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5장 38-48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38-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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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갖추라고 하십니다. 속물근성이 가득한 내 모습과, 늘 바퀴 하나 빠진 존재 같은 내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룩하고 완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살면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찾고, 꾀를 부려 세상을 살기 때문이죠. 내가 이룬 성공, 내 능력에 대한 자랑과 내가 알고 지내는 좋은 인맥이 나를 성공시켜 줄 것이란 헛된 희망을 갖고 삽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적대로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는 말씀이 공감 가는 시대입니다.


유다인들은 레위기의 가르침대로, 자기 동족을 미워하지 않고,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는 것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족은 서로 돕고 질책하며 격려해서 공존하는 삶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웃 사랑은 이민족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갖는 거룩함과 완전함을 자신들만의 성공에 가두려는 숨겨진 욕망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이웃 사랑의 길을 일깨워 주십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결국 하느님의 거룩함과 완전함의 방식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고 걸림돌 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직접 하느님 방식으로 사랑해 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거룩함과 완전함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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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 가졌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나의 사랑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묵상해 보고 나는 “여기까지 참아봤다”라고 생각된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보고 왜 여기까지밖에 참을 수 없었는지, 앞으로 그런 같은 일이 생기면 나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성경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복수를 행하고 있지 않은가”에서 나의 원수를 향해 “신앙”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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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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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고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과 학습 면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반 등수를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네가 이 친구보다 성적이 좋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그렇지 않아. 다음에는 적어도 이 친구를 이겨야 하지 않겠니?” 선생님께서 저를 아껴 주시는 마음에 하신 말씀인 것은 알았지만, 솔직히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친구와 면담하실 때에는 저를 거론하시면서 잘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공부는 친구와의 경쟁이 아니다. 진정한 싸움은 친구들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하는 것이다. 공부를 자신과의 싸움으로 여겨야 친구를 시기하지 않고 응원할 수 있다.’“원수를 사랑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과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나’와 용서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를 극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나를 극복하는 힘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지닌 사랑은 더욱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악과 싸우셨으며, 그 악을 몰아내시고자 두려움에 피땀 흘리시는 연약하신 당신 자신과 싸우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