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5장 1-12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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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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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세속적인 기준에 따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이른바 착한 사람들, 의롭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행복을 채워 주시면,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도 참된 행복이 마음속에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산상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산상 설교의 참된 행복은 현실의 역동성 안에 드러나는 것이지, 미래에 막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조건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복을 말합니다. 지상에서 가난한 마음, 겸손의 영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를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유함과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서 주어지는 예수님의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의 삶 속에 불멸의 평화가 가득 찹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다가 어려움이나 박해를 당할 때, 우리는 불사불멸의 즐거움, 영원한 상급의 전조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이 내 안에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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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나는 영의 부요함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세상의 기쁨을 끊을 때 참 신앙의 기쁨을 느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위에 좋지 않은 조건에서도 행복한 형제/자매를 본적이 있는지, 아주 좋은 조건에서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나는 현재 조건이 좋던 그렇지 않던 행복한 느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어떤 요소가 나의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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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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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입니다. 종교에 대한 이런 오해는, 종교가 죽음 후에나 누리는 천당이라는 환상 속의 행복을 설정해 놓고, 사람들을 달래고 마취시켜서 착취 계급에 순종하도록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옵니다.
그러나 산상 설교의 참행복은 오히려 현실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미래에 주어질 이런 몽환적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난하고 슬프게 살면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에서 가난한 마음, 빈 마음이 되었을 때 누리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가 있고, 우리의 온유함 안에,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 그리고 평화를 일구어 가는 우리의 삶 안에, 이미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다른, ‘참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이런 참된 행복을 맛보고 살지 못한다면, 죽음 이후의 하느님 나라에서 주어질 기쁨은, 내가 누릴 수 없는 ‘낯선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 번도 하느님 나라를 맛보지 못한다면, 미구에 주어질 하느님 나라도 결코 ‘나의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적어도 단 한 가지라도 참행복을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행복 가운데 우리 자신은 어떤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는지요?(출저: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396
11월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역하는 위령의 날/연중 제3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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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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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elrPMnZeK4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 담당 반유성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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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 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눈길 교통사고로 생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임사 체험을 했던 헨리 나웬 신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요르단강을 살짝 건너갔었을 때 받았던 가장 강렬한 느낌은 극진한 환대였습니다. 환한 웃음, 활짝 두 팔 벌린 세상 자상하신 분으로부터 세상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때, 평생토록 나를 억압해왔던 두려움, 상처, 분노, 굴욕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특별한 임사체험 이후 헨리 나웬 신부는 우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각자 죽음의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십시오.”

오늘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한바탕 불꽃놀이 하듯이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이 아닐까요? 바로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기간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 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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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언제, 왜 죽고 싶어질까? 죽은 자를 기억할 줄 모를 때>

영화 ‘P.S. 아이 러브 유’(2007)에서, 주인공 홀리는 가장 사랑하는 남편 제리가 뇌종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집안에 틀어박혀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는 남편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30번째 생일날, ‘죽은 남편’ 제리로부터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합니다. 제리는 자신이 죽은 뒤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그녀가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편지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새 옷을 사러 가”, “무대에 올라 노래해 봐”,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나”… 남편이 ‘죽음 너머에서’ 보내오는 사랑의 편지들은, 절망에 빠져 있던 홀리를 한 걸음씩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면,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 전통이 나옵니다. 그 세계관에서 영혼의 ‘최종적인 죽음’은, 이승에서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찾아옵니다. 기억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위령의 날 죽은 자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는 저승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죽고 싶을까요? 사람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사랑’입니다. 기름 없는 차는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랑받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사랑받지 못함’과의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화가가 되어서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광인’이라 조롱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랑은 동생 테오의 재정적, 정서적 지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이 동생에게 짐이 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자신의 귀를 자른 충격적인 사건 역시, 유일하게 곁에 있던 친구 고갱마저 자신을 떠나려 하자 벌인 극단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슬픔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없는 밀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죽음은 세상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한 영혼의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했던 부모를 기억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자신은 사랑받았고, 자신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미녀가 진짜 괴로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세상의 사랑을 위해 아버지의 사랑을 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여길 때 살고 싶은 마음을 잃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이유도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 분들은 죽어서도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위 영화 ‘P.S. 아이 러브 유’에서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어, 그 홀로 남은 사람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믿음을 줍니다.

가수 비, 곧 정지훈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삶을 막살아버리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침대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편지와 통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엄마는 이 통장의 돈을 남기기 위해 짐이 되지 않으려고 어쩌면 먼저 하늘나라로 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에 자극받는 비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이것이 ‘기억’의 힘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기억하려 할 때 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느낌을 되살립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주고 살아갈 힘이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나를 ‘기억’ 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파스카의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 기둥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미사'(전례)와 ‘기도’는 바로 이 ‘기억’을 위한 거룩한 장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미련했습니다. 그 차이는 단 하나, ‘기름’을 준비했느냐의 여부였습니다.

이 ‘기름’은 무엇일까요? 이 기름은 바로 ‘기억’입니다. 더 정확히는,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에너지를 잃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귀한 자녀인데, 어떻게 저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라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편지’로 자신을 기억하게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방식으로
그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십니다. 추운 겨울밤, 방안에 온기를 지펴주던 연탄불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연탄불을 보면, 한겨울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일어나, 그 차가운 연탄을 갈아내시던 어머니와 어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기억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제 가슴을 데우는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온기가 바로 제가 오늘을 살아갈 ‘사랑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를 가장 사랑한 표징은 ‘밥’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밥은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철민 씨가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들을 셰프들이 한 것을 먹고는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합니다.

잊혀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기억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미련한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여 기름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미련한 처녀는 구체적으로, 아침기도는 하면서
‘저녁 기도’는 생략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만약 아침기도 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녁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은, 등불은 가졌으되 기름을 채우지 않는 ‘미련한 처녀’의 모습입니다.

왜 저녁이 중요합니까? 창세기는 하루의 완성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창세 1,5) 고 말합니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요 기준입니다. 우리의 죄는 대부분 ‘저녁’에, 즉 하루의 에너지가 다 떨어졌을 때,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저녁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면, 그 기름을 밤을 밝은 대낮처럼 잘 지내게 할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시간도 바로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오후 세 시였습니다. 그분은 하루가 저무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 당신의 피로 ‘기억’의 기름을 우리에게 쏟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복음은 우리 자신을 향한 경고입니다. “너는 너의 등불에 아침저녁으로 기름을 채우고 있느냐?”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죽음’이라는 문 앞에서 신랑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기도는 물론이요, ‘저녁 기도’로,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기름을 채워 넣을 때, 우리는 미련한 처녀처럼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슬기로운 처녀처럼, 우리의 따뜻한 ‘기억'(기름)이 담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며 당당히 그분께 나아갈 것입니다.
지금 이 미사 중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차가운 심장을 성령의 ‘온기’로 채워주시도록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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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남부 사제 모임에서 이제 곧 은퇴를 앞둔 신부님이 강론하였습니다. 한 본당에서 27년 동안 사목하였습니다. 중남부 사제 모임의 ‘산 증인’입니다. 신부님은 강론 중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것이 4가지 있습니다. 목소리, 얼굴, 성격, 운명입니다. 목소리는 바꿀 수 없지만 목소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상냥한 목소리, 따뜻한 목소리는 이웃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얼굴은 바꿀 수 없지만 표정은 바꿀 수 있습니다. 웃는 얼굴, 밝은 얼굴, 온화한 얼굴은 이웃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격은 바꿀 수 없지만 성품은 바꿀 수 있습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양지심의 마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겸손함으로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수오지심의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비지심의 마음으로 선과 악을 식별하는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운명을 대하는 마음은 바꿀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거친 파도에서도 배를 항구로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우 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은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죽음의 강을 건넌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허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죽음이기에 살아 있을 때 먹고 즐기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죽음이기에 타인의 죽음까지도 함부로 여기기도 합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지우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죽음의 인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듯이,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데려가시리라.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거룩한 삶을 살았던 욥은, 충실한 삶을 살았던 욥은 사탄의 시험을 받아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재산과 명예 그리고 소중한 가족을 잃어야 했습니다. 몸은 종기와 부스럼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욥이 희망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언제가 하느님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와 죽음을 견디며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을 다시 보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5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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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로부터 우리 교회는 신자들에게 ‘사말’ 교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사말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때의 네 가지, 곧 죽음, 심판, 천국, 지옥을 말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결국 죽어서 심판을 받고, 그러고 나서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야 하는데, 이를 옛 천주교 교리에서 ‘사말’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여러분은 죽으면 어디로 갈 것 같으세요?” 교우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많은 분이 ‘연옥’이라 답합니다. ‘지옥’이라고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잘 살지는 못하였어도, 신자답게 살아 보려고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 있게 ‘천국’이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옥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충실하고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한 영혼이 겪게 되는 ‘정화’ 과정이 연옥입니다. 우리는 연옥을 거쳐 하느님 곁으로 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입니다.

오늘 첫째 미사의 복음은 어제 복음과 같은 ‘참행복’에 관한 산상 설교입니다. 놀랍도록 큰 희망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며, 의로움을 간절히 바라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아야 얻고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에라도 속하면, 그래서 하느님께 가닿으면 됩니다. 참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길목에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넘어 그것을 온전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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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30: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1.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날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날이다. 또한 아직 완전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정화의 여정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날은 단순히 죽은 이를 위한 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맞이하게 될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며 지금의 삶을 되돌아보는 영적 성찰의 날이기도 하다.

2. 연옥: 하느님 자비의 불
오늘 우리는 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연옥(煉獄)”에 대해 묵상한다. 연옥은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마침내 완성되는 정화의 과정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누구도 완전히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그분 앞에 나아가려면 모든 결점이 사랑으로 정화되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정의로 심판하시지만, 그 정의는 자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Enchiridion, 68) 이러한 정화의 상태를 교회는 ‘연옥’이라 부르며,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가 동시에 드러나는 자리로 이해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단죄하기보다는, 그분의 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마지막 정화의 은총을 주시는 것이다.

3. 교회의 교리와 전통 속의 연옥
연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의 긴 역사 안에서 정립되었다. 리용 공의회(1274)와 피렌체 공의회(1439)는 연옥의 존재와 그 영혼을 위해 산 이들의 기도와 미사, 선행이 유익하다고 가르쳤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연옥의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대속(代贖)의 행위가 참으로 도움이 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은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이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가르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한 몸 안에서 그들이나 우리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Homilia in Philippenses, 3)

4. 연옥의 정화와 희망
연옥의 영혼들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정화의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그 고통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 안에서의 고통이다. 그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며, 하느님께 도달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는 ‘연옥 논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연옥의 영혼들은 고통받지만, 그 고통 안에 가장 큰 기쁨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께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옥의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이 불처럼 작용하는 정화의 과정이다. 이 불은 미움의 불이 아니라, 불순물을 태우는 사랑의 불, 곧 하느님 자신이다(히브 12,29 참조).

5. 산 이들의 사랑: 통공의 신비
연옥의 영혼들은 더 이상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기도와 희생, 미사를 통해 그들의 고통은 줄어들고 정화는 빨라진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돌아가셨을 때,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가 대신 그 빚을 갚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는 것과 같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아가 8,6 참조). 성녀 모니카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 아우구스티노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내가 어디에 묻히든 상관없다. 다만,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다오.”(Confessiones, IX,11) 오늘 우리가 드리는 위령의 미사는 바로 그 기억과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가 바치는 이 미사와 기도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받아들이시어, 연옥의 영혼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것이다.

6. 모든 성인의 통공: 하늘과 땅의 연결
우리는 신앙의 고백 속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지상의 교회, 연옥의 교회, 천상의 교회가 서로 떨어져 있는 세 공동체가 아니라, 한 몸, 한 교회임을 의미한다. 천상의 교회는 완전한 일치 속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한다. 연옥의 교회는 정화 속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며,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 지상의 교회는 기도와 선행으로 그들과 통공한다. 이 세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이며, 우리의 사랑은 죽음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로마 8,38-39).

7. 복음의 위로: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은 단지 살아 있는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피로한 영혼들, 특히 정화 중인 영혼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다. 그분의 멍에는 부드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품 안에서 모든 영혼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다.

8. 결론: 사랑의 기념과 희망의 기도
오늘 우리는 돌아가신 부모님, 형제자매, 친지들, 그리고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을 기억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르도록 기도하자.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며 어떠한 고통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지혜 3,1) 우리가 오늘 드리는 이 미사 안에서 그들의 평화를 빌며, 동시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새롭게 다짐하자. 우리의 삶 또한 언젠가 주님의 품 안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 안에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주님, 죽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이 그들에게 비추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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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로>

마태오 11,25-30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대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믿으시니
믿고

믿으니
믿으십니다

희망하시니
희망하고

희망하니
희망하십니다

사랑하시니
사랑하고

사랑하니
사랑하십니다

섬기시는
섬기고

섬기니
섬기십니다

살리시니
살리고

살리니
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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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령의 날에 실천하는 보속과 기도는 사랑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2ㄴ)

1)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늘나라에들어가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위령의 날’은 그 영혼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기도하고 보속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위령의 날’의 기도와 보속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실천’이니까 ‘나 자신’을 위한 일도 됩니다.> 우리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는 곳이고, 하느님과 함께 완전하고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인 성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그분들에게 부탁합니다.>

연옥은, 희망 속에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 부족한 보속을 채우는 곳이기 때문에 ‘임시 거처’입니다. 그래서 연옥은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는 하늘나라뿐입니다. 우리가 연옥의 존재를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즉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지옥은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영원히 소멸됩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묵시 20,13-14) 그래서 지옥도 심판 때까지만 존재하는 ‘임시 감옥’입니다.>

2) 지금의 삶이 너무 힘들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면, 그렇게 희망을 버리고 절망에 빠져버린다면, 삶이 곧 지옥이 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면, 연옥에서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3) 산상설교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하늘나라에 5 자격에 관한 가르침, 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채워야 하는 조건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옛날에는 ‘진복팔단’이라고 표현했는데, 하늘나라의 행복이 여덟 가지인 것은 아니고, 또 자격이 여덟 가지인 것도 아닙니다. ‘참 행복 선언 말씀’은, 사실은 하나의 행복과 하나의 조건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즉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하나의 행복’과 그 행복을 얻어 누리려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의 조건입니다. ‘마음의 가난함, 슬퍼함, 온유함,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 함, 자비, 마음의 깨끗함, 평화 실현을 위해서 노력함, 박해를 견디어냄’은 모두 ‘신앙인답게 사는 것’ 하나입니다. 표현만 조금씩 다를 뿐이고, 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여덟 가지나 된다고 부담스러워할 것도 아니고, 여덟 가지 중에 하나만 해도 된다고 말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의 가난함과 깨끗함을 실천하고, 온유함과 자비도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고, 박해를 받아도 인내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한 번에 그것을 다 실천할 수 있나?”라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면 당연히 다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 위로를 받는 것, 흡족해지는 것, 자비를 입는 것, 하느님을 뵙는 것,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은 모두 하늘나라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일 뿐이고, 사실은 하나의 행복입니다.

4)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어떤 업적을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어떤 결과를 요구하신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예로 들면, 예수님께서는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을 뿐이지 정의와 평화를 실현시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 하는 모든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뿐입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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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왕년에’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면, ‘노인은 반성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내가 왕년에’라는 식의 말을 자주 하면서라고 자기를 반성하기보다 내세운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도 ‘그렇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반성합니다.

이렇게 ‘왕년에’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을 불행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계속 과거의 시간에만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럴까요? 아마 미래의 시간에도 분명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지금을 떠올리며 ‘왕년에’,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지금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습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을 탐내는 것입니다.

습관은 계속 반복함으로 인해 생기게 됩니다.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것도 오랫동안 반복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처음부터 새벽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과거를 말하는 것도 계속해서 그 시간만을 바라보려 하기에 습관이 된 것입니다.

습관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고, 나에게 딱 맞는 시간임을 계속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지금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지금껏 살아온 생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그럴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뇌를 측정해 보니, 심장이 멈추기 전 30초 동안 과거를 회상할 때 나타나는 뇌파 활동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과연 그 30초 동안 어떤 과거를 떠올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제서품을 받을 때, 제대 앞에 엎드립니다. 하느님과 교회 앞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주마등처럼 저의 삶이 떠올려졌습니다. 어떤 삶일까요? 감사한 일들, 사랑받았던 일들이 마구 떠올려졌습니다.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나인데….’, ‘이렇게 죄 많은 나인데….’ 그런데도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직전에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기억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후회하는 삶, 과거에 연연하는 삶, 걱정하는 삶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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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지만,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인간의 노력과 공덕만으로 얻을 수 없는 선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먼저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위해 그분들의 기도를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인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운명인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의미와 지향을 새겨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임을 알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바쁜 탓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희로애락들이 우리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가끔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 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세상에 대한 미련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남아를 선호하고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허점이 많지만, 주된 요지는 자신이 잊히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면 또한 그런 미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욥은 자신의 희망을 바꿉니다. 구원자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살갗이 벗겨져 죽음이 가까운 상황에서도 그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겠다는 희망과 믿음에 의지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도, 학교생활도, 일도, 인간관계도 끝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집니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후회도 모두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완성되어 새로운 시작의 밑바탕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에 대해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고 나이 드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늙어가는 것은 익어가는 것이고 노년과 죽음은 결실과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역시 허무와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만 희망을 걸고 집착하지 않지만, 세상의 가치는 오히려 믿는 이에게 훨씬 큽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새롭고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느님을 만날 희망을 선택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부와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든든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위령의 날인 오늘, 우리는 세상 삶 속에서 잊기 쉬운 이 희망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운 저주가 아니라 승리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두가 이 희망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3.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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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영진 베드로 신부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11월은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 특별히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연옥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위령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들 역시 죽을 인생임을 기억하며 복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교회 묘지에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위령 성월에 돌아가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1독서 지혜서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 큰 도움이 됩니다. 돌아가신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내일이라는 시간’이면 우리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기에 ‘오늘, 그리고 지금이라는 시간’에 충실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성화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먼저 돌아가신 선배들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에게 건네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당신들도 언젠가는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내일’ 후회할 일을 ‘오늘’ 하지 마십시오. 분에 넘치는 욕심 삼가고 겸손하고 성실하십시오.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부모나 형제, 자녀에게 잘하십시오.”

희노애락 하면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이곳’의 삶이 분명히 끝나면, 죽음을 넘어 우리의 본향인 ‘저곳’의 삶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하면서 이곳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저곳’에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게 ‘이곳’에서의 매일매일을, 아니 매 순간을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곳’에서의 어려움들을 떨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28-30).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오늘, 이곳에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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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모든 성인의 대축일과 같은 참 행복 선언입니다. 예전 베트남에서 돌아온 해 2014 관구 총회 중, 죽은 도밍고 수사가 자기 나눔의 시간 동안 두서 번에 걸쳐 반복해서 죽고 싶다, 는 표현을 들을 때 참으로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을 들게 했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오랫동안 투병 생활하더니만 일찍 외롭게 세상을 떠나 하느님 곁으로 귀천했습니다. 사실 생사 生死는, 곧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삶을 싫어하여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버리려고 한다면 곧 하느님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 또한 하느님의 생명을 온전히 깨닫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현세의 삶은 그저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임시 거처가 아니며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인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다.”라고 성 이레네오는 말합니다. 결국 삶도 죽음도 다 하느님의 생명이라면, 살아가고 있는 곳이 이승이든 저승이든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그곳에서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제 엄마 돌아가신 다음, 꿈속에서 엄마를 만났고 그래서 엄마에게 물었죠. “엄마 거긴 어때?”라고, 그러자 제 엄마 대답이, “신부, 피양 마찬가지여!” 이는 곧 이승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저승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제 엄마가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부터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만이 하늘에서도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즉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이기에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행복이란 만족 滿足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지금 힘들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이기에, 온갖 불행을 다 겪었음에도 행복했던 욥의 신앙을 본받아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존재와 행복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해인 수녀님의 「1% 의 행복」이란 시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 행복하냐고 낯선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사는 제가 자꾸 걱정이 되나봅니다.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아마. (…)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2%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지를 아는 모양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 전에 약간의 좋은 것으로 얼른 채워 넣어 다시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 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 우리 삶에서 아무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감미로운 음악 숲과 하늘과 안개와 별,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행복하다고.』

오늘 독서에서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19,25~27) 저는 아직 천국에 가보지 못해서 제 엄마가 이곳에 사실 때보다 그곳에서 더 행복하게 사시고 계시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욥의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전 마음의 위로를 느끼고 행복해집니다. 제가 사랑했던 엄마가 이젠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뵈옵고, 생명이신 하느님의 영원한 행복 안에서 잘 살고 계시다, 라고 느끼고 알게 되어서 마음이 참으로 편안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전 천국에서 제 엄마가 많이 아주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엄마가 행복하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엄마가 행복하시다고 느끼기에 저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끔 이곳에 엄마가 아니 계시기에 많이 슬프기도 하지만, 언제가 때가 되어 제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엄마를 다시 만나고 뵈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해집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엄마가 저의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엄마 또한 저의 간절한 소망처럼 엄마가 저를 기다리시면서 행복했으면 참 좋겠네요. 그래서 오늘 엄마와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사실 엄마와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기보단, 살아 있는 제가 엄마와 아버지처럼 신앙 안에서 죽음의 순간을 잘 받아들이고 거룩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봅니다. 저는 아버지와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엄마와 아버지가 당신들을 만날 때까지 제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만나도록 기도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 특히 이모와 이숙 조 아네스& 배 요한, 사제 생활하면서 만났던 양부모님 장시몬과 한데레사와 모든 분이 하느님의 영원한 자비 안에서 영원히 참된 안식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저를 이 수도회로 초대해 주고 인도해 주었던 마레이몬드 신부님과 박도세 유스티노 신부님도, 비오 수사와 도밍고 수사도,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영혼들 또한 기도하고 기억합니다. “주님, 이미 세상을 떠난 돌아가신 저희 각자의 부모님들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은 불쌍한 연옥 영혼들과 이 땅에서 살면서 재난과 질병 그리고 전쟁으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베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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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

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만남과 죽음의 신비를 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잎이 새싹일 때 ‘이미’ 단풍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보는 것이요, 꽃이 몽우리일 때 ‘이미’ 씨앗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요, 현재를 충실히 죽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이처럼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짓고,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파우스티나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우리의 죽을 몸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난다는 것’은 인생에 죽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애초에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사불멸의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에서 우리는 참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사되고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라 합니다. 곧 참된 ‘안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참된 안식’, 그것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그것은 공로로 얻어지기보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탐구로 얻어지기보다 순명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앎으로 얻어지기보다 사랑으로 얻어집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특히 소외된 영혼들, 곧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과 잊혀진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평화를 위해 일하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살육 속에서 희생된 이들,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들, 고문과 억압으로 희생된 이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없는 타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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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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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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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행복 도정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어제 모든 성인의 날에 이어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고 있는데
이는 우리를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떠나 천국에 든 성인들과 아직 그렇지 않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이 두 축일의 차이점이라는 것쯤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바이고,
그분들을 기도하는 날이 바로 오늘 위령의 날이라는 것도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왜 축일의 순서가 모든 성인의 날이 먼저이고 위령의 날이 다음인지
그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오늘 알아야 하고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성인처럼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인데 아직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도정에 있는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걸 인정하고 하늘나라로 가는 행복 도정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부정하기에 아예 그 도정에 오르지 않고 이탈한 인간도 있다는 겁니다.

이 도정에 오르지 않아 완전히 이탈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지옥이요,
이 행복 도정에 오르긴 했지만 아직 하늘나라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있는 곳이 연옥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입니다.

여기서 저는 연옥에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이라고 했는데
이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는 개신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개신교 신자들은 사실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직천당한다고 철석같이 믿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믿음의 내용이고 실천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가난 실천입니다.

영으로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다는
행복 선언의 말씀을 믿고 실제로 모든 것을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팔아 사야 할 밭에 묻힌 보물이라는 주님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라가야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주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해야 갈 수 있는 곳인데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아무것도 버릴 수 없고 나눌 수 없으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행복 도정은 출발조차 할 수 없겠지요.

둘째로 사랑 실천입니다.
나만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은 사랑 않고 하느님만 사랑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사랑 통공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인들처럼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랑이 통해야 합니다.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형제들인 가난한 이들을 주님인 듯이 사랑해야 갈 수 있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시는 주님처럼 길잃은 형제와 함께 갈 때 갈 수 있고,
이웃을 겨우 사랑하는 우리가 마침내 원수까지 사랑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행복 도정에 있고,
아직까지 연옥에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행복 도정에 있는 우리와 아직 연옥에 있는 연령들이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해서 통공의 기도를 같이 바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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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오늘은 11월 2일, 전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가 함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들, 특히 연옥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나의 죽음도 생각하면서 잘 준비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때 조건이 충족되면, ‘전대사의 은총’도 받게 됩니다.

전대사의 조건은 ‘고해성사와 영성체와 교황님 기도 지향 기도와 묘지방문’입니다. 11월 교황님 기도 지향은 ‘자살 예방’입니다.

‘전대사’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가 사해진 후 남아있는 벌(잠벌)을 모두 면제해 주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전대사는 내가 받는 것이지만,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양도할 수 있습니다. 단, 살아있는 이웃에게는 양도가 안 됩니다.

위령의 날에는 미사를 ‘세 대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 미사>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입을 것이다.”(지혜3,5)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사말 교리’가 있는데, 이는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종말, 곧 ‘죽음과 심판과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입니다.

‘연옥’은 끝이 아니라, ‘잠시 거쳐가는 곳’입니다.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물며 정화하는 곳, 단련받는 곳’입니다.

연옥 영혼들을 위해, 그것도 가장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죽은 이들을 위한 나의 기도는 ‘영적 보험’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천국을 그리워하며 함께 열심히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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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 나에게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단풍이
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돌아감입니다.

나무의 품으로,
땅의 품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완성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기억과 사랑은
그 한계를
넘어섭니다.

소중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를 현재 속에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이며,
그리하여 죽음조차
사랑의
기억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위령의 날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는
은총의 날입니다.

이 시간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배우는
사랑의 날입니다.

사랑은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생명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묵상할 때,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깊이
사랑해야 함을
배웁니다.

위령의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희망의 날이며,
소멸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긴
결과로서의
온전한 평화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우리의
슬픔은 기도로,
이별은 사랑으로,
죽음은 안식으로
변합니다.

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그리움과 사랑,
눈물과 기도를
봉헌합니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사랑이 머무는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삶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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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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