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0장, 46L-52절;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024, 2027)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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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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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남은 자들 중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이 있어서 하느님의 도움이 더 절실합니다. 예언자는 역경을 견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받고 기쁨 중에 환호성을 울리는 날’을 기다리도록 이끕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거지의 부르짖음은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을 대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 가문에서 나올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거지는 주변의 꾸중과 창피함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구세주의 자비를 외쳐 댑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것은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는 표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5) 하고 예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신지 확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걷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7,22 참조).
눈먼 거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신앙인을 표상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둠의 나라에서 헤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우리의 삶은 빛과 은총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눈먼 거지의 치유는 우리가 받을 자비로운 구원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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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예수님을 만나 다시 들을 수 있게된 사람은 그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자유롭게 상상해 보십시요.

2. 나는 내 앞에 놓여져있는 말도 안되는 문제를 만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찾는지 묵상해보고 어떤 문제였고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주님이 하실 수 없을거야 라는 문제)

3. 나에게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러한 체험이 있으신가요?

4. 오늘날 우리를 ‘앞 못보게 하는’ 하는 것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5. ‘치유’와 ‘구원’을 위해서는 와서(come) – 보고(see) – 따르는(Follow)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 어디쯤 와있을까요?

6. 살아오면서 내가 지니고 있던 ‘단점’과 ‘장애’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 이였을 수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7.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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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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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절규는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이요 기도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소리치며 부르짖는 그를 주위 사람들은 시끄러우니 잠자코 있으라고 합니다. 거지 주제에 운명이려니 하고, 자신의 처지를 그가 온순하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고통을 통해 가르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그가 믿고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지혜로운 처사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소리를 질러 댄다고 생각합니다.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서 경건하게 정성껏 올리는 자기들의 제사만 아름답고 고고한 기도라고 생각하면서, 길거리에서 소리치는 그의 부르짖음은 소음 공해에 불과할 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오히려 방해만 된다고 꾸짖으면서 소리치지 말라고 저지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면서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요. 마음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부르짖음이 있지만 무엇인가가 내리누르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히 기도만 하고, 눈길을 저 높은 곳에 고정시켜, 눈먼 거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번거롭게 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스스로 타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부르짖는 눈먼 거지에게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확인하십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청은 이 비참한 내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구원을 받은 것은 그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꾸짖던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막고 그분께 소리를 지르던 눈먼 거지였습니다.
용기와 소신을 갖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린 바르티매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나약함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이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그리고 그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