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6장, 30-34절;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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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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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은 어쩌면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준다는 명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는 싸움일 뿐입니다. 테러와의 전쟁, 평화 유지를 위한 싸움도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옳은 전쟁과 싸움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 이래 인간의 탐욕은 전쟁과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역사 속의 전쟁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짓밟으며 경쟁합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고 빼앗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를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 참조)을 행하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쉬고 싶으셨습니다. 쉬시며 허기를 달래고 싶으셨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예수님께서는 쉬실 수도, 허기를 달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피곤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신의 허기를 달랠 빵이 아닌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 시선에서 예수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빵이 필요합니다. 충분하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이익과 욕심에 주의를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가난하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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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내게 맡겨진 소명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자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말씀/복음화/선행 등등)을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현재 내가 속해 있는 그룹에서 필요로 하는게 무엇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나는 신앙적으로 어떻게 쉬며 생활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나는 신앙적인 기운을 어떻게 누구로부터 얻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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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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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는 생산 능률과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산하다 보면 복음의 가치들도 물질적 척도로 평가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은 물질적 평가와 보상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군중은 가난한 이가 부를 얻고, 병든 이가 치유되고, 불의한 재판의 결과가 공정하게 바뀌기를 기대하며, 복음이 세상 속에서 내는 효과를 직접 느끼고 싶어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기대감이 커질수록 복음이 지닌 내면의 가치는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복음 선포는 능률과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평화와 자유의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안에 ‘쉼’을 통해 그것을 깨닫도록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신성한 노동이 고된 노역으로 전락하고, 기쁜 봉사가 피하고 싶은 의무감으로 느껴질 때, 내가 선택한 삶이 잘못된 판단처럼 여겨지고, 희망찬 내일이 두려운 미래가 되는 불안감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 외딴곳에서 쉬면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와 자유, 내가 가진 재물과 세속적 권력이 누군가의 희생이나 나의 위선과 기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으로 갈라져 적대하며 살아가는 현실은 물론, 우리가 지닌 내적 모순을 십자가를 통해 화해시키시어 새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합니다. 흩어진 양들을 이끌어 줄 목자가 세상의 공정과 정의를 이루어 줄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굳은 믿음과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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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첫 번째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많은 경험을 하였지만 피곤하여 지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기쁨이 용솟음치는 살아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시려고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셨는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 군중은 육로를 이용하여 예수님 일행보다 앞질러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연민과 자비와 사랑의 주님!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하고 화답송에서 노래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아픈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등 소외되고 도움이 절실하며 인간적으로 홀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목자가 없어 흩어져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가엾고 측은하게 보일까요? 경제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바라보고 찾아 나서기 때문이 아닐까요?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고 생각되는 시련을 겪을 때, 복음의 군중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몸과 마음이 눈에 보이는 안일과 즐거움만을 찾아 헤맬 때에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올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하다가 지치고, 정의롭고 좋은 일을 하다가 실망했을 때, 또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방황할 때 주님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요? (출저: 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