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7장,1-8.14-15.21-2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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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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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손 씻는 문제는 율법이 아닙니다. 오경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기에,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막 지대라 먼지바람이 많고 물이 귀한 곳입니다. 따라서 외출하고 돌아와서나 음식을 먹기 전에 몸을 씻는 것은 위생에 큰 도움을 주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이 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될까요?

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잘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이 존재하고 지켜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죽음의 땅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정신이 아니라 문자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규칙을 더해 가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백성에게 강요합니다. 이 규칙들은 몇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위대한 조상들의 전통’이 되어 백성을 옥죄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백성을 차별하고, 죄인 취급하며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규정과 율법은 그 기본 정신에 따라, ‘죽음의 땅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다가가시어 그들을 살리셨듯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당이나 사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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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가 의롭다고 여기는 것(혹은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더 큰 죄를 지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죄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이 죄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외적인 일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정작 내적인 정결에는 소홀히 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내적인 정결에 소홀히 할 경우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만약 내적인 정결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 나와 성당 공동체에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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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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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12~22:50)

강론

강론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를 따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정·부정 규정 때문에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 말씀은, 악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근본적인 죄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아담은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먹고는 책임을 미룹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러한 핑계와 책임 전가는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기본적인 죄가 아닐까요? 더욱이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피해 숨어 있었지요(창세 3,8 참조). 잘못을 저지르고는 하느님의 존재가 불편해졌기에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입니다.
이후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한 나머지, 들로 데리고 나가 죽이고 맙니다(창세 4,1-8 참조). 이처럼 하느님과 신뢰가 무너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도 무너집니다. 결국,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소외시키게 됩니다.
죄를 극복하고 마음을 정화하려면 제2독서 말씀처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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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신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거기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거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셨습니다.
독서 말씀도, 모세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실천할 때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간청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는 구원 능력이 있으니,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면서, 그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말로 많은 일을 합니다. 설득하고 위로하고 위협하고 강요하는 등 많은 일이 인간의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빈말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더욱이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도 않고, 인간의 힘에 꺾이지도 않습니다. 그 말씀에는 지혜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세상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계속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또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본디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완성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야고 1,21).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