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1장 25-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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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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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며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이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간에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느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노력하였지요. 바로 이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계명만을 바라보다 보니 그만 계명 자체에 얽매이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안식일 준수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을 맞아 일하지 않는 동안 속수무책으로 적에게 학살당하기도 하였습니다(2마카 5,25-26 참조). 안식일에는 불을 붙이거나 끄지도 못하고, 빵 굽기, 바느질마저 금지하였기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멍에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어떤 분으로 보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힘들고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풀어 주신 것입니다. 지킬 수 없는 형식적인 계명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돌려 주셨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보다 근본정신을 강조하심으로써 하느님을 믿는 것을 참으로 쉽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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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영적인 구원의 조건이 세상적인 조건과 어떻게 다른지, 영적인 구원의 조건이 당시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묵상해 봅시다. 내가 자주 범하고 있는 영적인 실수는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고 사랑과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예수님께서는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며 영적인 자유를 느낀 경험이 있는지, 반대로 예수님과 멀어졌을때 영적인 자유를 느끼지 못한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보고 영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갈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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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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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하시고,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계시하시며, 사람들을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찬미, 계시, 초대의 차원을 보여 주는 세 부분의 짧은 말씀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지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첫 번째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신비가 ‘현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났다고 기뻐하시며, 이야말로 아버지의 선한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자들은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처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철부지들은 주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며 자신에게 다가오시기를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갈망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지식의 대상으로 주님의 신비를 대하거나 천상과 지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모두에 대한 대답을 가진 듯한 ‘강단 신학’에 자족하는 신학자는 정작 가장 중요한 신비는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대목에서 그 모든 것을 담은 신비는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깊이 알고 계시며 성자를 통하여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계시’해 주십니다. 이 앎은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사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주님께서 몸소 알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에게 드러납니다.
세 번째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앎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대응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란 고단함에 치이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이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사랑 안으로 초대하시고, 그들은 어떤 계산도 조건도 없이 감사하며 응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주저 없이 메고 주님께 배우려 합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그 멍에로 오히려 안식을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참된 행복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한 마음, 가난한 마음,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이 참행복의 길은 쉽고 편하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이 ‘참’임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길을 걷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출저: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