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마태오 25장,1-13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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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가)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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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힙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어 달라고 청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은 다소 냉정하게 들립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비로운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간청하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주인은 문을 열어 줄 법하지만 그리하지 않습니다. 유다교에서 ‘닫힌 문’은 놓쳐 버린 기회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마지막 때에,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준비가 필요하며 그 준비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등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서 받을 수 있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을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열 처녀의 비유는 마지막 때가 아닌 지금의 삶에 관심을 두게 만듭니다. 지금이 혼인 잔치를 위한 기름을 준비할 때입니다.

현재의 삶에 따라 슬기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지금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유다교의 ‘닫힌 문’의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고 여전히 우리의 삶 안에서 종말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수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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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슬기로운 처녀들의 입장에서

  – 어리석은 처녀들의 입장에서

  – 신랑의 입장에서

2. 나는 어떤 마음으로/방식으로 주님을 위해 남들보다 더 준비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하고있지 못하다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죽음의 선취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내 앞으로”라는 의미이고, 죽음을 내 앞으로 가지고 오면 나의 본 모습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다음주가 내 인생의 나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주님을 위해,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4.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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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신부의 친구들은 먼 곳에서 오느라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밤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등불을 밝히고 나가 신랑을 맞으려 했지만, 일부는 등잔에 기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이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르는 주님을 영접하려면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나 선행은 다른 사람에게서 빌리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 깨어 준비하는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사소한 잘못을 뉘우친다는 것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흔히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세상에 대해 불평하며 세상이 바뀌기만을 기대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변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은 끝까지 변하지 않고, 악에 물든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반면 내가 변하면,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달리 보일 것이 아닙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계십니다. 나의 믿음과 상관없이 주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의 삶은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늘 자신을 성찰하며 부족한 점을 찾아 이를 정화해 나간다면, 주님을 언제 어디에서 뵙더라도 기쁘게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