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4장 12-13절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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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23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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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갈릴래아는 게으른 사람들이 모여 불법을 저지르는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어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너무나 팍팍한 곳이었기에 남쪽 유다 사람들은 갈릴래아를 멸시하였습니다. 먹고살기 바쁘면, 품위 있고 고상한 시간을 즐기는 것은 사치에 가까운 것이지요. 요샛말로 ‘누구는 편안히, 즐겁게 살고 싶지 않겠냐?’는 푸념이 갈릴래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듯합니다.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신 곳은 바로 갈릴래아였고, 공생활의 대부분도 갈릴래아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가난한 곳이었고, 예수님께서 만나신 이들은 대개가 아프고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내세울 만한 능력도 기술도 명예도 없는 그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써 내려가시기 시작하셨지요. 개천에서 용 나듯 또 다른 성공 사례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언급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도시나 성공한 이들의 생활 방식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이나 갈릴래아의 큰 도시, 예를 들어 세포리스와 같은 큰 도시에서 벌어지는 삶의 구체적 언급은 복음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읽고 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사회적 약자들의 만남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구원 이야기입니다.그렇다고 세상의 부자와 성공한 사람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각자의 삶의 처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선택하신 이유는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그 연민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사람답게 살기 바라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삶의 처지를 살피는 것에 지치지 말아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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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나는 하느님께서 내 삶에 섭리하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주님의 섭리가 나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만약 느끼지 못하였다면 어떤 주님의 섭리가 나를 통해 이루어 지길 바라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에서 나는 주님에게 쓰임 받는 종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나는 현재 그분만 바라보며 그분을 어떻게 따라가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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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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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사야가 예언한 빛의 이미지는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에 의해 새롭게 탄생합니다. 그 구원의 빛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갈릴래아 땅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큰 빛이 비쳐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밤처럼 우리의 인생은 실패를 거듭하고 고통으로 점철될 때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한 외침과 갈망의 빛이 솟아오릅니다. 이미 어두운 밤은 사라져 가고 인생의 새벽이 예수님과 함께 시작됩니다.
믿음의 빛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어두운 삶은 밝아지고 변화합니다. 신앙을 받아들이면 지난날의 삶을 참회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어둠 속에서 주님의 빛을 발견하면 힘이 솟아나 새로운 인생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출 때 우리는 진리와 사랑이 승리하는 세상을 만납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쾌락과 물질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옮기게 됩니다.
진리와 생명으로 향하는 영혼은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어두운 밤은 더욱 신비롭게 그분에게로 다가가는 발걸음입니다. 낙오자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회생의 움직임을 보일 때, 은총은 타오르고 하느님께 나아갈 길을 비추어 줍니다.
은총의 ‘빛’과 하느님 상실의 ‘어둠’은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실존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빛’과 나의 ‘어둠’은 어떠한 것입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