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3장, 24-32절;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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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4-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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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맞이해야 할 종말이 있습니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이 끝날 날이 올 것임을 압니다. 생명은 살려는 욕구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생명이 끝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궁금해 합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이 죽음의 세계를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 너머의 세상을 분명하게 알려 준 적은 없습니다. 이따금 임사 체험을 해서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였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죽음 이전에 일어난 주관적 체험의 현상일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서 인간 존재의 마침, 곧 죽음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밝혀졌음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단순한 한 인간이 얻은 특은이 아니라 온 인류의 창조주이며 섭리자이신 하느님의 뜻이 인류에게 공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 번에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셨기에 인류의 마지막 악인 죄와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믿음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는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는 거짓 예언자들도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참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고, 스스로 가난한 교회여야 합니다. 가난은 예수님의 삶이었고, 교회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 너머 하느님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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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주님을 향한 소망 가운데 온전히 달려가고 있는지 묵상해보고 다음주가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남은 시간동안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 해보고 신앙적인 계획이 있다면 앞으로 5-10년 계획을 이야기 해봅시다.

3. 우리는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잘 이해하며 사는지 묵상해봅시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표징”이 있다면 어떤것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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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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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두 마지막 날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오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답은 본기도의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더해 주시니”라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곧 오늘 전례 말씀들은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을 갖도록 이끌어 준다는 점입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흥행하던 유다 묵시 문학은 역사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가족이나 국가, 사회와 자연계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혼란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박해로 수많은 이가 순교를 하던 시대, 다니엘서는 끝까지 신앙에 충실한 이들이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별처럼 빛나리라는 희망을 전해 줍니다.
한편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기에, 우리의 죄를 속죄하려고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해 주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에 이변이 생겨 하늘의 권세들이 제 기능을 잃어버릴 때,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 당시 유행하던 묵시 문학적인 표현이 사용되어 분위기가 어둡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마지막 날도, 우리가 무서워하는 다른 어떤 이가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를 불러 모으시는 날입니다.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갈라 2,20 참조)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불러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1테살 4,17-18).
또한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하고 노래한 입당송을 참조할 때, 그 날과 그 시간은 평화의 주님을 만나 뵙는 행복한 날입니다. 따라서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 닥칠까 걱정하는 것은 그분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소치임이 분명합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