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5장, 21-24절 35ㄴ-43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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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24.35ㄴ-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35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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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자, 열두 살 어린 소녀. 열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난치병을 앓았고 다른 한 명은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를 마주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에게는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교집합이 생깁니다. 물론 한 명은 예수님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예수님께 손을 댔고, 다른 한 명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손이 잡혔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도 하고 예수님께 붙잡히기도 합니다. 숱한 고생을 하고 많은 의사에게 가진 것을 다 쏟아부으며 열두 해를 보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아픈 딸을 고쳐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그분을 집으로 모시고자 하였지만, 집으로 가는 동안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예수님을 더 수고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던 회당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마주한 상황은 비록 다른 모습이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처지라는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만났습니다.
그러한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적당한 인간적 사고 안에서 만들어진 타당성의 결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는 무모하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그분께서 건네시는 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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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야이로같이 오직 믿음을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보고 환경과 여건을 핑계를 대며 신앙으로 해야될 일을 못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만약 하고 있다면 어떤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사람들은 아픈 아이는 예수님께서 낫게 할 수 있지만 죽은 아이는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35절). 우리는 주님의 치유가 필요한지, 주님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전지전능한 주님인지 듣고만 계시는 주님인지… 편하게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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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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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회당장 야이로는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이 죽게 된 사실이 억울하기만 합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간절하지만, 이미 죽은 딸아이를 뒤늦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십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아버지와 딸, 억울하고 한 많은 두 인생의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남에게 부끄러워 말도 못 하는 하혈 병을 앓는 여인이 병을 치유받으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군중 틈을 헤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별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지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밀쳐 대는 군중의 단순한 호기심의 손길과는 달리 치유를 간절하게 원한 손길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간절함 속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한 인간의 진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우리를 만드셨고, 세상의 불의와 불공정으로 말미암아 깨진 균형을 맞추시려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시어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십니다. 궁핍은 언제나 제 몫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심에서 나옵니다. 한정된 재화를 누군가 더 소유하면 내 주변에 그 누군가가 궁핍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경제적 정의만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생로병사의 모든 문제가 균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의 균형, 사회적 균형, 경제적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병과 슬픔, 차별과 편견, 위선과 교만의 병이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알 것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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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내 목숨 나의 것이니 내 인생 소신껏 마음대로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애원합니다. 피붙이를 낳아 지금까지 키워 왔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들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는 수많은 부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친밀함의 표현으로 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호칭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여자가 ‘딸’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당연히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딸’에게 생명과 행복을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통계 수치에 따르면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건강을 해치는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스스로 정리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존재하여 살도록 만드셨음을 강조하면서, 만물이 창조된 본디 목적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데, 특히 그분의 창조 계획에 따라 우리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따라서 지혜서는 인간이 본디 악하기 때문에 애써 그 본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결코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 본성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간직하면서 살아간다면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부모보다 우리를 더 애틋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본디의 선한 모습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특별히 어리석은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삶을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