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나눔을 길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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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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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세 명의 제자, 곧 시몬 베드로,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의 가장 중요한 때에 예수님과 함께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초대 교회에서도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제자들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이면서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과 소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시몬에게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깊은 물은 언제고 위험합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 수도 있고, 사고가 났을 때 멀쩡히 돌아올 수 있는 확률도 높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을 낚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복음을 선포하고자 위험을 무릅쓸 각오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아침나절에는 고기를 잡을 가능성이 없고 밤에 그물질을 해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내리라 하셨고,
그 결과 배 두 척이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복음 선포를 비롯한 하느님의 일은, 사람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은, 분열될 수 없는 교회의 특성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찢어져서 여러 개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본디 하나로서 다양성 안에서 언제나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개별적인 부르심이면서 하나의 공통된 응답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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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보거나 다음 관점에서 성경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 예수님 입장에서
– 시몬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입장에서
2.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에서 나는 주님에게 쓰임 받는 종이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고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마 주님이 나를 부르신게 아니였나?’라고 생각나는 주님의 초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3. 공생활이란 예수께서 가정 생활을 떠나 공적으로 복음 선포를 시작한 이후의 예수님 일상 생활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공생활(변화된 삶)”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공생활”을 시작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하지 못하였다면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공생활”을 시작하고 싶은지 이야기해 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고 싶은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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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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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아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첫 출근을 하던 아침을 기억하십니까? 그날 하루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이 얼마만큼 남아 있습니까?
사제 서품 후 첫 미사 때, 새 사제들의 인사말 내용을 살펴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글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족한 저를 불러 주셔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감사 인사입니다. 진솔한 표현이기에 잔잔한 전율도 전해 오지만, 이런 인사를 들을 때마다, 저 마음만 잃지 않으면 충분하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5년, 10년, 20년이 지났을 때에는, 과연 어떨까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정말로 깨달았습니다. 이사야는 가까이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스러움을 느꼈고,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였던 자신의 과오를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는 자신이 그분과 함께하기에 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같이 능력 있는 사람이 일을 도와 드리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마워하셔야 한다거나 내가 도와준 사람들이 나에게 보답해야 한다고는 감히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자신들이 무엇인가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잘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시거나 가까이하지 않으시고 칠삭둥이라고 자처하는 겸손한 이들을 찾으시는 모양입니다.
오늘날 복음 선포자에게 가장 절실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의탁하는 겸손한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출저: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4129
2월9일[연중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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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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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J1hbztSvH0
[서울대교구 정성환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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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내면을 주님으로 가득 채울 때!>
물때가 좋을 때면 근처 수로로 밤낚시를 나갑니다. 낮에는 잔챙이들이 활개를 치지만, 희한하게도 밤이 되면 씨알 좋은 녀석들이 슬슬 활동을 시작하지요. 밤바다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풍어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허사일 때도 수두룩합니다. 미끼를 싱싱한 것으로 갈아도 끼워보고, 수심도 바꿔보고, 자리도 옮겨보고, 움직임도 줘보고, 별의별 짓을 다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인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의 심정이 백이십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시몬과 다른 제자들이 딱 그랬습니다. 큰 기대를 안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거듭 반복된 헛그물질에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괜히 말 걸었다가는 큰일 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건네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 말씀을 들은 시몬은 속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신 것이 참으로 고깝게 들렸을 것입니다. ‘포크레인 앞에 삽질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내면의 표현이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결과는? 인생 한방이라고, 초대박이 터졌습니다. 그야말로 긴 연장전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역전 만루 홈런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그물질에 오랜 실패가 만회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비참한 내 인생,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외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열어주십니다.
‘철저한 실패로구나. 쫄딱 망했구나.’라며 좌절하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저 함께 현존하십니다. 딱 한 말씀으로 그간의 어려웠던 국면을 180도 전환시켜 주십니다.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조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희망해야겠습니다.
전문직 어부였던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씀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부도 아닌 예수님, 고기잡이에는 전혀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분야만큼은 프로인 시몬에게 전혀 설득력 없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라고 권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기존의 사고방식, 개인적인 야욕,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라는 말씀이겠지요. 과도한 욕심, 사사로운 감정에서도 벗어나라는 권고이겠지요. 예수님이란 너무나 큰 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크게 버려야 가능한 일이니만큼 모든 것을 다 바꾸란 말씀이겠지요.
그릇은 무엇이 담기냐에 따라 그 그릇의 품위까지 달라집니다. 아무리 멋진 그릇이라 할지라도 애완견 사료를 담아놓으면 개밥그릇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투박한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보물이 담기면 보물단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질지라도, 우리 내면을 예수님으로 가득 채울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값진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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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GzFtOyXZ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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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이 십일조를 내라는 뜻이라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겸손함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권유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존재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은 자존감에 의해 결정됩니다. 종이배를 만드는 어린아이가 행복할까요, 우주 비행선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할까요, 인간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하다면 먹는 것만 찾는 짐승처럼 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짐승은 짐승을 낳고, 인간은 인간을 낳습니다. 개 팔자가 아무리 상팔자라지만, 강아지를 부러워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느끼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끝에 매번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하느님 자녀를 낳으라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하십니다.
‘옥씨 부인전’에서 노비 구덕이는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양반에게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주인들은 더 악랄한 존재들입니다. 구덕이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탈출하여 한 주막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그 집에 옥태영이라는 외국에서 살다 온 양반이 묵게 됩니다. 그녀는 외국에서 살아서인지 양반임에도 구더기처럼 살라고 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덕이에게 동무처럼 잘해 줍니다. 구덕이는 그동안 양반에게 당해온 것에 비해 큰 사랑을 받으며 가당치 않은 꿈을 꿉니다. 옥태영의 집에서 동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적 떼가 주막에 불을 질러 옥태영이 죽습니다. 죽으면서 옥태영은 구덕이에게 꼭 꿈을 이루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합니다.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를 손녀딸로 착각합니다. 구덕이는 옥태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잠시 옥태영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벌을 받게 한 이후 다시 떠나려고 합니다. 이때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에게 옥태영으로 계속 살아줄 것을 권합니다. 구덕이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옥태영으로 삽니다. 그러면서 옥태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노비들을 변호하며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옥태영이 된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예수님은 구덕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신권으로 들어높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필요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면 전념하며 불쌍한 이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가 그러한 예입니다.
멕베스는 마녀들이 하는 예언을 믿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그래서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결국 자신이 미쳐버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왕의 권위를 합당하지 않았지만, 왕 자신이 우리에게 승계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 하셨음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이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내가 누구이고 그분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도 그분을 이기고 나에게 주신 것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축복을 멜키체덱 대사제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받았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과를 반드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덕이가 자신이 구덕이였음을 잊으면 옥태영으로 살아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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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생 때입니다.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생은 질문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질문하는 경우와 아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입니다. 모르는 친구들은 수업에 큰 관심이 없어서 질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저도 질문하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면서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도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에 문제를 내시고, 제게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걸 아시기 때문에 맡기셨습니다. 고등학생 때입니다. 친구들과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출발시간이 되었는데 3명이 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남아서 기차표를 주어야 했습니다. 제가 남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좋아하던 여학생과 같이 가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제 친구가 함께했고, 저는 남아서 늦게 온 친구들에게 표를 주고 같이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그 여학생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고,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늦게 오는 친구를 위해서 남아 있었던 것이 어쩌면 저의 사제 성소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서에 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늦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말주변이 없음에도 하느님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양치는 목동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리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직업, 나이, 성격, 재능이 다르지만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가 된 사람들,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 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와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은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거짓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다가오면 도망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거짓 예언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릇의 겉은 닦지만 안은 닦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아무 일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짐을 맡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됫박으로 가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서 남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막는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신앙은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로또 복권 당첨이 아닙니다. 신앙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요술 지팡이가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짐을 남에게 떠넘기는 위선과 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방법으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최선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든지, 삶의 지뢰밭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유혹의 달콤함은 가리지 않고 모든 신앙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사야 예언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것처럼 ‘겸손’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교만함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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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은 부르심과 파견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르심을 받은 이가 사명을 받아 파견되기까지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거룩함 앞에 선 인간은 죄 많은 제 모습을 깨치기 마련입니다.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사야는 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직접 뵙고 그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입술이 더러움을 깨닫습니다. 예언자의 소명에서 핵심 도구인 입이 더럽다는 것은 근본적인 장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타는 숯으로 정화된 다음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전에 먼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하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노련한 어부 시몬은 밤샘 고기잡이에서 허탕을 칩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그물이 터져 나갈 정도로 잡은 물고기 앞에서, 아니 예수님의 신적 권위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죄인인 자기에게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0)라는 말씀으로 그를 정화하시어 새로운 임무로 부르시고, 시몬과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5,11) 예수님을 따릅니다.
교회를 박해하였기에 “칠삭둥이”(1코린 15,8)로 자처하는 바오로는 열두 사도와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은총으로 정화되어 “지금의 내가”(15,10)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도 부르심부터 파견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렇게 우리의 합당함이 아니라 부당함을 정화하여 응답을 준비시켜 주는 은총에 자신을 내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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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오늘의 주제는 부르심과 선교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 사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당신 선성, 사랑의 확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며, 부름을 받은 우리가 갖는 선교 사명은 하느님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확산시키는 고귀한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 협력자로 부르신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파견 질문에 대해 두려워했던 이사야는 놀랍게도 태도를 바꾸어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 이 같은 용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루카 5,11)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처음부터 당신의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군중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을(2절) 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강둑에서 좀 떨어져서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3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4-6절) 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적은 바로 말씀의 힘이다.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은 베드로에게서 일어났다. 만일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복음은 선포되고 또한 철저하게 믿어지며 생활화되어야 하며,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사람을 낚는 고기잡이가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철저히 믿고 받아들인 복음이 지금까지의 생활을 변화케 한다. 이 같은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11절)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께서 보여주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에서 떠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베드로의 수위성이다. 우선 예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기 위해 택한 것이 그의 배였다.(3절) 그리고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명한 것도 베드로에게 하셨다(4절).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장본인이 베드로이다.(5절) 그리고 기적을 본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도 베드로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 앞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것도 베드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베드로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시고 기적의 고기잡이를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베드로 없이는 선교사명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베드로가 교회 일치를 이루는데 장애물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역할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듯이 다른 또 하나의 배는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도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배가 다 “가라앉을 정도가”(7절)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풍성한 고기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베드로의 배를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복음을 충실히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전했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믿고 받아들인 것을 말하고 있다.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1코린 15,11)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부당한 존재로 느끼지만,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용기를 가지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이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려는 순명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그분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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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허무’에서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4-11)
1) 여기서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들의 상황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합니다.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이 시편은, 단순히 ‘인생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없는 인생은 허무하다.”라는 뜻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인생은 목적지가 없는 ‘유랑’이고, 그래서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목적지가 분명히 있고,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허무한 유랑이 아니라 ‘본향’으로 가는 ‘귀성 여행’입니다.
신앙생활은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누구든지,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그 허무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어부들은 ‘인생의 허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또 벗어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로 그분이 인간을 허무에서 해방시켜 주실 ‘메시아’ 라고 믿었습니다.(요한 1,41).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때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부르심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응답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는 말씀에서 ‘깊은 데’는 ‘허무하지 않은 인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는 일은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알려 주시고, 그 나라에 가는 길을 알려 주시는 일까지만 해 주시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곳에서 그곳으로 들어 옮겨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기적”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어부들만 체험한 기적입니다. 그래서 그 기적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위한 기적인데, 기적 자체가 ‘부르심’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3) 그런데 만일에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이 아니라, 몇 마리 정도 잡은 상황이었다면? 또는 그럭저럭 생계에 도움이 될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면? 그래도 ‘허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
세속적으로 성공을 거둔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더 큰 허무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릅니다. 사실 세속의 성공과 출세는 허무하게 사라질 먼지 같은 것이고, 먼지는 아무리 많이 모아도 먼지일 뿐입니다.
4)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주님의 권능’에 압도된 인간이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동시에 이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희망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어부 시몬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는데, 8절에서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경외심’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들을 사도로 뽑으시겠다고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단순히 가지고 있던 소유물들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옛 인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새 인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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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동걸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삶>
성경 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시는 여정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인도로 이루어진 부르심(요한 1,40-42),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이루어진 부르심 (마태 4,18-20; 마르 1,16-18), 그리고 오늘 복음의 내용 (루카 5,1-11)입니다.
예수님의 지속적인 부르심과 그에 따른 베드로 사도의 갈등과 번민, 두려움과 주저함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묵상하게 되며,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예수님께 어느 정도의 관심과 존경심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걸어가시고자 하는 인생길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 짊어져야만 하는 삶의 무게와 책임감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자신은 죄 많은 사람이니 떠나 주십사고 청 하였습니다.
‘주님, 당신의 일은 이 세상의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당신께 어느 정도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일(고기잡이)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더 적합한 사람을 찾아가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걱정이 무엇인지, 베드로 사도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힌 물고기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네가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 잘 알고 있으며, 언제든지 줄 수 있다. 그러니 너는 두려워 말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원합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시며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물 가득 잡힌 물고기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사실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이 필요하고 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보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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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준비 작업”>
어떠한 일을 하거나, 하던 일을 접고 새로운 일을 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이 준비 기간입니다. 여러 분의 자녀가 군대에 가면 바로 자대로 배치되는 것 이 아니라, 적어도 한 달간 군대 생활에 필요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러한 준비, 훈련 기간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능한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준비하게 됩니다.
이때 잘 변화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준비 작업은 사람이 악하고 나약한 존재이기에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그릇되고 악한 습성을, 나태하고 부족한 면들을 고쳐 성숙하고 성화된 모습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입니다. 과거의 모 습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화 작업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사명을 받기 위한, 새로운 일을 수행하기 위한 정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1독서에서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라고 고백하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하느님께서는 타는 숯으로 이사야 예언자의 악과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렇게 죄의 사함이라는 정화 과정을 거친 후에 하느님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는 고백을 합니다.
복음에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에게 변화될 수 있는, 정화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새로운 삶, 일을 부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나, 우리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실 때, 먼저 준비 과정을 거치십니다. 과거의 모습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신 후에 당신의 제자로,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정화’입니다. 과거의 그릇된 악습에서 죽고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변화되어 야만 하느님의 제자가, 일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새로움은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살면 얼마나 사냐. 그냥 이대로 살다 죽지 뭐!’라는 마음으로 안주하려 합니다. 이에 변화되기 위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정화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하느님께서 우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나 자신과 하느님을 속이는 것들이 남아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참된 하느님의 제자요,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변화되어라. 내가 너와 새로운
사랑을, 관계를 맺으려 하니 과거의 악과 죄에서
정화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주님께 우
리는 어떻게 응해야 할까요? 많이 사랑받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더욱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기 위헤서는 그에 합당한 자세률 지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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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송규진 유스티노 신부님]
<겸손은 우리의 힘>
오늘 복음(루카 5,1-11 참조)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힘이 빠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밤샘 후 몸도 마음도 심란했을 텐데, 그런 와중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고선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는데 그 말씀이 얼마나 귀에 들어 왔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난 후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리라는 그분의 말씀에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부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베드로는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때의 베드로였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제가 만약 베드로였다면 예수님을 어부로 영입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떠나달라 말합니다.
어부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보다 갑작스러운 큰 이익 앞에 두려워하며 이런 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 고백하는 베드로의 모습, 그리고 그런 베드로를 제자로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단박에 이해시켜 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겸손은 어부도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게 했고, 큰 이익 앞에서도 두려워하며 그저 그런 복을 누릴 자격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오늘 2독서의 바오로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그는 교회 안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전에 교회를 박해한 사실 때문에 자신은 칠삭둥이며 사도들 가운데 보잘것없고,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늘 기억하며 살아갑니다.(1코린 15,1-11 참조)
우리는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힘,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주님을 만날지 모르니 항상 겸손할 수 있도록 그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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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영훈 베드로 신부님]
<주님께 사로잡힐 결심>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힘이나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들만하다.’는 말입니 다. 예수님과 부르심을 받은 어부들의 특별한 만남을 전해주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에 압도된 이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호숫가에 있던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많은 군중을 가르 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나가 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십니다. 고기잡이 전문가 였던 그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무슨 이유인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지치고 상심한 상태였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고, 기적 앞에서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죄 많음을 고백하며 떠나달라는 시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을 낚을 것이라며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고기잡이 기적은 사실 그 결과만 두고 본다면 어부들 에겐 대단한 횡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에 압도된 이들이 느끼게 된 감정은 ‘놀라움’을 넘어선 ‘두려움’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지만 불신, 의심이 너 무나 컸기에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피어오른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을 위로하시며 그들을 제 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께 압도된 이들의 첫 마음이 두려움이었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의 마음은 예수님께 사로잡힐 결심, 설렘과 안도감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신으로 인한 두려움과는 다른,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 중 ‘경외심'(두려워함)은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겸손한 마음이며,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와 악을 멀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그 사랑에 압도되어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은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초대에 따랐던 제자들처럼 주님께 사로잡힐 결심과 용기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마태 22,37 참조)고 말씀하셨습 니다. 바로 주님께 사로잡힌 삶, 그분과 일치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광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주님께 사로잡힐 결심을 기쁘게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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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성당에는 어린이 미사에도 또 청소년 미사에도 많은 아이가 나옵니다. 교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큰 희망이고 또 큰 기쁨이지만, 50대 중반을 넘어선 제가 아이들과 함께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세대 차이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하고 나면 힘이 짝 빠집니다. 함께하는 젊은 신부 한 명만 있어도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신부의 부족으로 인해 우리 본당에 보좌 신부가 올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친한 선배와 이야기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었던 고민, 즉 본당에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혼자 아이들을 담당하기에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우울한 마음으로 이야기했는데, 선배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내서 열심히 아이들에게 관심을 둘 수 있었습니다. 나니까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하니까요.
힘이 되는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힘이 빠지는 말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요? “너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데도, “너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라는 말을 해 버렸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로 더 안 되는 길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십니다. 군중은 주님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그물만 씻고 있을 뿐입니다. 그물을 씻고 있다는 것은 어부 일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고단한 일과를 마쳤는데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을 따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따릅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도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베드로는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적 권위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표현합니다.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인데, 하느님의 말씀에도 그렇게 집중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에 커다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힘이 되는 이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희망의 말씀을 계속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세상의 일에만 집중하면서, 주님 곁을 떠나고만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의 이웃에게는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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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이 오시니 나는>
루카 5,1-11 (고기잡이 기적-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님이 오시니 나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그들은 …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믿을 수 없는 때에
믿음이 오시어
믿으라고 하시니
우상의 손길을 물리치고
나는 꿋꿋하게 믿네
희망할 수 없는 때에
희망이 오시어
희망하라고 하시니
체념의 덫을 걷어버리고
나는 새롭게 희망하네
사랑할 수 없는 때에
사랑이 오시어
사랑하라고 하시니
무관심의 물살을 거슬러
나는 오롯이 사랑하네
자유로울 수 없는 때에
자유가 오시어
자유로우라고 하시니
압제의 사슬을 끊고
나는 마음껏 자유롭네
진실할 수 없는 때에
진실이 오시어
진실하라고 하시니
거짓의 껍데기를 벗고
나는 해맑게 진실하네
품을 수 없는 때에
품음이 오시어
품으라고 하시니
차가운 울타리를 허물어
나는 따뜻하게 품네
돌볼 수 없는 때에
돌봄이 오시어
돌보라고 하시니
닫힌 마음 활짝 열어
나는 살갑게 돌보네
일어날 수 없는 때에
일어남이 오시어
일어나라고 하시니
몸과 마음 새로 돋우어
나는 거뜬하게 일어나네
나아갈 수 없는 때에
나아감이 오시어
나아가라고 하시니
거칠고 모진 마파람을 뚫고
나는 힘차게 나아가네
살릴 수 없는 때에
살림이 오시어
살리라고 하시니
살려고 죽이지 않고 죽더라도
나는 기꺼이 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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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명으로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그 어려움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따름으로써 믿음이 성장합니다. 이시간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해도 따르는 사람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 한 가르침이 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고 하셨을 때 시몬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가5,5)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부로서의 생활을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시몬은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신뢰에 찬 순명은 경이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시몬이 만일 그 말씀을 무시하여 듣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도 고기를 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석, 으뜸 제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시몬의 순명이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 있게 만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순명이란 자신의 지식과 사고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권위에 대한 신뢰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기를 잡는 시몬은 자기 경험과 판단을 제쳐놓고 목수 출신인 예수님의 권고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도록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고기잡이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 말씀의 권능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관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와 같이 행동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듣고, 새기고, 들은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낙심하고 지친 시몬과 다른 어부들을 위해 이루신 기적은 단순히 고기를 많이 잡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패배 앞에서 실망과 낙담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그들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음에도 기뻐하지 않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겸손하게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몬의 눈에는 고기 대신 권능의 예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단순히 스승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죄스러움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주님 앞에 서니 자신의 허물이 보였습니다. 그분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자기 자신을 보았기에 스스로 엎드려 자백한 것입니다. 이미 그는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시몬은 그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새 생활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은 따름으로써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내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고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내 것을 고집하는 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시몬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어부로서의 경험을 접었듯이 우리의 지식과 경험, 판단을 주님께 맡길 때 놀랍게도 신앙의 눈이 새롭게 뜨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의 애착을 버림으로써, 그리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감히 예기치 못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 이라고 부르지만, 권능을 만난 다음에는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의 삶은 믿기 전과 후가 분명 달라야 합니다. 오늘 성당에 오실 때의 마음과 가실 때의 마음은 달라야 합니다. 말씀과 성체를 통하여 주님을 마음에 모셨으니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여 발걸음을 재촉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삶이 바뀝니다.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아주 오랫동안 쉬다가 오시는 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분의 고해성사는 내용이 아주 짧습니다. 몇 마디로 죄를 고백하고 잘 기억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자주 고해성사를 보는 분들은 내용이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주 보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가까이 있으면, ‘들보’ 같은 죄도 안 보이다가 ‘티’ 만한 죄도 보이게 됩니다. 영혼의 거울이 맑고 깨끗해진 까닭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 앞에 서면 어느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 라고 고백하였듯이 우리도 주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보게 되고 그에 상응하는 자비를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1장21절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권능의 말씀을 받아들인 여러분 안에 구원의 기쁨이 넘쳐 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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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0-11)
우리는 제각기 다른 처지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전문가 어부로서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여 낙담한 시몬은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깊은데로 내렸습니다. 자신의 익숙한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자, 시몬은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고 보잘것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인 자신을 떠나 달라고 주님께 청하지만, 예수님은 시몬의 겸손함을 더 크게 보십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시자, 시몬은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베드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 또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음성을 듣고 자신의 불완전한 처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라고 말하며 자신은 더러운 입술을 가지고 주님 뵙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이사야 예언자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며 부르심에 바로 응답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위대한 예언자로 자신의 삶을 투신합니다.
제 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라며 미천한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일에 일생을 바칩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영광을 자신이 누리게 된 것은 자신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하면서,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께 감사하라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은총으로 위대하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우리의 처지는 보잘것없지만, 부르심의 은총으로 우리는 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은총에 감사드리며 주님의 일에 투신하도록 우리는 초대받았습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가 되어
제각기 다른 성소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은 백인대장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으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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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5,8.11)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규정한 철학자들의 요점을 요약하자면, 무릇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어떤 그 무엇을 할 것인지, 하지 아니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근거로 선택한 것을 결단하고 실행할 능력이 가장 인간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의 경우는 선택의 무게 중심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과 결단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은총에 그 비중을 둡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인간의 선택이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갖추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낳은 결과이며 이를 오늘 복음은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때론 예기치 않은 때,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법으로 은총은 다가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부들은 밤새도록 일한 다음 그물을 씻고 있었으며, 소문을 들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배를 선택하여 타신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배에 오르자마자 베드로에게 배를 조금 저어나가라고 하신 다음, 배에 앉은 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참 평온하고 정겨운 광경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다음,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5,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작정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이 무슨 경우인가? 밤새도록 동료들과 그물을 던졌지만 공교롭게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이 아침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또다시 던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 고장에서 태어났고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이 바다와 그물질하기 좋은 시간과 자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인데 그리고 밤새도록 그물질로 피곤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편치 않은 상태인데 웬 그물질!!! 그러기에 베드로의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5)라는 표현 속에 베드로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도 경륜, 경험과 지식이 곧 자산이라고 할 만큼 베드로 역시도 자기 경력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대단했으리라 봅니다. 더욱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다른 밤과 달리 이상할 만큼 그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허탈감, 실망감으로 베드로의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던 겁니다. 이 상황을 표현하는 말, ‘애썼다.’라는 단어는 ‘나는 수고를 무척 많이 하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았고 그로 인해 나는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럼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애썼다.’라는 표현은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겪는 피로감, 불신감, 허탈감, 자포자기의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애써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나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자신에 대한 실망의 순간에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새로운 길로 초대하십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지금 바다에 다시 나가 그물질을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짓이니 저는 그만 집으로 가렵니다, 고 거부하고 돌아섰다면, 그는 평생토록 그 바다에서 어부로 끝날 인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삶을 바꿀 기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찾아온 그 기회를 붙잡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게 뭐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 나의 판단으로 아니올시다. 그럼에도 이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그 힘을, 생명을 느껴지니 어찌해야 하나. 마침내 베드로는 피로감이나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5)라고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아집이나 자존심, 경험과 지식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선택과 결단을 향해 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실망과 허탈 그리고 인생의 피곤함으로 힘들 때 베드로처럼 “스승님, 당신이 말씀하시니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당신의 은총을 믿고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 곧 밤새도록 그 바다에서 그물을 던졌던 그들에게 자신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니 그때야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 올라타시고 배를 저어나가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5,8)라고 고백합니다. 이 베드로의 말과 행위는 인생의 주인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승복이며 의탁이라고 봅니다. 이는 곧 사람들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죄를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얼룩져 보이고 비뚤어져 보이고 더 뚜렷하게 느끼리라 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저는 죄 많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베드로가 상대적으로 타인보다 죄가 더 많다, 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베드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仁慈를 더 많이 느끼고 깨달았다는 표현인 게지요. 하느님 자비의 거울 앞에 적나라하게 서 있는 베드로는 그러기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절감하면서 예수님의 대자대비하심을 체험했고, 그래서 그는 자기 동료와 함께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그분께 귀의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5,11) 겁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15,9~10)
이처럼 첫 제자들로부터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체험하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비로써 온전히 회개하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자비에 사로잡히지 못하면 우리는 온전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투신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이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오나 당신은 저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힘은 바로 당신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언제나 당신 말씀에 의지하고 당신 은총에 신뢰하며 제가 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 내면의 바다에 은총의 그물을 내리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주님께 의지합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합니다. 저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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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베드로의 배에 주님께서 올라타십니다. 그러고는 ‘배를 조금 저어 나가 주시지 않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어! 이것 봐라,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이래라저래라한다. 지금 열 받아 있는 모습이 안 보이나? 그리고 왜 이 사람은 내 배에 타가지고 나를 귀찮게 하는가? 그물도 손질해야 하고, 빨리 손질해서 다시 고기를 잡아야 집에 돌아가는데.’
그래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아직 주님이 누군지, 혹시 위대한 스승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배를 띄웁니다. 베드로가 진짜로 몰랐던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베드로 스스로가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물고기, 그물, 배, 심지어 자기 자신도 주님의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어쨌든 잠깐의 말씀이 끝난 뒤, 베드로를 돌아보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보십시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그곳에 그물을 던져 봤을까요? 아닐까요? 골백번은 더 던졌던 곳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물을 던집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놀라게 됩니다. 자기 생각이 뒤집히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니까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으로는, 고집으로는 안 되는 것인데, 예수님 말씀대로 하니까 됩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때야 인정합니다. 무엇을? 자신의 교만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정당하다, 정확하다, 잘못이 없다. 내가 맞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교만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 힘은 들고, 벌이도 안 되고, 그래서 지치고 피곤할지 모릅니다. 처음의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선 우리의 배에 타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라고 힘을 내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용기와 힘으로 다시금 배를 띄울 수 있기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빕니다. 모두 순명함으로써 대박 인생을 살아가시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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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1)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행복은 크게 존재의 행복과 소유의 행복으로 나뉩니다. 존재의 행복이란 제가 우리 엄마 아들이라 느끼는 행복이고, 소유의 행복이란 어머니가 저를 위해 밥을 차려주시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때 느끼는 행복이지요. 그리고 이 두 행복은 모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일, 즉 ‘생존’과 연관됩니다. 이 생존이 위협받으면 우리는 마음 속으로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들지요. 자기 소유를 늘려 불안감을 줄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나의 생존을 책임져 줄 수 있는 누군가와 깊은 일치를 통해 강한 유대감을 느낌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내 존재의 기반을 단단한 반석 위에 세워두지 않으면 불안 자체를 해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참된 행복을 누릴 수도 없지요. 참된 행복은 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내가 그의 뜻에 맞는 일을 충실히 실천할수록, 적어도 그 부분에서만큼은 나 스스로가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해지는 만큼 강해지는데,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 내가 소유의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불안을 극복하고 기꺼이 소유를 포기한, 그렇게 주님을 따름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두 어부가 예수님을 만나 처음으로 들은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갈릴래아 호수는 가로가 11킬로미터, 세로가 21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큰 호수입니다. 수심 또한 깊어서 호수 중앙은 40미터가 넘지요. 게다가 저녁 때가 되면 호수 중앙에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뒤엉켜 거센 풍랑이 일어나는데, 한번 그 풍랑에 휩쓸리면 아무리 숙련된 어부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거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저녁시간에 조업할 때면 되도록 호수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깊은 데까지 저어나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외적인 환경이나 물질적인 조건에 집착할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쉽고 편한 방법으로는 만날 수 없으며,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수고와 변화되려는 노력 그리고 그 힘든 과정을 끝까지 지속하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라는 배를 타고 마음 깊은 곳으로 저어나가 하느님을 만나면, 그분께서 우리 삶이라는 그물에 충만한 기쁨의 물고기들을 가득 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판단하려고 드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자기 판단만이 옳고 다른 이는 틀렸다고 여기는 독선과 교만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어부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발끈했을 겁니다. 내가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질한 세월이 몇 십년인데, 당신이 뭘 안다고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쓰라린 실패의 기억은 과거에 묻어두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자기 고집과 경험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실패의 쓴맛만 곱씹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자신에게 열릴지 모를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기로 한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 속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전에는 그분을 ‘스승님’으로 생각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나서 비로소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게 된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두번째 비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뜻에 순명하면, 그분께서 나의 삶에 놀랍고도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 삶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요. 그는 영적인 환시를 통해 높은 어좌에 앉아계신 주님을 보고는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고백합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부족하고 약한 인간인 자신은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지어 더러워진 존재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부정한 상태로 감히 전능하신 하느님을 뵈었으니 그분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려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던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벌을 내리시는 대신 그에게 ‘사랍’, 즉 가장 높은 계급의 천사를 보내시어 활활 타오르는 정화의 불꽃으로 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이에 큰 용기를 얻은 이사야는 당신의 일을 맡길 일꾼을 뽑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에게 그 소명을 맡겨달라고 자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겁 많은 죄인에서 용기있는 예언자로 변화되었음을 행동으로 드러낸 것이지요.
다시 오늘 복음으로 돌아와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분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서게 되면 이렇게 인간은 자신이 그분을 뵙기에,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누리기에 한없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럼에도불구하고 베드로를, 그리고 우리를 특별한 소명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그 소명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도록 이끄시지요.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겁쟁이에서 대 예언자로 변화시키신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를 고기 잡던 어부에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선구자, 인도자로 변화시키신 겁니다. 참된 행복은 그 변화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참된 행복은 두 단계를 거쳐 다져지고 완성됩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재물과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세속적인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들에 집착하고 의지하기 시작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모든 걸 잃게되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세속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등에 업고 내 뜻을 이루는 ‘호가호위’가 아닙니다. 주님 뒤에 서서 그분만 바라보며 철저히 그분 뜻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추종’의 삶이지요. 그 과정에서 당장은 손해를 보고 희생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로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여 완전히 비워낸 그 그물에 주님은 은총과 축복을 넘치도록 가득 담아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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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성칠 미카엘 신부님]
<깊은 곳으로 돌아오라>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
바람결 따라 들려오는 주의 말씀 들었네
예수님의 말씀 따라서 모든 것 버린 사람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주의 제자 되었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그 그물을 버리고
이제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 (김정식, 나를 따르라/생활성가)
고기잡이 나가는 사람들은 만선(滿船)의 꿈, 풍어(豊漁)의 꿈을 꿉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고기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만선의 꿈을 싣고 배 저어 나갈 때 부르는 노래도 고장에 따라 많이 발달했습니다. ‘썰 소리’로 알려진 <노 젓는 소리> 듣고 가겠습니다.
“에헤 어기여~
멸치 잡어 보리 팔고
쌀을 팔아 자식들 먹고
우리 집에 웃음꽃 피네
에헤 어기여”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한 어부와 예수님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몬은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합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빈 그물을 손질하던 마음은 참으로 외롭고 허전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잔챙이밖에 잡을 게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깊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그러나 이 말씀에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배철현 교수는 “깊은 데로 가라”는 그리스어 본문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인간의 위대한 질문, 63쪽)
‘깊은 곳’이란 호수의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깊은 곳’이란 일차적으로‘바닥이 없는 심연’이라는 뜻입니다. 더 깊은 뜻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발견하는 곳입니다.그러니까 ‘깊은 곳’이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 속 깊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만나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계신 것이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합니다. 익숙한 해변으로부터 떠나감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여기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수반될 것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의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깊은 곳’을 알게 된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 부릅니다.(루가 5,8) “깊은 곳”을 알게 된 시몬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죠. 디팩 초프라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네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너만의 독특한 재능을 찾아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라 그러면 너의 인생은 부유해질 것이다.”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고기를 잡던 사람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데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그 전문가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다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보다 훨씬 더 깊고 심오하다 하였습니다.(1 고린토 1,25) 그것을 깨달을 때, 사람은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잘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생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기를 잡아야 돈을 벌 수 있고, 노동을 해야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말을 우리는 이제까지 이런 뜻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라.’
‘사람을 구원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라.’
그러나“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해석으로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당신 안에 숨어 있는 신성(神性)을 낚아채는 어부가 되십시오.”
“당신의 인생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낚아채는 사람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