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9장 36-10장 8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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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6-10,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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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가 수고한 대가로 얻는 것일까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노력하고 애쓴 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당신 나라에 참여할 권한을 주신다고 우리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나약하던 시절, 곧 죄인이었을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죄인은 하느님 앞에서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불경한 자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서도 착한 사람을 위하여서도 선뜻 내놓기 힘든 그 귀한 목숨을, 아무런 공로도 없는 죄인을 위하여 내놓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연민과 동정은 복음서 곳곳에서 당신의 구원 활동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합니다.

그분께서는 가엾은 마음에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마태 14,14 참조), 더 많은 가르침을 주려 하시고(마르 6,34 참조), 그들의 배고픔까지 걱정하시어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십니다(마태 15,32 참조). 여기에는 혜택을 입게 된 이들의 어떠한 공로도 선행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닮은 아드님의 연민과 사랑이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여기서 ‘거저’로 옮긴 그리스 말 ‘도레안’은 선물을 뜻하는 ‘도레아’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는 보상이 아닌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이든 그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셨으며,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거저 받았다면 거저 줄 줄도 알아야 하고, 무상으로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무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보답이나 대가를 기대하는 선행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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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성당에 친구들이 있겠지만 주님이 파견하신 형제/자매가 있는지 묵상해보고 이 형제/자매랑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하지 못하였다면 주님이 허락하신 형제/자매와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3.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 36) 에서 신앙 관련된 활동을 하며 힘에 부친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기운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는지, 잠시 쉬어갔는지 이야기 해보고 신앙적인 기운을 얻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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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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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620
6월14일 [연중 제1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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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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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PzDK3Xir3g
[수원교규 한민택 바오로(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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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원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

100억을 가진 대부호가 100만원 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내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합시다. 누구라도 깜짝 놀라겠지요. 사업자금 든든하겠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로젝트 역시 탄탄하겠다, 금상첨화인 것은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금의 절반씩을 나눠 갖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만왕이 왕이신 분께서, 어마어마한 분께서, 삼라만상을 다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자랑할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을 향해 인류 구원이란 큰 프로젝트를 들고 오셔서 동업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 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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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TopnfWIC9Y?si=n96G5OOUobKHK8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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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 되기: 행복한 성체 되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찬미 예수님!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을 느끼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에르리메노이’는 단순히 의기소침한 상태가 아니라,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겨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채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처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상처받고 길을 잃어 쓰러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채찍질도, 훌륭한 설교도 아닙니다. 그들의 찢어진 상처를 보듬고 기를 살려 일으켜 세워 줄 ‘착한 목자’입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를 보십시오. 그는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 싸리나무 아래 쓰러진 채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 참조) 위대한 예언자도 기가 꺾이면 이렇게 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시어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머리맡에 놓아 주시며 두 번이나 다정하게 깨우셨습니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 19,7 참조)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기가 꺾인 이를 먼저 먹이시고, 완전히 회복시킨 다음에야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 19,6) 그렇다면 세상을 살리는 사제, 즉 목자란 무엇이겠습니까?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조 주교님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가르칩니다. “먼저 자신이 정화된 다음에 남을 정화시키고, 먼저 자신이 거룩해진 다음에 남을 거룩하게 하며,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된 다음에 남을 하느님이 되게 하여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589항 참조).

그렇습니다. 순서가 핵심입니다. 먼저 자신이, 그다음에 남입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진 사람만이 타인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꺼진 초가 다른 초에 불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심지에 불이 활활 타고 있어야, 나는 내 불을 잃지 않으면서도 수백 개의 초에 빛을 옮겨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타인의 기를 살려주는 목자가 될 수 있을까요? 타인의 기를 살려주고 상처를 끌어안으려면, 아주 명확한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바로 ‘내가 먼저 뼛속 깊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아, 내 기가 우주 끝까지 살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어떻게 남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 원리를 가장 뼈저리게 증명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 얼굴의 절반을 덮은 붉은 모반과 상악동 암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이겨내고,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목자가 된 방송인 김희아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며 얼굴의 모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수없는 조롱과 괴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얼굴에 암까지 찾아와 뼈의 절반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이라는 깊은 어둠의 동굴에 자신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하느님께 제발 이 붉은 점을 없애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바라보시며, 자신보다 더 아프게,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계신 주님의 모습을 가슴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영혼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주님께서 나를 이토록 끔찍이 사랑하시는구나! 이 점은 흉터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특별히 기억하시는 사랑의 표식이구나!’

자신이 우주의 창조주께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바닥났던 자존감은 하늘 꼭대기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얼굴의 모반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받아 행복해지자, 그녀는 비로소 다른 이를 살리는 완벽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길을 걷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야단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이를 안아주며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이고, 우리 딸! 이만하기 다행이네. 이것밖에 안 다쳐서 참 감사하네. 그치?”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도, 엄마의 그 굳건한 평화와 감사의 태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이가 먼저 넘어져 피가 나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감사하지요?”

야단치고 걱정만 하는 세상의 보통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기가 꺾일 뻔한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는 이런 작은 일로 행복을 뺏길 시시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감사를 통해 증명함으로써 아이의 영혼을 강인하게 세워준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성 그레고리오 주교님의 가르침처럼, 이것은 사제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파견되는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먼저 십자가의 피와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적 존재로 격상되고 그 압도적인 행복을 누려야만, 세상에서 기가 꺾인 이웃들에게 진정한 연민을 느끼고 그 행복을 전염시키는 ‘사제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한 사람은 결코 기쁨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내 안의 기를 살리고, 그 행복의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뇌과학과 심리학이 입증하고 모든 성인이 실천했던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인간의 뇌에는 망상활성계(RAS)라는 정보 필터링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핍과 불만에 집중하면, 뇌는 온 세상에서 불행한 증거들만 수집하여 우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습니다. 반대로 “이만해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에 초점을 맞추면, 뇌는 즉시 내 삶에 숨겨진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들을 찾아내어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합니다.

말씀과 성체로 이미 감사의 조건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씨앗을 키우기만 합니다. 이 감사의 근육을 키우는 가장 훌륭한 훈련이 바로 ‘잠들기 전 감사 일기 쓰기’입니다. 인간의 뇌는 잠들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입력된 감정과 정보를 수면 기간 내내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고 영혼의 무의식에 새겨넣습니다. 하루 종일 남을 흉보고 세상의 뉴스를 보며 분노하다가 잠이 들면, 우리 영혼은 밤새도록 독극물에 절여집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하루 내 삶에 주어졌던 감사의 조건 5가지를 손가락을 꼽으며 찾아보십시오.

‘오늘 아침 무사히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어 감사합니다. 미운 사람을 향해 한 번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할 때, ‘가엾다(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창자를 끊어내듯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이 성체의 사랑을 매일 먹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작은 상처에 기가 꺾여 주저앉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이 성체의 사랑을 내 삶의 현실로 번역해 내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언어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한 성체가 되었음을 믿고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찢겨진 세상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거룩하고 행복한 목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성체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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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숫자에는 상징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3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 삼자’라고 말하곤 합니다. 셋째 딸은 따지지 않고 며느리 삼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셋째 아들입니다. 반면에 4는 죽음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4층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숫자 4와 한문의 죽음을 뜻하는 사(死)와 음이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상징적인 숫자가 있습니다. 오늘은 ‘40’이라는 숫자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40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정화와 준비, 회개와 변화’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이루십니다. 노아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40일 동안 비를 내리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씻어내는 심판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비가 그친 후에 노아는 40일이 지난 후에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물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40과 관련이 많습니다. 40년은 이집트에서 왕자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40년은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나이산에서 기도하였고,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물은 심판과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군사들은 물로 심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도 40일 동안 걸어가면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했지만, 그 무너짐은 회개를 통한 변화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신 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처럼 40이라는 시간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변화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같은 40이라는 시간이라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세 왕,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은 모두 40년을 통치했습니다. 똑같은 40년이었지만 그 결말은 서로 달랐습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하느님보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결국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졌습니다. 같은 40년이었지만, 사울의 삶은 점점 무너져 갔습니다. 다윗도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눈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의 주인공이 되었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같은 40년이었지만, 다윗의 삶은 회개를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솔로몬 역시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받았고, 성전을 건축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교만해졌고, 결국 이방의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아쉬운 삶이 되었습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왕은 모두 같은 40년을 살았지만, 그 삶의 방향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쩌면 이 ‘40’이라는 숫자는 우리의 인생과도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길고 짧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음을 전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받은 은총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불평하며 살 수 있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시간, 이 ‘은총의 40’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는 정화되고, 회개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울처럼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다윗처럼 회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솔로몬처럼 시작만 좋은 삶이 아니라, 끝까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구원의 방주’가 되어,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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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군중을 보시고”(마태 9,36)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시선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머물러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5,1 참조). 이들은 고통과 질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난 이들이며(4,24–25 참조), 시대와 사회의 상처가 만들어 낸 불의이고 불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9,36). 여기에 쓰인 그리스 말은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정도의 의미로, 다른 이의 처지를 자기 안에 끌고 와 그 고통과 불행에 함께하는 깊은 자비를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 자비는 대개 인간의 육체적 어려움과 고통을 향합니다. 이는 곧 제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지 미리 밝힙니다. 교회의 첫 선포는 논리적 설명이나 사변적 논쟁이 아닌, 구체적 치유와 돌봄이었습니다.

군중의 처지를 묘사할 때, ‘시달리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가죽을 벗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목자 없는 양”(민수 27,17; 참조: 에제 34장)의 심상과 연결되며,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목자의 자리, 곧 돌봄과 보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도와 율법, 그에 따른 심판만 남아 있지는 않은지 오늘 복음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구실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목자들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 상징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종말론적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가는 이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종말이 다가왔음을 보여 줍니다. 내 삶의 한 조각으로 이웃의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말이고 구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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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36–10,1-8: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파견하셨다.

1. 하느님의 백성: 계약과 거룩한 부르심
탈출기 말씀은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사랑과 충실성’에 기초한 계약으로 드러낸다.(탈출 19,5-6) 이는 단순한 법적 구속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사랑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살도록 초대하신 사건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너 없이 너를 창조하셨지만, 너의 협력 없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신다.”(Sermo 169,11 요약) 즉, 하느님의 은총은 철저히 무상이지만, 그 은총이 열매 맺으려면 인간의 응답과 협력이 필요하다. ‘사제들의 나라’(탈출 19,6)로서 이스라엘이 부름을 받았듯,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계약의 백성으로서 세상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야 한다.(1베드 2,9 참조)

2. 예수님의 동정과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마태 9,36)을 가엾이 여기신다. 여기서 쓰인 동사 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깊은 연민”을 뜻한다. 예수님의 사도 파견은 바로 이 자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을 청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추수의 주인님께 청하라’라고 하셨다.”(In Matthaeum hom. 32,2) 즉, 사도직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명이며, 그분의 자비로운 뜻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이다.

3. 사도의 파견: 삶과 선포의 일치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사도”(ἀπόστολος, 파견된 자)로 세우시고, 당신이 하신 구원 활동을 이어가게 하신다.(마태 10,7-8) 그들의 선포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병을 고치고 악령을 쫓아내는 구체적 행위로 드러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과 삶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말만 하고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침묵하면서 존재 자체로 사는 것이 낫다.” 이는 오늘날 사목자들과 신앙인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복음은 삶 속에서 증거될 때만이 진정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4. 교회의 사명과 보편성
예수님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마태 10,6)에게만 사도들을 보내시지만, 부활 후에는 “모든 민족들”(마태 28,19)에게 파견하신다. 이는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이다. 교회 헌장은 이를 이렇게 선포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이 백성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불려 나와,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성령의 성전이 된다.” (9항)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에 존재하면서, 단순히 종교 공동체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민족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응답할 수 있도록 파견된 선교 공동체이다.

5. 오늘의 적용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교회는 늘 일꾼 부족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 일꾼은 단순히 성직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모든 신자가 일꾼이다. 우리는 말과 삶이 일치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한 예수님의 연민을 우리의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는 기도와 삶으로 ‘추수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청해야 한다.

6. 맺음말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우리를 부르셨듯, 우리도 거저 주는 삶으로 복음을 살아야 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삶으로, 우리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마태 9,36 참조)라고 고백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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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습니다>

마태오 9,36-10,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믿음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믿음께 가까이 다가가
믿음이 되어

믿음의 길을 걷습니다

희망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희망께 가까이 다가가
희망이 되어

희망의 길을 걷습니다

사랑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사랑께 가까이 다가가
사랑이 되어

사랑의 길을 걷습니다

기쁨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기쁨께 가까이 다가가
기쁨이 되어

기쁨의 길을 걷습니다

고움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고움께 가까이 다가가
고움이 되어

고움의 길을 걷습니다

착함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착함께 가까이 다가가
착함이 되어

착함의 길을 걷습니다

품음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품음께 가까이 다가가
품음이 되어

품음의 길을 걷습니다

돌봄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돌봄께 가까이 다가가
돌봄이 되어

돌봄의 길을 걷습니다

베풂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베풂께 가까이 다가가
베풂이 되어

베풂의 길을 걷습니다

돋움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돋움께 가까이 다가가
돋움이 되어

돋움의 길을 걷습니다

살림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살림께 가까이 다가가
살림이 되어

살림의 길을 걷습니다

이룸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이룸께 가까이 다가가
이룸이 되어

이룸의 길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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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꾼다운 일꾼으로>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우선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난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확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다.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하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 받도록 모두가 부름을 받았고, 그중에 특별한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 된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한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춤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하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선교와 교육사업, 병원 사목과 복지 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길 희망하며 기도한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셨다. 그런데 어부, 세리, 혁명당원, 훗날 배반자가 된 유다, 베드로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왜 그러셨을까? 아마도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 소용없고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어달라고 했어도 아마 거절했을 것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약도 없다. 오늘날도 뽑힌 사람 중에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잘난 사람은 뽑힐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난 사람은 아마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기보다 비판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내세울 것이다.

어찌 되었든 예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뽑으셔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도구 삼아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하신다.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다. 지금의 처지와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우뚝 서 있길 기도하자.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신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녀고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 당신이 저희를 뽑으시어 필요한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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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들이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성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희랍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를 그리고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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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9,36-10,8)

1)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루카 6,13).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따로 특별히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로 삼으신 것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조직과 제도를 만드신 것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도 당신의 일을 신앙인들이 이어받아서 계속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제도는 사실상 당신을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구원 사업은 우리를 위한 일이고,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을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또 스스로 구원을 위해서 일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구원 사업이 예수님 승천으로 마무리되는 일이었다면 교회라는 제도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복음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7-9)

2) 열두 사도는 ‘하느님의 건물’의 열두 주춧돌입니다. 신앙인들은 각자 맡은 직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사도 직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은 상속자들이기 때문에(로마 8,17)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들 자신들의 일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아버지의 일꾼들이기도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다가오는데 아직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선교활동은 잃은 자녀를 찾는 일이면서, 동시에 일꾼들을 모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꾼인 신앙인과 일꾼이 아닌 신앙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3)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또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자기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습니다. 식구들을 방치한 채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1티모 3,5)

예수님께서는 승천 전에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승천하실 때에는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태 28,19). 그렇게 복음 선포 대상이 확대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선포가 완료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마태 21,4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은총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교회는 ‘돈벌이’를 하는 장사꾼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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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정정원 마론 신부님]

<제자 공동체>

「모든 형제들」에서 보편적 형제애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경향들을 지적합니다. 공격적인 민족주의, 새로운 형태의 이기주의, 세계화, 버리는 문화(낙태, 장애인, 음식, 노인, 실업, 인종차별), 전쟁과 테러, 무관심, 자기 행복에 대한 지나친 집착, 피조물에 대한 폭력, 열광적인 소비주의, 무관심, 디지털의 개인주의 확대와 공격성 등.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씨앗을 계속 뿌려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며 희망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돈이 새로운 우상(복음의 기쁨 55항)이 되어버린 세상. 자기중심주의와 버리는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의 신앙생활은 ‘제자로 살기’보다는 쇼핑센터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닌지 의문을 가져봅니다.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의 쇄신을 위한 토론보다는 편안하고 안락한 신자 생활을 위한 민원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가져봅니다.

하나의 가톨릭교회인데도 관할구역 본당 공동체보다는 내 취향에 따라 본당 공동체를 선택하는 소비자적 신앙이 합리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져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희망을 잃고 기가 꺾인 채 절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사람들을 청하고, 부르고,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한을 제자들에게 맡기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성찬례 중에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듣습니다. “(빵과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기 위해 모인 교우들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자신의 안위와 안락함과 편안함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희망의 씨앗을 품고 세상의 복음화(보편적 형제애)를 위해 파견된 제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제들의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 되도록 불러주셨고(탈출 19, 6 참조), 우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하는(로마 5,11 참조) 제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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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용선 바오로 신부님]

<선발 기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 선발에 있어서 왜 그런 사람들을 뽑으셨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이 우리의 일반적 기준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이들은 대부분 무식한 어부들이었고, 항간에 소문이 안 좋았던 세리 마태오도 있었으며,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뤄 보려던 열혈당원 시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들을 뽑으셨을까요? 예수님의 제자 선발 기준은 주님의 뜻을 삶의 가장 앞자리에 두는 사람 그리고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선발하신 그들을 당신 가까이 두셨고, 그들에게 권한과 사명을 주시며 길 잃은 양들을 향해 그들을 파견하셨습니다.(마태 10,1.6-8 참조)

선발된 그들은 각자의 이름이 성경에 남겨질 정도로(마태 10,2-4 참조) 소중한 이들로서 맡은 몫을 수행했습니다. 실상, 그들 대부분은 부족함 가운데서도 죽기까지 주님의 뜻에 충실했으며, 자신이 부족할수록 주님께 더 의탁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이사 55,8 참조)는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선발 기준에서도 드러나고 있고, 주님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생각대로 제자들이 선발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 주님을 따르려던 이들은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해 떠났을 것이며(마태 19,22; 요한 6,66 참조) 복음은 선포되지 못하고 지상 교회가 세워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 각자를 통해서도 지속됩니다. 그런데 현실을 봅시다. 주님 밭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는 이들은 많지만, 자신의 기준에 따라 또는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잘 응답하지 않습니다.(마태 9,37참조) 다른 한편, 다양한 자리에서 기꺼이 응답하는 교회의 일꾼(봉사자)들에 대해서는, 일부 신자들이 자신들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함으로써 결국 어떤 이는 교회를 떠나게 되는 마음 아픈 일도 생깁니다.

바라건대,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 선발 기준이 우리에게 기억되고 존중되며 구현(具現)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는 나부터 기쁘게 응답하는 삶이 된다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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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님]

<철밥통 신부님>

본당에서 예비신학생과 부모를 면담하던 중, 예비신학생 에게 “예비신학생이 뭔지 아니?”라는 질문을 던졌습니 다. “네, 신부님 되는 거요!”라는 답에, 재차 질문했습니다. “왜 신부님이 되고 싶니?” 그랬더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신부님이 되면 먹고 살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해서요.” 이 대답을 들으면서 어떻게 반응해 야 할지 잠시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멋쩍게 웃으시는 아버님과 저의 눈이 마주쳤을 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것도 맞을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 하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먹고 살 걱정이 없나?”

가만히 돌이켜보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중에 돈이 많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계절이 바뀔 때면 제철 음식을 사제관으로 가져다주신다거나 교우끼리 식사를 할 때 초대해 주시는 것, 커피 한 잔 사려고 하면 계산을 막는 교우들을 볼 때면 “정말 많은 것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복된 삶인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디다케』에는 ‘사도들을 주님이 오신 듯 환대하되, 하루 이틀이 아니라 사흘 동안 머무르면 거짓 예언자로 대하라.’라는 지침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저 받는 삶을 살고 있는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사흘이 넘어서는 복을 누리며 거짓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비신학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먹고 살 걱정을 안 해도 된다.’라는 사실은 바꿔 이야기하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더 열심히 살기’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를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제가 삶의 울타리에서 느끼는 감사함과 교우들이 느끼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함은 다를 것입니다. 감사함을 깨닫는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하며 변화된 삶을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며 더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받는 것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것을 깨닫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러셨듯이, 우리도 거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베풂은 누군가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베푸는 삶으로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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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형제자매들은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상태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타인에 대한 시선은 좁은 시야(視野)로, 그것도 보여지는 것만을 편견과 선입견의 시선으로 그릇되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염기원은 「인생 마치 비트코인」이란 책에서 『 상식에서 벗어난 판단을 하는 사람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몸이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을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신이 가난한 사람은 그나마 가진 것도 모두 잃는다. 가난의 법칙이다. 실패를 통해 배운 게 없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 좌절을 극복한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라고 말합니다.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선은 참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형성된 것이며, 이는 결국 자기 과거 상처의 어둠과 의존적 약함에서 기인한 결과물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자신이 가진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모든 것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갇힌 채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태16,23)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사탄은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그 무엇이 아니라 항상 타인보다 앞에 나서고 드러내기를 원하는 자아,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양 가식과 허세로 넘쳐나는 거짓된 자아라는 사탄입니다. 이게 우리 내면의 상태이고, 그 결과가 바로 현실 속에 드러난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입니다.

오늘 복음엔 직접적으로 바리사이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란 거울을 통해서 바리사이들의 시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타인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을 뒤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이 겉으론 거룩함과 깨끗함이란 시선을 가지고 타인 곧, 예수님을 포함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을 뒤에서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결국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들의 뒷모습이 확연하게 보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군중들과 특히 예수님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기도 하고 어울리는 예수님,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 자신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위선자라고 질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의 시선, 곧 마음의 태도는 처음부터 비딱했고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에서 여차하면 빌미 거리를 잡을 의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예수님을 향한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에서 이미 그들의 내적 태도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이런 왜곡되고 오그라든 마음의 소유자들이 예수님 당대의 지도층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는 모두 다 민중들이 짊어져야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이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9,36)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전 남미를 두 차례 여행하면서 들었던 많은 사람의 자조적인 표현은 이렇습니다. 『 하느님께서 이 땅, 남아메리카에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딱 한 가지 주시지 않은 것은 바로 올바른 정치가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예전에 비해 남미 상황은 훨씬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다고 봅니다. 정치계나 종교계나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변화와 발전은 요원합니다.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일꾼들, 사제와 목사들의 숫자는 분명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성직자들이 많아져서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내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일꾼의 숫자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목자입니다. 군중의 기를 꺾지 않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을 가진 성직자, 자신이 한 말을 실행하는 참된 하느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일꾼의 수효가 적거나 없어서 지금 세상이 하느님의 밀밭과 포도밭에서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제대로 된 일꾼들이 많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더 마음 안타까우리라 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고 추궁당하는 성직자가, 바로 제가 아닌지 타인을 바라보는 저 자신을 거울이신 예수님을 통해 바라봅니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풀이 죽은 듯 보이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9,37~38) 예수님께서 언급한 ‘수확할 일꾼’이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농사지어 놓은 것을 수확할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확할 일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일꾼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사람을 살리는 일 곧 구원 활동입니다. 예수님은 강생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요19, 30) 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승할 일꾼들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성해 놓으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할 열두 사도들을 뽑으셔서 삶을 통해 가르치시고 파견하실 겁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 14)라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 일꾼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고 했지, 예수님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는 일꾼이 적었고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였지만, 정말 믿을만할 예수님의 일꾼은 많지 않았고, 많지 않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꾼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먼저 홀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시고,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아버지의 뜻을 지속해서 실천할 사도들을 하나하나 이름불러 뽑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요15,16 참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3,14-15)라는 점입니다. 즉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점은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과 몸과 마음이 함께 머물면서 삶을 통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육은 이념적 교육이 아니라 스승이신 주님과 함께 삶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터득되고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측은한 마음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처럼 목자 없는 양들을 가엾이 여기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곁에서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심영(心靈)으로 충만할 때, 수확할 힘을 길러내고, 수확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 는 것은 그분의 언행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그분의 마음을 닮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열두 제자의 명단을 봅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점은 이들 대부분이 혈연이나 지연 그리고 학연의 측면에서 볼 때,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계승할 협력자가 필요하셨는데 그 선택된 제자들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정말 하찮은 사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소명받고 선택받은 것은 우리 역시도 제자들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분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 26. 29)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그들이 선택받기 이전의 출신 성분, 교육 정도, 성격, 직업의 현재 상태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에 그 무엇이 될 가능성을 꿰뚫어 보시고 또한 하느님의 은총에 얼마나 순응하고 조화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선발된 이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갈 단순하고 순박한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어린아이와 같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 하느님의 어린아이가 되려고 노력했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셨음을 자각하고, 우리 역시도 선택받을 수 있음을 다짐하면서 용기를, 희망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이 주간을 살아갑시다. “언제나 주님 얼굴을 찾고 그 얼굴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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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과 ‘하느님 백성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 체결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약 체결을 통하여,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탈출 19,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독점적인 수취자가 아니라, ‘사제들의 나라’의 사명, 곧 하느님과 중재를 이루는 보편적 구원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로마 5,11)라고 고백합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났고, 모든 이가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해줍니다. 복음은 세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치유의 장면’,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장면’,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첫째 장면으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이는 인도하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목자 없는 양’의 가련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고 짓눌리고 상처받고 ‘시달리며 기가 꺾여’ 방향을 잃고 쓰러져 방치된 현실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말해줍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욱 안타까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마태 9,37)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고 말씀하시면서도, 못내 ‘가엾은 마음’을 어쩔 수 없으신 까닭에 손수 그 ‘일꾼들’을 뽑으십니다. 그러니 둘째 장면에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것은 ‘가엾은 군중을 위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들에게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 단지 복음의 수취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의 사명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예수님의 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할 일입니다.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위축된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요? 그것은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은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도 ‘그분의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이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께서는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그리고 셋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그러니 우리는 이미 그 마음을 거저 받은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곧 이미 받았기에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지 않는 가짜인 자기가 만든 마음이 아니라, 거저 받은 진짜인 예수 마음을 주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이 되게 하소서.
가짜의 제 마음이 아니라 진짜인 당신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게서 드러내소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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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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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ㄴ)

<성모 성심!>

오늘 복음(루카2,41-51)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말씀’으로, ‘환희의 신비 제5단의 내용’입니다.

‘환희의 신비 제5단 :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어제는 예수 성심, 오늘은 성모 성심입니다. 5월은 성모 성심, 6월은 예수 성심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아들과 어머니는 이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Fiat voluntas tua!”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마리아, 이 선택에 순종한 마리아는 이후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로서 한 생을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 성심을 간직하셨고, 예수 성심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모 성심’입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이런 모습으로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좋아하고,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의 공경을 받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성모 어머니를 닮아 ‘예수님’을 간직하고, ‘말씀’을 간직하고, ‘십자가’를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 전체를 묵상하는 묵주기도’가 ‘공염불’에 그치는 ‘죽은 기도’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겸손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본기도)

“우리농은 흙사랑, 땅사랑, 생명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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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함께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육체적 질병을 낫게 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얽매고 있는
어둠과 집착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예수님 가까이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도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상처를 보듬는 과정에서
우리 안의 상처 또한 치유됩니다.

성찰 없는 힘은
폭력이 되기 쉽지만,
사랑으로 정화된 힘은
치유와 회복의 도구가 됩니다.

제자들을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뜨겁게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신들의
상처와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치유받은 사람이 치유자가 되고,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의 전달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바꾸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마음을 닮아 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처럼 부르심과 치유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부르심은 곧 치유의 시작이며,
정화와 성장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치유받은 사람이
다시 세상을 치유하도록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넘치는 초대입니다.

부르심은 하느님의 몫이고,
응답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 초대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능력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신뢰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뢰는
모든 부르심의 시작이며,
모든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순간,
우리는 치유받은 사람이 되고,
동시에 세상을 치유하는
은총의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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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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