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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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12
1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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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이 선뜻 들어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며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느라 힘들기만 하지요.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보상은커녕 고통을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요한이 원하는 회개는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던 사람이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인간적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겠다는 결심이 회개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외침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우리에게 까닭 모를 어려움마저 겪게 하신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려고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유 없는 고통까지도 주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끝내 이를 잘 극복한 분들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생각하지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외침대로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나와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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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요한 입장에서
– 바리사이/사두가이 입장에서
2.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에서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나의 죄를 합리화 한 경험이 있는지 앞으로 또 죄를 지을지 알면서 고해성사를 한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무엇이 우리를 죄의 족쇄에서 해방시키지 못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의 영적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어떤 열매를 맺을지 묵상해 봅시다. 아직 열매를 맺지 못했으면 어떤 이유에서 열매가 맺지 못했는지, 나의 믿음의 문제인지 묵상해보고 나의 믿음이 성숙해지면 어떤 영적 열매를 맺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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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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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들려줍니다. 잘려 말라죽은 그루터기는 다윗 왕조의 죄와 불충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는 것은 거저 주는 생명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햇순은 은총이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영의 선물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지혜와 용맹과 사랑의 영으로 채워 줍니다.메시아께서는 주님의 영을 받아 무엇보다 힘없고 가련한 이들을 위하여 놀라운 구원의 활동을 펼치십니다. 메시아 나라는 긴장과 적대 행위가 없고 평화와 일치만 있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환시는 우리 마음을 희망과 기쁨으로 채워 줍니다.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인내와 위로”의 선물은 암흑 속에서도 희망과 기다림을 키워 주고, 사랑의 선물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섬기기 위하여 우리를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나 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할례 받은 이들, 곧 당신 약속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함을 나타내려고 선택된 백성에게 하였던 약속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넘쳐흐르는 당신의 자비로 찬양을 받습니다.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인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먼저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는 단순한 종교 예식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에서 진실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인격의 변화로도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명예와 자격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회개의 선물은 “성령과 불”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다가오는 하늘 나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430
12월7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사회 교리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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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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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Ep12vBt4Iw
[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사회사목국 부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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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대림 시기 때 마다 자주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의 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옷차림이며 생활방식이 얼마나 청빈하고 소박했으면, 복음사가들마다 그의 과도하게 없어 보이는 행색을 지적합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 낙타 털로 된 옷, 가죽 띠, 메뚜기, 들꿀…이런 표현들은 세례자 요한의 극도로 제한되고 겹핍된 삶을 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것처럼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기며 살아갈 때, 다시 말해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갈 때, 따라오는 한 가지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 자신의 힘, 자신이 지닌 재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섭리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보다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결핍과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난과 고통, 배고픔과 목마름 앞에 너무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지나친 결핍은 우리에게 굴욕과 비참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결핍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 겸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정했습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가난은 영예요 기쁨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비자발적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오욕이요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태생적 한계로 비자발적 가난에 노출된 수많은 이웃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림 제2주간은 그런 이웃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우리 교회가 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사회 교리! 말만 꺼내도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한 본당 특강 때 사회 교리를 조금 언급했더니 몇몇 분들이 즉시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불편한 얼굴 표정을 짓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실 사회 교리는 이 시대 가장 강조되어야 할 소중한 교리입니다. 사회 교리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초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로 인해 세세대대로 보존되어야 할 금수강산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굽이굽이 전 국토를 흘러 적시는 아름다운 강줄기를 잔인하게 토막 내 버릴 때, 그것은 교회 밖 일이니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지도자로 인해 국격이 완전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들이 만든 그릇된 제도로 인해 가난한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것은 남의 일이라 여기고, 높은 교회 담 안에서 우리끼리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제는 하늘의 찬란한 별이 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정말이지 일관되게, 끊임없이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제발 교회와 수도회 담 너머로 나가십시오. 안에서 안전하게 머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서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낫습니다.”
교황 착좌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계속 반포하셨던 일련의 회칙들의 주된 골자는 한결같이 사회 교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또 한분의 대 예언자,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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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9igE-8oy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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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희망’을 길들이는 새로운 세례자 요한>
태국의 한 감동적인 광고 영상이 있습니다. 사춘기 소녀가 엄마와 다투고 가출을 합니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볶음밥 가판대 앞을 서성이는 소녀를 보고 주인아줌마가 갓 볶은 따뜻한 밥을 내어줍니다. “돈은 됐다. 그냥 먹어라.”
소녀는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멈추고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볶음밥에 양파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양파를 싫어해서 엄마는 늘 양파를 빼고 볶음밥을 해주셨거든요. 이상하게 여긴 소녀에게 아줌마가 말합니다. “네 엄마가 다녀갔단다. 혹시 네가 오면 밥을 해 먹이라고 돈을 맡기고 갔어. 양파는 빼고, 계란 후라이는 반숙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
소녀는 밥을 먹으며 깨닫습니다. 내 뜻대로 살기 위해 집을 나왔지만, 엄마의 사랑이 있는 집이 여기보다 훨씬 행복한 곳이라는 것을요. 소녀는 밥그릇을 놓고 아줌마에게 핸드폰을 빌려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이 광고 속의 ‘볶음밥 아줌마’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아줌마는 자신이 엄마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소녀에게 엄마의 사랑을 맛보게 해 주고,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반 대학을 다니던 시절,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더 큰 행복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려 5년 동안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속에 묘사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책은 저에게 볶음밥 아줌마였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버리고 사제가 되면, 제자들처럼 저런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구나.” 그 희망을 보았기에 저는 세상의 행복(대학, 성공)을 미련 없이 버리고 신학교라는 광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데, 왜 어떤 이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행복을 찾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처지에서 불평만 하며 주저앉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익숙한 불행에 중독된 것’입니다.
어느 나그네가 툇마루 밑에서 계속 낑낑거리는 개를 보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개는 왜 저렇게 웁니까?” 주인이 무심하게 답합니다. “아, 깔고 앉은 자리에 삐죽 튀어나온 못(Nail)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일어나면 되지 않습니까?” “일어날 만큼 아프지는 않으니까요. 그냥 낑낑대며 불평할 정도만 아픈 겁니다.”
우리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사는 게 힘들고 허무하다고 불평하지만, 박차고 일어나 세례자 요한을 찾아갈 만큼 간절하지는 않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40년 넘게 복역한 장기수 레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감옥 벽이란 게 참 웃기지. 처음에는 미워하다가, 차츰 익숙해지고, 세월이 지나면
결국 의지하게 되거든. 그게 바로 ‘길들여진다(Institutionalized)’는 거야.”
세속의 삶은 감옥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더 큰 행복이 있다!”고 외쳐도, 그 변화가 두려워 귀를 닫아버립니다. 불평하는 것이 도전하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전개 3] 정글 속의 런던 지하철 노선도 그렇다면 이 무기력을 깨고 일어날 힘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맛보았던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에서 나옵니다.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부대가 전멸하고 홀로 남은 병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도 죽었으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뒤, 그 병사가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치고 구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던 꼬깃꼬깃한 지도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역시 지도가 있어서 살았구나!”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지도는 밀림의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런던 지하철 노선도’였습니다.
그는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 지도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런던에서 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었지. 주말에는 저 역에서 내려 데이트를 했었지.
나는 그 행복을 안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에게 런던 지하철 지도는 종이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미 살아보았고 체험했던 ‘확실한 행복의 증거’였습니다. 그 행복의 기억이 정글의 고통을 이기게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작은 희망의 성취를 맛본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기력이 학습되듯이, 희망도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학습시키는 곳’, 곧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꿀과 메뚜기만 먹으며 절제했듯이, 교회는 우리에게 세속, 육신, 마귀(삼구)를 끊어보라고 가르칩니다. “십일조를 내어보십시오. 돈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더 자유로워집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해 보십시오. 자존심을 꺾으면 평화가 옵니다.” “봉사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몸은 힘들어도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런 가르침이 부담스럽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런던 지하철 노선도를 쥐여주는 훈련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를 끊고 노력하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는 신자는, 단팥빵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지금 교회가 위기인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를 끊으라는 세례자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복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라는 세상의 희망만 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과 똑같은 행복을 주는 교회라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희망을 주지 못하는 부모가 버림받듯, 세속적 희망만 주는 교회는 필요 없어집니다.
‘체나콜로(Cenacolo) 공동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전 세계의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청년들이 모여 사는 가톨릭 공동체입니다. 이곳엔 TV도, 핸드폰도, 약물 치료도 없습니다. 오직 ‘기도’와 ‘노동’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감옥입니다.
그곳에 페데리코라는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그곳의 규칙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려 했습니다. “왜 나를 가두느냐”고 반항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형제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밤새 기도해주고, 묵묵히 밭을 갈며 땀 흘리는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페데리코는 형제들의 눈빛에서, 마약이 주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속의 쾌락(마약)을 끊고, 육신의 편안함을 끊고(노동), 마귀의 유혹을 끊는(기도)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을 통과했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은 나에게 마약을 주며 잠시의 쾌락을 팔았지만, 이곳은 나에게 고통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얻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못 위에 앉아 낑낑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세속, 육신, 마귀를 끊으면 진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대림 시기, 세상의 쾌락을 끊고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불편함’을 감수하십시오. 그 작은 승리의 체험들이 모여, 여러분을 구원자 예수님께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희망의 지도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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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용인 성직자 묘지’엘 다녀왔습니다. 지난 6월 동창 신부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고, 8월에는 존경하는 유경촌 주교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11월 위령 성월이었습니다. 청명한 날에 먼저 떠난 사제들은 반갑게 저를 맞이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동창 신부님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고 왔습니다. 라틴어 격언 중에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 (Mortui vivos doc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지녔어도, 많은 업적과 능력을 보였어도 죽음은 공평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비우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름 없는 들꽃처럼 남이 알아 주지 않았어도,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었어도 죽음은 공평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억울해할 것도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세상은 공평을 이야기합니다. 공평은 능력과 실력에 따라서 대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 자갈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제때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은 ‘공평’한 삶의 원칙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형평’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인간의 품위와 품격을 보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오후에 일한 사람에게도, 저녁에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햇빛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형평의 원칙에 따라서 1인은 1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어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어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영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곪게 만드는 미움과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행위를 ‘회개’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영들을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짓된 영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오랫동안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늑대와 같았던 바오로 사도, 사자와 같았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여서 순한 어린양과 같이 되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낡은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보았던 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의 영’으로 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영을 받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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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대림 제2주일에 듣는 복음의 주제는 광야의 세례자 요한이 재촉하는 회개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하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다는 것을요.
우리말로 ‘대림’(오기를 기다림)이라고 옮겨지는 라틴 말 ‘아드벤투스’는 다가옴, 가까워짐, 도착, 도래를 뜻합니다. 누가 오시나요? 누가 도착하시나요? 하느님이십니다. ‘대림’이라는 우리말에서는 기다린다는 ‘우리’의 행위가 드러나는데, 라틴 말은 ‘오시는 분’께, ‘하느님께서 오심’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지난 4월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기다리는 우리 자신보다 오시는 분께 초점을 맞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첫걸음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를 만나러 오시는 그분께서 나를 쉽게 찾아 만나시도록 숨지 말아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오실 때 두려워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입니다. 그가 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찾으실 수 있게 하려면 깨끗한 마음으로 자기 자리에 충실히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 회개의 구체적 표현 하나가 제시되는데, 바로 형제적 일치입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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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1. 회개의 복음: ‘하늘나라의 도래’와 인간의 응답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첫 외침으로 시작된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2절) 요한의 외침은 단순히 윤리적 개선의 촉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 앞에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전환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구원사의 요청이다. 즉, 회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교리서는 이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한다. “회개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근본적 내적 변화이다.”(1427항) “이 회개는 단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영적 여정이다.”(1430항) 따라서 대림 시기에 교회가 반복해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은, 단순히 ‘죄의 고백’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하라는 초대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먼 길이 아니다. 단지 마음을 돌리면 된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네 마음 속에서 기다리신다.”(Enarrationes in Psalmos 85,8)
2.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 정의와 평화의 회복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이사 11,1-10)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나리라.”(1절) 말한다. 이는 메시아의 정의로운 통치와 평화의 도래를 상징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싹”을 “그리스도 자신”으로 해석하며, 그분 안에서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화해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정의의 태양이며, 그분 안에서 모든 불의가 녹아 사라진다.”(Sermo 293,3) 이사야의 예언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을 멸하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는 종말론적 약속이자, 인간의 내적 쇄신을 요구하는 윤리적 요청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요한 세례자의 “회개하라”는 외침은 이사야 예언의 직접적인 성취이다. 그의 음성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사 40,3)로서 하느님이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실 것을 선포한다.
3. 요한 세례자의 소명과 예언자적 권위
요한 세례자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하느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다. 그의 존재는 엘리야의 예언적 전통 안에서 이해된다.(말라 3,23 참조) 그의 옷차림(털옷, 가죽띠)은 엘리야를 상징하며, 그의 장소(광야)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구원사의 공간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요한의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요한은 세상의 모든 소란을 떠나 광야로 갔다. 그는 하느님 말씀만이 자신의 재산이며, 회개의 외침만이 자신의 음식이었다.”(Homilia in Matthaeum 10,1) 요한의 존재는 단순한 도덕적 개혁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여는 신비적 예언자이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분”을 증언하며, 그분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11절) 이 겸손은 곧 참된 그리스도인 영성의 원형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요한은 자신을 낮추어 주님께 길을 열었다. 교만은 길을 막지만, 겸손은 주님을 맞이한다.”(In Ioannem Tractatus 4,5)
4. 회개의 의미: 외적 행위에서 내적 변화로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라고 촉구한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행위의 권고가 아니라, 내면의 전환을 뜻한다. 오리게네스는 “회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개는 단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중심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 그것이 회개의 본질이다.”(Homiliae in Lucam 24,2) 교리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회개는 인간의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마음의 근본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다.”(1431항) 이렇게 볼 때, 요한의 외침은 단지 ‘심판의 경고’가 아니라, ‘새 창조의 부름’이다. 도끼와 불의 이미지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마태 3,11) 말씀은 심판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 곧 사랑의 정화를 가리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 불은 죄인을 멸하는 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순물을 태워 거룩하게 하는 불이다.”(Homilia in Matthaeum 11,3)
5. 세례의 신비와 성령의 불
요한의 세례는 물로 죄를 씻는 ‘징표적 회개’였지만,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다.(요한 3,5)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말한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세례의 형식이 아니라, 은총의 본질적 차이를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구분한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의 세례는 재창조의 은총이다.”(In Ioannem Tractatus 5,9) 교리서는 이를 설명한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예비였고, 예수의 세례는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주는 것이다.”(720항) 따라서 회개는 단지 죄의 유감이 아니라, 세례적 삶으로 돌아가는 지속적 운동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이미 회개의 여정을 시작했으며, 대림은 이를 다시 새롭게 하는 시기이다.
6. 결론: 회개는 새로운 시작의 은총
요한의 외침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희망의 복음이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는 것은 심판의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뜻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낡은 뿌리를 잘라내고, 성령의 새싹을 돋게 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회개는 우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스도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대는 이미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Sermo 19,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함에 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회개와 쇄신 속에서 성장해 간다.”(교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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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맞이>
마태오 3,1-12 (세례자 요한의 설교)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님맞이>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믿음이 오시네요
믿어요
믿음이 오시도록
믿어요
믿음을 맞이하도록
믿어요
믿음과 하나 되도록
믿어요
믿음이 되도록
희망이 오시네요
희망해요
희망이 오시도록
희망해요
희망을 맞이하도록
희망해요
희망과 하나 되도록
희망해요
희망이 되도록
사랑이 오시네요
사랑해요
사랑이 오시도록
사랑해요
사랑을 맞이하도록
사랑해요
사랑과 하나 되도록
사랑해요
사랑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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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한의 회개 선포는 구원 선포이면서, 심판 선포입니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1-3)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7-12)
1)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루카 17,21) 그리고 이 말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10절에 있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가 바로 그 말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심판대에서 처벌과 멸망을 선고받지 않기 위해서, 즉 ‘구원을 선고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처벌과 멸망을 피하려는 생각만으로 회개를 한다면, 그 회개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회개, 억지로 하는 회개, 위선적인 회개가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회개는 바로 그 희망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원해서 하는 일, ‘기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전체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기쁨 가득한’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벌과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하는 것이라고 마음가짐을 바꿔야 합니다.
2)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구원 선포’이기도 하고 ‘심판 선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면서, 동시에 믿음도 거부하고 회개도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하고, 처벌과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12절의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는, 충실한 신앙인들을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처벌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메시아는 구세주이면서 동시에 심판관이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구세주로 오셨고, 심판관으로 오시는 것은 재림 때의 일이라고 믿고 있는데,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의 두 모습을 한 번에 선포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이 너무 성급하게 ‘재림 때의 예수님’을 미리 선포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이 재림 때의 일을 미리 말했다고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3) 3절의 ‘주님의 길, 그분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ㅜ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천여 년 전의 유대인들에게 선포된 메시아는 ‘오시는’ 분이었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미 오신’ 분이고, 우리 가운데에 살아계시는(현존하시는) 분입니다.
단순히 ‘대림시기’ 라는 이유만으로, 또 ‘대림’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척 하면서,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자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분’, 또는 ‘오실 분’이라면, 그리고 대림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일’이라면,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안 계시는 분이라는 말인가? 주님이신 예수님은 신앙인들을 떠나신 적이 없는 분이고, 신앙인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안 계시는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니까 그분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자.”가 아니라,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과 더욱더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회개하자.”가 되어야 합니다.>
4) “독사의 자식들”은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꾸짖는 말이고,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는, “심판이 무서워서, 심판을 피할 생각만으로 회개하는 척 하지 마라.”라고 꾸짖는 말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를 하여라. 온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라는 뜻인데, 여기서 ‘열매’는, 회개를 통해서 ‘완전히 변화된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원래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합니다. 삶에 변화가 없다면, 회개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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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영성으로 살아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이다.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당신의 숨, 영을 불어넣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본능으로 살지 아니하고 이성으로 산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살아야 한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 11,6-7)는 말씀이 있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하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된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의미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는 말씀이다. 예언 후 수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다. 사납게 굴던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 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다.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다.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다.”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새 삶을 살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다. 그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0)고 선포하였는데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이다. 마음 보따리를 바꾸는 것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프란치스코 교황) 는 말씀을 기억해 보라.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이다.(프란치스코교황)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 된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다. 시기와 질투, 분노, 적개심…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성령께 청한다.
예수님께서“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3,12). 하셨으니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하길 희망한다.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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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영식 사도요한 신부님]
<회개는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 다.”(마태 3.1)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듣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 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3.5-6 참조)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3.7)
왜 그랬을까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에게서 변화의 의지를 발견하지 못해서인지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3,8)라고 강하게 얘기합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율법과 같이 어떤 형식적이고 외적인 예식에 따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와 같이 세례 역시 참다운 회개가 동반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회개의 일차적인 의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 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그 회개로는 사실 근본적인 변화로 나아가기 힘듭니다. 세례자 요한이 말한 회개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우리 자신을 완전히 돌려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향해 걸어가는 실천을 포함합니다. 즉, 자기중심적 삶에서 하느님 중심적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쁘게 맞아들이고, 참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할 수 있게 됩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은 계속되는 회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가 온전히 완전한 존재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들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 회개의 삶을 허락하시고 초대해 주셨기에 우리는 희망 속에서 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는 힘든 숙제나 의무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어떻게 들리나요? 우리 인간을 옥죄는 주님의 강압이나 경고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참된 행복을 전해주려는 주님 사랑의 외침으로 들리십니까?
주님의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지 않는 합리화로 이용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기쁨과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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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 우정이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가고 신부가 된 후에는 그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환경과 성장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듯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 통합니다. 하지만 환경과 성장이 다르게 되면 만남이 어색해집니다. 애벌레와 나비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계속 친해지는 방법은 둘 다 성장하거나 둘 다 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릴케는 자기 책에서 ‘같이 있는 게 사랑이 아니라 서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게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이 같이 성장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셨던 것도 우리가 모두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성장해야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그 대상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 그의 성장을 위해 사랑하고 있나요? 자기 성장을 막는 사람과는 계속 함께할 수 없고, 그래서 멀어집니다. 하지만 나의 사랑으로 그의 성장을 도와주고, 실제로 성장하면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가 생활한 유다 광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는 시련의 장소이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처음 계약을 맺고 사랑을 속삭였던(호세 2,16) 영적 쇄신의 장소입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한을 구약의 예언 전통(특히 이사야와 엘리야)을 잇는 인물로 묘사하며, 예수님이 구약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선포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죄의 뉘우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제 ‘하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권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3,7)라고 비난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위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서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선민사상에 빠져있어서 자동으로 구원의 특권을 얻을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을 꾸짖고, 삶의 변화인 회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 시간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마태 3,10)라고 말하면서, 아주 임박했음을 강조합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요한이 요구한 것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합당한 열매’였습니다. 신부님, 우리가 신자들에게 강조해야 할 회개는 고해소에서의 고백을 넘어, 일상에서 맺어지는 정의와 사랑의 구체적인 열매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커지셔야 한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 삶의 방향을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함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을 통한 성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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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재석 안드레아 신부님]
<방향전환>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오늘 두 번째 대림초를 밝히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에 우리의 마음을 더하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광야는 모든 불필요한 것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하느님과 나만 남는 자리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도 마음의 광야를 만들어, 삶의 소음과 번잡함 속에서 잠시 물러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과 근심, 걱정, 반복되는 악습 등 셀수 없는 잡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순간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그 모든 것들을 넘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요한이 선포한 참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데 그치지 않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구체적인 실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는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살며, 죄의 악순환을 끊고 생명의 길을 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며, 말과 행동에 사랑을 담으려 애쓰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위해 기쁘게 봉사하는 삶이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혹시 우리가 욕심이나 거짓, 세상의 헛된 것을 따르고 있었다면,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삶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정돈하는 것입니다.
“얘야, 헛된 것을 쫓아가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단다.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해 둔 길로 다시 걸어오너라.” 대림 시기는 바로 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듣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방향을 전환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움직이는지보다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 하느님이 계십니까? 부디 이 대림 시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삶의 방향전환을 이루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은 인권 주일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사람은 가족과 이웃을 바라보는 눈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가정과 본당, 그리고 사회 안에서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화해하는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드러냅시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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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이원화 요셉 신부님]
<회개와 인권>
신자 : 지난 부활 때 판공성사 보고 처음입니다.
사제 : 8개월 되신 거네요?
신자 : 네.
사제 : 고백하십시오.
신자 : 특별히 지은 죄가 없습니다.
사제 : 네???
판공 성사를 드리다 보면 가끔씩 겪게 되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8개월 동안 지은 죄가 없을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 성찰 없이, 통회와 결심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순히 의무감에 고해성사를 보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선포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처럼 회개는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우리가 성탄과 부활을 준비하며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회개의 표시입니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으로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다짐과,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겠다는 노력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 진정한 고해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는 한 번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대림 시기를 보내면서,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회개는 나의 삶이 하느님 중심의 삶이 되도록 노력하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나는 죄가 없다.”, “나는 회개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이번 판공성사 때 고백할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우선 그 교만한 죄부터 뉘우쳐야 합니다.
판공성사를 준비하면서 무엇을 고백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다면 나는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고백할 죄가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회개는 사랑을 동반합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아울러 인권 주일과 사회 교리 주간을 보내는 우리 모두가 회개를 통해 오늘 제 1독서의 말씀처럼 “정의가 나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나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게”(이사 11,5 참조) 함으로써 공정과 정의, 사랑과 평화라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마태 3,8)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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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박범규 요셉 신부님]
<자비로 세워지는 인간의 존엄>
찬미 예수님!
교회는 대림시기 동안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시기는 단순히 성탄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가 완성될 그날을 바라보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인권 주일을 맞이하여 인간의 존엄과 권리에 대해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교회가 대림시기에 인권을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 신비가 바로 인간의 존엄을 가장 깊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그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인간이 되심으로써 죄로 단절된 인간과 하느님의 일치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인권이 국가나 사회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권은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으며,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살 권리를 지닙니다.(간추린 가톨릭 사회교리 153-154항)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고 외칩니다. 그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게 “독사의 자식”(3,7)이라고 강하게 꾸짖으며 그들의 외적 신앙이 아니라 참된 회개의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의 외침은 단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초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 어떤 죄인이라도 하느님께 돌아서는 한, 하느님의 자비는 열려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죄인을 쉽게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단죄로 끝나지 않고 자비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은 죄의 유무로 사라지지 않으며, 인권은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인권 주일을 맞이하는 이 대림시기에, 우리 공동체가 서로의 존엄을 다시 인정하고, 죄인들을 회개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단죄보다 회개, 심판보다 용서를 선택하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오실 때, 우리 안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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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래전, 제 서품 기념일을 맞아 어느 수녀님이 제게 따끔한 충고와 함께 한 편의 시를 예쁘게 써서 보냈는데,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시는 일본의 ‘미쓰하라 유리’라는 분이 쓴 시 「길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맨 처음 길을 걷는 사람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 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어쩌면 저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 추종의 길은 한마디로 이미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묵묵히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시를 제게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 복음(3,1~12)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길을 닦았던 세례자 요한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려운 역사적 상황과 불안한 현실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게 구세주 오실 길을 닦았던 슬기롭고 정의로웠던 예언자이자,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하느님의 대변인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가 첫길을 열고 그 길을 꾸준히 걸었던 것처럼,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그런 예언자적인 삶의 족적을 남긴 분이시지요. 킹 목사는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이한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의 연설 내용은 마치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평화로움을 보는 듯하며,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외침과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킹 목사의 연설은 평화의 꿈을 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서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부모의 후손과 그 노예의 주인이 낳은 후손이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꿈입니다. 흑인 소년, 소녀가 백인 소년, 소녀와 서로 손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황으로 언젠가 탈바꿈되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한 땅이 평지로 변하고, 꼬부라진 길이 곧은길로 바뀌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생물이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리라는 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킹 목사의 꿈은 참된 꿈이요, 희망이라고 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 나와 다른 인종과 종교, 부귀와 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 편협하고 편향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 이기심과 배타적인 삶을 살지 않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모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꿈과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증오와 미움, 전쟁의 살육과 인간 존엄의 차별이 없어지는 세상,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오도록 모든 인류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꿈이 실현되도록 앞장서야 하며, 그 길을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