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4장,12-26절;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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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6.22-26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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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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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가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하며 예수님과 동참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활동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희생인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과 가까워 졌다, 하나가 되었다”라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보고 성체와 성혈을 정성스럽게 모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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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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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세의 계약은 짐승의 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로 암송아지, 염소와 황소를 희생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신약의 계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짐승의 피를 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가 되시고 속량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 중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고통과 수고를 그리스도 안에서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포도의 즙처럼 우리가 흘리는 땀과 피는 주님 대전에 아름다운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죄악을 저지를 때마다 반복하여 짐승들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는 단 한 번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은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을 봉헌하는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속죄와 친교의 제물을 바칠 수 있습니다. 짐승의 피로는 완전한 속죄와 친교의 제물을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바치는 미사성제로 완전한 계약이 지속되며 우리는 그것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봉헌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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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랑하여 부부가 된 사람들도 서로 다툽니다. 작건 크건 다툼이 한 번 일어나면 두 사람을 다시 결합시켜 주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입장을 조정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물며 적대적인 사람들이 화해하는 일은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결단을 내려 크게 양보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서로의 관계를 건강하고 충실하게 유지하려면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면 계약을 맺을 때 피를 뿌린 모양입니다. 계약을 깨뜨리면 피라도 흘리겠다 또는 반드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면서 피를 흘려서라도 서로의 관계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다짐합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때 소를 잡아 그 피의 절반을 제단에 뿌렸습니다.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도, 상상하면 섬뜩할 만큼 장엄한 광경입니다. 이스라엘은 비장한 각오로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게 되면, 그들은 다시 하느님께 속죄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손상된 관계를 회복해야만 했는데, 히브리서가 고백하듯이, 이 제사는 늘 되풀이되어야만 했습니다.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우리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 계약의 피를 쏟으십니다. 동물을 잡아 그 피를 뿌리시며 계약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계약의 피”를 부으십니다. 이제 더 이상 이 계약은 깨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희생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미 다 치르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 사랑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강생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대신 대속하시는 하느님의 속죄의 어린양이 되셨으며 당신 몸과 피를 몽땅 내어 주시는 생명의 빵, 사랑의 성체성사가 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신비가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압축됩니다. 곧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생각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 서로 참고 인내하면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려면 어쩌면 날마다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거의 늘 아픔을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먹히는 빵, 자신을 떼어 주는 삶, 그래서 하나의 성체성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