기쁨, 지식 등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즉, “선생님, 우리도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신지 가르쳐 주십시오. 또 당신이라는 인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십시오.”(G. Segalla, S. Giovanni, Fossano 1972, p. 165 참조)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39절) 하시며, 당신이 누구신지, 또 이미 그분과 함께 살아야 할 제자들의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분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지를 체험하라 하신다.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그리고 복음은 안드레아의 소개로 베드로를 예수님과 만나게 하는 장면과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먼저 불림을 받은 자는 전달하는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삶의 의미로 체험하고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가치에 대한 강한 체험을 한 형제들의 중재로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부르심은 결코 고립된 것이라든가 고립시키는 사건이 아니다. 부르심은 공동체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시몬의 이름을 바위라는 뜻의 케파라고 하신 것은 교회 안에서의 사명을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그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한다(마태 16,18 참조). 그러니 우리가 불림을 받은 것도 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더 헌신적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따른다는 동사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37.38.40절). 따름은 믿는 이가 자신의 안전한 상태, 자신의 계획, 자신의 생활 체계와 습관을 떠나 어디로 갈지는, 그리스도만이 아시는 그 길고도 모험적인 길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인간적으로 바라는 그렇게 아름답고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스럽지만 추구하려는 원의를 가지고 응답할 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강한 원의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극복하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곳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를 밀어준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라고 한다. 즉 우리의 생활 형편이 어떻든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겸손하고도 순결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는 우리의 몸도 주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로마 12,1 참조) 주님과 더 일치하는 삶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언제나 항구하게 따르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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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을 향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 한마디가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묵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하나 발견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른 시간이 제자들 안에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이루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 베드로에게 찾아가 예수님에 대하여 새로운 증언을 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처음 두 제자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께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집니다.

미사 때마다 듣는 복음 말씀에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일으킨 것과 같은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분 안에 머물게 하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웃들을 향한 새로운 증언이 터져 나오게 합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듣는 마음’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느님께 이 말씀을 드리기 전까지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시기만 하셨습니다.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참된 관계가 시작됩니다. 복음도 우리가 듣는 마음으로 대할 때, 놀라운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예수님과 매우 특별하게 결합되어 있는,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듣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 몸은 이제 죄만 저지르는 장소가 아니라, 이 특별한 결합의 신비를 드러내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누군가에게 새롭게 증언하게 되는 장소로 바뀔 것입니다. 들음으로써 예수님께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 안에 머무는 주일, 우리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이루어지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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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무엇을 찾느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35-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이 부르심에 응답한 과정을 좀 더 잘 살펴보려면,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와 루카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를 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ㄴ-11)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이고, 루카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이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난 일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 사이에는 몇 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묵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고 본래의 생업인 어부 일을 하면서 지낸 것이 됩니다.

그 ‘몇 달’이라는 기간은, 제자들 쪽에서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그들을 정식으로 부르시기 전에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킨 기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제로 서품을 하기 전에 먼저 일정 기간 신학생으로서 준비하고 수련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정식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으면서, 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를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준비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무엇을 찾느냐?”라는 질문은, 루카복음에 있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에 연결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은, 두 이야기의 시간적인 순서와 상관없이, 신앙인이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애써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사도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 바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찾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습니다.”, 또는 “허무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와서 보아라.”라는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깊은 데’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허무하지 않은 인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와서 보아라.”라는 말씀은, “너희가 찾는 것을 내가 주겠다.”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지냄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어부들이 ‘고기잡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룻밤을 함께 지낼 때 두 제자가 무엇을 들었는지, 또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은 ‘머리로만’ 믿는 단계였습니다. 그랬다가 몇 달의 준비 기간,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더 듣고, 또 여러 가지 기적들을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함으로써,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로 올라섰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그 인생에서 벗어나서,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낚을 것이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사도들처럼 살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신앙을 통해서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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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 곧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는 단순한 부르심에 어떻게 레위가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많은 이들을 당신의 식탁 공동체에 초대하시어 그들에게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지위를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식탁에 앉은 것 자체를 단죄했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으로 세리를 비롯하여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던 이들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누구도 의인이라 자처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느님을 닮아 영원한 생명을 향하도록 부름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내면에는 하느님을 벗어나 죽음으로 달려가려는 죄의 경향도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죄의식은 불편하고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 죄의식은 그분의 현존을 늘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보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이 내린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사무엘을 통해 축성되지만 그의 본성에 숨겨진 권력의 욕망 때문에 끝내는 하느님을 배반하고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의인인 척하는 위선의 삶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삶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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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강 디에고 신부님]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이 올해도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분리시키는 분열을 극복하고,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일치(요한 17,20-21)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이 필수적인 일입니다.

대전교구도 교회 일치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데, 올해 1월 24일 수요일 저녁 7시에 원신흥동본당에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회를 지낼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 형제들과의 관계를 증진하려는 이 위대한 헌신은 더 많은 신자들의 지속적인 훈련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올해 기도의 주제는 부르키나파소의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했고 제안한 주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입니다.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부르키나파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테러 단체의 폭력적인 공격으로 인해 특히 그리스도인 교회들은 무장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고 신부, 목사, 교리 교사가 예배 중에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분열보다 강하며 부르키나파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길을 걷는 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현재 그들의 나라를 괴롭히고 있는 폭력을 극복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고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에 관계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연민을 보여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만 다른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 사이의 상호 지식 부족과 상호 의심은 일치의 길을 따르려는 헌신을 약화시킵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의심 때문에 형제자매들과 소통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희망과 열망을 격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치를 향한 길에도 동일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 그를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교회를 이웃을 환영하는 “여관”으로 변화시키도록 격려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우리 각자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 부르심은 다른 교회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맺고, 분열이 연대와 평화로 바뀌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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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님]

<당신은 메시아를 만나셨나요?>

영혼이 맑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나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맑은 사람은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내 모습을 나보다 먼저 바라보고 이해해 줍니다.

‘내 주변에는 왜 그런 사람이 없을까’ 하고 한탄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세상 어떤 존재보다 맑은 분께서 당신과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쁜 소식의 의미를 오늘 복음을 통해 찾아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 세례자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문 하루 동안 그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제자였던 그들은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탐색하러 갔다가 그분이 메시아임을 깨닫습니다. 하루 만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저는 하루 만에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오랫동안 머물며 제자들의 그 하루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 맑고 따듯한 그분의 품 안에서 먼저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 모습을 예수님의 격려와 함께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자연스럽게 그분이 누구이신지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따지고 항의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은 대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를수록 그분께서 얼마나 사랑이 넘치시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메시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에게 한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 마음은 그분을 ‘믿어야겠다.’가 아닌, ‘믿을 수밖에 없겠다.’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어느 샌가 그분께서는 저의 구원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경험하건대, 주님의 부르심은 선물이고 주님 안에 머무름은 축복입니다. 주님께 다가가 머무릅시다. 당신의 메시아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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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형천 미카엘 신부님]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아의 고백>

(네 권의 복음서, 그보다 더 많은 원천들)
첫 번째 신앙인들은 한 분 예수님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으며, 마침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은 복음서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한’ 분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복음서는, 하나가 아니라 ‘넷’입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한 복음서 안에서도 서로 다른 표현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요한 10,11)로 비유하시다가도, 이윽고 당신을 “참 포도나무”(요한 15,1)라고도 하십니다.

이 두 표현의 건너편에는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이 비칩니다. 한편에는 양을 길러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쪽은 포도나무를 길러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요. 정리하자면 유목 사회의 신앙 전통과, 농경 사회의 신앙 전통이 반영되어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복음서는 예수님이라는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네 줄기의 큰 흐름입니다. 그리고 한 권의 복음서 안에도,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여러 신앙 작은 줄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두 가지 고백, 표현 너머에 흐르는 것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복음 이야기에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두 표현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0,36) 그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는 자기 형을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0,4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 이야기 앞부분에서 요한은 고백에 말꼬리를 달아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아마도 이 표현은 많은 것들을 연상시키겠지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어린양. 사람의 악행과 죄악을 짊어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이사 53장)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자 잡았던 어린양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탈출 13장)

혹은 대속죄일에 대사제가 백성의 죄를 지워 광야에 풀어놓던 숫염소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요.(레위 16장) 그 어느 쪽을 떠올리건 간에 ‘어린양’이라는 고백은 지금까지의 전통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전통에 마음을 걸어두고 하느님을 찾아온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모든 유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율법에서 메시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메시아를 기대하던 사람들끼리도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모두 달랐습니다.

과연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요. 안드레아가 ‘메시아’라는 단어에 어떤 마음을 담았을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당대의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만큼이나 ‘현실’이 중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메시아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이 고백하며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반면, 안드레아는 적극적으로 찾아나섭니다.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또 다른 이를 초대합니다. 어떤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전통 안에 머물던 세례자 요한, 새로운 변화를 꿈꾸던 안드레아, 두 사람의 고백은 같은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느낌을 줍니다. 표현의 뼈대를 이루는 낱말의 질감이 다르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나 방향성도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고백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물려받은 말과 새로운 삶)
사실 그들의 신앙고백은 물려받은 낱말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답답한 현실 가운데 어떤 변화를 기대한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고백했습니다.

종이에 말라붙은 글자를 더듬어가는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물려받은 신앙의 언어 가운데 자신의 삶과 마음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것을 골라내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라성찰하고 실천하고 기대한 것을 물려받은 낱말로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느님의 어린양’과 ‘메시아’는 그것이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당연한 말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 낱말에 어떤 마음을 담아내고 있을까요. 우리의 삶의 자리가 다른 만큼 우리에게 어울리는 신앙고백이 따로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고백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찾는”(요한 1,38)지, 예수님께 “와서 보”(요한 1,39)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이 멀리 있지도 않습니다. 먼저 집으시고 읽어보시기를!(Tolle, Lege!) [가톨릭신문 2024년 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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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와서 보아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경청이 너무나 중요하며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청을 제대로 실행하기란 참으로 어렵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어떤 사정을 갖고 있고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서 나오는 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바쁩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되지요. 그런 우리들에 비해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이 보여주는 경청의 자세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한밤중에 “사무엘아”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습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에 굳이 왜 부르는지 이유를 따지지도,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기만 하는 상황에 짜증을 내지도 않고 그저 들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자기는 무조건 순명하고 따르겠다는 자세로 겸손하게 답합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런 사무엘을 하느님이 어여삐 여기시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사무엘이 당신 말씀을 귀기울여 들은 만큼, 하느님도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십니다.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시며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없이 땅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당신 마음 안에 고이 간직해 주십니다.

제1독서인 사무엘기가 하느님과 사무엘 사이의 대화라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라갔던 제자들 사이의 대화입니다. 마치 불교의 선문답처럼 이어지는 그 대화의 내용과 의미를 따라가다보면,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귀기울여 듣고 그에 올바르게 답하는 소통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는 과정이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인 안드레아와 필립보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말을 들은 두 제자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가지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보통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나보다 먼저 주님에 대해 알고 있던 누군가가 나에게 그분을 소개하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아직 주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일단 그분을 따라보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친구따라 강남가는 것’처럼 수동적이고 가볍기만 한 게 아닙니다. 아직 주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단 주님을 믿고 그분 뜻을 받아들이며 따르겠노라고 자발적으로 그분께 순명하는 능동적이고 진중한 자세가 필요하지요. 주님의 뒤를 따르는 내 발걸음이 묵직하고 진지한만큼, 그분을 따르는 과정에서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자세로 주님을 따르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신자분들께 ‘왜 신앙생활을 하시느냐’고 물으면 우물쭈물 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남들이 말하는대로 ‘마음의 평화’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맹목적으로 답하시기도 하지요. 하지만 ‘무엇을 찾아야’할지를 제대로 모르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생활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신앙이 지닌 참된 의미와 그 궁극적인 목표를 모르기에,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는 것처럼 나아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당신 뒤를 따르기 시작하려는 두 제자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갈망하며 추구하는게 무엇인지, 그들이 주님을 통해 찾고 구하며 얻고자 하는게 무엇인지를 물으신 겁니다. 그 물음을 듣고 두 제자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을 겁니다. 자신이 지금 온 마음으로 갈망하는게 무엇인지, 그것이 구원받기 위해 꼭 필요하고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인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월의 흐름 속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먼지 같은 것들을 쫓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겠지요.

하지만 그 답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여러가지로 부족한 지금의 상태로 답하는 대신, 일단 그분 곁에 머무르며 그분과 함께 지내보기로 합니다. 지금은 주님을 통해 무엇을 찾아야 할지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그분과 함께 지내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고 체험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답을 찾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에 묵고 계시는지’를 물은 것이지요. 그 질문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원래 자기들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한 말을 믿었기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아직 ‘머리’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다보면,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소통하며 그분과 깊은 친교를 맺게 되면 그들의 믿음은 비로소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팔과 다리를 거쳐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자기 삶에 자신이 없는 사람, 스스로의 믿음에 확신을 지니지 못한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뒤가 구리고 감출 것이 많은 사람은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진실의 언어, 믿음의 언어가 바로 “와서 보아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나 추측은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요. 직접 현장에 찾아가 자기 두 눈으로 확인해봐야 더 많은 사실을,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올바른 판단과 식별을 할 수 있기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당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욕망과 집착, 오해와 갈등,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당신께서 주고자 하시는 참된 기쁨, 행복, 평화를 누릴 수 없기에, 세상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당신 가까이에 마치 피정하듯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 주님 곁에 머무르는 데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편리함과 익숙해진 편안함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불편과 수고,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감수하고 주님 곁에 머무르면 비로소 그분의 참된 모습이,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보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를 예수님께 인도했듯,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그냥 아무 이름이나 지어주신게 아닙니다. 시몬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부족함과 약함, 두려움과 우유부단함을 주의깊게 살펴보시고 그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 즉 바위처럼 굳건하고 단단한 믿음을 지향하며 살아가도록 그에게 ‘반석’이라는 뜻을 지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신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받은 ‘이름 값’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그 이름이 뜻하는 바를 삶 속에서 실현해 나갈 겁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과정에서 나의 믿음이 깊어지며, 다른 누군가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그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거쳐가야 할 신앙의 과정이자 구원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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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님께서 쓰신 책을 읽다가 신부님의 목표가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조금 이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고해성사를 가장 잘 주는 사제가 되는 것.”

아니 사제가 당연히 고해성사를 잘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준다는 것이 무엇인가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런 목표를 갖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으셨습니다.

보좌신부 때 판공성사를 주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판공성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여학생이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뒤에 사람이 많으니까 다시 준비해서 들어오세요.”라고 차갑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 여학생이 다음날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신부님은 심한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죄책감에 사제 생활을 그만둘 생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직접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이 여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그렇게 미안하면 앞으로 조금만 더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님이 되어주세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사제 생활의 목표를 대한민국에서 고해성사를 가장 잘 주는 사제가 되는 것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누구는 이 사건으로 좌절에 빠져서 포기하는 반면에, 또 누구는 더 나은 자기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또 다른 부르심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요한의 두 제자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와서 보아라.”라고 답변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불러야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머물고 그분을 따라가야겠다는 자기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아야 했습니다.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결단이 그리고 자기의 적극적인 변화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삶 안에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결단이 계속 요구됩니다. 절대로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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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조금 더 가까이>

요한 1,35-42 (첫 제자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조금 더 가까이>

“와서 보아라.”(요한 1,39)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눈길이
가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손길이
닿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발길이
머무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나를 찾는 사람아

조금 더 가까이
나의 마음이
느껴지는 곳까지
와서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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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아라>

사랑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모두를 줍니다. 좋은 것을 줍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고 너를 생각하며 함께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드레아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고, 외치는 소리로써의 임무를 완수하고, 추종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누구인지 주제 파악하고 있었고, 분수를 알며,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서 ‘너’에게! 로 향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하고 고백한 대로 주님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몫을 충분히 해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만이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도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정말 내면 깊은 곳에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러고는 ‘와서 보아라’ 하셨으며 함께 묵으시고 당신을 알 수 있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중에 주님을 체험하다 보면 ‘무엇을 찾느냐?’는 물음은 ‘누구를 찾느냐?’의 물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면서 만나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은총의 결과물,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저는 주님을 찾습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1,38) 하며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요한1,39)  하시며 그 마음을 기꺼이 받아 주시고 그날 함께 묵었습니다.

함께 묵었다는 것은 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머물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15,4)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9)

이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가 됨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함께 묵음으로써 예수님의 삶을 보고 느끼며 살 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묵으니, 그의 모든 것을 얻게 되었고 얻은 것이 복된 것이니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살기 힘든 곳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n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함께 머문 다음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형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머물면서 큰 은총을 입었으니 자기 형제와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형을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눈여겨보시고 “너는 케파(베드로)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42) 하시며 당신이 베드로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실지 예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이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다음은 그분께서 몸소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인도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기쁨이어야 하고 또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을 확신한다면 혼자만 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전해야 할 소명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와서 보아라’ 하시며 당신을 드러내셨듯이 우리도 ‘와서 보시오’ 할 수 있는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이기적이고 닫힌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이웃 사랑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열린 마음으로 제자의 삶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 6,15) 물으시며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고린 6,20)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니 그 품위를 지켜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품위를 지킨다는 것은 지켜야 할 도리에 충실하다는 의미이며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결국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산을 보려고 앞산에 오르면 앞산을 옳게 보지 못한답니다. 역시 뒷산을 보려고 뒷산에 올라도 뒷산을 옳게 보지 못합니다. 결국은 앞산을 옳게 보려면 뒷산에 올라서 봐야 하고, 뒷산을 옳게 보려면 앞산에 올라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한발 물러서서 보아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옳게 보려면 내 눈으로 보지 말고 이웃의 눈으로 봐야 하고, 특히 믿는 이들은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님의 사람인가를 옳게 바라봐야 합니다. 과연 내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손과 발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지요?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지요……

내 생각만 가지고, 내 편에 서서, 내 이익을 따져서는 결코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볼 것을 제대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과 하루를 묵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루를 보내고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든, 성체 조배를 하든 기도 안에서, 이웃 사랑 안에서, 미사 안에서 주님과 함께 묵으십시오! 그리고 내 삶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는 떳떳함, 당당함을 키워야 합니다.

‘와서 보아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제 내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와서 보아라’ 하는 부끄러움에서 다시 일어서는 한 주간의 시작이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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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님의 제자(弟子)답게 사는 이들!>
“와서 보아라”
-머뭄, 경청, 순종, 성전-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수도형제들과 함께 정주한지 어언 42년째이고 여기 요셉수도원에서는 36년째 되는 해입니다. 새삼 주님 안에서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나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 감동하게 됩니다.

과연 스승이자 친구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에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행복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정말 스승이신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자 진리요, 희망이자 기쁨이요, 생명이자 빛입니다. 이런 주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질 때 무지와 허무의 어둠은 짙어져 병든 삶이 되고, 죄악에서 벗어나기 참 힘듭니다. 때로 산책 때는 김민기의 옛 “늙은 군인의 노래”를 일부 바꿔부르기도 하며 주님과의 우정을 새롭게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2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꽃다운 이 내 청춘”

저에겐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은 어머니이자 스승이 됩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스승이자 어머니이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을 생각하며 자주 부르는 동요입니다. 요즘은 세상 떠난 육신의 어머니보다 더 친근히 와닿는 영원한 어머니이신 교회와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니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중독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역시 인간 삶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중독의 폐해가 막심하니 문해력, 사회성이 저하되고 관계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합니다. 지난 월-화요일 한겨레 신문은 2면에 걸쳐 스마트폰 중독에 대한 경고기사였습니다. 새삼 살아있는 인간관계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정말 좋은 스승은 친구와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스승이자 친구인 예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우선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와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참나의 실현이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온갖 중독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제자가 되어 온전한 영적 건강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1.늘 참 좋은 스승이신 주님안에 머무르는 것이 제자의 첫째 자질입니다. 정말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관상 훈련보다 스마트폰 해독에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바 참 스승이신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깊이 참 스승을 찾는 영적 갈망이 있습니다. 진정 좋은 스승이라면 세례자 요한처럼 제자들을 참 스승인 예수님께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요한은 두 제자에게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의 말에 즉각 반응한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바야흐로 스승을 따르는 제자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찾느냐?” 구도자의 우선적 자질이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인 89세의 고령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신력은 60세 남성 수준이라 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와서 보아라.”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 머무르고 싶은 제자로서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초대입니다. 와서 나와 함께 머물며 보고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에 배움에 대한 사랑이 제자로서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참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안에 머물며 배울 것은 무궁무진 끝이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자체가 온통 배움의 모범이니까요.

저로 말하면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42년째 주님 사랑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삶이었으니 과연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충실한 삶이었는지 성찰과 더불어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간절한 소망은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예닮의 삶 하나뿐입니다. 주님을 만나 크고 깊게 배운 안드레아는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말하면서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 불릴 것이다.” 두 형제가 한 스승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형제간의 우정도 주님 안에서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2.주님 안에 머무름에 이어 경청과 순종이 제자로서의 두 번째 자질입니다. 우리는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참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만납니다. 엘리의 사무엘 제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사무엘의 깨어 스승 엘리에게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마다 깨어 경청하다 순종하는 사무엘의 반응이 참 제자답습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거라.”

세 번 반복된 후, 엘리의 가르침에 따른 사무엘의 순종적 반응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아, 정말 이런 경청과 순종의 자세로 살아야 주님의 제자다운 삶입니다. 사무엘에 자라는 동안,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니 그의 철저한 깨어 있는 삶이, 경청과 순종의 삶이 참 놀랍습니다.

3.성령의 성전인 자기의 몸을 잘 돌보는 것이 제자의 세 번째 자질입니다. 성령의 성전을 더럽히는 탐식의 식욕이요, 탐욕의 물욕이요, 불륜의 성욕입니다. 한계를 넘어선 식욕이, 물욕이, 성욕이 사람을 추하게 하고 성령의 성전인 몸을 더럽힙니다. 특히 경계할바 음욕의 불륜이요 성적 타락입니다.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불륜을 멀리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몸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을 받았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탐식, 탐욕, 불륜의 성욕으로부터 깨끗이 함으로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때 명실공히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은 제자의 삶을 원하십니까?

1.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정주의 관상적 삶에 충실하십시오.
2.늘 깨어 주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순종의 삶에 충실하십시오.
3.늘 성령의 성전인 몸을 깨끗이 돌보십시오.
결코 탐식, 탐욕, 불륜으로 성령의 성전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잘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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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보고 닮는>

지난주 주님의 세례 축일 때 예수에 대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첫째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수에 대해 각각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는 나의 종”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아드님”
“자기보다 앞서신 분”, “자기가 알려야 할 분”

저의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내려가 오래간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얘기하는데 성서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반가워서 세례받았냐고 물으니 그저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기에 존경하고 삶에 도움이 되기에 성서를 가끔 읽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였습니다.

옛날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세계 4대 성인 중의 하나이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스승이 될 만한 분 중의 하나이신 분 말입니다. 실제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부를 때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것도 나의 스승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좀 뛰어난 분을 일컫는 것으로.

저도 북한에 가면 선생님, 김찬선 신부 선생이라고 불립니다. 그저 ‘김찬선 씨’하고 부르거나 김 동무나 김 선생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는 싫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저를 마음으로부터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저를 종교인으로 진정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도 종교, 그것도 천주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그리고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선교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도, 스승도 아니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러기에 나보다도 훨씬 앞서시고 크신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빙자해 우리를 등쳐먹는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희생제물이 되실 분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세상의 죄,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의 물의 세례는 세상에 죄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회초리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의 물과 성령의 세례는 세상의 죄를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희생으로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씻는 사랑의 세례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자꾸 잘못을 저지르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고치지 않자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놓고 당신의 종아리를 치라고 합니다.

네가 이렇게 잘못을 계속 저지르는 것은 내가 네게 나쁜 유전자를 주고 너를 잘 못 가르친 나의 잘못이니 나를 마구 치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희생양이 되게 하신 것도 이처럼 세상의 죄를 당신 죄로 짊어지고 없애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신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런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주님을 봐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만 하면 우리 과제가 끝납니까? 본 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죄를 씻을 뿐 아니라, 남의 죄를 나의 죄로 끌어안는 어린양을 보고 닮는 것, 이것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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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6)

<희생 제물!>

오늘 복음(요한1,35-42)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첫 제자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을 들은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두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안드레아였는데,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부르심이 또 다른 부르심을 낳는 복음화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은 다양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메시아, 그리스도, 구세주, 주님,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 우리의 속량, 우리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속죄 제물이시며, 희생 제물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제1독서(1사무3,3-10.19)는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주님의 부르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엘리 사제의 도움을 받아 세 번째 부르심 만에 주님께 응답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

사무엘을 부르신 그 주님께서 이제 우리를 부르십니다.

‘왜 부르실까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6,20)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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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와서 보아라.”(요한 1, 39)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찬 복음이
있습니다.

때와 장소도
어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낯선 삶으로의
초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깨달음도
만남도
진심어린
실천의
또 다른
이름들입니다.

사람을
바라봄에 있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진실한
시각뿐입니다.

모르는 것을
이제야
알게되는
진실한 기쁨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응답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것입니다.

다시 살아있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 날을
맞이합니다.

지금 이 자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복음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복음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삶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는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서툰 만남으로
시작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아름다운
일꾼으로
사람들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신앙의 삶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와서 보아라.”는
이 말씀에서
뜨겁고
역동적인
체험을 만납니다.

가장 중요한
초석은
두말이 필요없는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일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삶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압박하는
모든 불편함이
복음을 통하여
기쁨이 되고
은총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만남의
길이
진실한 복음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쁘고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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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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