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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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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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꽤나 불편합니다. 나보다 못한 이들,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꽤나 불편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잘한다고 생각해서 한 모든 일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편하고,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용인되는 듯하여 불편하고,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이 얄밉기까지 합니다.
불편한 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니 그냥 두기로 합시다. 그런데 왜 불편한가를 되묻는 것은 어떨까요? 무슨 기준으로, 어떤 상식으로 우리의 불편함을 파헤쳐 볼 수 있을까요? 대개 불편함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둘째 아들을 찬찬히 묵상해 봅니다. 그는 포도밭 일을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들 된 이가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기도 힘들었겠지요. 일은 하기 싫으나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둘째 아들은 포도밭에 가겠노라 답하였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네 삶의 모습이니까요. 하기 싫은 일이 더 많고,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웬만하면 쉽고 하고 싶은 일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어정쩡한 중간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닌,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말과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세, 이런 자세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보다 더 얄밉지 않으신가요?
맏아들은 솔직하게 ‘싫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스스로 생각을 바꾸어 일을 하였습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솔직하였습니다. 시대의 죄인으로서 솔직한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는 이들이었지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긴가민가 뭉그적거리는 자세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솔직히 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저는 믿음이 약합니다. 너무 약하여 포도밭까지 걸어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빌고 빌 뿐입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사, 저를 위하여 빌어 주십사 신앙 공동체에 함께하시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뿐입니다. 세리와 죄인 취급받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 뿐입니다. 이 못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가고픈 마음이 있으니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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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맏아들 입장에서
– 다른 아들 입장에서
– 아버지 입장에서
2. 오랜 신앙적 습관에 빠져서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아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오만과 위선에 빠진 나의 모습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신앙생활을 하며 어정쩡한 중간적 자세를 취하다가 주님과 멀어진 경우가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생겼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어떻게 생활해야 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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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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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30
10월1일[연중 제2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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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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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HHV5CyjnbI?si=VsHMF258WPY2_iw_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수도회 정요안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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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보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난하고 고통받는 당신 백성을 향한 시선은 더할나위없이 따뜻했습니다. 건네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목이 메이고 눈물겨울 정도로 은혜롭고 다정했습니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지도자들, 뒤가 구린 부자들, 잔뜩 폼만 잡고 다니지 머릿속은 텅빈 사제들을 향해서는 얄짤 없었습니다. 그들의 사악함을 손바닥 보듯 읽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빙빔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말씀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잔뜩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들이 수석사제들이요 백성의 원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놓고 도전장을 던지니 속으로 엄청 불쾌했을 것입니다. .
‘뭐 저런게 다 있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게 겁대가리도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건가?’ 그들은 벌써 예수님을 향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어떻게서든 꼬투리를 잡고 올가미를 씌워 그분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작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절대 굽히지도 않고 물러시지도 않으십니다. 오로지 직진입니다.
이윽고 ‘예! 일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절대 움직이지 않는 첫째 아들 즉 이스라엘 백성, 그 중에서도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장을 날리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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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fupiXiU_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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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앙은 ‘자기부정’부터; 지옥은 자기를 긍정하는 이들의 것>
오늘 복음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어째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지 알려줍니다. 구원은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 성취됩니다. 아기들은 누구의 뜻을 따를까요? 부모의 뜻을 따름으로써 두 발로 걷게도 되고 말도 하게 되고 형제를 사랑하여 세상에 살 수 있는 수준의 인간으로 자라납니다.
하느님 나라도 성체를 통한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라 믿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까지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도 그리스도께로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2)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틀렸음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긍정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긍정은 자기 부정의 결과입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긍정하려는 이들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듭니다. 하느님까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좌신부를 할 때 세례식을 통하여 한 자매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70대 할머니셨습니다. 그분은 전직 산부인과 의사셨습니다. 처음엔 낙태도 많이 하시고 그렇게 돈도 많이 버셨습니다. 그러나 벌을 받은 것인지 얼굴 반쪽이 마비되어 비뚤어지는 병에 걸리셨고 창피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저절로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지내던 중, 아래층 한 교우 자매님이 위층 집에 전교를 왔고, 이런저런 모든 사정을 들은 그 신자분은 “하느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세례식 때 휠체어에 앉아 있는 분만 찾았는데 그분은 다른 세례자들과 마찬가지로 걸어 나와서 모든 세례 예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던 당신의 외아들이 아내와 아이들을 남기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입니다. 저는 아들 생각을 덜 하게 만들기 위해 성경필사를 하도록 권하였습니다. 오래 앉아계시지도 못하고 눈도 안 좋으신 그 분은 18개월 만에 신구약 성경을 모두 필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아들의 죽음에 대해 하느님께 원망을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고 빨리 하느님 나라에 가서 아드님을 만나고 싶다고만 하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래된 신자 부부가 똑같은 일로 성당에 다니지 않겠다고 한 경우도 보았습니다. 찾아가서 달래봤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아드님을 잃은 아픔을 극복한 자매님 이야기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당신들이 옳은 것입니다. 이렇듯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갑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 자신을 긍정하며 살아왔던 고통을 알기 때문에 부정도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뱀이라는 자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단어는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부인하다”라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뱀과 같아서 깜짝 놀라 혐오스럽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긍정하면 하느님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자기 긍정이 지옥의 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 자기를 부정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가까이 갑니다. 그 사랑만이 자기를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주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주시는 분 앞에서 무언가 드리고 있다는 파렴치한 나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을 남긴 도스토옙스키는 도벽이 있었습니다. 책을 판 돈을 마약과 술, 도박에 탕진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에게 도박 자금으로 줄 것이 없다며, ‘마지막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반지와 보석’을 내어주었습니다. 원망한 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착한 아내를 위해 새사람이 되기로 마음먹고 자기 자신과 싸우기 시작하여 결국엔 도벽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로 알아봅니다. 교회에서 많은 회개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보고라도 핑계대지 말고 믿읍시다. 신앙은 사랑을 받음이기에 자기 부정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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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나 담배 끊었어”와 “나 비흡연자야”라는 말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런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습니다.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라고 이릅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일하러 갑니다.
둘째는 처음엔 간다고 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는 싶었지만, 몸이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맏아들은 세리와 창들을 상징하고, 둘째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상징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처음엔 따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받아들여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처음엔 하느님 뜻을 따르는 듯하였지만 실제로는 계속 죄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일어난 것일까요? 어째서 어떤 사람은 변하고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는 행위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 행위에 대한 태도는 ‘믿음’에 의해 좌우됩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도자들이 요한이 가르치는 길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가리켰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삶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분을 믿으면 행위에 대한 시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현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였다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사형 집행인은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5분을 주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러시아 황제가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사형시키느니 그런 척하면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 5분은 평생만큼 소중한 시간이었고 1분씩 쪼개어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인생은 신의 선물이고,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다” 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순간마다 그 5분처럼 아껴 쓰며 의미 있게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4년간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종이 대신 머리로 소설을 쓴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그는 훌륭하게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책을 판 돈을 마약과 술, 도박에 탕진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변한 이유는 아내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그에게 도박 자금으로 줄 것이 없다며, ‘마지막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반지와 보석’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선물은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녜요. 나는 당신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믿어요” 라는 말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믿음을 받아들여 모든 것을 끊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지금 하는 행위들은 마치 사람이 개같이 네 발로 걷는 것처럼 어색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 지도자들은 머리로 변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계명을 지키며 변하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담배를 끊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는 원래 담배를 안 피워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배를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피울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원래 자신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어색하게 됩니다. 실수로 피워도 곧 영원히 피우지 않게 될 것을 압니다.
유다인들이 열에 하나 계명을 지키면, ‘나 하느님 자녀 맞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자녀는 ‘어 이상하다? 앞으론 죄 안 짓겠지!’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걷는 것이 이상했을까요, 물에 빠지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을까요? ‘당연히 걸어야 하는데 왜 빠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두세 발 걸은 것으로 물 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죄짓는 게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어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이기에 죄짓는 게 이상한 거지!”라고 반박하는 사람은 곧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계획을 세워놓고는 실행을 못 하는 의지 박약자였습니다. 1년 안에 책을 써서 주겠다고 계약을 해 놓고 좀처럼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830년 여름까지도 빈둥대던 빅토르 위고를 보고 출판사는 1831년 2월로 마감을 못 박았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옷장 안의 모든 옷을 꺼내 봉인한 뒤 치워버렸습니다. 속옷까지 치워버렸습니다. 옷을 치워서 외출을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가 걸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숄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마감 시한보다 2주 빨리 『노트르담의 꼽추』를 탈고하여 제출했습니다.
이전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임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물 위를 당연히 걸을 수 있는 존재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입니다. 의사가 치료하지 않고, 선생이 가르치지 않고, 사제가 미사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존재와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치료를 몇 번 해서 의사가 되는 게 아니고, 가르쳐서 선생이 되는 게 아니며, 미사를 거행한다고 사제가 아닙니다. 먼저 의사이고, 선생이고, 사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언젠가 다시 물속으로 우리를 빠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행동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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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19년 8월 21일에 서울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어느덧 4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제게도, 우리가 머무는 세상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2020년 9월 10일 어머니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팬데믹이 심했기에 저는 뉴욕에서 연도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없을 때입니다. 브루클린 한인성당에서 미사를 부탁하였고, 저는 기꺼이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코로나는 끝났지만 한인성당을 위한 미사는 3년이 넘게 다니고 있습니다.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동료사제들과 진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함께 자전거도 타고, 캠핑도 가고, 여행도 다녔습니다. 동료사제들과의 대화는 코로나를 견디는데 위로가 되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올해는 지난 3년 동안 가지 못했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덕분에 4면 만에 한국으로 가게 되었고, 어머니가 있는 추모관엘 다녀오려고 합니다. 지나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들입니다.
지난 4년 세상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역시 ‘코로나 팬데믹’입니다. 코로나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인류는 코로나를 겪으면서 깊은 성찰을 하였습니다. 인류의 지성과 과학적인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허망하게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박해의 엄중함 속에서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멈추었습니다. 코로나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멈추자 자연은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오염되었던 대기가 정화되었습니다. 중요한 것보다 소중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폭염, 가뭄, 산불’의 삼종세트가 지구촌 곳곳을 찾아왔습니다. 학자들은 이제 ‘지구온난화’를 넘어 ‘지구열대화’를 이야기 합니다. 지구가 끓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일본의 오염수 해양 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지 말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쓰레기 처리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지구열대화는 ‘회개’를 촉구하는 표징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는 방법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업적을 보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를 보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다. 비록 잘못했다 해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과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포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돌아와서 뉘우치면 상을 주십니다. ‘난 안 돼!’ 이 생각과 말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악의 큰 유혹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아픈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든 하느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부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비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맏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둘째 아들은 말은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입니다. 신앙은 생각이 아니고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더 극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비록 죄인으로 여겨지지만 ‘세리와 창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도 많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대림과 사순시기에 특강이 있습니다. 성령기도회에서 피정을 준비합니다. 각 구역과 레지오에게 성당 청소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우리가 조금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로부터 상을 받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우리의 몫입니다.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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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8-32: 맏아들은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오늘의 주제는 회개이다. 자신들의 운명을 조상 탓으로 돌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개개인의 운명은 하느님 앞에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사회 관념론이 오늘날에도 일반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우리 자신들보다는 사회적 구조에다 그 탓을 돌리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에제 18,28) 당신께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금 살려주시는 분이시다.
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유다인들의 자세를 말한다. 즉 율법에는 “예!” 하면서도 그리스도께는 “아니오!”라고 하는 모습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가지 질문, 즉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28절)와 마지막에 나오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는 말씀은 듣는 사람들에게 경각심 내지는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이 어떤 아들과 같은지 판단하게 될 것이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는지를 잘 분별하고 있다면, 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두 아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초대에 인간들이 응답하는 두 가지 형태의 태도를 의미한다. “예!” 하고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는 회피하는 둘째 아들의 형식적인 존경에 의한 행동과 처음에는 거부하였지만, 나중에 행동으로 옮긴 맏아들의 갈등과 깊은 사고에 의한 일치 행동이 그것이다. 맏아들은 무례하긴 했으나 사실상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종교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는 추상적으로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식주의적 종교로서 의지적 노력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요구를 실현하는 행동주의적 형태로 많은 수고를 치르는 형태이다. 즉 처음에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나중에 힘겨운 자기반성과 생각을 바꾸어 다시 받아들인다. 즉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29절)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종교를 만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같이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규정을 엄격히 지켰던(마태 23,13-32)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그들의 뜻과 일치할 때 쉽게 “예!”하며 응답하며 그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의 뜻하는 길과 일치하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써서 반대하고, 그들이 예수께 한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까지 쓰기도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였을 때, 그 뜻은 더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한편, 이들 주변에는 강도들, 세리들, 창녀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힘겹게 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복음은 해방의 메시지로서 그들을 아버지의 집에 떳떳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복음은 그들의 인간적 품위를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자신들이 비교된다는 것 자체를 치명적인 모욕으로 느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라고 하신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회개할 수 있으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이 때문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자신들을 첫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빛으로는 꼴찌가 될 수 있음(참조: 마태 19,30; 20,16)을 표현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범적 태도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일치하신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필리 2,5) 하도록, 즉 하느님의 뜻에 완전한 순명의 태도를 보이도록 권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앞에 의심이나 재고의 여지가 없는 철저한 “예!”의 태도였다. 즉 “아니오!”의 부정적인 태도도 아니었고 게으르고 무기력한 “예!”의 태도가 아니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이해관계로 빚어지는 내적 분열이며, 이기심과 교만에서 야기된다고 한다.(필리 2,1-4 참조) 사도 바오로는 이 점을 깊이 새겨주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을 예로 든다(필리 2,6-8 참조). 그러나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 높이 올려주셨고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세워주셨다.(필리 2,9-11 참조)
하느님의 뜻에 대해, 하느님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선택과 이에 따른 철저한 응답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담을 수 있으며, 그분을 닮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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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두 아들의 비유>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ㄱ)
‘두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을 혼동하는 이가 있는데, 두 비유의 ‘맏아들(큰아들)’은 완전히 뜻이 다릅니다. 루카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은, 스스로 ‘큰아들’로 행세하는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사제들, 즉 종교 지도자들입니다.(루카 15,2-3) 그러나 마태오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은 먼저 회개해서,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마태 21,31ㄹ)
예수님께서는 왜 세리와 창녀들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하셨을까?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회개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지금’ 회개해야 하고, ‘지금’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현재 상태에 대한 심판입니다. 과거에 ‘죄인’으로 살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완전히 변화되었다면 지금은 ‘의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에 의인으로 살았더라도 타락해서 죄인이 되었다면,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그냥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심판이 집행되는 시점에서 하는 말이고,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까지는 “하느님은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2베드 3,9) 그래서 ‘지금’도 중요하고, ‘앞으로’도 중요한데,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말고 나중에 회개하겠다.”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나중’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과 시간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심판이 한참 뒤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비유에서, ‘포도밭에 가서 일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즉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유의 표현만 보면, 아버지가 시켜서 하는 일, 아버지를 위한 일로만 보이지만, 뜻을 생각하면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 그래서 ‘나를 위한 일’이고, ‘나의 일’입니다. 맏아들이 처음에 싫다고 대답한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생활을 하기를 거부한 것을 뜻합니다. 그랬다가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은 회개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하러 갔다는 것은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뜻입니다. 다른 아들이 “가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대답했으면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것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말로만, 또는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는 위선자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의인으로서 잘 살고 있었지만, 중간에 타락해서 죄인이 된 사람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주 선명하게 대조되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박해자였는데 회개해서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와 사도였는데 타락해서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맏아들’입니다. 그리고 배반자 유다는 누가 보아도 ‘다른 아들’입니다.>
루카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비유의 ‘현재 시점’은, 작은아들이 돌아와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때입니다. 그 비유에서, 큰아들은 동생이 회개하고 집에 돌아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먼 고장에서 방종한 생활을 했었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큰아들은 동생의 현재 상태를 안 보려고 외면한 것입니다. 동생의 현재 상태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과거는 잊어버렸고, 회개하고 돌아온 현재 상태만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잊어버렸다는 말은 기억을 못한다는 덮어버렸다라 덮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그렇게 우리의 과거를 덮어버리는 일이고,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가 한 번 회개했다가 또다시 타락해서 죄를 짓고, 그 상태 그대로 심판대에 서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러면 덮어버리고 지워버린 죄까지 합해져서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이 말씀은 간음하다 붙잡혀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예수님 덕분에 그 위기에서 벗어난 여자에게 하신 말씀인데, 여자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 용서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여자가 만일에 다시 죄를 짓는다면, 용서의 은총이 완성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에 지은 죄까지 합해져서 가중처벌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한 번 주신 은총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총의 완성은 우리가 응답하고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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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에 의문을 품으면서 세례자 요한을 거부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21,23-27 참조) 상대로 비유를 들어 그들과 벌이는 논쟁을 이끌어 가십니다. 비유 속 맏아들은 특권적 지위에서 그에 따르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 지도력과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다른 아들은 이런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시면서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었다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은 맏아들의 모습과 반대되며 비난을 받기에 마땅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신 포도 속담을(에제 18,2 참조) 반박하시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공평한 주님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따르면 의인이라도 불의를 저지르면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구원을 얻는 데 과거의 행적보다 현재의 행적이 더 중요하다는 신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맏아들은 회개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는 우리가 모든 죄악을 벗어버리고 회개하여 ‘의인’이 되도록 촉구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가운데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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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최재규 베드로 신부님]
<신앙으로 꾸려가는 ‘삶의 자리’>
찬미 예수님!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기쁜 한 주간을 보내셨는지요?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저마다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에 지어주신 질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들은 하늘을 지붕 삼아 날아다니며, 물에 사는 물고기들은 바닷고기와 민물고기로 갈립니다. 이렇게 주어진 제자리를 벗어나서는 도저히 제대로 살 수가 없겠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지으시고, 그 위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가라 이르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위에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저마다의 값진 삶의 자리를 살아갑니다. 하느님 말씀 위에 자리한 삶의 자리를 잘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곧 삶이며, 삶은 나의 모든 것이니 우리는 기필코 신앙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와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제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이끕니다. 한평생 포도밭을 일구며 두 아들을 키운 아버지는 이제 아들들에게도 그 밭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두 아들의 반응과 그 행실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한평생을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포도밭을 일구어 가며,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아들들에게 감사함까지는 바라지 않는 것이 부모 마음이지만, 아들들이 세상을 알고 제 삶의 자리에서 잘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것이 부모 마음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세상을 잘 일구시고, 우리더러 잘 다스리며 살라고 우리를 세상으로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함도 모르고 간교한 뱀의 꼬임 한 번에 스스로 그 자리를 박차버렸습니다. 결코 돌이킬 수 없이 죽어 마땅했던 그 시간을 하느님께서는 쓰린 마음으로 움켜쥐셨습니다. 그리고는 때가 차자 죄 말고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어 이 모든 죄가 된 인생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두 팔 벌려 세상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죄가 된 역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 그리고 유혹에 흔들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형제들처럼 힘없는 고백과 마음 없는 행실로 삶을 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임을 기억합시다. 그 자리를 벗어나서는 제대로 살 수 없으니 우리는 기필코 신앙에 마음을 두고 신앙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신앙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필리 2,5)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고백하셨고, 진실로 사랑을 사셨습니다. 그 사랑의 자리가 십자가인들 그 위에서 두 팔 벌려 세상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살아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사랑을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마주합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기억하고 행하여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라는 그리스도의 초대는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사랑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라 내 삶의 자리를 사랑으로 물들여 갑시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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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동기 유스티노 신부님]
<“니는 대답은 잘도 한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너는 대답은 잘도 한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자주 듣던 말씀입니다. 대답만 잘하지 실천이 없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별생각 없는, 어머니에 대한 진정한 배려 없는, 나만을 위한 마음 편한 무책임한 대답이었습니다.
만일 부정적으로 대답하면, 이제는 잔소리가(?) 길어지고, 결국 제가 제압당하게 되겠죠. 그래서 순간의 불편을 모면하기 위해서 바로 긍정적으로 응답한 겁니다.
오늘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제각기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고 일렀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바로 싫다고 합니다. 작은아들은 가겠다고만 하고 가지 않습니다. 결국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말을 거부한 셈입니다. 가부장제 시대에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의 현장에 있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두 아들 가운데 맏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다고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맏아들은 처음엔 포도원에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다가(하느님의 율법을 거부한 삶을 산 세리와 창녀들),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어”(요한을 믿고 회개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랐기에, 예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작은아들은 처음엔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하느님을 따른다며 자신만만하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 등) 가지는 않았습니다.(요한을 거부)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버지의 요청에 “예”라고 답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언행일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두 아들의 비유는, 말이냐 실천이냐, 기득권 고집이냐 회개냐에 대한 것 같습니다. 대답은 “예”라 하고 실천을 안 하면 그것은 거짓이 되지만, 대답은 “아니오”라 하고 실천을 하면 애초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거짓이라고는 볼 수 없고, 차라리 회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 앞에서 그동안 지닌 그릇된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 회개할 줄 아는 융통성을 지니기를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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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요한 사도 요한 신부님]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의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아버지가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고 했을 때 싫다고 했다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맏아들과,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가지 않은 다른 아들 중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이 물음은 우리에게도 던져진 질문입니다.
나는 두 아들 중 어떤 아들인가 생각해봅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신앙은 말이 아닌 삶인데 갈수록 말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만 삶으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웃의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가난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삶은 가난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생태파괴와 기후위기가 심각하다고 말하면서도 생태적인 삶을 살기는 주저합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내게 결정권이 있을 때는 민주적인 방식을 따르기 싫어합니다.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가는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삶은 갈수록 노동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정치를 비판하는 말은 쉽게 하지만 보다 나은 정치를 위한 행동은 내 일이 아니라며 방관합니다. 경쟁에 내몰려 꿈을 잃어가는 청소년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노인 소외를 걱정하면서도 어르신들을 맞이하는 것은 귀찮아합니다. 우리 사회에 고통받는 이가 너무 많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은 주저합니다.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변화를 위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비판의 말은 쉽게 쏟아내지만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내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삶이 말만 앞서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삶과 무엇이 다르냐?”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말이 아닌 삶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면.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들여 조금이라도 내 삶을 아버지의 뜻에 맞게 바꾸려고 한다면. 죄인이라고 비난받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들처럼 나 역시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바꾸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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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엄마가 보고 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시길 희망합니다.
순종한다는 것,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대로 하겠다고 말해놓고 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사람은 말을 잘 듣는다.’고 하면, 귀로 듣는 것을 뛰어넘어 행동으로 옮겼을 때 말을 잘 듣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의로운 길을 가르치는 요한의 말을 듣고 그대로 했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요한의 말을 “믿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뜻에 순명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로 들었으면 그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말씀을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1)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은 그야말로 “폭탄선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전포고”로 들렸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고, 스스로 내로라하는 사람으로 뽐내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머리가 큰 것이 아니라 가슴이 따뜻해야 하고 결정적으로 손발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자신들의 세속적인 권력과 인기와 명예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요한을 기피 하였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싫습니다.” 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 또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면서 시원스레 대답만 하고 행동으로는 딴짓했습니다. 말만 있고 실행이 없으면 더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신뢰하고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못 한다고 하면 다른 방안을 강구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밭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긴박성을 말해줍니다. 아들이 무슨 계획이 있든지 그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함을 암시합니다. 순명은 미룰 일이 아닙니다.
사실, 선이 무엇인지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 말을 잘 듣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결정적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 집은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마태 7,24-27 참조) 우리는 결정적으로 심판의 폭풍 속에서도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자기가 취해야 할 태도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작 들어야 할 사람은 듣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끝내 뉘우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극약처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인 취급하고 무시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흉보고 험담하며 욕하지 마라. 먼저 자신을 속이는 네 마음속을 봐라. 머리와 입술이 빠른 사람은 마음이 늦습니다. 그래서 알고도 거부합니다. 그것이 교만이고 불순명입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사람은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와 같습니다.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도 기름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은 쓰레기와 같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민첩하고 신속하게 그리고 후회 없이! 행동이 없으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시작은 아무리 늦어도 빠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학교에서 반 ‘급훈’을 응모하였는데 ‘엄마가 보고 있다.’가 뽑혔습니다. 이걸 제안한 친구는 수업 중에 장난을 치다가도 이 급훈을 보면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집을 떠나 외지에서 공부하는데 엄마와 찍은 사진을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그 방에 놀러 왔는데 한 아이가 책상 위의 사진을 엎어놓으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엄마가 나가셨다. 신나게 놀자.”
누군가 보고 있으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쳐다볼 때 자기도 모르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사람의 길은 주님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분께서는 그의 모든 행로를 지켜보신다.”(잠언 5,21) 사람에게 인정받고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주님 눈에 꼭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언제 행할 것인가? 미루지 않길 바랍니다. 제일 적당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할까 말까?’ 할 때는 ‘하고’, ‘갈까 말까?’할 때는 ‘가자.’ 미루지 말고 지금!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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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컴퓨터를 만진 지가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 컴퓨터를 접할 때만 해도 비싼 게임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이 되었습니다. 특히 모든 글 작업과 강의 자료 등을 컴퓨터 안에 담아두기에 컴퓨터는 제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1999년에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모든 자료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하드디스크 손상으로 애써 써 놓았던 글과 자료들이 모두 없어진 것입니다. 몇몇 데이터 복구 가게에 들렀지만, 어느 곳에서도 복구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 데이터 백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보조 하드디스크에 계속해서 저장을 해두었습니다. 물론 그 뒤로 한 번도 하드디스크 손상으로 데이터를 잃어버린 적은 없었지만, 지금도 뜻밖의 상황을 대비해서 계속해서 백업합니다. 특히 요즘에는 보조 하드디스크뿐만 아니라 웹 하드에도 보관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바라보며,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갈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떠올려 봅니다. 아직도 멀었다고 하면서 조금의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사실 아무도 알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또 하느님 나라에 재물을 쌓는 노력을 평상시에 계속 해야 합니다.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갑작스럽게 다가올 그날과 그때에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백업이 중요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계속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재물을 저장하는 가장 큰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맏아들은 처음에 싫다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고, 작은아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습니다.
이 두 아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안에 있습니다. 열심히 주님 뜻을 따르겠다는 말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있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당장 따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제들과 원로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반대로 세리나 창녀들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로 오늘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단순히 성당에 다니는 것만으로 또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으로 평가받았던 사람이라도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뜻을 계속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재물을 지금 당장 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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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걷는 나에게 달렸지요>
마태오 21,28-32 (두 아들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길 걷는 나에게 달렸지요>
가야 할 길이
가고 싶은 길이요
가고 싶은 길이
가야 할 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좋겠지만
어찌 그럴 수만
있겠습니까
가야할 길은
가기 싫고
가지 말아야할 길은
가고 싶으니
이 어찌 하오리까
탄식이 절로 날 때
그저 마음 다부지게 먹고
이리 하는 거지요
가고 싶어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면
가지 않는 거지요
가기 싫어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는 거지요
가고 있어도
가서는 안 되는
길이라면
돌아서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