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4장, 1-12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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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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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떻게 …….’ ‘어떻게 …….’ 토마스는 ‘어떻게’에 묶여 있습니다. 토마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실은 예수님 그분 자체입니다. ‘어떻게’는 토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어떻게’를 찾아 나서는 것은, 지도도 없이 미지를 탐험하는 일과 같습니다. 토마스와 필립보는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실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마디가 ‘머물다’입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경험과 이해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강아지나 고양이와도 함께 머물 수 있는 우리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함께 머물기가 그리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자문해 봅니다.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 사이에,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통하지 못하는 갈등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너무 미워할 수 있다.’라는 말은 신앙생활 안에서도 되짚어 보아야 할 말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믿고, 너무 의지해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예수님, 자신이 갈망하는 예수님이라는 우상을 부여잡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이런 죄인 안에서도 자유로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실 수 있을 때 터져 나오는 감사와 감탄의 행위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작 우리의 편협한 뜻을 이루시려고 육화하시고 우리와 함께 머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로우실 수 있도록 예수님 앞에서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 보아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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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세상의 행복의 가치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대형화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세상에 초대교회의 모습을 구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묵상해 봅시다.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가로막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앞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주님의 길을 이야기 해봅시다.

3.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만 필립보는 주님에게 또다른 표징(“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을 요청합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많은 표징을 보여줘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우리 신앙에 표징이 필요한지, 무엇이 우리의 신앙의 깊음을 바로 잡아주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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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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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초기 교회 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신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영원한 가치로 삼지 않은 초기 신자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행복의 가치를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적인 약점은 언제나 드러납니 분배가 공정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이내 불평을 터뜨렸는데, 믿는 이들도 팔이 안으로 굽는 인간적인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려고 일곱 부제를 뽑고 그들에게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영적 교회와 제도 교회의 양면성이 엿보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유지할 사회적 제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제도가 영적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제도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쓸모없는 돌멩이 같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께서는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는 살아 있는 돌로 만드신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나약함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지만, 불신은 사람들을 편견과 오해의 걸림돌이 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려면, 내 인간적인 약점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련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겸손의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