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고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과 학습 면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반 등수를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네가 이 친구보다 성적이 좋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그렇지 않아. 다음에는 적어도 이 친구를 이겨야 하지 않겠니?” 선생님께서 저를 아껴 주시는 마음에 하신 말씀인 것은 알았지만, 솔직히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친구와 면담하실 때에는 저를 거론하시면서 잘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공부는 친구와의 경쟁이 아니다. 진정한 싸움은 친구들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하는 것이다. 공부를 자신과의 싸움으로 여겨야 친구를 시기하지 않고 응원할 수 있다.’“원수를 사랑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과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나’와 용서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를 극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나를 극복하는 힘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지닌 사랑은 더욱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악과 싸우셨으며, 그 악을 몰아내시고자 두려움에 피땀 흘리시는 연약하신 당신 자신과 싸우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