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2장, 28ㄱㄷ-34절;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려 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등장합니다(마태 22,34-40; 루카 10,25-28 참조). 다만,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만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라는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려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형식적으로 봉헌하는 번제물과 희생 제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물을 봉헌하기만 하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희생 제물과 번제물을 바라지 않으시고, 신의와 하느님을 옳게 아는 것을 더 바라셨습니다(호세 6,6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제물을 봉헌하고 전례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미움을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그 어떤 계명보다 강조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웃 사랑을 강조한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이웃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의미를 기억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미사에 참석한다고, 주일의 의무를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감사드릴지 생각하며, 만약 미워하는 이웃이 있다면, 쉽지 않겠지만 ‘함께’라는 단어와 그의 얼굴을 같이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의 나라가 더 가까이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신앙생활을 하며 형식에 사로잡혀 일을 그릇치거나 사람들(봉사자)과 불편한 관계를 만든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묵상해보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 안에서 어떻게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
.
———————————–
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

오늘의 묵상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마치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날마다 받는 햇살처럼 하느님께서는 나보다 더욱 내 곁에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지만, 때로는 너무 가까이 계셔서 그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첫째 계명,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신명기의 위대한 계명을 상기시키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 존재의 시작과 마침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때로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지만, 마음이 흔들릴 때 언제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고, 목숨 걸고 잃지 않으려는 내 재산과 명예, 건강만큼이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과 봉헌의 몫을 바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올바른 믿음을 간직하려면 정신을 헛된 것에 쓰지 않고 성경과 교리 공부도 해야 하고, 삶에 지쳐서 쓰러지더라도 힘을 내서 일어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첫째 계명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사랑은 마음이나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내가 교리를 잘 몰라서도 아니고, 성경 지식이 짧아서도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들, 특히 교회 생활에서 만나는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은 물론, 가족과 직장 동료, 일상에서 부딪히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무너질 때 신앙도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피하고 싶은 내 이웃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기다려 주고 돌보아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