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8장,16-20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모임 주위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경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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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다. 다른 하느님은 없다.>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32-34.39-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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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14-17
형제 여러분,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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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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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하느님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오늘 제2독서가 언급하듯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거나 식사를 할 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며 신비입니다.

사실 그 어떤 비유와 설명으로도 삼위일체 신비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믿음과 하느님의 계시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오하고 놀라운 신비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리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통이 되지 않을 때 ‘먹통이다’ 또는 ‘불통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적으로 소통하시듯 우리와 소통하시고, 우리는 세상에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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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햅봅시다.

2. 삼위일체를 위한 나만의 계명을 몇개 만들어 보고 왜 이 계명을 만들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과 가까워졌다”라는 느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보고 어떻게 하면 성령님이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 더욱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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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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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삼위일체란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성부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계획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 계획에 따라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승천하신 다음 하느님의 혼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어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렇게 저마다 역할이 다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일치하시어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계신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느님을 온전히 닮음으로써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지요.

첫째, 인류 구원 계획을 세우신 성부 하느님을 본받아 모든 말과 행동의 원천인 생각부터 올바르게 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물의 악한 면이 아닌, 선한 면을 먼저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상대방에게 힘과 기쁨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 역시 이웃에게 먼저 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성화를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성령을 본받아 생각과 말에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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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날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기도를 시작하고 끝맺습니다. 삼위일체 신비! 분명 이것은 믿음의 대상이지 지식이나 이해의 대상은 아닙니다. 육체를 지니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지고한 신비를 올바로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반이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이성적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초월하는 초이성적, 초자연적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이 신비의 오묘함과 풍요로움 때문에 우리가 충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덮어 두기만 한다면, 아주 귀중한 보물을 땅 밑에 묻어 두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독서를 중심으로 해서 이 심오한 신비의 한 조각만이라도 맛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라는 이 한 구절만 묵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에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해져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지칭하기도 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각 개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합당하게 부를 수 있는 분은 본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뿐이셨습니다.
물론 우리말 표현들 안에서는 그 차이점이 명확하게 구별되지는 않지만, 교리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은 본성에 의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우리는 입양에 의하여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나의 아버지”와 “너희의 아버지”를 구분하셨습니다. 오늘 본기도에서 정확히 표현하듯이 우리는 “외아드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참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예수님 없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움 없이 자녀다운 자유로움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내 주셨기에,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성자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시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성자와 성령께서 아버지와 한 본체이신 같은 하느님이시라는 것,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경우,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세 위격 모두와 관련된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