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0장 26-33절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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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6-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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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역사 안에서 교회는 자주 박해와 부딪칩니다. 교회가 살아가는 그 주변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다른 고통과는 달리 의인에게 주어지는 폭력입니다.
이사야서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당함을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14)고 불편해 하지만, 주님의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예언자를 박해했던 자기 조상들의 불의를 이어 가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반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계산은 어긋날 뿐입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1코린 2,8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늘 새롭고 더 큰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온통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가난, 그리고 용서를 외치는 이는 틀림없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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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복음을 전하는거에 대한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데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없이 잘 전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이유로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이 생기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에서 예수님을 안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묵상해 봅시다(사탄도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들인걸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라는 말은 어떤 말인지 이야기 해보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떻한 삶을 살아갈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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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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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마태오가 병사들의 손에 순교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두 가지 장면이 대비를 이룹니다. 한 장면에서는 포악한 병사가 마태오를 죽이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천사가 월계수를 마태오에게 건네고자 구름을 타고 내려옵니다. 한 그림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장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비참한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을 그린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신앙에 의하여 승리의 월계수가 주어지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장면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비극적 죽음이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압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치 씨앗이 땅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씨앗이 죽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싹이 텄다.”라고 말하듯이, 비극적인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승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 속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많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드러내는 믿음에 기뻐하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