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코1장 14-20절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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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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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살면서 ‘때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코헬렛은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니네베의 악행을 심판하시려고 요나를 보내셨을 때, 요나는 자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도망을 칩니다. 요나가 생각하기에 니네베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의 달갑지 않았던 회개 선포에 곧바로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의 표지로 자루옷을 입은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은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이 잡힌 뒤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때가 되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음속 깊이 그들이 찾던 인생의 해답을 그 부르심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세속의 행복만을 찾는 사람에게 결코 다가오지 않는 때입니다.
냉담 중인 부모나 자녀들,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대자 대녀들,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싶지만 눈에 거슬리는 동료 신자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내게 상처를 준 본당의 사제나 수도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내 맘에 들고,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나를 인정해 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생각하는 조급하고 이기적인 때와는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흘러 지나가는 시간의 때가 아니라, 당신의 충만함을 보여 주시는 때를 선물하십니다. 물론 그때와 그 시간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그때를 기다리며 믿고 맡기고 사랑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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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복음/묵상/동영상 강의에서) 이야기 해봅시다.
예)   저는 “XXX”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XXX”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상입니다” 조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찾던 인생의 해답을 그 부르심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인생의 해답을 찾은 경험을 이야기 해봅시다. 이 신앙의 해답이 세속에서 주는 행복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에서 나는 주님에게 쓰임 받는 종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마 주님이 나를 부르신게 아니였나?’라고 생각나는 주님의 초대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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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9년 9월 교황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하여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구원과 신앙, 일치와 자비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알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복음의 삶에 초대되어 마음을 연 첫 번째 제자들은 구원과 신앙, 일치와 자비의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통하여 과거의 삶에서 용기를 내어 ‘바뀐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준 위로와 용기는 제자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힘은 현대에 부르심을 받은 우리 또한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화답송에 나와 있듯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게 하고, 하느님의 진리로 이끌며, 올바른 길을 걷게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갈릴래아로, 병자와 허약한 이들 그리고 죄인들을 용서하셨던 곳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 말씀과 함께 걸어가기를 바라시고, 삶의 가장 힘든 곳으로 가서 모든 것을 그분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새로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어쩌면 오늘 제1독서의 요나처럼 우리가 바라지 않는 일을 하라고 초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은 요나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습니다. 요나의 깨달음은 요나 자신을 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 말씀을 통하여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삶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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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021년 나해 연중 제3주일 – 사람 낚는 어부들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 지배받는 나라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지배받지 않으면 악령에 지배받게 됩니다. 하느님께 지배받으면 하느님 나라에 살고, 악령에 지배받으면 지옥에 삽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중국 후베이성. 11층에서 떨어지는 여성을 맨손으로 받아내려던 남성이 있습니다. 펭닝이란 이 남성은 충격에 얼마 동안 쉽사리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청년의 다리는 부러졌고 인대가 손상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성은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펭닝은 정신을 차린 뒤에도 자신의 몸보다는 여성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청년은 말합니다.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아요. 다만 여성분을 구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 이야기를 11층에서 떨어지는 여성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동영상이 있어 소개합니다.
“10층에서는 금실이 좋고 화목했던 부부가 싸우는 게 보였고 9층에서는 밝고 유쾌하고 잘 웃던 남자가 우는 게 보였습니다. 8층에서는 남자들과 말도 하지 않던 여자가 바람피우는 게 보였고, 7층에서는 건강하기로 소문났던 여자가 약 먹는 게 보였습니다. 6층에서는 돈 많다고 자랑하던 남자가 일자리를 찾는 게 보였고, 5층에서는 듬직하고 정직했던 남자가 여자 속옷 입는 걸 보았습니다. 4층에서는 닭살 커플로 엄청나게 사랑했던 연인이 헤어지려고 싸우는 걸 보았고, 3층에서는 남녀관계가 복잡하다던 할아버지가 혼자 지내는 걸 보았습니다. 2층에서는 이혼하고 남편을 욕했던 여자가 남편을 그리워하는 걸 보았습니다.
11층에서 뛰어내리기 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사람마다 말 못 할 사정과 어려움이 다 있었네요. 사실 내가 너무 불행한 건 아니었군요. 내가 보았던 사람들이 지금 나를 보고 있네요. 그들도 나를 보며 자신들은 괜찮다고 자기 위안을 하겠죠.”(출처: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느낄 때」, 감성힐러 JAy, 유튜브)

이 세상에서의 지옥은 아무래도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서 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사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겉만 보고 자신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들이 위로를 얻으려는 방법이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삶이 이렇게 남과 비교하고 힘들어지는 이유는 이 세상의 욕망에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갈 때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았겠고 자신보다 많이 잡고 더 큰돈을 버는 사람을 부러워해야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베드로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자신의 배 밑에 물에 빠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전재용 선장이 참치보다 96명의 베트남 선상 난민을 건져 올렸던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건져 올릴 때 물고기는 더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래서 우울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떨어지는 여성을 구하려다 몸을 다치고도 구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펭닝과 같습니다.
펭닝 주위엔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자신은 자살한 여자보다 행복하다는 위안을 받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또 누군가와 비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사랑이란 힘에 지배받기 전까지는.

며칠 전 바다까지 얼어붙은 추운 날씨에 배에서 일하던 한 작업자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본 다른 배의 한 선장은 긴 막대를 이용해 익수자를 구하려 했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명튜브를 던졌지만 역시 익수자는 그것을 잡을 수 없었고 계속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배에 손짓했지만 보지 못한 것인지 그냥 지나칩니다.
이 남성은 한참을 망설입니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바다에 뛰어듭니다. 익수자의 몸을 바치고 한참을 물에 떠 있던 남성은 해경에 도착한 뒤에야 물 위로 함께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엔진을 수리하고 있던 김인학 선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려주소, 살려주소.’ 하는 소리가 나서 뛰어나오니까, 사람이 곧 (물속으로) 내려갈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제가 생각도 못 하고 (바다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김 선장은 어깨 수술을 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물속에 바로 뛰어들지 못한 것에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구조된 남성은 김 선장에게 고맙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도와주는 게 대단하신 것 같고, 저도 본받아서 그런 일이 생기면 사람을 도와가며 살도록 하겠습니다.”(출처: 「얼어붙은 겨울바다에 ‘풍덩’ 익수자 구한 선장」, UBCUHDTV, 유튜브)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함하여 우리를 구하신 분이십니다. 생존 욕구에 지배당하지 않고 이웃의 영혼을 구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저절로 물속의 고기는 관심이 줄어들고 함께 빠진 사람들에게 눈이 더 갑니다. 그리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전 삶이 지옥이었고, 이것이 하느님 나라구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될 것입니까, 물고기를 잡는 사람으로 남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을 잡다 보니 물고기도 걱정 없이 잡힌다는 것입니다. 전재용 선장은 베트남 96명을 구해주어서 직장을 잃었지만 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엔 조금 고생했을 수 있겠으나, 하느님께서 지켜주셨고 나중에는 그들이 미국으로 초대하여 큰 영광과 보답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물고기 잡는 어부입니까, 아니면 사람 낚는 어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전삼용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42
1월21일[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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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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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dE65fafulk
[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도회 유재선 안드레아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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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시는 분들 참 많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동료, 연인, 친구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일찌감치 퇴직하셔서 매일 집에 계시는 영감님들 때문에 상습 편두통에 시달리는 할머님들 위해 제가 단골로 건네는 멘트가 있습니다.

“영감님께서 안 계신다고 생각하고 한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영감님이 계셔서 마음 든든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디 영감님과 함께 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까칠한 사춘기 청소년 한명 양육한다고 생각하시기를..”

아마 바오로 사도께서도 관계가 힘든 부부들 대상으로 신앙 상담을 많이 해주셨던가 봅니다. 오늘 두번째 독서에서 그런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코린토 1서 7장 29~31절)

인간 관계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이 우리를 인간다운 삶과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나 부동산, 귀중품이나 소장품들…

그런 세상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과욕은 깊은 상처나 좌절을 남깁니다. 때로 가장 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는 그 대상들로 인해 우리네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비참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어느 정도 살만하면 대폭 내려놓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욕심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걸고 쥐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실상은,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머지 않아 순식간에 형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임을 잊지않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올린 이미지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고수해온 정치적·사상적 성향 역시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만의 영역, 나만의 틀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수십년 전에 받은 상처와 수모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말이 쉽지 놓아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때,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할 때,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서로 다투며 소송을 걸게 되지요.
소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매우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가지지 않습니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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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점점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 작은 풍파나 고통에도 일희일비하고 울부짖는 오늘 우리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요약하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들 다 지나가고 다 떠나가니, 그러려니 하고 마음 크게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엄청 대단해 보이는 것들,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니,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작아지는 것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외로워지고 허망해지는 것도 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점점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겠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한쪽 발은 지상에 두지만, 다른 한쪽 발은 천상으로 옮겨가야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이미지를 놓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고수해온 정치적·사상적 성향 역시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만의 영역, 나만의 틀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과 비참함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수십 년 전에 받은 상처와 수모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떨치기 어렵습니다. 말이 쉽지 놓아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좀 더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때,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할 때,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서로 다투며 소송을 걸게 되지요. 소유는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매우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물을 가지지 않습니다.”(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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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3)출장뷔페가 차려진 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결혼식 끝나고 의례 출장뷔페가 차려진 홀로 안내가 되지요. 그리로 가시면 제일 먼저 어떤 음식에 손이 가십니까? 갈비를 수북이 담아 와서는 환한 얼굴로 신나게 먹어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조금은 서글퍼지더군요.

저 같은 경우 요즘 ‘뜯는 작업’이 필요한 갈비나 고기류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제 눈에 들어오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쌍하게도 호박죽입니다. 집에서도 늘 먹는 밥이나 김치 정도입니다.

한때 그렇게 정신없이 좋아하던 양념갈비였는데, 한때 그렇게 먹고 싶던 삼겹살이었는데, 이제 별 관심도 없습니다. 이거다 하는 맛도 느끼지 못합니다. 절차가 복잡한 음식은 싫습니다. 그저 간단히 한 그릇 먹는 게 최고입니다.

제가 요즘 영적생활만 너무 강조하다보니 그런가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제 입이 고급으로 변했나, 생각해보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그저 맛있는 것, 특별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시시해졌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결혼식 뷔페석상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것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우리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세상 것들이 대부분 지닌 한 가지 특징은 유한성입니다. 돌이켜보십시오. 한때 우리가 그토록 혈안이 되어 찾아다녔던 세상의 재미들이 세월과 더불어 이제는 우리들의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한때 목숨조차 걸 정도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던 대상들이 이제 별것 아닌 것들로 전락되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인 저이기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요즘 제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런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어찌 그리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 아이가 아픈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활짝 웃으며 일어서는 것을 볼 때면 보*탕 몇 그릇 먹는 것보다 훨씬 기쁩니다.

한 아이가 악습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제 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3만 원 짜리 뷔페 10번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기분 좋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추구해야 될 보다 항구한 대상, 보다 차원 높은 대상,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께서 남겨주신 복음이며, 복음의 핵심정신인 사랑입니다.

그분께서 즐겨하실 영적생활입니다. 영혼에 우위성을 두는 삶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만날 때 마다 새롭습니다. 그분께로 돌아갈 때 마다 뭔가 색다릅니다. 그분의 복음 역시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펼칠 때 마다 복음의 모든 페이지는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할 대상, 마지막으로 돌아갈 대상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입니다. 희망입니다. 구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무질서한 향락의 세계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우리만큼은 늘 단정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나날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 첫 사도단에 가입한 제자들의 성소 여정을 묵상해봅니다. 제자들은 어제까지 지녀왔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떨쳐버려야만 했는데, 그것은 꽤 큰 부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총체적인 삶의 전환을 당부하셨습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길, 검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인생을 새로이 시작해야만 했던 제자들은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모험을 꺼려합니다. 반면에 기존의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안정된 생활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안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기를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또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여행길을 떠날 것을 요청하십니다. 매일 매 순간 변화될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 과거의 생활방식을 탈피한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옛날 사도들처럼 지난 과거를 주님 자비에 모두 맡기고 다시 한 번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따라나서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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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n577ly08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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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이웃의 행복을 위해 멈추지 않고 도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도대체 ‘복음’은 무엇이고 ‘회개’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여지려면 회개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회개는 이전의 행복에서 새로운 행복으로의 선회를 의미합니다.

그 예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첫 제자로 뽑으십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라고 하시고,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라고 하십니다.

‘자이언 클라크’는 하반신 없이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당뇨였고 감옥에서 아이를 배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보육원에 맡겼고 아이는 멸시와 학대, 절망과 우울증에서 커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보육원에서도 자이언을 원하지 않아 열 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삶을 바꿔준 한 권의 책을 만납니다. ‘카일 메이나드’의 『핑계는 없다』(No Excuses)입니다. 카일은 손발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그를 매우 엄하게 키웠습니다. 무언가 할 수 없다고 여기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 하는 걸 다 시켰습니다. 카일은 모든 스포츠를 섭렵했고 심지어 격투기 대회에도 출전하였습니다. 레슬링으로 고등학교 4학년 졸업반 때 36승을 기록하고 전국 12등을 달성했습니다. 이에 멈추지 않고 킬리만자로와 아콩카과와 같은 높은 산을 오르며 손발이 없어도 끈기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은 자이언 클라크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초등부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둬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레슬링부를 찾아갔습니다. 훌륭한 코치를 만나 생애 첫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실력 차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 ‘No Excuses’(핑계는 없다)를 새기고 지금까지 하던 운동량의 두 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첫 2년 동안 치른 경기에서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러다 3학년부터 자이언은 다시 승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회개하면 뒤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패배자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 살던 삶이 지옥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처음에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와 교회에서 키울 때 한 달 정도 지나면 그 아이들이 다시 길거리로 나가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박 목사는 그들이 몇 년 동안 갈아입지 않고 입고 있었던 냄새 나는 옷을 입어보라고 합니다. 그들은 토악질하며 옷을 입고는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박보영 목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회개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뒤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돈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부럽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참 행복이 나를 행복하게 함이 아니라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함으로써 내가 행복해지는 삶임을
알았습니다. 이웃의 영혼을 구하고 성장시키는 것보다 더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는 바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따라나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혼다 그룹 창립자 소이치로 혼다는 “꿈을 가져라. 끊임없이 도전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마라.”라고 권합니다. 그 꿈이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회개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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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서 한국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습니다. 자막은 영어로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았는데 미국에서 한국영화를 영어자막으로 보니 조금은 생소했습니다. 한국영화 ‘노량’도 곧 개봉한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도, 노량도 역사적인 사건에 재미를 더한 영화입니다. 서울의 봄은 45년 전의 사건이고, 노량은 426년 전의 사건입니다. 서울의 봄에 저는 서울에 있었지만 노량해전은 제가 태어나지 않았던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봄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과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권력을 얻으려고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이 승리했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얻어 호사를 누린 사람들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부당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애국심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생 갈 것 같았던 권력도 10년이 못 되어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백담사로 유배를 가야 했고, 내란 음모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서울의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몰입감이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걸었고, 눈먼 소경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치유되었고, 죄인들은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자비를 베풀면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쉽게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의 봄은 오지 않았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없앨 음모를 꾸몄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끝났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삼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는 놀라운 소문이 돌았습니다.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군인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들풀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두려움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제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에페소, 고린토, 갈라디아로 봄은 퍼져나갔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도 봄이 시작되었고, 240년 전에 조선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봄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내 마음의 봄에는 꽃이 핍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화사한 봄이 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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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4-20: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께서 네 명의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계속되지만, 오늘의 주제는 부르심보다 구원을 위해 회개하라는 초대에 있다. 그 기회는 놓쳐버리면 사랑과 생명으로 개방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영원히 잃어버릴 수 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즉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동정의 가치를 주님께 대한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일치하게 하는 것임을 제시한다.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가치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벽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동정자라는 것은 하느님께만 의지하기 위해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유희에서 눈을 돌려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것은 이제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풍요성은 그것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때가 차다.”(1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시간 속에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함으로써 그때를 완성해 주심을 의미한다. 이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때이다. 연대기적 시간(Chrόnos)이라 하지 않고 구원의 때(Kairόs)라고 한다. 즉, 의미로 가득 찬 시간이며 우리의 구원과 멸망을 가늠하는 시간이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바로 이 순간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구원으로 가득 찬 때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15절)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것은 강생의 신비를 통해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써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이미 전해주고 있고 그 결과 이 세상 모든 것이 죽음까지도 그에게 복종하게 될 때(1코린 15,27-28 참조), 하느님 나라의 통치권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이미 들어와 있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그곳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밖에 머물러 있든지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하느님의 나라가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으로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그 하느님 나라에 동화할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한 모든 요구에 응답할 수 있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하신다. 회개하고 믿는다는 두 개념은 내용상으로 다 같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이 새로움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영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정신세계의 변화, 즉, 우리 자신의 가치 기준의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이성의 범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마태 5,3.10 참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논리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일 때만이 가능하다.

“복음을 믿어라”(15절)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겨 그분의 구원과 생명과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복음을 통해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체험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분의 가르침뿐 아니라, 당신의 현존을 통해 실현하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처음부터 항상 살고 기록해야 할 영원한 복음이시다.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며 그분을 닮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8절)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절박하게 요청되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신속한 응답의 표본이 바로 첫 번째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부르심이나 응답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선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아무런 미련도 남겨놓지 않은 그러한 모습이다. 그들은 과거를 떠날 줄을 안다. 가족까지도 이차적인 문제가 된다. 그들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있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 제자들의 부르심의 사화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변화하고 진정으로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선택의 순간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려 나를 위해 다시 호숫가를 지나가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때 우리 자신의 변화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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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주일 학교 아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교리 교육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히 묵주 기도를 하는 곳이에요. 영원히 십자가의 길을 하는 곳이고, 영원히 미사를 드리는 곳이에요. 영원히 하느님 말씀을 듣는 곳이고, 영원히 교리를 배우는 곳이에요.” 그러자 한 아이가 “아이고.” 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기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였더니, 아이들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제가 아이들에게 예로 들었던, 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미사, 하느님 말씀, 교리,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미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여야 한다는 신앙의 분명한 목적의식도 잃어버린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저 교우들과 만남에서 얻어지는 기쁨만을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적으로 느끼며 미사에 나옵니다.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는 이유도 잃어버리고, 미사와 복음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는 기쁨도 느끼지 못하며, “하느님을 믿고 있다.”라고 말하는 교우도 많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처럼 세상은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삶의 모든 습관에서 떠나, 하느님께 돌아서는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하는 삶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한 요나 예언자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선택을 한 것처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회개의 삶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신앙생활은 복음을 믿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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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4-20)

“때가 차서”는 “때가 되었다.”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이 세상 근처 어딘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의 날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는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종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심판을 잘 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실, ‘회개’와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회개할 것입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들어가게 될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 하루 종일, 또 영원히 기도만 하고, 성가만 부르는 곳인가? 그런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유치한 생각입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으니, 그 나라가 어떤 곳일지는 막연하게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지상에서의 신앙생활이 그대로 똑같이, 영원히 연장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온갖 억압과 압박에서, 또 온갖 두려움과 슬픔과 아픔에서, 또 온갖 미움과 갈등과 집착에서,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해방되는 곳, 그래서 순수하고 참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만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 종일 기도만 하는 것이 기쁨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그런 나라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이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를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성전이 없다는 것은, 전례가 없다는 것이고, 기도도 성사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제자’ 라는 말과 ‘신앙인’이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제자’ 라고 표현하든지 ‘신앙인’이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너희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 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내가 너희에게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도의 인생’을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도로 삼겠다.”라는 뜻이기도 한데, 정식으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일은 나중에 하셨기 때문에,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그들을 사도로 뽑으시겠다는 것을 미리 예고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라는 말은, 여기서는 “물속에 빠진 사람을, 즉 죽음 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 건져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낚는다.’라는 말은 곧 ‘구원한다.’ 라는 뜻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느닷없이 부르심을 받고, 얼떨결에 응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버림’과 ‘따름’은 시작 단계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계속 배우고, 계속 훈련받았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낚아야 할(구원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그들 자신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은 ‘내가’ 앞장서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뒤를 따라오라.’고 권고하는 활동입니다. ‘앞장서다.’는 ‘모범을 보이다. 먼저 하다.’입니다. 먼저 신앙인이 된 내가 잘못된 길을 가면, 나도 망하는 것이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망하게 만드는 일이니 그 죄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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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경빈 알렉시오 신부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시며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시작되었고, 그 선포는 회개의 선포였습니다.

어쩌면 너무 많이 들어왔기에 무감각해질 수 있는 말씀입니다만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이기에 새겨야만 하는 선포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예수님의 선포를 새겨봅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은 회개를 선포하십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회개란 하늘 나라로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은 회개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삶의 방향을 영원한 하늘 나라로 잡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위해 살던 삶에서 하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못들어 본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하라는 말을 듣는다고 회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 회개를 선포해야 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며 회개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 선포가 힘을 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만나는 요나 예언자가 그렇습니다.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그렇게 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시키신 대로 요나는 외쳤을 뿐인데 사람들이 회개를 합니다. 요나 예언자의 인품이나 성덕이 뛰어나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선포되는 말에 힘이 실리려면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셔야 하고 하느님께서 시키신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 선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우리는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며 하느님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마음에 잘 새기고 살아갑시다. 그러면 삶의 방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잃은 이웃에게도 이것을 알려주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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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용우 베드로 신부님]

<거룩한 독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하느님 계시의 초대에 대한 응답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계시된 진리인 성경을 모르면믿음이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하면 신앙도 그러합니다. 역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면 신앙도 자라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우선,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거룩함’은 ‘구별됨’을 뜻하지요.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여느 때와는 달리 집을 치우듯, 하느님 말씀을 읽을 때도 공간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내 공간에 ‘하느님 말씀’을 위한 구별된 공간을 마련하는 겁니다(책상, 기도상 등).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24시간 중, 하느님께 봉헌할 귀한 시간을 저마다 따로 마련합시다.

다음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성령 청원 기도를 바칩니다. <성경을 읽기 전 기도문>을 바쳐도 좋습니다.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성경 말씀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눈으로 보든, 소리 내어 읽든, 손으로 필사를 하든, 이 모든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 위한 일입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정해진 분량을 읽습니다. 읽고 또 읽습니다. 잘 모르는 단어나 상황은 표시하고 찾아가며, 또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가며 읽습니다. 읽을 때는 내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성경 본문이 그 자체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져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은 뒤에는 묵상을 합니다. ‘성경 본문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며 말이지요. “너 자신 안으로 다시 들어가라. 사람의 내면에 진실이 머문다”(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며, 묵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읽으십시오. 여러분 삶의 여정이 어땠는지 여러분의 내면을 읽으십시오.” 말씀과 함께 각자의 삶을 읽는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시선’을 선물로 받고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시선, 회개해야 할 내용, 새로운 결심 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관상’이라 합니다.

예를 들면,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한 그릇이 자식을 향한 배고픈 어머니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으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행동하는 것, 기도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전통 안에서의 거룩한 독서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지침」 29항) 이 거룩한 독서의 과정은 우리 소공동체의 <말씀 살아가기>에도 잘 녹아들어 가 있습니다.

요나의 외침을 듣고 곧장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섰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새로이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삶을 시작해 봅시다. 사랑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좋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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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익빈 액벨트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찬미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다음 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라는 단어는 ‘가던 길을 바꾸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의 내 삶의 방식과 길을 뉘우치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의 잘못과 죄를 바라보고만 있으면 회개하기가 힘듭니다. 회개는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고 기대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좋은 성적과는 인연이 없어 늘 반에서 중간만 하던 학생이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문제의 요점을 잘 짚어내는구나, 공부에 소질이 있어!” 공부 칭찬이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던 그 학생은 그날 선생님의 말씀이 계기가 되어 소홀히 했던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학생이 공부하고 노력하게 된 것은 바로 지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생님의 관심과 칭찬 덕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혐오하거나 자학하거나 반성하는 것으로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고, 내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깨달으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하여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건네시며 당신에게로 초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은총 안에서 하느님 사랑 초대를 받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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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 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지오디가 부른 <길>이라는 곡입니다. 이 노래는 삶이라는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 즉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는지, 이 길을 왜 걸어가야 하는지,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셨나요? 아직 못 찾으셨다면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 함께 그 답을 찾아가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신앙의 길, 구원의 여정을 걷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구원의 여정을 걷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는 일입니다. 자신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저 남들보다 빨리 가는데에만 신경쓰다보면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먼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를 확인하고 삶의 방향을 똑바로 잡아야 합니다. 혹시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방향전환’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교만에서 겸손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집착에서 나눔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독선에서 배려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고집에서 순명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요나 예언서에 등장하는 니네베 사람들이 그랬지요. 그들은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는 요나 예언자의 말을 듣고 그 동안 행해왔던 잘못들을 즉시 중단했습니다. 단식을 선포하고 자루옷을 입는 등 재계를 실천함으로써, 악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잘못된 길에서 마음을 돌려 하느님을 향하자, 하느님께서도 그들의 죄악을 보고 실망하여 등을 돌렸던 당신 마음을 다시 그들에게로 되돌리셨습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려던 원래의 계획을 파기하시고,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이 무능하거나 혹은 줏대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하느님은 괘념치 않으십니다. 당신의 뜻은 그들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지, 그들을 벌주고 멸망시키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멸망과 심판을 예고하신 것도 진짜 그렇게 되기를 바라셔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고 행한 이들만이 구원받을 기회를 잡게 되는 겁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어렵사리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린 우리가 하루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구체적인 실천사항과 목표를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기로 다짐했다면, 그대로 가만히 서 있을 게 아니라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여 그분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듯, 주님과 한 배를 탔음에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실천이라는 노를 젓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신앙이라는 배는 유혹과 시련이라는 세상의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깊은 절망과 멸망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부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여 그분 뒤를 따른 것도 그래서입니다. 가장 처음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다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아버지마저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에게 그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그런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했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했다는 뜻입니다. 모든 희망을 주님께 두고, 그분의 희망을 곧 나의 희망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버지를 배에 버려두고 떠난다는 것은 믿음 안에서 주님과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혈연’과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애착마저 과감하게 끊어내겠다는 결단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그로 인해 큰 슬픔을 겪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까지 받게 되겠지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야만 하지요.

주님은 그렇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욕망을 절제하고 끊어내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하지만, 우리 삶이 진짜 힘들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욕망에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갈 때가 그랬지요. 그들은 자기보다 더 많은 물고기를 잡는 이를, 큰 배를 소유하고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며 떵떵거리고 잘 사는 다른 어부를 부러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십니다. 물고기를, 욕망과 집착을 낚는다면서 오히려 그것들에 얽매이는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 사람을, 삶의 참된 의미와 기쁨을 낚는 행복한 삶으로 초대해주신 겁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삶의 참된 의미와 기쁨을 깨닫고 나면, 물고기나 낚는 세상의 일은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남과 나를 비교할 일도, 상대적 박탈감과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할 일도 없이 주님 사랑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주님은 그런 복된 삶으로 그 어부들을 부르셨고,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이지요.

주님의 뒤를 따르며 그 복된 삶을 누리려면,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사도로 변화되려면, 쓸 모 없는 것, 해로운 것은 과감하게 내버리고 정말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분들이 이 식별과 선택을 제대로 못하십니다. 이른 바 ‘님도 보고 뽕도 따고’식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야 함을 알지만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이익 또한 포기할 수 없어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그런데 계속 그런 식으로 주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구원의 여정을 마치기도 전에 다리가 찢어져 모든 걸 잃고 말겠지요.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데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지금 즉시, 가차 없이 버려야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그물’과 ‘배’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두려움과 걱정을 버려야 합니다. 나태함과 안일함을 버려야 합니다. 우유부단함과 비겁함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고집과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버리고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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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종종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빌려 보곤 했습니다. 형제가 육 남매나 되기에 만화가게에서 책을 보는 것보다 빌려 보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보다가 화날 때가 있습니다. 내용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긴장하며 만화책을 보게 되는데, 누군가가 어느 인물의 얼굴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범인’이라고 적어 놓은 것입니다. 소위 ‘스포일러’를 한 것입니다. 결과를 알고 나면 이 만화책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만화책을 긴장하며 읽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찢어져 있는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으니 만화책 보는 재미가 역시 떨어집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미래를 미리 알면 어떨까요? 사실 우리는 미래를 미리 알면 행복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오늘의 운세’ 같은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드는 삶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삶이라면 과연 재미가 있을까요? 또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일 때, 이 시간이 훌쩍 지나갔으면 하지요. 이렇게 시간이 지나간다면, 이 역시 재미없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알려는 노력보다는 지금에 충실하도록 더 힘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고통과 시련 역시 나에게 중요한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면서 피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시간이 나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삶도 사랑해야 할 삶이며, 지금에 충실할 때 멋진 미래가 내게 주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때가 찼고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주 ‘나중에~~’라고 말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뒤로 미루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결정적인 순간 역시도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시간이 가까이 왔기에 우리 모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지금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기쁜 소식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보다 더 깨끗한 상태, 바로 회개해서 주님의 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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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마르코 1,14-20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6-17)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라네

일터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노동자라네

가족에게 헌신하는 엄마아빠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돌보는 엄마아빠라네

꾸밈없이 해맑은 어린이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밝히는 어린이라네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북돋우는 젊은이라네

여태껏 세상을 돌본 늙은이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품는 늙은이라네

오롯이 제 몫 다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보시니 이제 그들은
사람을 살맛나게 하는 사람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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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서 부르시면>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은 일상 안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응답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시간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먼저 시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님께서 부르시면‘나’ 달려가지요.
하던 것 멈추고, 있는 것 버리고……
님께서 부르셨으니‘나’ 응답하지요.
두려움 버리고, 망설임 없이,
임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예’하며… -홍요한-

예수님께서는“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마르1 ,18-19).

소중한 생계 수단인 배와 그물을 선뜻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를 남겨둔 채 따라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가진 바를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친교를 나누었던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사람들에게 매력 주었습니다(사도 2,47). 아마도 그들의 발목을 잡는 복잡한 계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따라보자! 그들은 따름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기쁨,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버렸기 때문에, 낚인 것이 아니라 낚였기 때문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사람에게 ‘성당가자’할 때 어떤 매력을 줄 수 있을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온 것이 바로‘기쁜소식’, 복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임금이 되시어 당신의 주권을 펼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주권은 권력을 마구 휘두르거나 군사적, 물리적 강력한 힘과는 다릅니다. 그분의 강력한 힘은 자비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자비가 충만한 상태, 곧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고통을 없애주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시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그 사실을 알리는 것 또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병고와 악령과 같은 악한 세력의 속박에서 해방해 주심으로써 강력한 하느님의 자비가 이미 당신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데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생각을 바꿔라. 불의한 기존 질서를 따르지 말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태의연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 통독을 통해 가르침을 듣고, 성체 조배를 하며 그분 안에 머무르고, 신앙의 기쁨을 선포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 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를 남겨두는 것은 편안함과 안전, 기득권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미련 없이 떨쳐 버리고 앞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사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루카9 ,6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3-24)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것은 좁은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더운 여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래요.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를 모르는 것은 그 한 가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갇히면 다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예수님의 잣대로 나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내려놓는 만큼 주님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삶의 현장에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음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당신의 뜻을 실천하길 원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그분 마음에 드는 답을 해야 하겠습니다. “일단은 따라보자!” 매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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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悔改)의 여정, 귀가(歸家)의 여정>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자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20일에 매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낼 것을 선포하였고, 교회는 이날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1월18일부터 1월25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까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일치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일치주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로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가난도 아닌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빛인, 영원한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말씀공부와 실천뿐임을, 평생 주님의 학인이, 말씀의 학인이 되어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을 정의하면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오늘 말씀의 주제도 회개가 중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꿈도 실현되며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꿈이 있어야 삽니다. 꿈이 없으면 살아있다 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 있어야 힘도 샘솟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을 희망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꿈중의 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 꿈이요, 예수님이 평생 추구했던 바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하느님의 꿈쟁이였던 것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꿈은 예수님의 평생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겨울철 1월이 되면 생각나는 26년전 써놨던 “봄꿈”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화장실에 들렸다가 창문밖 하얀 눈덮인 언덕을 보며 떠올라 쓴 글입니다. 이 시를 써놓고 그해 겨울은 참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봄꿈이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꿈,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와 더불어 24년전 “별꿈”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꾸며 잠못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을 상징하는 별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화두이자 평생꿈이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 나라의 꿈의 실현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회개를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예수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현재성을 띄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오늘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 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입니다. 하늘 높이 나뭇가지들 올라갈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이치와 같습니다. 참으로 진짜 꿈과 희망의 이상주의자일수록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시한 참된 영성가들은 모두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 나라가, 결코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 또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어부 네 사람을 부르심으로 현실화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나라 꿈의 현실화입니다.

복음의 네 제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공동체인 여기 수도공동체도, 우리 신자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도 역시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이들 형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이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 중심의 제자공동체,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예수님의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할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제1독서의 요나입니다. 요나의 회개에 선포에 즉각 응답하여 살아난 니네베 주민들입니다. 이들의 전격적 회개가 회개의 모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부였다가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이들이 전격적으로 주님을 따라나서는 모습이 그대로 니네베 사람들을 연상케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응답보다 더 좋은 회개의 표현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갈릴레아 호숫가에 살던 네 어부들이, 또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삼 부르심의 은총은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만약 세례로 부르심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은 정말 부질없는 상상인 것이지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회개는 바로 전격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한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중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충실히 한결같이 따를 때 하느님의 나라 꿈도 더욱 현실화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제가 즐겨 일컫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회개의 시스템같은 하루 일과표의 중요성 강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의 시스템 같은 기도와 일이 균형을 이룬 일과표에 충실함이 우리의 성소를 굳건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 기여를 하는지 요즘 깊이 깨닫습니다.

비단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공동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기도와 일이 균형잡힌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의 준수입니다. 참으로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꿈의 현실화에 이보다 더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귀가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여기 지상의 장소가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잠정적으로  지상에 머무르는 순례여정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보면 회개의 여정이자 아버지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중인 순례자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와 더불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고맙습니다. 회개의 여정에,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상 삶에 집착하지 말고 참으로 초연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래야 참으로 너그럽고 관대하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처럼” 살자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니 담아둘 것은 담아둬야 합니다. 이건 위선이 아니라 고귀하고 품위있는 삶의 절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아파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슬퍼도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자취없이, 흔적없이, 가볍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매임없이 자유롭게 무공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내고 살것입니다. 바로 현실에 무관심하라는 것도, 현실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라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맑은 의식으로 깨어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수렁에,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순례자로서 회개의 여정에, 귀가의 여정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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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때가 찼습니까? 아직 덜 찼습니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저에게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즉시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기쁜 소식이 아닌 사람도 즉시 회개하라!

사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그 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죄입니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 그 생활을 하는 겁니까? 자기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사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는 행복 정도를 삽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행복을 사는 이유가 불행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정말 불행하기에 불행하지 않다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행복이란 만족 상태이기에 행복하지 않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만족하는 것도 궁색하지만 행복의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입니까? 이 정도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은 현명이지만 불행하지 않은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고 그래서 현명하고 자기 인생에 책임감이 큰 사람은 즉시 ‘행복 회개’ 다시 말해서 불행한 삶을 회개하고 행복을 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일반 사람도 이러해야 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더 그래야 합니다. 일반 사람보다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면서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일반 사람처럼 살았을 땐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행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믿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태중 교우였지만 한동안 다른 철학과 다른 종교를 기웃거린 사람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왜 굳이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방황하고 편력을 한 십 년 하다가 그리스도에게서 답을 찾았고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교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저의 인생철학은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가 아닙니까? 왜 행복하지 못하고 왜 행복에 조건이 있습니까? 무조건 행복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만 내게 있다면.

하느님 나라가 없는 것이 불행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하느님 나라가 자기에게 아무리 가까이 왔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시 얘기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닌 사람, 그래서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주님께서 부르셔도 즉시 따라나서지 않는 사람은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의 니네베 사람들은 즉시 회개한 사람들이고,
복음의 첫 제자들도 주님의 초대에 즉시 응답하여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미뤄서는 안 되고 즉시 뭔가 해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의 때가 찼습니까? 나의 행복의 때는 아직 덜 찼습니까?

행복을 미루겠습니까? 즉시 행복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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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6)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마르1,14-20)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시는 말씀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마르코복음 1장 16절의 말씀은 갈릴래아에서의 첫 전도인 ‘예수님 공생활의 첫 일성(一聲)’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성(現在性)’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재는 멈춰진 현재가 아니라,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현재이며 자라나는 현재’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나라’입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의 나라’인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바로 죽음 저 너머에서 맞이하게 되는 ‘아직인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늘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는 것,
미래의 시간인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는 것,
구체적으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인 나의 영과 육의 움직임이 예수님에게로,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
매순간 그렇게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의 참모습’이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天國)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오늘 두 독서는 ‘회개가 곧 사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복음이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구원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이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의 길로 부르십니다. 우리도 이 부르심에 곧바로 그리고 기쁘게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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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yqCalnzQJ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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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모든 회개는
그 자체로
복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이
회개의
복음입니다.

회개는
그 자체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내포합니다.

이렇듯
회개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건강한 인격의
기쁨입니다.

우리자신을
묶어 왔던
불행한 수 많은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회개의 실천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나누고
복음을 나누면
더 커지는
우리들 삶의
기쁨입니다.

회개도
사랑도
기뻐야 합니다.

회개와
함께하는
참된
기쁨입니다.

복음은
삶의 기쁨을
되찾아줍니다.

기쁨으로
살게하시는
기쁨의
주님이십니다.

말씀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돌아가는
복음의
자녀들입니다.

복음의 자녀들은
새로운 기쁨인
회개로
매순간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만난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
돌아가는
이 벅찬 기쁨이
회개하라는
하느님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회개이며
복음을 믿는
우리들의
참기쁨입니다.

회개를
믿고 따르듯
예수님을
따릅니다.

기쁜 회개로
주님을 따르는
복음으로
가득찬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영원한 것은
기쁜 회개이며
기쁜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을
기쁘게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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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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