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2장, 38-44절;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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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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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진심은 통한다고 합니다. 가뭄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으로, 죽기 전에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으려던 사렙타의 한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를 믿었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궁핍한 가운데 하루 먹고 살 생활비를 모두 헌금함에 넣는 과부의 모습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십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생존 욕구를 갖고 있기에 어떻게 해서든 살길을 찾기 마련입니다. 인간도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니 생존의 문제라면 도덕 가치나 윤리 규범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도 도덕적으로 남에게 흠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윗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뽐내면서 기도하는 위선적 삶입니다.

예수님께 심한 질책을 받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결코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선뜻 부정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한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자기 비움으로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시고, 죄와 죽음을 이겨 내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희망을 두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를 봅니다. 비록 현실은 어둡고 힘들지만, 그리스도인은 시편 저자의 기도가 현실이 될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아멘! 그렇게 되기를 빕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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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예수님을 만나 다시 들을 수 있게된 사람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주님의 일을 하며 인정(칭찬)을 받으며 일을 한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인정/칭찬/높임이 신앙생활을 할때 어떻게 나를 주님으로부터 멀게 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헌금을 할때 어떤 마음으로 주님에게 드리고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헌금함이 아닌 주님이 내 앞에 계시다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재물을 드릴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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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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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과부는 울타리 노릇을 해 주는 가장을 잃었기에 고아와 더불어 사회적 약자로서 대개 자선에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신뢰로 놀라운 결단을 내리는 과부들을 만납니다.
사렙타 마을의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먹어야 할 마지막 끼니의 식량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엘리야 예언자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하였고, 복음의 과부도 자기의 그날 생활비를 모두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양이지만, 엘리야 예언자도 그렇고 과부의 헌금을 받아 주시는 하느님 편에서도 그렇고, 얼핏 보면 하느님께서는 마치 가진 것 모두를 요구하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것을 요구하셨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를 몽땅 봉헌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죠. 복음에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율법 학자들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는데, 과연 하느님께서 가난한 과부에게 가진 것 모두를 요구하시겠습니까!
율법 학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하고 긴 겉옷을 입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 드는 이들은 제물도 많이 바쳤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도 그가 소나 양을 몇 마리나 바쳤는지가 중요합니다. 성금이나 후원금, 미사 예물을 봉헌할 때도, 많이 낸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량이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의미입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내놓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진심을 담아 내놓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