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기도의 목적

신앙의 빛

모임 주위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경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스디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복음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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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한광석 마리요셉 신부님]
<거룩한 변모>

신부로서 부끄리운 고백이지만 주일보다 기다려지는 날이 수요일입니다. 그날 오후가 되면 설레는 변모를 하기 때문이죠. 성직자 복장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축구화까지 신으면 제 변모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풋살 경기장에 들어가 신나게 뜁니다. 경기장 문 앞까지 저를 따라다니던 잡념들이 사라지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시간입니다. 제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순간이기도 하죠.

자매님들의 변모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해외성지순
례를 함께 갔나다가 돌아오는 경유지 공항에서 겪은 일입니다. 여리 성지를 순례하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자매님들이 잠시 주어진 쇼핑시간에 얼굴이 환해지며 빛났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나. 누구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얼굴에 빛이 난다는 것을 알았고, 미사와 기도가 축구와 쇼핑보다 즐거울 날이 우리에게 언젠가 오리라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거륙한 변모를 하십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산에 올랐듯, 예수님도 제자들과 높은 산에 오르시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림 하얘졌다.”고 마태오는 전함니다. 그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무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예언자들이기에, 영원히 빛의 세계에서 사는 분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립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연령회 봉사를 오랫동안 하신 어느 형제님께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죽었을 때 나온다는 말씀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욕심을 비우고 죽음을 잘 준비하여 맞이한 사림은 몸에서 광채가 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함니다. 해미국제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도 그러했을 것이라 확신합니나. 우리도 예수님처림 사랑하는 그분의 자녀이고 거룩한 빛으로 아름답게 변모할 존재임을 믿고 안다면, 지금의 삶이 조금은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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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나라 체험>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1-6)

1) 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 목격했고,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특별한 체험을 한 장소가 ‘산’이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집, 들판, 바다, 산, 어디든지 장소가 아니라 ‘체험’ 자체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인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은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요한 20,24-29) 또 우리 교회가 본격적으로 교회로 창립된 계기가 된 사건인 오순절 날의 성령강림도 ‘집’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사도 2,1-4)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고,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표현을 조금 바꿔서,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체험이 먼저냐? 믿음이 먼저냐?라고 묻는다면, 정답은 “믿음이 먼저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신 일은,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음은 있지만 아직 용기와 힘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체험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일이 많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체험을 통해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놀라운 일을 경험해도 그저 신기해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체험이 없어도 믿음이 유지되고, 어떤 체험을 한다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더욱 강한 확신을 하게 됩니다.>

3)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시고, 다른 아홉 명은 기다리게 하신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홉 명을 소외시키신 것일까? 차별하신 것일까? 또는 그 세 제자만 편애하신 것일까? 그것은 아니고, 그 일은 “체험을 증언하는 이들의 믿음과 그 증언을 믿는 이들의 믿음은 같다.” 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로 해석됩니다. <그 세 제자가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었던 것은 사실이고, 중요한 일에는 늘 그들을 데리고 가신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세 명을 편애하거나 특별대우하신 것은 아니고, 다른 아홉 명을 멀리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사도들의 믿음과 그들의 증언을 믿고 신앙인이 된 우리의 믿음은 ‘같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신앙인이 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인도를 받아서 나중에 신앙인이 된 사람들의 믿음도 ‘같은 믿음’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들의 증언 외에도, 예수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한 스테파노의 증언이 더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사도 7,55-56)

스테파노의 체험과 증언은 순교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것으로 생각되는데, 스테파노는 바로 그 모습을 보았고 증언했습니다. 그 체험 덕분에 스테파노는 자신이 이제 곧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아무 두려움 없이 순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믿음이 없다가 믿게 된 일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주님의 응답’을 얻은 일입니다.>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 나라 체험은, 신앙여정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는 큰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어떤 놀라운 일을 체험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얻는 크고 작은 기쁨들, 또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다는 느낌들, 그것들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여정은 그 자체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내가 나 혼자서 지고 가는 멍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시고, 이웃들이 함께 나누어서 지고 갑니다.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신앙생활이 축복이며 은총이라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가 힘들어할 때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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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때 베드로와 같이 나를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해 본적이 있는지 묵상해보고 이야기 해봅시다.

– 우리도 남아있는 9명의 제자와 같이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대해 묵상해보고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키워 나아가야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거가에 합당한 행동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는다고 하는 “느낌적인 느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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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574
8월6일[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연중 제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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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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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575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회사가 나의 재능을 잘 알아준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재능을 알아준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겨우 25%였지요. 회사가 나의 능력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75%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사는 직원의 재능을 알아주어야 할까요? 재능을 알고 여기에 맞춰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업무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직원의 재능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회사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만을 바라봅니다.

예전에 직원 채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말에도 출근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면접 중에 이를 이야기하니, 한 사람은 “주일에 일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주일에는 쉬고 대신 평일에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당연히 제가 맞춰야죠. 뽑아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채용되었을까요? 회사가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사에 맞춰야 채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주님이 내게 맞춰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할까요? 주님께서 내 재능을 몰라준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 자리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행복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하지요.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거룩한 변모가 이루어지는 그 장소에 계속 머물러 지내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저 제자들이 원할 뿐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하얘진 주님 모습에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든 전교 활동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아니지요.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주님을 나에게 맞추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cpbc방송미사**

(박상운 토마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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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머지않아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극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던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매일 마음속에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묵직한 고민거리들이 열 가지 정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느 날 세수를 하던 중,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봤는데,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좀비 한 마리가 거울 속에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이나 정신이 빠져나가 버린, 그저 몸만 흐느적 흐느적 거리며 돌아다니는 영락없는 좀비였습니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흘러 수도생활 연륜도 30년, 40년인데, 계획대로라면 내공이 차곡차곡 쌓여,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하고 당당한 얼굴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뾰쪽하고 모난 곳은 깎이고, 움푹 패인 곳은 잘 메꾸어져,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로 변모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니, 그때 느낀 참담함이 엄청났습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한번 변화되어 보고자 그토록 발버둥을 쳐왔습니다만, 그 변화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거룩한 주님 변모 축일에 다시 한번 힘을 내어봐야겠습니다. 보다 긍정적인 태도에로의 변화, 보다 인간적이면서도 보다 영적인 삶에로의 변화, 보다 거룩한 삶, 천상적 삶에로의 변화…

오늘 타볼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단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되십니다. 얼굴과 몸 전체가 눈부실 정도로 광채로 빛났습니다.

주님 얼굴의 거룩한 변모는 조만간 맞이하게될 메시아의 운명을 넌지시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대사건입니다.

성경과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주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속제 제물이자 희생양이 되셔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으로 내려가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정복하십니다.

그리고 참혹했던 주님의 얼굴은 당신의 부활로 인해 더없이 찬란하고 빛나는 얼굴로 변화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과 영광의 삶을 우리에게도 나눠주실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다양한 죄속에서 살아가고 이런저런 결핍과 고통 속에 허덕이지만, 우리도 머지않아 주님의 거룩한 변모와 부활의 삶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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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O4IFArn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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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목적>

오늘은 주님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 변모 축일은 기도에 대한 예시입니다. 기도의 장소는 이스라엘 전통상 ‘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모세는 진리이고 엘리야는 은총입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 곧 하느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었고,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제물 위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미사 때의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미사나 기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변모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변모하기 위함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악령 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그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마태 17,17)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이 세상을 참아내고 치유하기 위한 힘을 얻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나의 죽음입니다.

미워하는 내가 죽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내 안에 그 미움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결국 나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타볼산에서 내려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오늘 복음이 이 기도의 올바른 목적을 말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잘못 알고 헛된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인도 수도사가 18년이 걸려서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자랑처럼 떠드는 제자에게 스승은 묻습니다. “자네는 18년 동안 18루피(갠지스강 건너는 뱃삯)를 벌었네.”

기도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남을 용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나 자신이 죽었는지, 얼마나 더 그리스도로 변모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워룸(2015)은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남편은 직장에서도 돈을 횡령하고 외도하려고 하며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미워 옆집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자 옆집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기도는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싸움의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입니다.

워룸은 전쟁에서 지휘관들이 하는 회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할머니는 집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남편과 싸우지 말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과 싸워 하느님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하라고 합니다. 남편이 어느 날 옷장에서 자신을 위한 기도가 적힌 것을 보고 아내가 이미 자신의 외도사실까지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고 아내와 딸에게 사과합니다.

기도로 싸워야 할 대상은 은총의 가치를 모르는 나 자신입니다. 제가 부모님의 굳은살을 보았을 때 라면 하나도 부모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은 부모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불만 가득했던 내가 죽고 부모님의 뜻을 따라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순종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계신다면 나도 기도할 때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의 가치를 알고 순종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은 은총을 많이 받았지만, 그 은총의 값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자에 빠진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리게 만듭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것입니다. 눈도 뽑힙니다. 그제야 삼손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총이 당신 눈을 빼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되자 이제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미움을 함께 묻어 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죽어야 미움도 죽습니다. 그리스도가 사셔야 용서와 사랑이 성취됩니다. 우리는 기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모하여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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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교회는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낸다. 이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시며 당신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분처럼”(1요한 3,2) 되어야 한다고 초대하는 축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변화는 십자가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전례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40일 후 9월 14일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변모는 바로 영광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임을 오늘의 전례는 말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2절)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한 1,9)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 빛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보이는 빛이며 마음의 눈에 보이는 해이며 지혜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옷은 그분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 옷자락은 손을 대기만 하여도 병이 나은 여인처럼, 구원을 받는 바로 그분의 교회를 말한다. 그 옷은 그렇게 빛처럼 빛나야 한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3절)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복음서에서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언자와 율법을 대표하는 분들이지만 구약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 때문에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한 분들이다. 이분들은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신다. 그 길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바로 이것이 제자들이 목격한 위대한 신비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절)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그 초막은 당신이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에 마련되어야 할 초막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기쁨에 차서 이 말을 하게 된 것이지만, 영광에 앞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모든 유혹을 이겨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베드로가 말한 초막보다 더 좋은 초막, 빛나는 구름으로 그들을 덮어주셨다. 그 빛나는 구름은 의인들에게 그늘을 드리워 주고 그들을 보호해 주고 그들을 비추는 구름이다. 그 빛나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으니, 그 구름은 아버지의 권능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 말씀은 아드님을 대신하여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답이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라는 것이며, 즉 귀로만 듣는 것보다 그 말대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사는 것, 곧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도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어야 한다.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6절)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곳은 사방에 아무도 없는 높은 산이었고 고요했으며, 변모가 일어났고,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놀라운 일이었으며 그리하여 두려움과 경배의 감정을 함께 느끼며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더 강하게 해 주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모습이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절)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거나,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기 때문이거나,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나약성으로 그런 엄청난 영광을 보았을 때, 아마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몸과 마음이 떨려 땅에 엎드려지고 말 것이다.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를 수 있도록 먼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 주셨다. 당신은 병자를 치유해 주실 때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8절)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고, 또한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는 것을 보았고 아버지의 말씀도 들었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땅에 엎드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일으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만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모세와 엘리야, 즉 율법과 예언서가 예수님 안에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셋이었지만, 셋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얻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으므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는 것과 이제 하느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하느님의 참된 거처를 가지시는 것을 확신시키는 사건이다. 그러면서 또한 이 변모 사건은 신앙인들의 길을 분명히 제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승리와 기쁨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시련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영광스러운 변모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십자가의 도전을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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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여행을 다녀오면서 피부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강한 햇볕에 노출된 어깨와 등이 빨갛게 익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의 허물이 벗겨졌습니다. 피부가 햇빛에 약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학생 때 바닷가를 다녀와서 허물이 벗겨진 이후에 처음으로 허물이 벗겨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물이 벗겨지면서 미관상 안 좋기도 했고, 무리하게 허물을 벗겨내면서 민감한 피부가 아프기도 했습니다. 허물을 벗겨내면서 허물의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입니다. 저처럼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허물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곤충에게는 ‘허물’이 있습니다. 곤충에게 허물을 새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탈피의 과정입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죽음과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허물은 남고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같은 몸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마치 부활의 상징과 같습니다. 파충류 중에는 ‘탈피’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허물을 벗으면서 더 성장하고, 더 깨끗하고 건강한 피부가 됩니다.

허물의 두 번째 의미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허물과 관련된 속담이 있습니다. “숯이 검정 나무란다. 칼날이 날카로워도 제 자루 못 깎는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남의 말이라면 쌍지팡이 짚고 나선다. 누구나 허물 없는 사람은 없다. 독사는 허물을 벗어도 독사다. 똥 싼 놈은 도망가고 방귀 뀐 놈만 잡혔다. 자랑 쟁이에게 허물이 더 많다. 자기 얼굴은 자기가 못 본다. 겨울바람이 봄바람보고 춥다고 한다. 재를 털어야 숯불이 빛난다. 가랑잎이 솔잎 더러 바스락 거린다고 한다.” 허물에 대한 속담 대부분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이야기 하듯이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을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남들도 그러는데 머!’라고 하면서 저의 잘못을 합리화 한 적도 많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허물은 ‘원죄’와 같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백신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었듯이, 원죄의 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백신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신 것이 ‘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늘에 계셨으면 ‘이 꼴 저 꼴’ 안 보시고 편하게 계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제자들의 배반을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몸소 사람이 되시려고 했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허물은 지나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허물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겸손이 세상을 구원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텐트가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사랑과’겸손‘이라는 ’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염색을 하는 것도, 체중 조절을 하는 것도, 성형을 하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변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변모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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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되풀이하여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의 마지막 장소는 산이었습니다(4,8 참조). 예수님께서 참행복의 말씀을 들려주신 곳도 산이었고(5,1 참조),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빵을 많게 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15,29 참조). 복음서 끝에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산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28,16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약의 두 인물도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계시를 받고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 산을 내려와 예언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갑니다.

이렇게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내면 깊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우리 자신의 ‘변모’를 희망하며 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단념하고 하느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결심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복을 받아 세속적 의미에서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데에만 매여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려고 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참된 주님의 모습과 그 영광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산에서 그분을 뵈었으니 이제 다시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물고 싶어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을 내려오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러 길을 떠나십니다. 성당에서 또 고요한 기도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산을 경험합니다. 지금 우리도 이 산을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이신 스승께서 당신의 생명을 쏟으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산에서 들은 말씀과 산에서 본 그분의 참모습을 마음에 품고 형제들을 섬기고자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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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나종진 스테파노 신부님(사목국 노인사목팀 담당)]

<주님,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마태 17.4)>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선조 중 한 분인 정약용(요한)은 박해가 오자 신앙을 버리고 배교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이분이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았다는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많다고 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 다산은 강진에 유배 온 후 석벽에 정석(丁石)이란 글씨를 새겼으며, 3채의 초당(草堂)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며 18년간 학문에 매진하여 복민심서 등 많은 기념비적인 저술을 남겼습니다.

이는 아마도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에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며 3채의 초막을 지어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 봉현하고 거기에 머무르고 싶어 한 바람을 자신도 똑같이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학문의 영역’이자 ‘신앙의 영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속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당신의 인성(人性) 안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의 신성(神性)을 우리에게 계시해 줍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 고 있습니다.(콜로 2.9)

이 사전은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과 수난 에고, 그리고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 후에 전해지는데 이는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6는 말씀의 실현을 미리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닮은 존재가
되도록 운명지어진 우리가 주님의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길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에 응답하여 우리도 현대인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일상생활 안에서도 나 나름대로 ‘조막’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도시 안에 ‘광야와 높은 산’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도시인의 분주한 외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내 마음 안으로 침잡하는 내적인 생활을 되찾을 때 이미 내 마음의 밭 속에 묻혀있는 보물인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발견하고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에수님의 얼굴이 태양처럼 찬란히 빛나심은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말씀은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1,4 참조)

우리의 내적 생활이 이 말씀의 빛 안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우리 육신 안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되찾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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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님(문경 성 요셉 치유 마을 원장)]

<하느님 나라의 예고편>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한동안 극장에 가기 어려웠는데, 요새는 새로운 영화도 많이 개봉하고 극장에 가는 것이 한결 편해져서 참 좋습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 시작 전에 꼭 나오는 게 있는데요, 바로 다른 영화들의 ‘예고편’입니다. 흥미롭게 편집된 예고편을 보는 재미도 쓸솔하지요. ‘다음에 저 영화도 꼭 보러 와야겠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예고편이 그 영화의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예고편에서 영화의 내용을 다 알려주면 안 되니까요. 예고편에서 보여주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를 보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예고편이라는 유혹에 기분좋게 빠집니다. 물론, 예고편이 더 재미있는 영화도 종종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영화의 예고편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가 있습니
다. 오늘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일컬어 이렇게 말하
고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예고편’이라고 말이지요. 복음 속 예수님께서 해처럼 빛나고 빛처럼 하애지는 모습은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홀딱 빼앗는 놀라운 사건이면서, 동시에 하늘나라의 모든 신비를 전부 다 보여주지않는 영화의 예고편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 놀랍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거룩한 변모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가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 언젠가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하늘나라의 거룩한 영광을 기억하고 희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곧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걸림돌이 될지라도 그 이후에 다가올 부활의 영광을 기다리라는 것이며, 끝으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너머에는 반드시 예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늘나라의 잔치가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제자들과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친히 준비해주신 이 멋지고 설레며, 한편으로는 몹시 떨리는 ‘하늘나라의 예고편’이 여러분 안에서 절대로 시들지 않는 희망으로 거듭나기를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으로 미처 다 볼 수 없었던 하늘나라의 신비는 분명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큰 기쁨과 영광으로 다가오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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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명식 가브리엘 신부님]

<말씀 새김에서 말씀 살기로>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서각 도구를 챙겨 각자(刻字) 전수 교육관으로 향함니다. 일 년 차 초보이지만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재미에 폭 빠져 두세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처음 새김칼을 잡고 서톨게 획을 따라가던 칼끝이 생각납니다. 마음과 손이 따로 놀아 막막하기만 하고 삐뚤거리며 애태우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서톨기만 하던 칼끝이 꾸준히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다듬어져 가는 변화를 느낌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서불고 많이 부족함니다.

지난해 서각 교육을 마치면서 제출한 교육 수료 작품 두 점이 책상 앞에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저의 서품 성구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21)”이고 또 하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는 말씀입니다. 두 작품은 다닐 행(行) 전서체 바탕에다 성경 말씀을 새겼습니다. 늘 이 말씀을 마주하면서 생각합니다. 말씀을 그저 새김에서 멈추고 만다면, 말씀을 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한다면 죽은 말씀을 걸어 놓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타볼산에서 사랑하던 세 제자에게 장차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하게 될 빛나는 참모습을 잠시 보여주심으로서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종겠습니다.”(마태 17.4)라는 제안을 하자 이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는 말씀과 함께 “일어나라.”(마태 17.7)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왜 일어나라고 하셨을까요?

일어난다는 의미는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존재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끊임없는 떠남의 역사였습니다. 그렇지만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눌고 싶은 것이 사람이기에 사람은 편한 것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오랫동안 길들여진 안식처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또한 생경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감행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러나 떠남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의 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떠나는 삶입니다. 주님 말씀 따라 떠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권태롭고 숨이 막히며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음성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떠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은 선택이 아닌 번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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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오세민 암브로시오 신부님]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 (시편 36,10)>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라는 시편 구절은 제가 좋아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온 세상 만물이 태
양에서 나오는 빛으로 생병울 유지하고 또 사물울 인식하게 되듯 우리는 빛이신 주님울 통해 진리와 생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앞길을 환히 밟혀주시고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 삶은 어둠 속율
헤매게 될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여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보르는 인생의 순간들을 맞
닥뜨릴 때, 우리는 주님께서 나의 빛, 나의 구원'(시편 27,1 참조)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허 기도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소방에 응답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처럼 환하고 밟게 빛나는 보습을 보여주십
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를 직접 목격한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전하며 주님의 변보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
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위대함과 권능을 드러내 주는 이 사건은 베드로 사도에게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게 만들었지만 두고두고 큰 험과 위로가 되었고 결국 베드로는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닫겨진 사명은 빛 자체이신 주님울 닮아 세상의 빛이 되는 삶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주님 가까이에 머물면 머물수록 우리 또한 그분의 빛을 받아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도 우리의 빛율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또한 빛으로 살아갈 수 있울 것인가 고민하다가 최근 있었던 어떤 신부님과의 만남이 떠울랐습니다. 어느 날 주교님께 자신이 있던 소임지 임기가 다 되어 분의를 드렸더니 후보를 한번 추천해 보라고 하셨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이 다른 것보다 잘 웃는 사람’이 오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답니다. 주교님께서”왜 그러냐?”고 물으시니, “이곳은 많은 신자가 방문하는 곳이니 밝게 환대해 줄 수 있는 사제면 좋겠다.”라고 대답하셨답니다. 과연 사제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환한 미소와 따뜻한 말 한 마디야말로 주님의 빛울 전하는 효과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사실 보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항상 당신 결에 머무르며 당신의 빛으로 우리의 허물을 일깨워주시고, 또한 당신이 주시는 온기
를 받아 우리 마움이 냉담해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닮아 당신
생명의 빛 속울 걸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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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제주》 말씀
[제주교구 김선용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터널을 지날 때..”>

예수님은 수난과 부활의 첫 예고 뒤에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 앞에서 보여주신다. “예루살렌에 가
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흔날에 되살아나셔
야한다”는(마태16.21)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의
당혹감을 볼 수 있다. 그럼, 예수님은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답을 통해 지금 지상에
서의 마음가짐과 하느님 나라의 삶으로 향해야 함
을 알려주신다.

오늘 복음은 이런 맥락 속에서 산 위에서 제자들
의 눈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주님 부활의 예고편임
셈이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
게 될 수난과 죽음, 기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엄청난
사건을 준비시키는 단계에서 다시 만날 당신의 모
습을 직접 보여주신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
당한 말씀에서 경험해보지 않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룩한 변모을 통
해 흔들리는 제자들의 마음을 잡아주신다. 마치 기
차가 어둠 속 터널로 들어갈 때 잠시 후 실내등이
들어와 마음의 불안을 줄이고 작은 위안을 주는 모
습과 비슷하다

지금 우리는 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세상을 마주한
다. 지리학자 제레미 다이아몬드 교수는 네 가지 원
인을 앞으로의 지구인들에서 생존위협요인으로 경
고한다.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 전쟁으로 인한
핵무기 위협, 천연자원의 고갈, 사람들 사이의 여러
불평등(인종, 경제, 문화 등)으로 인류의 생존을 어
돕게 보고 있다. 그럼,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는가?
여러 학자들은 지금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남극에서 보여진 오존층 파괴를 국가간
의 합의와 노력으로 해결한 좋은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는 지구인들의 협력과 합의 그리고 실천
으로 불안한 요소를 줄이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
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할 일이다.

베드로는 산 위에서 안주할 것을 예수님께 제안한
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어
명게 보면 당연하게 드는 마음이다. 그러나 예수님
은 우리의 현실회피적 태도를 “일어나라. 그리고 두
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제자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
가신다. 그리고 고통이 기다리는 예루살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신다. 지금의 시, 공간을 살아가는 우
리들에게 당신과 그 길을 함께 가고자 하신다.

위령 감사송에서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
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
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
없이 노래하나이다.” 암울하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
거룩하게 해처럼 빛처럼 빛나는 주님을 만나기를
희원하며 우리가 주어진 사명과 책임들을 성실히
해야 한다. 힘들다고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말고 당
당히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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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김정호 베네딕토 신부님]

<다시 산에서 내려가자>

오늘 첫째 독서인 다니엘서에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는 분께서 천상어전회의를 주재하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다니엘이 바라본 이 환시는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눈처럼 하얀 옷, 양털같이 깨끗한 머리카락, 구름 속에 잠긴 모습 등 유다인이 그리던 하느님의 모습이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 나타났습니다. 이 거룩한 변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목인데, 이 내용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다른 대목과 연결 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마태 16,21 참조) 그 순간 제자들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기대치와 다름에 대해 심한 거부감과 함께 실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비록 내가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결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하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때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으로 요약되는 구약의 전 역사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둘째 독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신 분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실을 증언하셨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변모를 보면서 황홀한 나머지, 베드로는 어지럽고 혼탁한 산 아래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도외시한 채 피안의 세계만을 찾는 것이 당신의 길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산에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코 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세계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삶을 무시한 채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인간의 실제 삶과 직결된 것임을 다시금 명심합시다.

세례란 단순히 외형적인 예식일 뿐 만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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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모습이 밝게 빛나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과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들로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럴 때 믿는 이들의 소명이 더 명확해집니다.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정성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건강관리에 유의하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으시고 영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면, 이미 지난 역사인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인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을 희망하며 주어진 선물인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저 죽은 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 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 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등지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엿새 뒤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진”(마태 17,2)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십자가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끝자락에 영광의 때가 온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라.”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닮은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 단장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말씀으로 지은 견고한 초막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며 들은 바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누구나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에 이르려면 그의 말을 들어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가 일러주고 그가 앞서간 길은 가장 쉬운 길이며 단 하나뿐인 길입니다”(홍승모).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병에 걸립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야 합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외적인 신앙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길 바랍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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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초막>

마태오 17,1-9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초막>

산 아래서
벗들을 품어야할
보잘것없는 거친 초막에
지친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빛나는 초막을 맛보이시려
주님께서 올라가시네

산 위에
아쉬울 것 없는
우리만의 초막을 짓자는
들뜬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산 아래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든 이 깃들 초막을 지으시려
주님께서 내려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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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희망의 증인>

주님의 변모 축일에 저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있는 제자 공동체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왜 다른 제자들처럼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의 목적 없이 떠난 것입니다.

토마 사도 축일 때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토마 사도도 어쩌면 절망하고 제자단을 떠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열 사도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고, 그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세 사도 곧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가 다른 제자들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고 설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세 사도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봤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와 두 제자가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증인들로서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했다고 감사송은 노래합니다.

십자가는 걸림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걸림돌이라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고,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 가는 것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십자가에 걸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서지 않는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진 다음 마음을 접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만 한다면 그리고 걸림돌이었던 십자가를 오히려 디딤돌 삼기로 마음먹는다면 십자가는 우리를 부활에로 인도하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 영광의 시작이라는 믿음과 희망, 그것을 우리가 지녀야 하는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이 믿음과 희망의 근거라고 감사송은 노래하고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이라고 합니다.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제는 젊은 형제들과 우리 안에 희망이 있겠냐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둠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어둠만 보면 희망이 없지만 어둠 속에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며, 사람만 보면 희망이 없지만 인간의 어둠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희망을 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가 희망의 증인이 되어 전체가 희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 한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되라고 타볼산으로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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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 갈망, 만남, 이탈, 경청, 추종 –

“성화되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여러분께 드리는 축복인사입니다.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갈 때 역설적으로 본래의 내 참 모습입니다. 변모의 여정 끝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했을 때 주님은 당신을 닮았는지 우리 마음의 얼굴을 살피실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변모 축일입니다.

날씨는 불볕더위라 몹시 덥지만 열정은 샘솟는 듯 어제 두편의 아주 짧은 시를 짓고 만족했습니다.

“작열하는
불볕 더위
열정은 더욱 타올라
마음은 더욱 깨끗하다
하늘은 더욱 푸르고 꽃은
더욱 붉다”

“날마다
휴가처럼 산다
새삼
웬 휴가?
죽으면
영원한 휴가인데”

지난 8월1일부터 시작됐던 포르투칼 리스본에서의 제37차 “세계 젊음의 날(World Youth Day)” 축제도 오늘로서 끝납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에 있습니다. 젊음의 날 축제의 주인공이 흡사 88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인 듯합니다. 20-30대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쁘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황님의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삶의 기쁨을 잃지마라!”
“결코 슬퍼하지 않았던 성인들처럼, 언제나 행복하라!”
“형제자매들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놀라라! 육화없이는 그리스도교는 이념이 된다.(Without the incarnation, Christianity becomes ideolagy)”
“두려움에 마비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움을 꿈으로 바꿔라.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신비에 놀라라!”

젊은이들에게 준 교황님 말씀이 참 멋지고 은혜롭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마다 체험하는, 만나는 일상의 평범한 신비가 교황님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마다 만나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이자 주님을 닮아 그 자신 역시 거룩한 모습으로 변모됩니다.

또 반갑고 고마운 소식은 7.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님의 “한국인들이여! 평화의 예언자가 돼달라” 당부한 메시지입니다. 유흥식 추기경은 메시지 대독후 “교황님께서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경로로 수차례 전하셨다. 북한이 초청하면 거절하지 않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북한에 꼭 가고 싶으니 나를 꼭 초대해 달라.”고 말씀하셨다며, “남북이 70년동안 서로 갈라져 왕래도 없이 지내는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 교황님의 뜻”이라며 교황의 방북 의지를 다시금 전했습니다.

교황님 재위시 북한 방문이 이루어져 남북의 화해와 평화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꿈꾸며 고대합니다. 이모저모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 반갑고 기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영원한 꿈이며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날마다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가는 변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주님은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후 사랑하는 세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변모를 체험케 하십니다. 그대로 당신 부활의 영광을 체험시키니 말그대로 광야 여정중의 오아시스 체험이자 신비체험입니다. 여러분도 주님 변모의 신비를 체험하고 싶습니까?

주님의 변모체험을 갈망하십시오. 참으로 간절히 끊임없이 한결같이 깨어 주님 만남을 갈망할 때 주님은 만남의 신비체험을 선물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갈망의 사람, 다니엘이 그 모범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을 밤의 환시중에 체험하는 다니엘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하늘 나라 꿈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사실 당신의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주님 변모체험을 일상화해줍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주님의 변모와 더불어 주님을 닮아가는 자신의 변모축일입니다.

세 제자들은 주님의 참 면모를 보고 싶은 갈망이 깊었기에 마침내 선물처럼 주님의 변모를 체험합니다. 높은 산에 오르시자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높은 산이 상징하는 바, 바로 내 삶의 꽃자리이며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찾는 갈망에 눈만 열리면 영광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상시에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 안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누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집착은 금물입니다. 이탈이 중요합니다. 바로 주님을 만난 신비체험에 감격한 베드로의 집착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부정적 경향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선의로 포장된 이기적 독점의 유혹입니다. 베드로의 집착에 즉시 제동을 걸고 제자리를 찾게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충고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나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씀은 세 제자들 마음 깊이 각인되어 평생 깨어 분발케 했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보다시피 이때의 감격을 고백하는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시금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집중하여 경청할 것을 권하는 베드로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언행이 정말 섬세하고 치밀합니다. 하늘에서의 음성을 듣고 땅에 엎드려 몹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 손을 대시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주님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 평생 화두로 삼고 싶은 말씀입니다. 한마디 추가한다면 “내가 너와 함께 있다”일 것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당신이 부활할 때까지는 함구하고 당신을 추종하는 여정에 항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갈망-만남-이탈-경청-추종의 영적 삶의 리듬따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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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

<숨겨져 있는 부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곳이 바로 ‘타볼산’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저는 2008년도에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두 번을 그곳에 오른 기억이 있습니다. 한 번은 걸어서, 한 번은 차를 이용해서.

그 타볼산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합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 하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마태16,21-23)하신 다음에, 그리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는 말씀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을까?’

이는 제자들에게 힘과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부활, 곧 이제와 영원한 부활은 십자가 뒤에 숨겨져 있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곧 신성을 지닌 분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숨겨져 있는 부활!’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실 때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수많은 성인들은 숨겨져 있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고, 그래서 십자가 죽음 뒤에 숨어 있는 부활에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잃지 말고, 숨겨져 있는 부활을 향해 나아갑시다!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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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4znIF8Z8_S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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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마태 17, 2)

나에게서
거룩한 변모는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주일
아침입니다.

가장 단순한
것에서 만나는
거룩한 변모입니다.

참된 사랑이
거룩한 변모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참으로 보편적인
사랑을 발견합니다.

거룩한 변모를
우리의
한정된 문자나
언어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변모
부활은
토의될 성질의
것이 아닌
실현되어야 할
사랑의 참된
가치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기위한
다짐의
시간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선
선행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가
주님을 통하여
부활을 얻는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거룩한 변모로
서로가 서로를
힘껏 북돋아 주고
서로가 서로를
살려내는
이 빛나는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의 삶은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슬픔과 기쁨이
뒤썪여 있습니다.

뒤썪여 있는
이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부활의 진정한
변모입니다.

변모 앞에서
우리의 무지와
오만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매일매일의
새로운 삶이
사랑의 힘으로
변화됩니다.

사랑의 힘으로
사랑의 실천으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환하게
보입니다.

낡은 인식에
머물지 않고
새로워지는
사랑의 주일
변모의 주일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앞에서
우리의 변모는
어떠한지를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