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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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6-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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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역사 안에서 교회는 자주 박해와 부딪칩니다. 교회가 살아가는 그 주변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다른 고통과는 달리 의인에게 주어지는 폭력입니다.
이사야서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당함을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14)고 불편해 하지만, 주님의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예언자를 박해했던 자기 조상들의 불의를 이어 가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반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계산은 어긋날 뿐입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1코린 2,8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늘 새롭고 더 큰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온통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가난, 그리고 용서를 외치는 이는 틀림없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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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복음을 전하는거에 대한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데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없이 잘 전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이유로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이 생기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에서 예수님을 안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묵상해 봅시다(사탄도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들인걸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라는 말은 어떤 말인지 이야기 해보고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떻한 삶을 살아갈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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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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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마태오가 병사들의 손에 순교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두 가지 장면이 대비를 이룹니다. 한 장면에서는 포악한 병사가 마태오를 죽이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천사가 월계수를 마태오에게 건네고자 구름을 타고 내려옵니다. 한 그림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장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비참한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을 그린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신앙에 의하여 승리의 월계수가 주어지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장면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비극적 죽음이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압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치 씨앗이 땅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씨앗이 죽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싹이 텄다.”라고 말하듯이, 비극적인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승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 속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많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드러내는 믿음에 기뻐하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627
6월21일 [연중 제1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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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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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1jrkgsIrMU
[춘천교구 이태원 시몬(서석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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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섯 곳에 모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파견설교’로 마태오 복음 10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를 발탁하심,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시 말씀,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말씀, 예수님 추종에 따른 보상.
연중 제12주일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파견 설교 가운데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승의 생명은 죽일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만은 죽일 수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 가지 생명을 다 앗아가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찮은 미물인 참새의 생명도 아끼고 돌보시는데,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작업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골적인 박해자들과 냉랭한 반대자들,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주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때로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오 복음 10장 26~27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당당한 대세 종교이지, 캥기는 것이 많아 은밀히 집회를 여는 밀교(密敎)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메시지는 태양처럼 밝은 빛, 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생명이 약동하는 빛 안에서 전해집니다. 우리 집회는 비밀집회도 아니고 지하 운동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자신들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하거나 은폐시켜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포되어야 하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는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손길 한번 닿지 않는 교회 도서관 먼지 낀 영성 서적 안에 잠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거리에서 울려퍼져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자신의 뒤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절대 그게 아니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0~31절)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나 같은 인간, 하느님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만큼 하느님께서 내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허물투성이뿐인 내 일생일지라도 그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일상생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분의 큰 관심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라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생활 전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고 암담해보일지라도 더 이상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보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영양가 있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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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gSCGcbX57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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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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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근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참례 인원이 늘어난 것입니다. 제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 2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700명이 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900명이 넘는 때가 많았고, 지난 부활 대축일에는 1,155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교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가대 모임에서도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원이 늘어서 연습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성가를 배우고 싶은데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포 사목의 현실은 점점 고령화되고, 봉사자는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은 오히려 봉사자가 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고, 교우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입니다.
감사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성당 경계를 이루던 나무 몇 그루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나와서 퇴비를 뿌리고, 죽은 나무를 뽑아내고, 다시 새 나무를 심었습니다. 예전에 ‘마징가 제트’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나타나서 도와주던 정의의 로봇이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그런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묵묵히 나타나서 땀 흘리며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지난 Mother’s Day를 앞두고 형제님들은 어머니들을 위해서 맛있는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형제님들이 모여서 고기를 썰었고, 정성껏 구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님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성모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참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인 1996년입니다. 봉성체를 가면 만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갔다 오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이 큰 병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점점 근육이 약해져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첫영성체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 늘 기뻐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친구는 어느 날 제게 짧은 시 한 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 시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맑고 따뜻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본당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당 청소를 하는 분들,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 주차 안내를 하는 분들, 성가대로 봉사하는 분들, 힘든 교우를 위로하는 분들, 말없이 헌금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수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도 있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고향을 떠나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고, 미사를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이유는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한 제도 때문만도 아닙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별처럼 빛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맡겼습니다. 시련은 예레미야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두려운 일이 많습니다. 오해받을 때도 있고, 손해 보는 일도 있고, 외로운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지는 십자가라면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힘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땀방울입니다. 묵묵히 감당하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교회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없이 봉사하고, 기쁘게 나누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욱 빛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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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피부에 와닿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박해와 거절을 실감하는 제자들에게 건넨 말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10,26).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는 말씀은,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고통 속에서 배운 말, 상처를 통하여 들은 말은 혼자 듣고서 감내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몸은 상처 입고 쓰러질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 선 나의 참된 가치에는 감히 인간의 위력이나 억압이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협보다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립니다. 이처럼 값싸게 여겨지는 생명의 죽음조차 하느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조차 하느님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버려지는 것, 잊히는 것,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침묵하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 입을 열어 주고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세상을 향하여 끝내 나아갈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의 슬픔을 다른 빛으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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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26-33: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반복된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사도들과 모든 제자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반대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루카 2,34), 박해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항상 동반자처럼 존재해 왔다.
1. 예레미야의 상징성과 그리스도인의 소명
제1독서(예레 20,10-13)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당한 고통과 두려움을 증언한다. 그는 동족으로부터 “공포가 사방에 있다!”라는 조롱을 받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지만, 끝내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다. 예레미야의 충실함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고하며,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2.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반복하신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된다. 우선, 심판 때에의 담대함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된다.(26절) 즉, 진리의 말씀은 결국 드러날 것이므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복음을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감출 수 없으며, 진리를 감추는 순간 스스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참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육신만 죽일 수 있지만, 영혼과 육신을 함께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28절) 이는 인간 권력보다 더 근본적인 두려움, 곧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일깨운다. 사람의 칼은 육신을 베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영혼과 육신을 함께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칼보다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섭리 안에서 확신을 갖도록 하자.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존재 전체가 아버지 손길 안에 있다는 약속이다.
3. 고백과 증언의 책임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증언할 용기와 순교 신앙의 의미를 드러낸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믿고 생명을 바쳤다. 교회 헌장도 그리스도인의 증언을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는 언제나 박해를 당해 왔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의 운명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부활의 빛을 드러내는 표징이다.”(42항)
4. 은총이 죄를 압도한다: (로마 5,12-15)
바오로 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죄보다 더 큰 것이 은총임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죄의 세력은 인간을 두렵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은 죄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신앙인은 두려움보다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5. 신앙인의 삶에의 적용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위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과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용기는 인간적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에서 비롯된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는 말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증언이 된다.
6. 맺음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진리는 드러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의 섭리가 너희를 붙들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는 담대히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구원과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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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중에>
마태오 10,26-33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기도 중에>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기도 중에
들릴 듯 말 듯
그분께서 속삭이신다
들리느냐
지체하지 말고
네 삶으로 외쳐라
귀를 막은 이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기도 중에
보일 듯 말 듯
그분께서 비추신다
보이느냐
두려워하지 말고
너를 살라 비추어라
어둠을 즐기는 이들까지
빛에 잠기도록
기도 중에
알 듯 모를 듯
그분께서 알려주신다
알겠느냐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네 목숨을 걸고 증언하여라
거짓을 일삼는 이들까지
진리에 무릎 꿇도록
기도 중에
느낄 듯 말 듯
그분께서 함께하신다
느끼느냐
아낌없이 남김없이
너를 바쳐 느끼게 하여라
홀로 삶에 맛들인 이들까지
더불어함께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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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한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래도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 15,1).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 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 5,17)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8)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분명 “아니오”하고 답하길 원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되어야 할 때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길 희망한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는가?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다. 누가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겠는가? 세례명을 받은 사람다운 품위를 지켜 주님과 아버지 하느님 앞에 당당하길 소망한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호하시고 지켜 주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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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연구팀은 5년 동안 노년 부부를 추적·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타인을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 멜런대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혈압이 낮고, 염증 수치가 낮고,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기여는 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량이 줄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뇌가 ‘나는 더 이상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부나 기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하고, ‘내 코가 석 자’라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뜻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더불어 이 세상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세상 권력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고작 육신의 죽음뿐이고, 그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결단코 손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 즉 영원한 심판권자는 오직 하느님 뿐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올바로 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참새와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는 가장 값싼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생사조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가닥에 이르며, 우리 자신도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다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를 존귀한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때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 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요?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이 더 큰 이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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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