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1,2) 하고 묻자 헤로데는 다른 임금이 태어난 줄 알고 두려워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하고 말하면서, 황제에 맞서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를 풀어 주면 그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라고 하면서 빌라도를 윽박지릅니다(요한 19,12 참조).
그 결과 주님께서는 ‘예수 나자렛 사람 유다인의 왕’이라는 조소 섞인 죄명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은 세상이 두려워하는 위엄과 권력을 쥐신 권세의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연약한 평화의 임금, 자비와 사랑과 봉사의 임금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여 종말, 곧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묵시록의 말씀대로 “처음과 마지막”이신 그분의 왕권을 전례 안에서 고백합니다. 1980년대 초반 보좌 신부 시절, 어느 자매님이 저에게 편지와 함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산문시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느 분의 글인지 밝힐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만, 그대로 인용하면서 오늘의 묵상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예수는 가난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에게는 자기 소유의 집도, 보험 증서도, 사회 보장 제도 카드도, 은퇴 계획도 없었다. 그의 재산은 무엇인가? 그는 간단한 옷만 남겼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상처들을 제외하고는 빈손으로 죽었다. 재산과 후계자는 남기지 않았다.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래서 그는 아내 또는 자녀의 격려도 없이 짧으면서도 긴 세월을 보냈다. 우리는 자녀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루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아들 또는 딸의 아빠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쓸쓸히 죽었다. 자녀 없이…….
그러나 예수는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죽도록 사랑했다.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죽도록 신뢰했다. 그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죽도록 봉사했다. 예수에게는 하느님이 모든 것,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