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코 1장,7-11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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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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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느님이시다.’라고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마주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늘 함께 있는 보호자처럼 그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십니다. 성자의 강생은 나약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례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동참하는 가장 아름다운 결심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례가 하느님과 만나는 문이라면,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세례는,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성자께서 성부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나약한 우리에게 드러내어 보이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어린아이의 모습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셨듯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늘 함께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세례는 영광이고, 예수님께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하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성부께 순종하시고 예언을 성취하시고자 택하신 겸손의 표양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간인 우리도 주님의 세례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내 삶의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놓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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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2. 내가 이해하는 삼위일체는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영이(삼위일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더욱 일하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고백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무엇이 우리를 겸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어떻게 하면 늘 겸손에 길에 머물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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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의 선풍이 일었는데 그 가운데 근본주의자였던 후터, 메논, 제논 등은 칼뱅이 주도하는 종교 개혁이 권력화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분양받고자 동참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제자로 살고자 신앙의 개혁을 한 것이다. 유아 세례는 부모의 신앙 봉헌식에 불과하다. 성년이 되어 직접 자기 일생을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고백의 결단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진정한 세례성사다.” 유아 세례를 받은 이도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재세례파’라고 하는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주에 정착한 그들을 ‘청교도’라고도 부른다.
그 후손들은 500년 전통을 이어 지금도 신앙 공동체로 살아오고 있다. 그들은 세례를 대단히 중요시한다. 단순한 입교 예절이 아니라 평생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는 투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자도’(弟子道)란 말도 즐겨 쓴다. 스승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이 제자의 길이라는 뜻이다.
세례성사가 입교 예식에 불과하면 자신의 삶이 변화될 수 없다. 세상 물신을 숭배하는 삶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로 변형되는 은총이 세례성사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셨어야 할까?’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의 궤적은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하나를 이룰 때 구원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람은 예수님처럼 하늘의 점지로 태어났는데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투신이 진정한 세례의 삶이며 제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