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강의에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한 학기의 여정을 함께해 주고, 부족한 강의를 열정적으로 들어 준 이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한 학기를 총정리하고 요약하면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도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시간에는 감사와 정리와 간절함을 담아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마지막을 준비하십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짐을 아시고 이제까지 걸어오셨던 당신의 삶을 정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이 당신의 죽음으로 완성될 것임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께서 이야기하시고 살아오셨던 복음의 삶이 이루어질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삶처럼, 앞으로 일어날 수난과 죽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사람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도 그 죽음을 두려워하십니다. 그 죽음의 길을 피해 가고 싶으십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포기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묵묵히 그 두려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두렵습니다. 예수님처럼 죽음과 두려움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어떤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죽음임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날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느끼며 살고 있는지, 예수님의 은혜에 어떻게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목숨을 미워하다”는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 해보고 진정한 하늘의 가치를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못하고 있다면 하늘의 가치를 위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예수님을 찾아온 그리스 사람들은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예루살렘 순례의 여정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알고 싶어서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 사도에게 부탁합니다. 그들을 만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높이 들려 돌아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모든 이의 구원을 이루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의 때는 영광의 때가 됩니다. 하늘의 천사도 이를 보증하며 알려 줍니다. 이 세상의 죄악이 심판을 받으며 악의 우두머리가 쫓겨날 때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가슴에 생명과 사랑의 법, 용서의 법을 새겨 주시는 때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누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생명을 전해 주려고 헌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삶은 자신의 전 인생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봉헌하는 길에 머뭅니다. 우리는 날마다 희생의 씨앗을 주님의 포도밭에 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섬기며 그분을 닮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99
3월17일[사순 제5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nUQw-x0RLM?si=z3N1g75OivamUVlu
[인천교구 이학노 요셉 몬시뇰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 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 지으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찹찹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드리며, 일반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펴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QWuIgBIKvo
++++++++++++++++++
<인생은 어차피 목숨을 담보로 한 투자임을 알면 인생이 단순해진다>
‘한국 교회사 열전’에 따르면, 정 쁘로다시오는 개성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신분을 감추고 새끼 꼬는 일을 하면서 미천하게 살았습니다. 30세경에 입교하여 부인과 함께 홍살문 근처에서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교우들을 돌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배교하여 석방되었지만, 바로 후회하고 뉘우치며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를 취소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형조의 문지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굽히지 않고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계속 조르는 바람에 결국 41세의 나이로 순교합니다.
가끔 이런 순교자들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죽고 싶어서, 죽기 위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주식 시장에서 수익에 확실한 때에 돈을 빌려 가면서까지 투자하려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밀알 하나로 상징되는 당신 목숨을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해 투자하셨습니다. 그 투자처는 아버지였습니다. 투자 방식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끊임없는 투자자임을 증명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자기가 키운 하마에게 물려 죽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하마를 자신이 키웠으니 하마가 자기를 물지는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것에서 보니 개가 호랑이 새끼들을 젖 먹여 키웠는데 그 호랑이들이 커서 어미 개를 지켜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자기 주위에 호랑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투자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어떨까요? 썩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그냥 놔두는 것도 일종의 투자입니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2007)는 맥캔들리스라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기대에 지쳐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대학까지 졸업해 가진 돈 모두를 기부하고 자유를 찾아 미국을 횡단하여 알래스카까지 갑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의 목적지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그에게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알래스카에 갇혀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맥캔들리스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자유는 없었습니다. 외롭기만 했고 관계를 위해서는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투자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인생이 쉬워집니다. 나의 밀알을 사랑이라는 땅에 묻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투자는 언제나 손실이 날까 두렵게 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액을 한꺼번에 투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버린 것의 100배를 받고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먼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청년 레지오를 하며 봉사하지 않았다면 사랑에서 오는 생명력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고 온전히 생을 봉헌하기를 결심하기까지 우리는 충분히 시험해 볼 기회가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투자라고 생각하고 내가 투자하는 생명에 가장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는 대상에 투자합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투자합니다. 투자법을 압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 역시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아드님이 당신을 위해 투자하게 함으로써 그 열매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결단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
https://youtu.be/FuQXzlYjMF4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사람의 아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마르코 복음 10강, 제13장)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때 반드시 일어날 일:
1. 성전의 파괴,
2. 거짓 예언자들의 등장,
3. 전쟁과 환난
구원될 사람이 하고 있을 일
4. 깨어 기도함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무라까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있다.)”
축구 선수로서 해외에서 인정받고 많은 기록을 남긴 최초의 선수는 ‘차범근’입니다. 그는 ‘차붐’이라고 불리면서 유럽 축구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돌파력은 그의 강점이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씨를 뿌린 유럽축구에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박지성 선수가 있었고,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선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처 이름을 모르지만 더 많은 선수들이 유럽 축구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야구선수로서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인정받고 기록을 남긴 선수로는 ‘박찬호’ 선수가 있습니다. 박찬호 선수 덕분에 저도 90년대 중반에 미국 메이저 야구를 보았습니다. 미국의 강타자를 빠른 속도의 볼로 스트라이크 아웃을 시키는 모습은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뿌린 씨가 열매를 맺어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략하고 있습니다. 김병현 선수는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에서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추신수, 최희섭 선수도 있었고, 지금도 4명의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1998년입니다. 한국은 IMF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좌절과 절망 속에 힘들어 하고 있을 때입니다. 미국의 LPGA 골프에서 한국 선수 박 세리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 주며 우승하였습니다. 박세리 선수는 물가에 떨어진 볼을 치기 위해서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볼을 쳤고, 그 볼로 인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 박세리 선수는 많은 우승을 하였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뿌린 씨는 수많은 박세리 ‘키즈’를 키워냈습니다. 한 때는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우승한 골프 대회가 절반을 넘었습니다. 명실상부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 골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최나연, 유소연, 리디아 고, 박인비 선수들이 활약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LPGA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골프를 잘 모르는 제가 이 정도를 아는 것은 그 선수들의 실력이 LPGA에서도 알아 줄 만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기까지 선수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눈물로 씨를 뿌렸기에 기쁨으로 곡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과 면담을 하면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이야기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릴 때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 ‘울지마 톤즈’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나도 저런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의사였고, 사제였던 이태석 신부님은 멀리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서 선교하였습니다. 그곳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일그러진 발에 맞추어 신발을 제작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열정을 다 한 후에 안타깝게도 40대의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뜨거운 삶과 열정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사제가 되어서 신부님이 못 다한 꿈을 이루고 있습니다. 톤즈의 학생들은 신부님의 뒤를 이어서 의사가 되었고, 신부님처럼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꽃이 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어두운 땅에서 썩어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신앙은 꽃이 되기보다는 먼저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좋아하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도 씨앗이 되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씨앗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0-33: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의 전례는 파스카에 대해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쁨에 찬 묵상을 요구하는 사순절의 근본적인 주제들이 들어있다. 낮춤의 신비보다 고양의 신비로 제시되는 십자가 신비와 자아 포기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권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선택에 따라 나타나는 구원과 단죄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사랑의 결정적인 선물인 새로운 계약 등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실 새 계약으로 결정적이고 절대 깨지지 않을 계약이라고 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계시다. 그것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21절) 한다. 여기서 본다는 동사는 예수님을 그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이 알아차리지 못한 그 비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독백처럼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신비스러운 점을 드러내셔서 그리스인들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알처럼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우리 삶의 신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노력이다. 여기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을 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헌신에의 초대를 말하는 것이지 죽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풍요한 결실 능력을 확장하기 위한 밀알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때, 그리스도께는 최대의 영광이 돌아온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우선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더욱더 큰 사랑을 표명하는 것이며, 또 이러한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고 이끌어줄 능력을 갖추기 때문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32절)
그리스도를 뵙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구원으로 이끌려 들어오는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내는 첫 번째 표현이다. 십자가는 이미 그리스도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우리는 지난 주일의 복음의 높이 들린다는 말을 만난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얻은 영광을 의미하였다.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 되기 전에 이미 높이 들리심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높이 들림이라는 사실이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 예수님의 공포와 거부감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 무서운 상황 앞에 두려움과 마음의 동요를 표현하고 계시다. 그래서 성부께 기도하시면서 당신이 느끼시는 괴로운 긴장감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마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이 세상의 역사를 위한 그 결정적 순간의 주인공이 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28절) 기도하신다. 즉,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기도하신다.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28절) 아버지의 계시는 예수님의 전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확인이다. 즉, 예수님의 지나온 생애, 죽음을 감수해야 할 생애, 부활을 통해 더욱 빛나게 될 생애를 말한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이미 빛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내려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신다. 그분을 죽이는 것은 빛을 거스르는 결정적인 죄였다. 이렇게 빛을 거부하고 단죄를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을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심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을 충실히 내맡기고, 그분 사랑의 선물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사탄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으로 여기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항상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는 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것처럼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십자가의 고통 앞에 큰 소리와 눈물로써 기도하고 간구하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구해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워야 했던 당신의 뜻을 이룰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약을 깨지 않고 무한한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은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랑의 결과로 세상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들과 영원히 결합하셨기에 인간은 그분께 결정적인 사랑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 이 결합에 사랑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분께 결합할 수 없을 것이다. 사순절의 여정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 가능하고, 부활을 지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매 순간 그분에게 사랑의 응답을 드리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자기를 끊는 아픔을 이겨내도록 주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바랐을 소망을, 오늘 복음은 그리스 사람들의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동문서답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매우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알고 싶다면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건너가는 참된 파스카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은 뒤 다시 열매를 맺듯, 십자가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파스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당신을 뵙게 하여 달라는 이방인들의 요청에, ‘땅에서 올려진 십자가’야말로 가장 정확히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장소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사랑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면, 그 자체로 억압이고 폭력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지요. 그러나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그 고통스러운 계획이 이제 시작되려고 합니다. 십자가야말로 죽음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완전한 사랑의 장소요 그 약속(계약)의 장소인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