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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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7-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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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성소는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소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부르셨음을 알 수 있지요.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들 일상생활의 외적인 틀은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타, 라자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같은 사람들이었지요. 그들은 주어진 자신들의 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예수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를 넓은 의미의 성소라 부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과 가족까지 다 버리고 완벽히 다른 생활을 택한 사람들이지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입니다. 이를 좁은 의미의 성소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두 가지 길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계속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평신도로서, 둘째 부류는 성직자, 수도자로서 저마다 고유한 역할을 맡은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뜻하는 성소는 좁은 의미의 성소를 말합니다. 특별히 사제직과 수도 생활로 부르심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성소 주일인 오늘은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 투신하는 젊은이가 많아지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아울러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더욱 성화되도록 기도하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고, 또 함께 나누는 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성소를 더욱 잘 가꿔 나갈 수 있도록 따스한 사랑과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출저: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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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주님의 부르심이었다고 느낀 경험이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그런 깨달음을 준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나눠보고,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면 앞으로 주님의 부르심은 어떻게 다가올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3. 사제직과 수도 생활을 꿈꾸는 젊은이를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신학교에 가는 친구는 응원하면서도, 만약 우리 자녀나 가까운 가족이 사제직을 선택한다면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지지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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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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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땅은 농사보다는 목축에 적합합니다.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신선한 풀이 자라는 곳으로 이동시켜 배부르게 하고 목을 축이게 합니다. 그런데 양은 귀는 밝지만 눈은 그만큼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소리로 양을 이끕니다. 목자는 앞장서 가며 양을 목소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자의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양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잘 구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왔을 때 늘 배부르고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를 따를수록 더욱 목자의 목소리를 믿게 됩니다.
이는 아이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오는 그 사랑에 익숙해져 어머니의 목소리만 따르면 안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양들도 목자들이 자신들의 배를 곯게 하고 위험한 곳으로 인도한다면, 목자의 목소리에 대한 믿음을 잃고 더 이상 그 목소리를 신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시고,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은 이미 예수님께 길들여진 양들입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오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일들을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양들은 착한 목자만 따릅니다. 교회의 목자들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양들은 더더욱 교회 목자들의 목소리를 신뢰하고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213
5월4일[부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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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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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BQ-weTAsbo
[서울대교구 오석준 레오(생명위원회 사무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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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손수 따뜻한 아침 밥상을 차려주시는 주님!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다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습니다. 제발 그냥 좀 지나가 주면 좋겠는데, 물어봅니다. “뭐 좀 잡히나요?” 어떤 분은 더 사람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잡은 고기를 가둬놓은 망까지 꺼내 쳐다봅니다. 큰 놈으로 몇 마리 건진 날은 어깨가 으쓱하지만,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못 건진 날은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 보면 은근히 화까지 납니다.
제자들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밤새 티베리아스 호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단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말을 건넬 힘도 없어 다들 묵묵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 손나팔을 모아 외칩니다.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 심기는 더 불편해졌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누르며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포인트를 딱 잡아주시면서 조언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제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나? 우리는 이 바닥에서만 경력이 30년인 전문직 어부들이야!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어 정말!’ 그러나 포스와 위엄이 잔뜩 느껴지는 그분의 말씀에 압도된 제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눈치 빠른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알아차리고 수제자 베드로에게 보고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던지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채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힌 물고기를 몇 마리 갖고 오라고 하시고는 손수 숯불을 피우셔서 노릇노릇 맛있게 굽고, 빵도 꺼내놓고서는 크게 외치십니다. “와서 아침을 들라.”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스승님의 초대 앞에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참담한 실패의 밤을 보낸 허기진 제자들 앞에 손수 빵과 물고기를 대령하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조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 텐데, 그날따라 단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뭘 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 상태에서 임재 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 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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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RPJTJWNu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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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하면 좋은 것, 두 가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 많은 물고기를 잡고는 그분을 보러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자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당신 양 떼를 잘 치라는 사명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무엇이 좋을까요? 두 가지 큰 이유를 말해보려 합니다.
2003년 4월 26일, 등산가 ‘아론 랠스턴’은 유타 블루존 캐니언 좁은 틈에서 360kg 바위에 오른팔이 눌린 채 127시간을 버텼습니다. 물 350mL와 무딘 멀티 칼뿐인 그는 탈수, 저체온, 환각에 시달리며 헬멧 카메라로 “엄마, 아버지, 사랑해요. 내 인생을 내 방식대로 살게 내버려 두셔서 고마웠어요.”라며 유언도 남깁니다.
환각 속에서 그는 장차 태어날 아들을 한쪽 팔로 안고 뛰노는 미래를 보았고, 그 비전이 “살아 돌아가 가족을 다시 껴안겠다.”라는 결단을 품게 합니다. 다섯째 새벽, 바위를 지렛대 삼아 팔뼈 두 개를 부러뜨린 뒤, 힘줄과 신경을 무딘 칼로 끊어냈고 20m 절벽을 외팔로 하강하여 10km를 걸어 우연히 만난 관광객 가족에게 구조되었습니다. 병원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자 그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저를 ‘팔을 자른 남자’로 여기세요. 그런데 웃으면서 그랬다는 건 아무도 모르실 겁니다.”
사랑은 웃으며 나에게 필요한 중요한 것을 자르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세상 집착 때문에 자르지 못하는 것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론 랠스턴은 자기 팔을 자르고는 기뻐서 “내가 팔을 잘랐다!”라고 연신 외쳤습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여자와 헤어지고는 “자유다!”라고 말하던 남자 주인공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 나를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사라지면 그만한 자유도 없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달려오는 여자 친구를 보고는 배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세상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고통이 집착으로부터 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기쁘게 자기 팔까지 자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좋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나의 양 떼가 생긴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양 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맡겨지는 것입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남자 주인공이 자기 꿈까지 포기하게 만든 여자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자녀들 때문에 물론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목숨을 바칠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요한 바오로 2세는 돌아가시기 직전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내가 이 세상에서 돌보아야 할 양 떼가 없고 그래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나는 어떤 존재가 됩니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서 나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살 의미도 없어지고 무기력증의 고통으로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살고 싶어지고 열심히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양 떼는 나의 집착이 되지 않지만, 동시에 내가 목숨을 바칠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 유일하게 찾아온 동생에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고 말하며 죽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예수님만을 사랑해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은 갈등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친구를 사귈 것인지, 수백 년 동안 집착해 온 반지를 훔칠 것인지. 그는 결국 반지를 선택하여 외로운 죽음을 맞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줄 호빗들을 사랑했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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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른”과 “꼰대”는 나이는 비슷할 수 있지만, 태도와 사고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른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 꼰대는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른은 젊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경험을 나누되 강요하지 않고, 조언이 필요할 때만 건넵니다. 과거의 방식을 절대 기준처럼 내세우지 않으며, 세상이 변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배우려 합니다. 직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반면 꼰대는 자기 말만 옳다고 생각하고, 대화가 아닌 설교를 합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세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나이나 지위를 내세워 복종을 요구합니다. 제가 아는 어른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자주 여는 사람.” 저도 60이 넘은 나이에 후배 사제들에게 ‘꼰대’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말을 듣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보십니다.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돌보아라.”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 번이나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같은 수의 질문으로 베드로의 실패를 용서하시고, 사랑의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이라는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많은 순례자가 이 성당 안 바위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다. 바로 그 바위 위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저도 그 성당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가브리엘 신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 말씀을 실제 삶으로 살아낸 두 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분은 대구의 김장하 선생님입니다. 평생 한약방을 하시며 돈을 벌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쓰지 않고, 수많은 가난한 학생과 이웃을 위해 장학재단과 복지재단을 만들고 수백억 원을 기부하신 분입니다. 본인은 단칸방에서 검소하게 사시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요, 남을 위해 살 때 가장 행복합니다. 자기만 알고 살면 결국 외롭고 불행해져요.” 그 장학금으로 공부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문형배 헌법재판관입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공부하던 문형배 재판관은 김장하 선생님의 도움으로 꿈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훗날 성공한 뒤,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김장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건 나의 것이 아니야.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너에게 나눈 것뿐이다. 이제는 네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 문형배 재판관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법의 정의를 지키는 어른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판결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며, 공정하고 흔들림 없는 판결문을 낭독했습니다.
이 두 분은 말로 사랑을 외치기보다는, 삶으로 사랑을 증명한 진짜 어른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명령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않고, 우리 곁의 누군가를 돌볼 때, 진짜 부활 신앙이 시작됩니다. 내 자녀, 내 가족, 내 일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눈을 넓혀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 약한 이들, 외로운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어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돌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께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그분의 양들을 돌보는 발걸음도 함께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진짜 모습일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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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방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저마다의 특성에 따른 맞춤식 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자 토마스에게, 그가 말한 대로 그의 손가락과 손을 당신의 꿰찔린 상처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20,25-27 참조). 그런 예수님께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하고 대답하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도 맞춤형으로 다가가십니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하고 자신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그러자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 하고 대답합니다. 다른 이보다 더 사랑한다고 장담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그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번의 질문으로 세 번 배반한 베드로를 고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사명을 맡기시는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치유와 화해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드로에게 사명이 맡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함께 바라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세 번의 문답을 통한 치유와 화해의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베드로에게 거듭 당부하십니다. 많이 사랑받았으니 더 많이 사랑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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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진실과 증거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이 증언은 이미 분노와 미움을 초래하였었다. 회개를 위하여 외치는 진실의 소리가 다른 이에게는 미움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21,1-19: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 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만나 고기잡이 기적을 이루는 장면(요한 21,1-14)과 그리스도의 모든 양떼에 관한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장면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고 보고하고 있다(요한 21,1.14). 그리고 고기잡이 기적이든, 수위권 부여든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고기잡이는 교회론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밤새도록 애썼으나 헛수고만 하여 포기한 제자들(3절)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풍성한 고기잡이를 이룬 것(7절), 153마리의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11절), 고기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11절)이다.
고기잡이 기적은 선교사명을 암시한다.(루가 5,1-11 참조) 그 유사점을 보면, 어부들이 밤새껏 한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상황이 바뀐다. 그물을 가득히 채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만이 사도적 활동의 결실을 이룬다. 오늘의 고기잡이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없이 하는 공동체의 노력(헛수고)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노력(풍성한 결실)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선교는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만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153이라는 숫자는 ‘신비스러운 완성’을 뜻하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현존’하심으로 결실이 비롯된다. 비록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조직하는 임무가 있지만(3절) 그들의 성공은 그리스도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이렇게 제자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에서는 베드로의 사목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는 이미 고기잡이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어린양들과 양떼들을 돌볼 직무를 맡기시고(15-17절)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으로서 교회의 구원의 모든 활동에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신다. 베드로가 갖는 권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권위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파스카 선물’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봉사직은 사랑의 능력에서 비롯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사랑 안에 성장하게 되어있다.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세 번이나 배반을 했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목직과 봉사직은 더 큰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16.17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목직을 부여하시면서 그의 순교에 대해서도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19절)
베드로의 봉사직 사목직과 목숨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자기의 뜻을 중요시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데서 완전한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W. Marxen). 베드로의 직무와 다른 모든 직무는 오직 예수께서 하신 바와 같이 먼저 고통과 십자가상의 죽음의 직무가 되어야 부활의 직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직무가 되리라는 것이다.
제2독서: 묵시 5,11-14: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묵시록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상징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모든 만물이 경배를 드리는 천상전례를 묘사하고 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12절). 이 어린양은 흠숭을 받으시는 분으로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시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13절). 그러므로 오늘도 영원한 파스카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신분을 취하심으로써’ ‘주님’이 되신다(필립 2,7-11참조).바로 이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길이다.
제1독서: 사도 5,2732.40-41: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통하여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들과 같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하며 예수님의 부활의 진실을 전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29절)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일지, 시련의 길일지 모르나 아마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하고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삶을 청하면서 우리도 진리를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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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