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7장,1-8.14-15.21-2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손 씻는 문제는 율법이 아닙니다. 오경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기에,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막 지대라 먼지바람이 많고 물이 귀한 곳입니다. 따라서 외출하고 돌아와서나 음식을 먹기 전에 몸을 씻는 것은 위생에 큰 도움을 주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이 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될까요?

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잘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이 존재하고 지켜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죽음의 땅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정신이 아니라 문자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규칙을 더해 가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백성에게 강요합니다. 이 규칙들은 몇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위대한 조상들의 전통’이 되어 백성을 옥죄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백성을 차별하고, 죄인 취급하며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규정과 율법은 그 기본 정신에 따라, ‘죽음의 땅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다가가시어 그들을 살리셨듯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당이나 사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가 의롭다고 여기는 것(혹은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더 큰 죄를 지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죄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이 죄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 각자가 외적인 일에 신경 쓰면서 내면의 정결에 대해 소홀히 한 적이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만약 내면의 정결을 등한시한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그리고 반대로 내면의 정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 자신과 성당 공동체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
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

(강론: 12~22:50)

강론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를 따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정·부정 규정 때문에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 말씀은, 악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근본적인 죄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아담은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먹고는 책임을 미룹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러한 핑계와 책임 전가는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기본적인 죄가 아닐까요? 더욱이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피해 숨어 있었지요(창세 3,8 참조). 잘못을 저지르고는 하느님의 존재가 불편해졌기에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입니다.
이후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한 나머지, 들로 데리고 나가 죽이고 맙니다(창세 4,1-8 참조). 이처럼 하느님과 신뢰가 무너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도 무너집니다. 결국,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소외시키게 됩니다.
죄를 극복하고 마음을 정화하려면 제2독서 말씀처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오늘의 묵상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신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거기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거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셨습니다.
독서 말씀도, 모세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실천할 때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간청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는 구원 능력이 있으니,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면서, 그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말로 많은 일을 합니다. 설득하고 위로하고 위협하고 강요하는 등 많은 일이 인간의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빈말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더욱이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도 않고, 인간의 힘에 꺾이지도 않습니다. 그 말씀에는 지혜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세상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계속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또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본디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완성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야고 1,21).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967
9월1일[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fNH-_uA02o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 반유성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교회 행사를 주도해 나가다 보면 가끔 크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례나 미사의 가장 중심, 핵심, 본질,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한 표현인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언젠가 제법 큰 행사를 한번 주관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더군요.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승인을 받자마자 행사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각 분야의 실무자를 선정해 즉시 실무에 착수했습니다.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것,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행사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1부 전야제, 2부 미사, 3부 친교의 마당… 행사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피드백을 받아보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하느님 체험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행사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끝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저 일만 죽으라고 했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정작 제 안에는 아무 변화도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 안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과로에 찌든 한 영혼이 힘겨워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주객이 전도됩니다. 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적, 사적, 이기적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보다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만 잔뜩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백성의 인도자들이었던 그들은 하느님 보다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법에, 지극히 세밀한 생활규칙에 더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수도회나 교회 안에도 많은 규칙들, 법조항들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을 들으면 보다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규칙들은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질타 당하는 가장 큰 이유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외양은 무서웠습니다. 어딜 가든 율법이란 잣대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율법서를 들이대었습니다. 싸늘한 눈초리, 냉랭한 얼굴, 엄격한 잣대, 호시탐탐 이웃의 실수를 노리는 표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음을 빼앗기는 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알 바꿔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음은 원하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자기가 신이라 믿고 소유하고 먹고 이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고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는 일이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에서도 개구리처럼 착해지고 싶었던 전갈이었지만, 정작 수영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기를 태워주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마음으로 자신이 전갈이라 믿고 있으면 아무리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더라도 전갈의 본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믿는 대로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믿으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도 헤어졌는데 빚 독촉도 심해지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표류한 김에 적응하며 사는데 다른 사람 간섭을 안 받고 혼자 사는 삶이 즐겁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섬에서 자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생존에 집중합니다. 김 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보고 그것을 만들어 먹고자 합니다. 그를 지켜보던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방 안에서만 살아가는 김정연이라는 여자가 김 씨를 사진기로 보고는 그 섬까지 짜장면을 시켜줍니다. 김 씨는 짜장면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받으면 간섭 받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어서 결국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허무함과 그 달콤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는 중에 여자 김 씨와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결국 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김 씨도 집 밖으로 나와 남자 김 씨에게 달려옵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섬이 되어줍니다. 갈 곳이 생기자 이제 이전의 자기를 지배하던 섬, 곧 마음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법은 피를 받음으로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줍니다. 자녀는 마음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마음 안에서 살지 않고 부모의 마음으로 삽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고 마음 아픈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세계로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고 조금씩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빼앗깁시다. 그분의 마음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에게 자기 옷을 빼앗겨 아기까지 낳습니다. 나무꾼은 옷을 숨긴 미안한 마음에 선녀에게 옷을 내어줍니다. 선녀도 아이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나무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여 나무꾼을 하늘로 불러 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마음을 빼앗기는 관계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재형 [umbrella]   23:26 ㅣNo.175565
본당에 목수회가 발족했습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실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커피 머신 water line 교체, 변기 flush diaphram 교체, 친교실 문 Adjustment, 성전 바닥 타일 수리, 잔디밭: 흙 파인 곳 흙 채우기, 여자 화장실 천정 라이트 교체, 부엌 후드 라이트 교체, 부엌 천정 형광등 교체, 여자 화장실 누수 수리, 농구장 보수” 예정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Blower & Power Washer Tune-Up, 성전 문 Adjustment, 성전 십자가의 길 라이트 교체, 성전 천정 라이트 교체, Asian Jasmine 구매 및 설치, 죽은 나무 또는 관목 교체, Top Soil Spreading, 남쪽 주차장 누수 – Water Leak Testing, 놀이터 Boundary – Concrete, 놀이터 Rubber Mulch 교체, 제대 Handicap Ramp, 성전 바닥 Vacuum Purchase, 제구실 누수 수리, 성당 주위 보도 및 외벽 검은 곰팡이 제거, 성당 입구 처마 스테인 제거, 북쪽 주차장 물 고임: Parking Lot Striping, 부지 서쪽 경계선 주위 정리, 농구장 Shade Installation, 새 창고 주위 보도블록 설치” 저는 봐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형제님들은 세밀한 부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찾아냈습니다. 해야 할 바를 알고, 묵묵히 실천하는 형제님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댈러스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넘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창고 만드는 일, 벽화 그리는 일, 농구장 꾸미는 일에 함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창고 공사에 함께 하면서 목수회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벽화 작업하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농구장 단장하면서 사도회 형제님들을 만났습니다. 댈러스 성당에 숨어있는 많은 보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역모임, 반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구역 미사, 반 미사를 함께 하면서 교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당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 교우들의 고충도 알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소홀해진 구역모임이 다시 활기를 찾으니 좋았습니다. 이렇게 구역모임이 자리를 잡으면 쉬는 교우들을 방문할 수도 있고, 주일 점심 친교 봉사도 수월하게 할 수 있고, 9월 22일에 있는 본당의 날 행사에도 많은 구역이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26기 사목회가 임기를 마쳤고, 27기 사목회가 출범했습니다. 26기에는 공석인 자리가 더러 있었는데, 27기에는 모든 분과의 봉사자가 선임되었습니다. 기꺼이 봉사를 맡아 주신 27기 사목회 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열정과 신앙이 충만한 봉사자를 보내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합니다. 구역과 반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 함께 하려고 합니다.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사제관도 수녀원도 성당 밖에 있습니다. 성전 신축할 당시에 비용이 부족했고, 당시는 성당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성당 주변에 건물도 많이 생겼고, 지금의 사제관과 수녀원을 매각하면 건축비용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으면 모임에 참석하기도 수월합니다. 수녀님이 성당에서 기도하기도 좋습니다. 교우들과 소통하기도 좋습니다. 바늘 가는데 실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당을 보았습니다. ‘메이플 우드 성당, 퀸즈 성당, 워싱턴 DC 성당, 필라델피아 Holy Angels 성당’이 50주년 행사를 하였습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영적인 준비, 친교의 준비, 전례의 준비, 문화의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먼저 너의 병이나 고쳐라 .” 사제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겸손, 헌신, 희생, 나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덧 9월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지난 8개월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남은 4개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하나씩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8.14-15.21-23: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선과 악이란 사물이나 관습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계명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신명 4,1) 계명과 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이해되는 법을 말한다. 그 법은 생명의 원천이며, 윤리적 압박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유의 원천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법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당신 백성과 대화를 계속하신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편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변질시키고 있다. 오늘 복음의 논쟁 시작은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는 것에 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절).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조상들이 율법 해석으로 만든 규칙들이었다. 이 전통 중에는 모세의 율법에는 없는 많은 규정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선과 악의 척도로 삼고 있다. 조상들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보다도 선악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이사 29,13을 인용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6-7절) 예수께서 전통을 비난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통들이 사람의 계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전통들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명보다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보다는 인간의 헛된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사이적 형식주의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려는 마음도 가질 생각을 못 하고 그냥 전통에 물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나 자신 안에도 이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나에게서 악습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바꾸어 가야 한다. 선과 악은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모든 선택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즉, 인격의 심층부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신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4-15절) 마음 안에, 모든 죄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마음으로 더러워진다.

예수님의 말씀은(21-23절) 무섭다. 마음에서 나오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 인간을 더럽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생활을 발견하고, 인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음식이나 외적인 행동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의 법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고 실천함으로써, 즉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활화하고 실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하느님께로부터는 오로지 선한 것들만 온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오는데 이제 그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현함으로써 능동적으로 구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벌이 되고 말 것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척도는 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태도이다. 실천적인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성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가 되지 않으면, 즉,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러면 신앙 자체가 형식적인 신앙, 바리사이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규정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규정을 어기면 죄가 된다는 것으로 규정 지키기에만 급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이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전통만을 중요시할 때 이웃을 거스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된다. 불결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전통이나 규정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을 더럽히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반성하면서 항상 주님의 뜻으로 충만한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들음에 대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실천하면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머리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때보다, 하느님께서 이것이 바른길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을 따라갈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온갖 좋은 것은 위에서 온다고 하며, 공손히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공손함, 그것은 신명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더 좋고 더 옳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우기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에 순응하는 것이 공손함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느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통은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열왕기 상권 3장에서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청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듣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우리에게는 이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이 더 지혜로움을 인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거나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이 더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며 그 지혜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시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5-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겉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않은’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정결 예식’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 실행한 것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거룩하다.’ 라는 말과 ‘깨끗하다.’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깨끗이 씻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는데, 그게 위선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고, ‘삶’을 깨끗이 해야 한다.”

몸을(몸만) 깨끗이 씻는다고 해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1장을 보면,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우리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긴 겉옷’을, 즉 사제복과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온 삶으로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3)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라는 말씀에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일이 연상됩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창세 3,6)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16-17) 그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는 선악과 탓일까?

‘먹음직하고 소담스럽고 탐스럽게’ 보인 그 열매의 잘못일까? 만일에 정말로 맛없게 보이는 열매였다면, 하와가 안 따 먹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명령을 어기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 명령을 하신 하느님 탓일까?

아담과 하와의 죄는 그들 자신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 자신들이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은, 열매를 준 하와 탓을 하는 말이고, 또 하와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 탓을 하는 말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남 탓’만 하고, ‘외부 탓’만 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온 삶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대구대교구 이성웅 세례자 요한 신부님]

<사랑과 법>

오늘 독서와 복음은 법에 관한 것입니다. 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먼저, 법이라고 하면 좀 딱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생각이 들죠.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법이 있어야지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다. 법은 우리 삶을 보호해 줍니다. 이처럼 법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속박하는 것, 또는 나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법에 대해서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법들이 생긴다. 더 많이 사랑하면 더 많은 법들이 생깁니다. 과연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며칠 전 저는 안동에 일이 있어서 갔었는데요, 자연 휴양림에 갔었습니다. 거기에서 마음에 드는 돌멩이 하나를 주웠습니다. 그곳을 관리하시는 분께 이 돌멩이를 가질 수 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그 돌멩이 가져가도 아무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돌멩이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돌멩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법도 규정도 없습니다. 사랑과 관심이 없는 대상에는 아무런 법이 없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아주 좋아하고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물관 내에는 여러 가지 법과 규정이 있습니다. 들어갈 때부터 입장권을 구입해야 하고, 줄을 서야 합니다. 함부로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정숙함을 유지해야 하고, 음식을 먹으면 안 됩니다.

만일 제가 모나리자 그림을 보고, 이 여인의 얼굴에 보조개가 있으면 더 예쁘겠다고 생각하고, 붓으로 보조개를 그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가 어떻게 될까요? 바로 감옥소에 가게 되겠죠?

이처럼 사랑하는 것에는 더 많은 규정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지켜야 할 규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법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을 법으로 생각하고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에 법이 생깁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그 진실한 마음으로 내 마음에 새겨진 법들을 잘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춘천교구 김선류 타대오 신부님]

<2024년 창조시기 주제 : 창조세계와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자!!>

각각의 피조물은 저마다 고유한 선과 완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69항>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계획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고유한 선함과 완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덧없이 사라지는 작은 생명도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며, 그분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은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과 친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창조는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창조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고, 지금도 과정 중에 있는 신비입니다.

이번 창조시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여전히 활동하시는 창조의 진화를 강조하며, Creation을 대문자로 표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속되는 창조의 의미는 모든 피조물이 누군가의 소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는 고유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개념을 담아서 교회는 올해 창조시기 주제를 ‘창조세계와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기’ 로 정했습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하느님의 전체 창조 질서 안에서 오늘의 희망을 발견하며, 그 희망으로 일어나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우리의 착취와 파괴로 인한 지구의 고통을 어머니가 겪는 해산 고통에 비유하면서(로마 8,22), 지금의 고통이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아픔으로 이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내버려두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믿음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의 희망은 막연한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본성, 약속, 행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몸을 일으켜 그리스도를 닮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희망을 두 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희망에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는데, 그 이름은 분노와 용기입니다. 분노는 현실에 대한 분노이고, 용기는 현실을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용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구와 모든 피조물의 고통을 목격할 때 우리는 거룩한 분노를 일으켜야 하고, 정의를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후 위기와 생태 위기를 제어하기 위한 대담한 행동이 얼마나 시급한지 알고 있으며, 반면 인간의 생각과 마음,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더딘 과정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행동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범(육화)을 따라 창조 세계를 돌보고, 가난한 이들의 아픔과 지구의 울부짖음에 거룩한 분노를 일으켜야 하며, 용기를 내어 변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인천교구 정인화 야고보 신부님]

<참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신명기 4,6)

오늘 제1독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요약을 해주셨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 길이 하느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길이고,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데 있어 여기에 하느님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면, 이웃 사랑이 빠져있다면 그 율법 준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겠지요.

‘이 음식은 하느님께서 농부들을 통해서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음식이니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겠습니다.’라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어야 한다는 율법이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음식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손만 씻으면 다 되는 것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손 씻는 행위 자체만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아닐 텐데, 그런 형식적 행위로 둔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을 꾸짖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먹는 음식도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부정한 음식이 있었는데, 이런 음식을 먹는 사람도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음식을 먹으면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음식 자체에 무슨 선악이 있겠습니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이 얼마나 명쾌하고, 통쾌한 말씀입니까! 예수님 이셨기에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외적인 것도 중요합니다. 소중한 것을 더 소중하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외적인 것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 형식보다는 내용, 껍데기보다는 알맹이, 그릇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음식,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알맹이가 빠진 외적인 것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키는 외적인 행위나 형식이 있다면 그 안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더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외적인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미사를 열심히 참례하는데, 봉사직을 열심히 수행하는데, 그 안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온전한 미사, 온전한 봉사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6)

오늘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기도 합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의 생태환경의 오염과 파괴는 인류의 운명을 경고만 하는 수준을 이미 넘어선 것 같습니다. 생태환경 또한 천지창조 때부터 이미 우리의 소중한 이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웃을 사랑하는 데 너무나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요? 늦은 감이 있지만 이웃 사랑의 영역이 사람뿐만 아니라 생태환경으로까지 더 넓어지고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부싸움에서 가장 큰 원인은 “당신은 왜 변하지 않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이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니, 결혼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지 40년이 넘으셨으니, 40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40년 넘게 변하지 않으셨는데, 과연 남편분께서 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불만족은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커집니다. 상대의 변화를 바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자기 배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피하기 어려운 마음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하면 자기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래서 이기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이 변화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40년 넘게 유지했던 자기 모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불행이라는 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당신 삶으로 직접 사랑을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행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변화를 요구합니다. 제발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단순히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깨끗하고 흠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 위에 있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섬기는 행위가 손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와 다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다름 아닌 바로 일의 계획과 방향을 세우는 인간의 의식에서 나온다고 하시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1독서 신명기 말씀처럼, 오로지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자기의 진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다스려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며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언했던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또 그들의 영성을 살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언젠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았는데 손 잘린 사람이 발가락으로 노름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손이 도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 비춰지는 죄짓고 벌 받으러 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끄럽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죄를 지었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죄지은 마음이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손 버릇 나쁘다’,‘손 크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손은 고운 손입니다. 사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마음 관리를 잘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잠언에 보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마음이 편안 하면 몸에 생기가 돌고 마음이 타면 뼛속이 썩는다)(14,30)라고 적고 있습니다. 속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무엘 상권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주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으로 성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이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6,7)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질문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7) 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당시 조상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 중에, 하나는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 온 음식, 시장에 다녀온 몸, 그리고 그릇들을 씻었습니다. 위생상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밖에서 부정탈 수 있었던 것을 씻기 위한 정결례였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에 손을 대거나 부정한 사람, 즉 나병환자를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이런 부정은 물로 씻으면 없어진다고 알고 있었으며 거룩한 신에게 잘 보이려면 그에 합당한 정결함을 지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어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대전에 들어서면서 온갖 악한 생각을 빼어 버리고 거룩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그리고 나갈 때는 거룩해져 나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수를 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아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보면 피해야 할 금기사항, 부정 탓을 때 회복하기 위한 속죄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민수기 5장.9장.19장),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자신들을 반성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정,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을 저질러서 재앙을 겪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정한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20,7)는 율법의 요구에 따른 정결법은 점점 확산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정화는 소홀히 하고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형식에 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외적인 형식에 연연해하지 말고 내면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근본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장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고 멋지게 하느님 앞에 나왔지만, 마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정말 아름답고 예쁜 모습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을 용서받고 주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시편에 보면 ‘겉꾸민 우리 위선 흉측하오니 당신의 은총으로 벗겨 주소서…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하고 노래합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지만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얼짱’,‘몸짱’이라는 외면을 가꾸는 데 온갖 노력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마음짱’, 속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아니 방치합니다. 정말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혹 도금이 되었거든 하루라도 빨리 벗겨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무시하시지 않았고, 다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마음의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지혜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주님 앞에서 마음속을 환히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있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 위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좋은 곳에 두어야 한다.”“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마르코 7,1-8.14-15.21-23(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그 누구도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없앨 수 없고

그 무엇도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빼앗을 수 없으나

오직 사람만이
스스로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우려 드니

하느님의 모습이
없어야

참으로 사람인 듯
그릇 생각함이요

하느님의 모습을
잃으면

사람이 아님을
깨닫지 못함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참 좋은 사람들>
-경청, 실천, 순수-

“주여, 당신 장막에 묵을 이 누구오리까
거룩한 당신 산에 살을 이 누구오리까
허물 없이 살아가며 의를 하는 이,
마음 속에 진리를 품은 사람이외다.”(시편15,1-2)

오늘 화답송 시편이 누가 주님 장막에 묵을 수 있을지, 주님 거룩한 산에서 지낼수 있을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합니다.

“왜 전부 일본만 가노,
제발 좀 오세요.
심지어 동해도 폭망, 거품이 빠져도 이정도까지!”

새벽 열어본 한 동영상 제목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일본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건 국수적인 사고가 아니라 애국심의 발로입니다. 우리의 관광지를 이용해 주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작금의 의료대란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호소도 절절합니다.

“어느 여당 인사의 말이다, 국가를 이루는 3요소가 ‘국민, 주권, 영토’인데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주권이 없었기에 나라가 없었으므로, 8월15일은 건국절이란다. 인용하기에도 민망한 말이라 잠시 주저해 보지만 그럼 지금은 국민이 있는가 묻고 싶다. 국민이 없는 의료정책을 펼치는 이 시국에 과연 나라가 존재하는가?”

오늘은 9월 첫날, 달력을 넘기는 순간 참 많은 과제를 부여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참사람되어 사는 보람과 기쁨을 충만히 느끼는 9월의 시작입니다. 무엇보다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가을의 도래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어지는 대림시기, 참으로 풍요로운 영적수확을 위해 부지런히 성실히 치열히 살아야 할 날들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은 특별히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 103위와 순교 복자 124위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굳은 믿음을 본받고자 하는 달이요, 특히 순교 성지 순례를 권하고 싶습니다. 순교적 삶에 항구하는 것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자랑스런 의무이기도 합니다. 제 고향집 충남 예산의 구암리 카페 인근의 솔뫼성지, 해미성지, 신리성지, 그리고 수덕사와 윤봉길 의사 생가와 추사 김정희 생가가 볼 만합니다.

교황님의 9월의 기도지향도 절박합니다. “우리 각자는 지구와 환경재해와 기후변화의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을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세상의 보호를 위해 온갖 개인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취지의 기도지향입니다. 또 오늘 9월1일 첫날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기도 합니다. 열정에 넘치는 교황님의 담화문 극히 일부만 소개합니다.

“피조물과 함께 희망하고 행동하십시오. 피조물이 진통을 겪으며 탄식하는 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우리 지상의 삶만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주인이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우리의 미래, 지극히 복된 종말, 평화 가득한 낙원인 지구가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자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성부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삶을 삽시다.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에, 우리 삶은 하느님을 위한, 인류를 위한,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을 위한 사랑의 시가, 노래가 될 수 있고, 거룩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우리에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과제가 부여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시로, 사랑의 노래로 사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랑하는 하느님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 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

그대로 오늘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이 더욱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되고 빼서도 안된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모세에 이어 야고보 사도의 거듭된 경청과 실천의 충고가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단숨에 읽혀지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빛의 아버지께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본질은 진리의 말씀 입니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하나될 때 참사람이 될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도 이런 신심의 은총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오늘 몇 현자의 말씀입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기보다 남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도록 마음을 지키라.”<다산>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 이유를 살피고, 그가 만족하는 바를 관찰하라.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숨길수 있겠는가? 어떻게 숨길수 있겠는가?”<논어>
“‘존재하는 것은 나타내는 것이다.’ 히브리 철학자이자 신비가 아브라함 헤쉘의 말이다. 한 인간의 존재는 본인이 알든 모르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그의 언행이 그대로 어김없는 자기증언인 것이다.”<어느현자>

답은 단 하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만든 조상들의 전통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이요 말씀입니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오물통과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다음 어리석은 무지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위선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느님을 참되이 섬기는 것은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심어진 진리의 말씀을 공손이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말씀을 통한 정화은총이, 성화은총이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주님의 오늘 복음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것들에 대해 번호도 달아봤습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1.나쁜 생각들, 2.불륜, 3.도둑질, 4.살인, 5.간음, 6.탐욕, 7.악의, 8.사기, 9.방탕, 10.시기, 11.중상, 12.교만, 13.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오물통같은 마음이요 이런 오물들이 배설될 때 세상은 악취 진동하는 오물통같은 세상이 됩니다. 이런 주님의 진리 말씀을 깨달아 실천해 가면서 날로 정화되어 순수해지는 마음에, 자유로워지는 마음입니다. 세상은 우리 마음의 축소판입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나를 탓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그만큼 변합니다. 참으로 부단한 하느님 중심의 말씀공부와 실천의 생활화가 절박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물통 세상을 탓할게 아니라 오물통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우선이요,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마음의 정화와 성화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는 우리>

직장 상사가 하라는 것은 군소리 없이 하지만 엄마에게는 함부로 말하면서 엄마의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조폭의 막말은 꼼짝못하고 들으면서 아버지의 말은 가볍게 넘긴다.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왜 이럽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더 풀이하면 사랑으로 하는 말을 사랑으로 듣기보다 강압으로 하는 말을 두려움 때문에 듣기 때문입니다.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고 흔히 말하는데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걸 뒤집으면 법은 주먹보다 멀며, 사랑은 법보다 멀고 주먹보다는 더, 더 멉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렇다면 하느님은 다른 누구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 하느님보다 주먹을 더 가까이 느끼고 법이 더 가까이 있는 것이며, 사랑의 말보다 주먹의 말을 더 잘 듣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모이고 하느님이십니다. 조폭은 결코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 않고 우리에 관한 관심이 도무지 없습니다.

사실 관심이 없다면 관계도 없는 것이고 관계가 없다면 그것이 제일 먼 것이지요.

이렇게 조폭은 우리에게 관심도 없고 멀리 있지만 우리는 되레 두려움 때문에 주먹을 가까이 느끼며, 그의 말을 듣는데 이것이 다 우리의 미성숙과 약함 때문입니다.

사실 미성숙하고 약한 사람이 사랑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고 요한의 서간은 충고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중요시한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들은 얘기이기도 하고 저도 경험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본당 그래서 전통이 있고 뼈대가 있는 본당에 사제가 새로 가면 그 본당 신자들은 본당 사제보다도 본당 원로들 눈치를 더 본답니다.

그래서 신부가 새로운 사목을 펼쳐도 그리고 사목회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원로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이 달리하기에 신부들이 애를 먹고, 심지어 교무금을 더 내고 싶어도 원로가 적게 내면 그보다 적게 낸다고 합니다.

아무튼 미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만만히 보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는 두려워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합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7,6)

<땀의 순교자가 되자!>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면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두 번째 회칙인 ‘찬미받으소서'(Laudato Si/2015.6.16)는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자는 회칙’입니다. 교황님께서 이 회칙을 반포하시면서, 매년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했습니다.

‘찬미받으소서’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 말하고 있는 외침은, 공동의 집인 지구와 지구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인 피조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외침입니다. 그 중심에 ‘인간의 탐욕이 크게 자리잡고 있고, 이 탐욕을 내려놓자는 회개의 외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 7,6-7)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5.21-23)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악한 것들을 끊어내는 순교자,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땀의 순교자’가 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3)

삶의 우선순위를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으로 돌아가
우리 마음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외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로
마음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마음으로 시선을 돌리니
마음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얽힌 관계도
부족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부족한 우리 마음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마음을 키워 나간다는 것은
순간순간의 우리 마음을
주님과 나눈다는 것입니다.

행복도 기쁨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마음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 마음을
숨기지 않고 내어드립시다.

그것이 정화이며
그것이 소통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주님의 날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Yahoo Mail: Search, Organize, Conqu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