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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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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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손 씻는 문제는 율법이 아닙니다. 오경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기에,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막 지대라 먼지바람이 많고 물이 귀한 곳입니다. 따라서 외출하고 돌아와서나 음식을 먹기 전에 몸을 씻는 것은 위생에 큰 도움을 주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이 왜 예수님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이 될까요?
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잘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이 존재하고 지켜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죽음의 땅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정신이 아니라 문자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규칙을 더해 가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백성에게 강요합니다. 이 규칙들은 몇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위대한 조상들의 전통’이 되어 백성을 옥죄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백성을 차별하고, 죄인 취급하며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규정과 율법은 그 기본 정신에 따라, ‘죽음의 땅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다가가시어 그들을 살리셨듯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당이나 사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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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내가 의롭다고 여기는 것(혹은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더 큰 죄를 지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죄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이 죄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 각자가 외적인 일에 신경 쓰면서 내면의 정결에 대해 소홀히 한 적이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만약 내면의 정결을 등한시한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그리고 반대로 내면의 정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 자신과 성당 공동체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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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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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를 따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정·부정 규정 때문에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 말씀은, 악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근본적인 죄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아담은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먹고는 책임을 미룹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러한 핑계와 책임 전가는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기본적인 죄가 아닐까요? 더욱이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피해 숨어 있었지요(창세 3,8 참조). 잘못을 저지르고는 하느님의 존재가 불편해졌기에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입니다.
이후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한 나머지, 들로 데리고 나가 죽이고 맙니다(창세 4,1-8 참조). 이처럼 하느님과 신뢰가 무너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도 무너집니다. 결국,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소외시키게 됩니다.
죄를 극복하고 마음을 정화하려면 제2독서 말씀처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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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신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거기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거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셨습니다.
독서 말씀도, 모세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실천할 때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간청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는 구원 능력이 있으니,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면서, 그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말로 많은 일을 합니다. 설득하고 위로하고 위협하고 강요하는 등 많은 일이 인간의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빈말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더욱이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도 않고, 인간의 힘에 꺾이지도 않습니다. 그 말씀에는 지혜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세상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계속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또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본디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완성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야고 1,21).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967
9월1일[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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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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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fNH-_uA02o
[오푸스데이 성직자치단 반유성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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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교회 행사를 주도해 나가다 보면 가끔 크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례나 미사의 가장 중심, 핵심, 본질,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한 표현인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언젠가 제법 큰 행사를 한번 주관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더군요.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승인을 받자마자 행사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각 분야의 실무자를 선정해 즉시 실무에 착수했습니다.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것,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행사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1부 전야제, 2부 미사, 3부 친교의 마당… 행사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피드백을 받아보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하느님 체험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행사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끝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저 일만 죽으라고 했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정작 제 안에는 아무 변화도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 안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과로에 찌든 한 영혼이 힘겨워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주객이 전도됩니다. 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적, 사적, 이기적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보다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만 잔뜩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백성의 인도자들이었던 그들은 하느님 보다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법에, 지극히 세밀한 생활규칙에 더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수도회나 교회 안에도 많은 규칙들, 법조항들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을 들으면 보다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규칙들은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질타 당하는 가장 큰 이유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외양은 무서웠습니다. 어딜 가든 율법이란 잣대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율법서를 들이대었습니다. 싸늘한 눈초리, 냉랭한 얼굴, 엄격한 잣대, 호시탐탐 이웃의 실수를 노리는 표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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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음을 빼앗기는 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알 바꿔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음은 원하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자기가 신이라 믿고 소유하고 먹고 이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고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는 일이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에서도 개구리처럼 착해지고 싶었던 전갈이었지만, 정작 수영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기를 태워주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마음으로 자신이 전갈이라 믿고 있으면 아무리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더라도 전갈의 본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믿는 대로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믿으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도 헤어졌는데 빚 독촉도 심해지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표류한 김에 적응하며 사는데 다른 사람 간섭을 안 받고 혼자 사는 삶이 즐겁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섬에서 자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생존에 집중합니다. 김 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보고 그것을 만들어 먹고자 합니다. 그를 지켜보던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방 안에서만 살아가는 김정연이라는 여자가 김 씨를 사진기로 보고는 그 섬까지 짜장면을 시켜줍니다. 김 씨는 짜장면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받으면 간섭 받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어서 결국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허무함과 그 달콤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는 중에 여자 김 씨와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결국 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김 씨도 집 밖으로 나와 남자 김 씨에게 달려옵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섬이 되어줍니다. 갈 곳이 생기자 이제 이전의 자기를 지배하던 섬, 곧 마음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법은 피를 받음으로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줍니다. 자녀는 마음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마음 안에서 살지 않고 부모의 마음으로 삽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고 마음 아픈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세계로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고 조금씩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빼앗깁시다. 그분의 마음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에게 자기 옷을 빼앗겨 아기까지 낳습니다. 나무꾼은 옷을 숨긴 미안한 마음에 선녀에게 옷을 내어줍니다. 선녀도 아이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나무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여 나무꾼을 하늘로 불러 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마음을 빼앗기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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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재형 [umbrella] 23:26 ㅣNo.175565
본당에 목수회가 발족했습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실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커피 머신 water line 교체, 변기 flush diaphram 교체, 친교실 문 Adjustment, 성전 바닥 타일 수리, 잔디밭: 흙 파인 곳 흙 채우기, 여자 화장실 천정 라이트 교체, 부엌 후드 라이트 교체, 부엌 천정 형광등 교체, 여자 화장실 누수 수리, 농구장 보수” 예정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Blower & Power Washer Tune-Up, 성전 문 Adjustment, 성전 십자가의 길 라이트 교체, 성전 천정 라이트 교체, Asian Jasmine 구매 및 설치, 죽은 나무 또는 관목 교체, Top Soil Spreading, 남쪽 주차장 누수 – Water Leak Testing, 놀이터 Boundary – Concrete, 놀이터 Rubber Mulch 교체, 제대 Handicap Ramp, 성전 바닥 Vacuum Purchase, 제구실 누수 수리, 성당 주위 보도 및 외벽 검은 곰팡이 제거, 성당 입구 처마 스테인 제거, 북쪽 주차장 물 고임: Parking Lot Striping, 부지 서쪽 경계선 주위 정리, 농구장 Shade Installation, 새 창고 주위 보도블록 설치” 저는 봐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형제님들은 세밀한 부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찾아냈습니다. 해야 할 바를 알고, 묵묵히 실천하는 형제님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댈러스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이 넘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창고 만드는 일, 벽화 그리는 일, 농구장 꾸미는 일에 함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창고 공사에 함께 하면서 목수회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벽화 작업하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농구장 단장하면서 사도회 형제님들을 만났습니다. 댈러스 성당에 숨어있는 많은 보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역모임, 반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구역 미사, 반 미사를 함께 하면서 교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당에서 멀리 떨어진 구역 교우들의 고충도 알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소홀해진 구역모임이 다시 활기를 찾으니 좋았습니다. 이렇게 구역모임이 자리를 잡으면 쉬는 교우들을 방문할 수도 있고, 주일 점심 친교 봉사도 수월하게 할 수 있고, 9월 22일에 있는 본당의 날 행사에도 많은 구역이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26기 사목회가 임기를 마쳤고, 27기 사목회가 출범했습니다. 26기에는 공석인 자리가 더러 있었는데, 27기에는 모든 분과의 봉사자가 선임되었습니다. 기꺼이 봉사를 맡아 주신 27기 사목회 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열정과 신앙이 충만한 봉사자를 보내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합니다. 구역과 반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 함께 하려고 합니다.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사제관도 수녀원도 성당 밖에 있습니다. 성전 신축할 당시에 비용이 부족했고, 당시는 성당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성당 주변에 건물도 많이 생겼고, 지금의 사제관과 수녀원을 매각하면 건축비용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으면 모임에 참석하기도 수월합니다. 수녀님이 성당에서 기도하기도 좋습니다. 교우들과 소통하기도 좋습니다. 바늘 가는데 실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당에 사제관과 수녀원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2027년은 본당 설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 50주년을 기념하는 성당을 보았습니다. ‘메이플 우드 성당, 퀸즈 성당, 워싱턴 DC 성당, 필라델피아 Holy Angels 성당’이 50주년 행사를 하였습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영적인 준비, 친교의 준비, 전례의 준비, 문화의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먼저 너의 병이나 고쳐라 .” 사제가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먼저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겸손, 헌신, 희생, 나눔,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덧 9월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지난 8개월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남은 4개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하나씩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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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1-8.14-15.21-23: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선과 악이란 사물이나 관습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계명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신명 4,1) 계명과 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이해되는 법을 말한다. 그 법은 생명의 원천이며, 윤리적 압박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유의 원천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법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당신 백성과 대화를 계속하신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편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변질시키고 있다. 오늘 복음의 논쟁 시작은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는 것에 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절).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것은 조상들이 율법 해석으로 만든 규칙들이었다. 이 전통 중에는 모세의 율법에는 없는 많은 규정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선과 악의 척도로 삼고 있다. 조상들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보다도 선악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이사 29,13을 인용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6-7절) 예수께서 전통을 비난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통들이 사람의 계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전통들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명보다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보다는 인간의 헛된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사이적 형식주의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려는 마음도 가질 생각을 못 하고 그냥 전통에 물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나 자신 안에도 이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나에게서 악습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바꾸어 가야 한다. 선과 악은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모든 선택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즉, 인격의 심층부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신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4-15절) 마음 안에, 모든 죄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마음으로 더러워진다.
예수님의 말씀은(21-23절) 무섭다. 마음에서 나오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 인간을 더럽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생활을 발견하고, 인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음식이나 외적인 행동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의 법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고 실천함으로써, 즉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활화하고 실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하느님께로부터는 오로지 선한 것들만 온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오는데 이제 그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현함으로써 능동적으로 구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벌이 되고 말 것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척도는 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태도이다. 실천적인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성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가 되지 않으면, 즉,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러면 신앙 자체가 형식적인 신앙, 바리사이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규정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규정을 어기면 죄가 된다는 것으로 규정 지키기에만 급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이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전통만을 중요시할 때 이웃을 거스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된다. 불결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전통이나 규정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을 더럽히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반성하면서 항상 주님의 뜻으로 충만한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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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들음에 대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실천하면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하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머리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할 때보다, 하느님께서 이것이 바른길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을 따라갈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온갖 좋은 것은 위에서 온다고 하며, 공손히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공손함, 그것은 신명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더 좋고 더 옳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우기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에 순응하는 것이 공손함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느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통은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열왕기 상권 3장에서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청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듣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우리에게는 이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이 더 지혜로움을 인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거나 내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이 더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며 그 지혜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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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