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6장, 7-13절;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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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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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여행을 떠나려고 짐을 싸다 보면 가방이 언제나 작게 느껴집니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챙기다 보면, 어느새 빈 공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놓고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여행 가방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십니다. 여행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이 여정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여행은 ‘머물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떠나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래서 가벼워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머무는 동안 더 가지려고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채우려고 집착합니다. 짐이 가벼우면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나의 울타리, 습관, 행동 방식, 소유와 집착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쌓여 무거워지고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지면 떠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짐 꾸러미를 가볍게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예수님과 함께 떠나야 합니다. 자신을 묶어 두었던 것으로부터,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하였다고 생각한 것들로부터, 그러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면, 또 다른 집착에 허덕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짐을 가볍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 떠나는 길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그 중심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머무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버리고 떠나 봅시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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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성당에 친구들이 있겠지만 주님이 파견하신 형제/자매가 있는지 묵상해보고 이 형제/자매랑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하지 못하였다면 주님이 허락하신 형제/자매와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은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에서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묵상해보고 주님이 어떤것을 나에게 채워주시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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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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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때마다 그런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행여 제자들이 능력에 대한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니고 가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도구로 쓰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숙명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계심을 먼 훗날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베텔에 파견된 아모스 예언자는 자신이 처음부터 예언자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붙잡으시고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고 명하셨기에, 박해와 반대가 두려웠지만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숙명 같은 삶을 견디고 사랑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병든 노부모를 모시고, 장애를 지닌 자녀를 돌보며, 누군가의 잘못을 짊어져야 할 순간도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 지금은 무거운 십자가이겠지만, 부활의 희망으로 바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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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타당하고 옳은 말인 줄은 잘 알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있습니다.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더욱이 남왕국 유다 출신인 그가 북왕국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외치고 있으니 결코 달갑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모스도 본인이 자원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가서 그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하느님께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 모두가 그 말씀을 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청중 가운데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말하면서 많은 이가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말씀은 듣기조차 거북하고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짊어지고 그분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 있는 시대와 사회의 양심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힘이 없고 억눌린 사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 자신의 의사마저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늘 기구한 삶을 살다가 비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신원과 역할 때문에 그들의 삶은 늘 그렇게 고달팠는지도 모릅니다.
아모스도,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와 아마츠야의 경우처럼, 힘 있고 가진 사람의 눈에는 예언자의 외침이 늘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해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예언자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사실 지금까지 제거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양심에 호소하는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먼저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도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에페소서의 말씀대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하느님의 소유로 속량될 것입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