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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 해도 그가 한 일이 떠올라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실을 고치고, 더불어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을 풀어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치고 그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나에게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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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정성을 다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지 않은 선물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왠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값진 선물을 하게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게 되면, 그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도록 고맙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펄쩍 뛰던 베드로를 왜 사탄이라고까지 꾸짖으셨는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둘로스’는, 사실 성경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주님의 종으로 불린 것처럼 오히려 종은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칭호이기도 합니다. 동방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종은 사적 공간인 임금의 침전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보다도 더 가까운 당신의 벗,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친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가 자기 장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고 할 때, 부모님이 자녀의 애틋한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의 친구, 벗인 우리는 친구인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