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장 12-15절;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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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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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광야는 풀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입니다.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땅입니다. 그렇지만 광야는 박해받거나 쫓기는 이들에게 피신처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광야는 어디입니까?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세상의 편함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어느 깊은 산속에서 홀로 자신을 성찰한다면 그곳이 광야입니다.
요나 예언자에게는 물고기 배 속이 광야였습니다.성전에서 홀로 기도한다면, 성전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수련하시던 중에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아마도 사탄은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신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유혹했을 것입니다(마태 4,1-3 참조).
우리는 능력이나 시간이 있어야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나의 배고픔부터 해결하겠다는 유혹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잘 극복하시고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철저하게 광야를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번 사순 시기 동안 광야를 체험하며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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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지나고 보니 “사탄의 유혹이 아니였나?”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난 그 유혹에 넘어갔는지, 반대로 유혹에서 벗어났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유혹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에서 나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하지 못하였다면 어떤 노력을 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할 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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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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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의 무대는 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머무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광야를 향하여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 속에서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십 년간의 유랑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광야 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렸으며, 하느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다가도 하느님께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였던 ‘노예 집단’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들은 광야라는 그 척박한 공간에서 조금씩 성숙합니다.
광야는 그런 의미에서 성장과 성숙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노예 신분이었어도 모든 것이 보장되고 안정적인 이집트에서는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기는 아니어도 빵이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익숙하고 안정된 이집트에서 벗어났을 때,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 백성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광야는 편안함보다 불편함을, 생명보다 죽음을, 희망보다 절망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불편함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절망 가득한 신음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은 신앙의 성숙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이 피곤하고 피하고 싶은 시간이 아닌, 머물러야 하는 은총의 시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3770
2월18일[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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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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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3HoCn_N_Bm8
[청주교구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 집전(성모 꽃마을호스피스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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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갑시다!>

언젠가 성지 순례 때 잠시나마 광야 이곳저곳을 걸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즉시 다가온 느낌은 황량함이요 삭막함이었습니다.

광야 한 가운데 서서 아무리 둘러봐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머무를 곳도 쉬어갈 곳도 없는 불모지, 뱀과 전갈만이 위협하는 고통과 죽음의 땅이 광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시시각각으로 기후가 변하는 곳, 때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나 무지막지한 광풍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 우리의 미성숙, 거짓신앙, 값싼 신앙, 유아기적 신앙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 우리 각자의 맨얼굴과 인간적 한계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 생각과 마음이 단순화되는 장소, 하느님께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때로는 고통의 장소, 때로는 은총의 장소인 광야를 40년 동안 걸어가면서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그릇된 요소들을 정화시켜나갔습니다.

우상숭배에서 유일신이신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형식적인 신앙, 위선적인 신앙에서 진실하고 견고한 신앙으로 변모시켜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의 땅에 입국하기에 합당한 신앙공동체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더 자주 광야로 몰아넣으십니다. 우리가 원치도 않는 쓰디쓴 광야를 체험케 하시는데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중에 하나가 ‘광야’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하십니다. 또한 광야 체험을 통해 나 자신의 어둡고 부끄러운 내면을 직시하게 하십니다. 더불어 광야 체험을 통해 우리의 뾰쪽뾰쪽 모난 부분은 다듬도록 인도하십니다.

깊은 고독과 단절 속에 걸어온 광야 체험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동시에 거듭 날 수 있었던 은혜로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본격적인 공생활의 시작 전 예수님의 40일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그분께서는 유다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장 40일 동안이나 유다 광야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단둘이 머물면서 그분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절히 찾으셨습니다.

그냥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분께서는 정답을 찾으셨고, 기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깊은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내적 광야, 텅빈 공간, 마음의 여유를 마련해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들어올 수 있지,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감실, 내 안의 성전 하나를 건설해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시기, 우리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히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사실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놓아보니 꼭 그렇지도 않더군요.

우리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이 되신 스마트폰, SNS, 신용카드, 술, 담배, 깊이 빠져버린 취미활동… 과감히 우리 손에서 한번 내려놓고, 하느님 아버지와 나 단둘만 머물수 있는 내 안의 성전으로 자주 들어가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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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6htCQESi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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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란 지옥의 원인이 나 자신임을 확실히 아는 것>

오늘 복음은 왜 복음을 믿기 위해 회개가 필요한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유혹은 한 순간 받는 무엇이 아니라 매 순간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유혹은 매 순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것이 유혹이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유혹을 이기셨더니 세상을 구원하는 자가 되시고 결국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따르라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은 나 자신을 그것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회개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의 결단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랑에게 지옥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쓴 『닫힌 문』(No Exit)이란 연극에서 왜 타인이 지옥이 되는지 설명합니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지옥의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죽어서 이 방으로 들어왔지만, 서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인정받으려 하고 사랑을 갈망하기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공간이 됩니다. 하지만 혼자 외롭게 되는 게 더 큰 고통이라 여기기에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며 삽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세상이 지옥이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옥이 타인의 탓일까요? 타인에게 집착하는 자기 마음 탓이 아닐까요?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느님이고 나는 그 사랑에 내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죽음의 보상을 줄 신의 존재를 거부할 때 의미를 잃습니다.

인도 영화 ‘삼사라’에서 사람은 누구나 물 한 방울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마르지 않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도를 닦는 것임을 말합니다. 결론은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바다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사랑에 투자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마치 사막의 펌프처럼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그 한 방울의 물을 지키려는 마음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펌프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된 주유소가 있고 그곳엔 물 펌프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목이 말라 실신할 지경에 이른 나그네가 주유소의 물 펌프를 발견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바가지의 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었습니다.     “이 펌프 밑에는 엄청나게 시원한 지하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이 펌프 물로 갈증을 해소하세요. 명심하세요. 펌프 앞에 놓인 바가지의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돼요. 이것은 ‘마중물’. 잊지 마세요. 다음 분을 위해서 ‘마중물’을 꼭 채워 놓고 가세요!”

이 한 방울의 물을 바치는 게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뱀입니다. 지옥은 이 뱀, 곧 나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에게서 탈출시키려 합니다. 모세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파라오 때문에 지옥을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가 곧 지옥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모세를 믿게 됩니다. 가나안 땅, 곧 하느님 나라는 자기 안의 파라오를 배신함으로써 얻는 에너지를 갈아 넣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고 생명은 곧 피입니다. 돈도 피이고 음식도 피이며 명예도 피입니다. 이 피를 갈아 넣지 않으면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회개는 지혜의 빛이 요구되고 그 지혜의 빛으로 사랑의 삶을 살겠다는 착한 뜻을 만들고 착한 뜻은 그것과 반대되는 나의 뜻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뜻에서 휙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을 향하게 될 때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나를 가만히 두면 지옥에 머물게 되어 나 자신을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마르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복음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지옥의 땅이고 복음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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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1982년 서울 가톨릭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동창 중에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 모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분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지난 5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전임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전에 7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신부님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저와 초등학교 동창이고, 같은 본당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함께 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죽마고우입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신학생들을 위한 영신수련 피정을 함께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영적으로 훌륭하십니다. 두 분 모두 저보다 사목의 경험이 풍부하십니다. 한분도 아니고 전임신부님 두 분이 모두 저와 동창신부님이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부족하기에 마음에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김영관 도미니꼬 신부님은 성전 신축이라는 씨를 뿌렸습니다. 김남길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깊은 영성으로 물을 주었습니다. 저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표징으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표징을 통해서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물로도, 불로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할 수 있는 표징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댈러스 교구로부터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할 수 있다는 공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로부터 댈러스 한인 성당의 본당신부로 사목하라는 파견을 받았습니다. 저의 표징은 서울대교구의 파견과 댈러스 교구의 임명이라는 공문입니다. 공적인 표징은 그렇지만 제게는 또 다른 표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예수님처럼 착한목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또 다른 표징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바른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바른 양심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큰 덕목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몰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던 자캐오는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식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올바른 식별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원리와 기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으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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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2-15: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사순절은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더 깊이 느끼며 파스카의 빛을 향한 광야의 고달픈 길을 가는 여정이다. 이 시기는 참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광야의 시련, 하느님께 대한 체험, 마음의 정화 등이 오늘의 주제이다. 독서에서는 노아의 홍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아와 그 아들들은 홍수의 물로 씻긴 새로운 인류를 의미하며, 하느님께서는 무지개(창세 9,13)라는 평화의 징표를 통해 이 인류에게 생명과 사랑을 영원히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창세 9,14-15) 베드로 사도는 홍수가 많은 사람에게 멸망의 원인이 되었지만, 비록 소수라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1베드 3,21) 세례의 물을 통하여 묵은 인간을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이며 우리의 파스카이다. 사순절은 세례를 통해 부여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의 요구에 따라 살아야 함을 재확인하고 노력하는 시기이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사탄과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따름으로써 내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광야에서의 유혹에 관한 이야기(12-13절)와 첫 번째 복음의 선포 이야기(14-15절)이다. 이 둘을 연결하면 사순절의 총체적인 의미가 나올 수 있다. 다른 복음에서와같이 마르코 복음에도 예수님의 유혹이 나오지만, 다른 복음과는 달리 간결하게 표현하면서 풍부하고도 효과적인 면이 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유혹은 예수께서 광야에 있는 사십일 동안 계속된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그 유혹이 극복하기가 힘들고 피곤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악의 세력과의 격렬한 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 걸쳐 악의 세력과 싸우시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사탄을 거슬러 하는 싸움은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는 데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이 어떤 것인지는 전해주고 있진 않다. 그 유혹은 십자가를 통해야 하는 어렵고도 험난한 메시아사상과는 반대로 쉽고 승리감에 넘치는 메시아 상으로 바꾸려는 술책이다. 이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후에 사탄이라고 크게 꾸짖으시며,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3) 하신 것과 같다. 이 유혹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될 것이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당신 자신을 맡김으로써 극복하실 것이다. 이러한 유혹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올 유혹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곯아떨어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 사순시기에도 우리에게 하실 것이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오늘 복음에서 광야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광야는 무한한 고독의 상징처럼 다가오지만, 광야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곳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모든 자신감을 털어버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의 무능력, 나약성, 무력감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십일 동안 광야에 머무시는 동안에 하느님과 더욱더 깊은 만남을 체험하신다.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사탄의 정면 공격을 물리칠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더욱더 강한 현존도 체험하신다. 이 광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보내신 분이 바로 성령이심을 마르코 복음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12절) 이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셨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상으로 거룩한 숫자이며 광야의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십일이라는 기간의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무엇임을 깊이 깨달을 때야 하느님께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가졌던 그 자세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침묵의 공간을 즉 광야를 만드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 속에서 왜곡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을 쳐 이기심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하고 평화를 주시며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 천사들의 시중(13절)은 바로 이 승리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변화도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광야 체험을 하신 후에 제일 먼저 선포하시는 내용이 사탄과의 싸움을 통해 당신 안에 실현하신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사순절이 요구하는 회개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탄을 몰아내고 하느님을 우리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길고도 험한 광야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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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순 제1주일에 이 유혹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아마도 사순 시기에 새롭게 마음을 잡고 회개의 삶을 살아 보려는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탄의 유혹을 잘 이겨 내도록 도우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우리를 죄악에 떨어뜨리려는 사탄의 유혹은 평생 계속될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유혹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은 유혹을 받는 것과 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유혹을 느끼는 것은 우리 탓이 아니기에, 거기에 동조하지만 않는다면 어떠한 책임도 없습니다. 오히려 유혹을 뿌리치고 이겨 낸다면 더욱 풍성한 은총을 받고 좀 더 성숙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유혹을 이겨 내는 몇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유혹을 받을 때, 곧바로 하느님께 의탁하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떠올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큰 힘을 줍니다. 기도에 지치지 않는다면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그 유혹을 영성 지도 신부나 동반자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 밖으로 언급된 유혹은 이미 절반은 정복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유혹이 계속 괴롭힌다면, 마지막 남은 방법은 저항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끝까지 끈기 있게 저항한다면, 사실 사탄은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사탄은 유혹할 뿐이지 실제로 동조하거나 죄를 짓는 것은 ‘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지향과 결심을 가지고 사순 시기를 시작한 우리에게 많은 유혹이 덮쳐 올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은총과 성인이 가르쳐 주신 방법들로 슬기롭게 이겨 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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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혹>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2-15)

1)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려고 접근할 때 천사로 위장합니다. 다가오는 존재가 사탄이라는 것을 알면 누구든지 경계부터 하지만, 천사라고 생각하면 신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2코린 11,14ㄴ-15ㄱ)

실제 상황에서 ‘사탄의 유혹’은 가장 친한 사람, 또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리려고 했던 일이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이 이야기는 사탄이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었던 것도 아니고, 마귀 들렸던 것도 아니고, 그저 자기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사탄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 속에 숨어들어서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한 것입니다.>

2) 유혹이 다가올 때, 그것이 유혹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유혹에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에 유혹은 ‘진심으로 하는 충고나 조언’의 모습으로, 또는 ‘지극한 사랑으로 하는 호소’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 충고나 조언이나 눈물어린 호소에 마음이 흔들려서 넘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로 넘어가게 됩니다. 박해 때에 사랑하는 식구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에 흔들려서 배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그것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러 나가는데, “꼭 네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할 것이다.”라고 말리는 것도 그런 유혹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열정적으로 하려고 하는데, 주변에서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또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니 나중에 해도 된다.”라는 말도 유혹입니다.

3) 우리는 유혹을 받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실제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유혹하는’ 존재가 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린 일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심각한 유혹이 된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고, 아마도 처음에는 왜 그렇게 심하게 혼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순수한 의도로 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게 유혹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남을 유혹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단히 엄하게 경고하셨던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해당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 18,6)

4) 나의 잘못된 신념과 잘못된 확신이 나 자신에게 큰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우리는 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곧바로 고쳐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5)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간단하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수호천사는 우리를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과 천사의 보호 사이에서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합니다.

유혹은 사탄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오고, 나 자신의 내적 욕망에서도 옵니다. 우리 교회는 옛날부터 세속, 육신, 마귀를 세 가지 원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디에서 오든지,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우리는 늘 유혹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은 그런 상황을 나타냅니다.(마태 10,16)

이리 떼는 언제나 항상 양들을 유혹하거나 압박하거나 위협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리 떼를 제압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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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소형섭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받으며 신부님으로부터 듣는 권고입니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던, 예수회의 앤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신부는 이러한 글을 남겼습니다.

어떤 구두쇠가 수많은 돈을 저축해 놓고 가장 좋은 투자법을 결정하기 전에 일 년 동안 즐기기로 하였답니다. 그렇게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갑자기 죽음의 사자(使者)가 나타나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려 하였습니다. 부자는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을 해 보았지만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사흘만 더 살게 해 주면 제가 가진 재산의 반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간청하여도 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부자를 세게 잡아당기기 시작했습니다.

다급해진 부자는 “하루만 말미를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그러면 제가 일생 동안 벌어 놓은 돈 전부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사자는 여전히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부자는 겨우 단 하나의 허락을 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짧은 시간을 얻은 것입니다.

“이 메모를 발견하는 사람은 보시오. 어느 정도 살 만하다면 재산을 모으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남을 위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시오. 나는 엄청난 돈을 모았지만 그 걸로는 단 한 시간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앤토니 신부는 덧붙입니다. “백만장자가 죽으면 사람들은 묻는다. 재산을 얼마나 남겼을까? 대답은 물론 전부이다. 사실, 그가 남긴 재산은 남긴 게 아니라, 가지고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 또, ‘우리 자신이 먼지이며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디에서 온 존재이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를 깨닫고, 그 마지막 때를 미리 헤아려보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됩니다.

그 마지막 때는 앞서 소개한 부자의 이야기처럼 이 땅의 물질적인 것, 악착같이 모으고 베풀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때일 것입니다. 먼지인 존재가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데 무엇을 더 챙겨갈 수 있을까요?

결국, 회개 즉,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삶은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들이 끝까지 움켜쥐고 누리고 즐길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참으로 가치 있고 필요한 일에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가치를 세상의 가치보다 우선시하며,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고, 하느님 앞에 내어놓고 자랑도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지금부터 챙겨놓는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이런 회개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머리에 재를 얹으며 들은 이 말씀, 또 오늘 예수님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선포된 이 말씀이 사순 시기 동안 여러분들 일상의 등불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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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혁순 요셉 신부님]

<갈등>

갈등(葛藤)이란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 을 의미한다. 여기서 갈(葛)은 ‘칡 갈’ 자를 쓰며 등(藤)은 ‘등나무 등’ 자를 쓴다. ‘갈등’ 의 의미는 덩굴 식물인 칡과 등나무의 특징에서 유래한다. 대부분의 덩굴 식물은 오른쪽으로 회전하면서 주변에 의지한다. 하지만 등나무는 왼쪽으로 회전하면서 성장하기에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서로의 숨을 막게 되는 악연이 되는 것이다.

이 ‘갈등’ 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갈’ 의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아니면 ‘등’ 의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는 회개와 참회의 생활을 통해 예수님의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 첫 주간을 지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허무의 광야에서 사탄의 목소리를 통해 유혹의 갈등을 겪으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시며, 과감하게 자신을 포기하시어 갈등을 풀어내신다.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매일의 삶 안에서 예수님처럼 많은 유혹 속에 ‘갈등’ 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신앙의 갈등은 우리의 힘으로 풀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뜻에 맡기지 않으면 우리는 더욱더 조여지는 갈등의 유혹에 머물 수밖에 없다. 즉, 나 스스로 신앙의 힘을 빼지 않으면 우리는 거룩한 사순 시기를 살면서도 갈등의 유혹에 더욱더 조여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쪽의 힘을 풀지 않으면 절대 풀 수 없는 ‘갈등’ 속에서 힘을 내려놓는 사람이 먼저 ‘나’ 일 때, 우리는 신앙의 갈등도 풀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신 이 말씀도 내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 돌아서서 예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즉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맡겨야 이 세상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판단과 뜻이 옳다고 주장하여 갈등하는 신앙의 모습에서 이제 내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삶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의 ‘갈등’을 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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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서철완 세례자 요한 신부님]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우리의 주위에는 반대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빛과 어둠, 사랑과 미움 등등. 좋은 것들만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현실에서 왜 우리에게 시련과 시험이라는 과제를 안겨주는 것일까요? 사실 부정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내신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서면 하느님과 반대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개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사람은 분명 하느님께서 유익한 것을 줄 것이라는 진리 혹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인간에게는 보호본능이 있어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는 바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는 점이죠. 곧 인간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 나에게 정말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을 하고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 인간만의 식별을 통해 그것이 나에게 시련과 어려움을 안겨준다면 인간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게 됩니다. 이로써 어리석은 인간은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되어 부정적인 것들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죄이고, 그 죄가 점점 무거워지면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극한의 어둠이 닥치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을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상황이 인간에게 펼쳐지게 됩니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눈앞의 시련 때문에 인간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과연 어떠한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는가?’라는 판단기준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판단기준이 흐려지는 이유는 하느님의 것을 가리는 유혹이라는 걸림돌 때문입니다. 이 유혹을 잘 바라보고 잘 선택한 이가 바로 복음에서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혹을 이기셨나요? 복음에는 간략하게 소개되지만, 마태오복음 4장을 보면, 좀 더 자세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마음을 헤아림으로써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과 마음을 이성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안에 담아 두셨습니다. 때문에, 유혹이 다가 와도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금세 알아차리고 곧바로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셨죠.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자세를 본받아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고쳐 세우는 데에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보통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은 바로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그 형태가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시련과 힘듦으로 보이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의 나약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매우 나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이 있기에 소중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이점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하느님을 선택함으로써, 선이 충만한 우리 자신이 되도록 한 주간 동안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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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이름이 꽤 알려진 중견 작가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뜬금 없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대뜸 그녀에게 “너는 뭐가 되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지요. 마흔을 훌쩍 넘은 중년의 딸에게, 어느 정도 자기 분야에서 자리를 잡은 자신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도무지 의도를 헤아리기 어려워 벙쪄있던 그녀의 눈을 응시하면서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물으십니다. “뭐가 되고 싶으냐?” 그러자 그녀는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답했지요. “저 지금 작가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혀를 끌끌 차시며 안됐다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에휴, 너는 꿈도 없냐?” 그 작가는 아버지의 이 말씀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 마음 속에 품은 희망도 없이 그저 현재라는 시간을 버텨내듯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삶은 하루 하루를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궁극적인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 그런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매 순간을 닥치는대로 넘기기에 급급하지 말고, 쉽고 편안한 삶을 쫓으려고만 애쓰지 말고,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마음 속에 품은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라는 척박한 땅으로 내보내시는 것도 그런 참된 희망을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광야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입니다. 하지만 그런 곳이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세상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극한의 환경에서 자연스레 하느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지요. 비록 모든 자유가 제한된 노예 신분이었어도 양식이나 지낼 곳 같은 기본적인 것들은 보장되었던 이집트에서는, 고기처럼 좋은 건 못 먹더라도 적어도 빵만큼은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익숙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인도에 따라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그곳을 벗어나자,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며 그분을 따르는 백성으로 점차 변화되어 가지요. 광야는 편안함보다 불편함에, 생명보다 죽음에,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힘들고 괴로운 곳이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그 고통과 시련 때문에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나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깊이 체험하게 되며, 그 체험이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여 신앙적으로 한 단계 성숙해지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셨듯 성령의 이끄심에 순명하여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어려서부터 고생은 사서라도 시키듯,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광야로 내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러시는 의도와 의미를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광야 체험’을 통해 자신의 부족하고 약한 부분을 성찰하고, 뾰족하게 모난 부분을 순명이라는 정으로 조금씩 깎아 나가다보면, 광야가 내 삶에 갖는 진정한 의미를, 나를 광야로 보내신 하느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겁니다.

하지만 그런 광야의 의미를 생각한다고 해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청하라고 하셨을 정도로 악의 세력은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심각한 ‘걸림돌’인데, 그 걸림돌을 예수님 앞에서 치워주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탄이 그분을 마음껏 유혹하도록 방치하시는 듯한 모습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겁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의 답 또한 주님의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저희 앞에서 유혹을 없애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청하는 것은 유혹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 있지요. 길을 걷다 마주하게 되는 똑같은 돌이라도 부주의함과 안일함으로 그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지만, 늘 깨어있는 자세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을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도와주는 ‘디딤돌’이 되는 것처럼, 유혹 또한 우리가 영적인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에라 모르겠다’하고 그것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과 함께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를 더 높은 차원의 신앙으로,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운 곳으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도 유혹에 당당히 맞서십니다. 무려 4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유혹에 당당히 맞서고 그것을 극복하는 훈련을 하심으로써, 당신 앞에 놓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힘과 용기를 얻으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그리고 우리를 아무 대책 없이 유혹 속에 방치하시는 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로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당신 목숨을 위협하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여기서 ‘들짐승’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위협을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된, 욕망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고자 하는 죄스럽고 악한 성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광야에 들짐승만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 함께 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애쓰는 이들을 이끌고 지켜 주지요. 그러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간계와 들짐승들의 위협을 천사들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 극복하셨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과 함께, 또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이 힘들고 고된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 주님 뜻대로 사는 ‘광야살이’가 참으로 고되고 어렵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이 광야 한 가운데서도 참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을 샅샅이 성찰하고 낱낱이 파헤치는 ‘수사’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 자기 허물과 잘못에 절망하며 ‘난 결국 이거밖에 안되는구나’라고 자책하는 ‘자기비하’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뒤를 향하고 살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눈, 코, 입, 귀 같은 우리 감각기관들이 모두 앞을 향해 있는 것은 허물 많은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갈 희망찬 미래를 지향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부족했던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면 됩니다. 알 수 없는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면 됩니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그분 뜻을 철저히 따르며 매일의 시간을 착실히 살다보면, 그분과 함께 누릴 영원한 행복이,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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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 다녀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순례 코스 중에서 광야 체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몇 시간을 보내면서 광야가 어떤 곳인지 느껴보는 것입니다. 광야는 사막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매우 덥고 따가운 햇빛을 맞으면서 살아야 했지만, 약간의 풀도 있고 또 물도 구할 수 있기에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와 같은 풍요로움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몇 시간 체험은 가능해도, 며칠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없어도 너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하느님 체험을 위해 많은 은수자가 움막을 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고 하니, 사람들은 하느님 체험을 위해 광야로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광야에서 하느님 체험이 가능할까요? 단순히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장소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요?

세상과 동떨어진 이곳에서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볼 것이 너무 많습니다. 즉, 정작 하느님을 보는 데는 소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볼 것이 없어서, 하느님께 집중하는데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수자가 이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광야는 피해야 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찾아가는 곳이 되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을 찾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도 세상에 파묻혀서 광야처럼 고통과 황량함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도 광야로 가셨습니다. 가뜩이나 불편하고 황량함이 가득한 광야인데, 여기에 사탄의 유혹까지 받게 되십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40일 동안을 말이지요. 어려운 장소에서 더 어려운 시간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도 광야에 가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역시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장소로 불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받으신 것을 왜 나는 안 된다고 말할까요?

그 시간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일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기쁜 소식이지요. 그런데 정작 그 주인공인 우리는 광야와 같은 곳을 피하면서 철저하게 쉽고 편한 것만을 쫓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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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광야에서 삶의 자리로>

마르코 1,12-15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그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광야에서 삶의 자리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홀로 젖어 들어가는 외로움이
오히려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무관심의 행복과
하릴없는 쉼의 기쁨으로
내 탓 없이 서서히 변질되어가고

이러면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쉼 없이 뇌까리면서
박차고 일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괜찮아 다 괜찮아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달콤한 유혹의 손길이
나를 더욱 움켜잡으려드니

무엇이 이러면 안 되는 것인지
무엇이 괜찮고 다 괜찮은 것인지
이도 저도 그저 내 것 아닌 양
될 대로 되라 내 탓 아니니
나의 밖으로 스스로 나를 몰아내고
나 없는 나에 숨어 즐기려하다가

삶의 자리로 떠나보내시기에 앞서
나의 하느님께서 내게 당신 뜻 심으려고
잠시 머물도록 애써 마련하신 광야에서
나를 열어 하느님과 벗과 나를 품어야만
이내 맞이할 삶의 자리에서
굳게 믿고 밝게 희망하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으니

그저 홀로 머무는 듯한 광야에서
하느님 안의 나를 내 안의 하느님을
벗 안의 나를 내 안의 벗을
나마저 팽개쳤던 나를
다시 정성스럽고 곱게 보듬어
그 어디든 내가 깃들 삶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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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은 은총의 시작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용기를 통해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유혹에 관해 묵상하며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시조 한 수 읊어 드리겠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는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창건하려는 야심을 품은 이방원이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시조 한 수를 들려주면서 마음을 떠본 내용입니다. 칡넝쿨처럼 서로 얽혀서 옛 왕조, 새 왕조 따지지 말고 오래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한 것입니다.

이에 정몽주가 시조 한 수를 지어 변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정몽주는 이런 충절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00여 년의 박해 동안 만여 명이 넘는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온갖 유혹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임 향한 일편단심”을 버리지 않은 분들이 순교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청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온갖 허례허식과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서약을 잘 지켜야 합니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주님보다 세상의 소유와 지배, 재물과 권력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 온갖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청하며 기도합니다.

저는 신부가 되어 10여 년 뒤에 사회복지 공부를 했습니다. 조치원역에서 서울로 야간열차를 이용하며 대학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충남 조치원역에 새벽 0시10분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역 앞을 나오기가 무섭게 아가씨들이 달라붙어 말합니다. “오빠, 따뜻한 방 있어요, 쉬고 가세요!” 그러면 제가 “내 방도 따뜻한데요!”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로만 칼라를 제대로 하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아가씨들은 여전히 달라붙었지요. 제가 기분이 좋았을까요?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지쳐서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따뜻한 방 있어요!”하고 아가씨가 달라붙는다면 한 번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물론 가치관이 두렷한 사람이나 배우자에게 신뢰와 사랑이 있는 사람이 어디다 한눈을 팔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악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고 내가 약해졌을 때를 이용하는 법입니다.

유혹은 항상 옆에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유혹이란 부정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자를 꼬이는 것을 의미하고, 올바른 생활 원칙에서 돌아서게 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것은 첫째로 자만해서입니다. “너는 네 사악함으로 자신만만하여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하고 말하였다. 너의 지혜와 지식이 너를 현혹시켜 너는 마음속으로‘나뿐이다. 나밖에는 없다’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불행이 너에게 들이닥치리니 너는 그것을 요술로도 막아내지 못하리라.”(이사 47,10.11)

둘째로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신다.”(1역대 28,9) 집회서를 보면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 42,2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남이 모른다고 생각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욕심에 끌려서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면 좋겠는데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심이 우리를 흔듭니다. 정말이지 그칠 줄을 알면 부끄러움이 없고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로운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그러나 유혹은 긍정적으로 볼 때 은총의 시작입니다. 이 유혹을 통해서 나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내 자신의 상태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유혹은 주님께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유혹을 극복하게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곳에 구원해야 할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목마르고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황량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바로 온갖 유혹이 있는 이 세상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유혹받으시고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이 유혹받으셨기에 유혹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쉽게 유혹에 노출시키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유혹당할 기회를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비쭉, 작심삼일입니다. 아무쪼록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지 말고, 주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여 은총으로 만드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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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광야 인생 순례 여정>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전사, 평화의 전사”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사순 제1주일 강론 제목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현실성을 지닌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32년전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 미사때 제가 한 강론 제목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였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답답한 마음에 끊임없이 묻게되는 물음은 광야 순례 인생 여정,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요즘 매일 인용하게 되는 다산 어록에 나오는 말씀이 오늘도 참 좋습니다.

“공부는 나를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요,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공부하는 평생학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새로워지는 공부가 진짜 평생공부요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제 좌우명이 뭔지 아십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하루하루 살 때, 거품이나 환상, 허영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역시 올해 2024년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시기 담화문도 참 깊고 풍부하며 참삶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를 통해 우리를 자유로 이끄십니다”라는 제하에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사순시기는 은총의 때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호세아 예언자의 말처럼, 광야는 다시 한번 우리 첫사랑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형성하시어 우리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신랑처럼 우리 마음에 사랑의 말씀을 속삭이시며 우리를 당신께 다시 이끄십니다.”

2월18일자 오늘 가톨릭평화신문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1월30일 서울 명동 교구청 접견실에서 국민의 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환담했다”는 기사 내용도 이채로웠습니다. 대주교는 한위원장에게 “전국을 누비시면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으실 텐데, 특히 작은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 들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으며, 한위원장은 “포용의 자세를 잘 배우도록 하겠다. 힘없는 소수를 대변하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노력하겠다” 화답했다 합니다.

좌우의 극단의 대립과 갈등, 분열의 상태에서 좌우를 함께 품에 안아야 하는, 어느 한쪽도 내칠수 없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어머니 교회로서의 통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지… 어머니 교회의 고뇌는 깊을 수뿐이 없습니다. 오늘날 광야 세상에서 겪게되는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순시기는 물론 우리의 평생 삶에 대한 궁극의 물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이 답을 줍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됩니다. 끊임없는 영적전쟁의 광야여정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광야 여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삶을 압축 요약하고 있는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잘 살아야 나머지 삶을 잘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주님과 함께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전투의 삶이라하여 너무 심각하고 긴장하지 마십시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놀랍게도 즐거움이란 단어 둘을 오직 사순시기에 대한 장에서만 사용합니다. 앞서도 소개했지만 내용이 고맙고 고무적이라 다시 나눕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광야여정의 영적전쟁의 삶,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광야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우리 광야여정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한 성령은 광야 여정중 사탄과의 영적전투중에도 예수님께 결정적 도움을 주셨음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희망이 생생하고, 성령은 물론 교회공동체 형제들의 우군이 있으며, 무엇보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면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광야는 낙원임을 잊지 마십시오.
광야를 광야로 받아들일 때 광야는 낙원이 된다고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오늘 광야여정중의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넘어가거나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떨어진 하와와 아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입니다.

사탄이 없는 곳이 낙원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을 때 낙원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통과해가면서 영적성장에 낙원의 실현입니다. 유혹이 없이는 영적성장도 멈춥니다. 그러니 유혹을 없애 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예수님은 사탄이 아닌 성령께, 천사들에 귀를 기울이며 들짐승들과도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으니 그대로 지상 낙원의 실현입니다. 다음 복음의 짧은 대목이 예수님의 지상낙원의 삶을 요약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우리 삶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

들짐승들이 상징하는바 사람같지 않은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들짐승들 같은 사람들, 괴물같은 사람들, 사탄같은 사람들도 측은히 불쌍히 가엾이 여기며 평화로이 공존해야 하는 지상 낙원의 현실입니다. 자비와 지혜에 용기를 겸비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시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천사들 또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광야여정중에도 낙원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와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에 결정적 표지 역할을 하는 계약의 표징들인 무지개와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 홍수에서 살아난 노아와 그 가족들은 세례의 물로 구원받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무지개를 가리키며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구약의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라면 신약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구약 창세기의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의 하느님을 제동하는 장치가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였다면, 이제 우리 교회의 시대에 하느님을 제동하는 유일한 장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광야 여정, 탈출의 여정에 우리의 결정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하느님을 무한히 인내하게 하는, 계약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광야여정, 탈출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영원한 길잡이가,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부단히 더불어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을 통해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광야의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사는 참으로 역동적인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바로 은총의 사순시기는 물론 전생애를 관통하는, 우리가 날마다 살아 내야 할, 다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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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령의 승리와 단련을 위해>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첫째 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 얘기이고,
둘째 독서 베드로 서간은 과거엔 노아가 물로 구원받았음을 얘기하면서 이젠 노아의 홍수보다 그 본형인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사순 제1주일은 먼저 물의 세례를 얘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물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에 대해 착각치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이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할 때 물을 섭취하면 살고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뜻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물은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가지고 우리를 죽인 다음 살리시고, 우리는 물에 의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정교하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죽어야 할 내가 있고 살아야 할 내가 있는데 죽어야 할 나는 육의 나이고 살아야 할 나는 영의 나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육적인 나는 어떤 나입니까? 나를 추구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나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없는 나와 하느님 없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자기와 세상을 추구하게 하는 육의 영은 죽어야 하고, 육의 영과 대결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와 헌신의 영이 성령을 모셔 들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뒤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시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나 루카 복음과 달리
유혹받으셨다는 얘기만 할 뿐 유혹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고, 유혹받았다는 짧은 보고에 이어 복음 선포의 시작을 짧게 기술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의도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비로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빼먹어선 안 될 것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내보내시어 광야로 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악령과의 대면은 성령께서 원하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는 자주 대면하고 악령과의 대면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악령은 피할 것이 아니라 대면하여 이겨야 하는 것이고, 대결하여 이겼을 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악령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피하다가는 우리는 교회 안이나 수도원에 갇힐 것이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시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악령의 유혹과 시련은 성령의 승리와 단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레 겁을 먹고 악령과의 대면을 피하는 것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시려는 성령의 인도를 뿌리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디모1,7)음을 믿으며 힘차게 나아갑시다.

오늘부터 강론을 다시 올린다고 말씀드렸는데 너무 죄송하게도 오늘 늦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내일부터 심기일전 새로운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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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회개의 열매>

오늘 복음(마르1,12-15)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말씀과 갈릴래아에서의 첫 전도 말씀’입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부활을 준비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나를 바라보는 시기, 밖으로 향해 있던 나의 시선을 내 안으로 향해 있게 하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보다 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동참하는 시기’입니다.

‘보다 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큰 사랑(자비)을 기억하고, 이 큰 사랑(자비) 안에 머무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이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시기’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얼른 회개하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17.26)

‘믿음에 따라야 하는 실천은 회개이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와 공동체의 부활을 위해 나름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금주, 금연 등등) 잘 지키고 계시죠?

합천본당은 이번에 <물동이>(우리신학연구소)를 가지고, ‘생태위기 시대, 칠죄종을 성찰’하면서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성찰은 우리를 ‘생태적 삶’으로 초대하고 있고, ‘회개의 합당한 구체적인 열매들(생태달력)’에게로 초대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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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6jsv5Hr4q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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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 13)

광야는
단지 공간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삶의 매순간이며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사람의 광야는
사람입니다.

광야의 풍경이
우리들
풍경입니다.

광야에도
길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입니다.

들짐승의 모습도
쓰다듬어
함께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간절하게 찾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은총이고
선물일 수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던
우리 마음을
만나는
사순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거울이 되어
우리 내면을
보여줍니다.

광야가
가리키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어버리는
우리의 신앙을
광야를 통해
반성합니다.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 광야와
은총입니다.

거기서 시작되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광야에도
하느님이 계시고
유혹 중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가
하느님 안에서
우리자신을
만나는 회개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회개이며
복음의 길입니다.

복음을 믿는
가장 따뜻한
마음의
사순 제1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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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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