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절, 41-52절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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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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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공익 광고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깊이 공감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직장에서는 친절한 아버지, 상점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어머니,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아이들이 집에만 오면 모습이 돌변하여 무뚝뚝하고 다른 식구의 일을 도와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짜증을 내고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흔한 일이지요?
모든 이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가정도 큰 고민거리를 하나씩은 안고 살아갑니다. 더욱이 요즈음에는 경제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정을 이루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들고 부담스러워진 것도 사실이지만, 현실이 너무 심각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혼자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입으로 수백 번 신앙 고백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그 신앙을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들 부부가 모두 신자일 때 ‘성가정을 이룬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성가정을 이루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에페소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훈계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이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장소가 바로 우리 가정일 때, 비로소 우리의 가정은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는 아름다운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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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야기 해봅시다.

2.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을 때 우리 삶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할 때 어떤 변화와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3.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합당하지 못한 자리에 머물 때가 있었는지 묵상해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합당한 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하기: 오늘 말씀(묵상/동영상)을 통해 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되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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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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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날 가정은 많은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가정이 도덕적으로 파괴되면 사회와 교회도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어 인류의 첫 가정을 만드셨고, 모든 인간이 가정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자라나기를 바라셨습니다. 가정 안에서 당신 사랑의 계획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외아들도 예외 없이 가정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로 이루어진 성가정은 매우 신앙적인 가정이었습니다. 여자는 순례 의무가 없지만, 마리아는 해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 가는 요셉과 동행하였고, 열세 살이 된 남자는 모든 권리와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성인으로 선언되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축제를 지내러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면서도 그에 따른 불편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오가는 사람들은 남자들 일행과 여자들 일행으로 큰 무리를 지어 다녔는데 어린이는 어느 쪽으로든 다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예수님이 요셉과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반면에 요셉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날 일정을 마치고 식사와 저녁 휴식을 위하여 함께 모였을 때 예수님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녁 식사도 거르고 밤을 새워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그들은 사흘 뒤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큰 걱정과 불안이 담긴 마리아의 말을 통하여 예수님을 향한 요셉과 마리아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 삶의 중심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완전히 잊고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가정에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087
12월29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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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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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cPJ5VlIqHs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전진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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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정말이지 힘든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순명의 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하라시니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하는 순명이 아니라,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하게 접는다는 것, 분명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는 것, 타인의 생각과 계획에 내 삶을 종속시킨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그러한 정황을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참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삶 전체, 당신의 미래를 인간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극도의 자기 낮춤이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지만,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수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 장상들도 회원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때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순종하신 예수님, 그 놀랍고 감동적인 덕행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이 있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운 나머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살벌한 죽음의 현장,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순명의 덕과 관련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는 돈보스코 시대 때부터 내려온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Faccio Io, Vado Io’(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통입니다.

굳이 장상이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사리 부탁하기에 앞서, 수도자들은 미리 장상의 괴로움을 파악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원장님, 어려운 일이 있으신가보군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관구장님, 어디 힘든 자리로 누군가를 보내기 위해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목소리로 ‘Faccio Io, Vado Io’를 외치지만, 어딘가를 보내면 그쪽에서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러니 잘 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어디를 가든 공동체와 잘 어울리면서, 기쁘고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어딜 가든 그쪽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집회서와 바오로 사도가 건네는 권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콜로 3,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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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8WhgHeoq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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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의 핵심은 각자의 확고한 사명 인식에 달렸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인식이 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모습만 보면 일치하는 가족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모 말을 안 듣고 성전에 남아있었고 성모님과 요셉은 아들이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너무 늦게서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거룩한 가정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 각자 다른 확고한 사명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를 떠올려 봅시다. 이 영화는 일상에 갇히고 권태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지만 부부가 공동의 사명을 발견하고 함께 외부의 어려움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는 가족이 각자의 욕망을 넘어선 공동의 목표를 발견할 때 비로소 살아난다는 진리를 반영합니다. 공공의 적이 생기면 싸우다가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가족의 공통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모두가 천당 가는 게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 가운데서도 가족이 서로 분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자가 가진 ‘욕망’ 때문입니다.

영화 ‘17 어게인’은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묵상해보게 합니다. 고등학교 때 유망한 농구선수였던 남자는 여자 친구의 임신으로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당장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야 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되고 회사에서는 능력이 없어 명퇴하고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자녀들도 무능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깨어보니 다시 17살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운동 잘하고 인기 있는 학생이 됩니다.

주인공은 학교에서 자기 딸과 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각자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녀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홀했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에 대한 탓을 가족에게 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농구로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아내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상황에서 그는 주저 없이 아내를 다시 택합니다.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른 욕망이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가정은 다시 정상화됩니다.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사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사명을, 성모님은 이 사건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묵상해야 하는 사명을,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각자 다른 사명이지만, 같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명이기에 가족은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모님은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라며 남편을 앞에 둡니다. 요셉 성인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나의 청을 알리는 시간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각자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가족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절대 하나인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불만만 쌓여갈 것입니다.

존과 아일린 크롤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엑스트라오디너리 메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세 자녀 중 두 자녀가 폼페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10대 초반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존은 절망으로 일에만 전념합니다. 아일린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 싫습니다. 둘은 한참을 싸웁니다. 그러다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당장 해야 할 일을 깨닫습니다. 어떻게라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치료제를 찾겠다고 합니다. 아내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그렇게라도 해보라고 합니다. 존은 치료제를 개발하던 사람을 만나 결국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치료제를 개발하게 됩니다. 두 자녀가 완벽히 치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데 성공했고 이 치료제는 덕분에 전 세계의 모든 폼페병 환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부부의 같은 사명이 있고 각자의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때만 가정에 화목이 있습니다. 함께 오래 바라보기만 한다고 사랑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각자의 방식대로 깨닫고 참여할 때 그 가정은 그 뜻 안에서 성가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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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 아침 성당 가는 길이었습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나올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우선도 없이 성당으로 갔습니다. 중간쯤 가면서 비가 내렸습니다. 사제관으로 가기도 그렇고, 비를 맞으면서 성당으로 갔습니다. ‘머피의 법칙’이 제게도 해당하는지 그만 성당 열쇠를 사제관에 놓고 왔습니다. 아무리 본당 신부라고 해도, 열쇠가 없으면 성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조금 기다리니 수녀님이 오셨고,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를 맞으며 걸어오면서 예전에 토론토에서 지냈던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2005년 11월에 저는 해외연수를 신청했고, 토론토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과 저는 2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따로 지냈습니다. 말을 배우려면 따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2달 정도 지내다가, 동창 신부와 저는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말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낯설고 먼 타향에서 같이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2년 동안 지내면서 부부가 같이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집은 열쇠가 있으면 열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어야 열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3가지 차원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께서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는지,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서 머물렀던 ‘구유’가 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족이라는 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혼자 있어야 하는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가족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 모두는 가족이라는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늘과 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지구라는 집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지구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한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가정 역시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추억, 기억, 상상력’이 시작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가정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소중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가족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 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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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간에 사랑의 막을 쳐야 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한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정교회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1979.1.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라고 하셨으며 그 때문에 가정 사목에 중점을 두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가족관계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의 교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누구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에 속한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가정을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도록 초대하고 있다.

복음: 루카 2,41-52: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이고,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루가 24,26.46-47)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자렛 가정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분위기는 마리아가 걱정하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48절)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보는 가정은 모두가 아무런 번민, 즉 갈등, 오류, 실패, 질병,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만큼 이상적인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모두 이럴 수 있다.

여기서 신앙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가족들을 더 가깝게 일치시켜 주고 밝은 희망을 줄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 하느님을 통해 보이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1-52절)라고 복음을 맺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의 사고를 요구하는 대목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50절) 한다.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가 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일 것이다. 이 신비는 그의 부모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 과정에 있는 인간존재 안에는 ‘신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제2독서: 골로 3,12-21: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콜로새서에서도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각자는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날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이 자연적 가정에도 새로운 힘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자렛 가정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2천 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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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머니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양아버지였던 요셉과 혼인한 뒤, 당시 임금이 아이를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아들 예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일은커녕 어부들과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우리가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실상 행복한 가정이나 기쁨이 흘러넘치는 가정, 또는 자녀들이 성공해서 부모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정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가정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루카 1,38 참조)을 가지셨고, 요셉 성인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마태 1,24; 2,13-15.19-23 참조)으로 살았으며,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도 순종하셨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이해하기 어려우실 때조차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루카 2,51 참조)

오늘날 많은 가정이 사랑을 잃고 가족들은 외로워합니다. 가정이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순종, 마음속에 간직함,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 이것이 가정이 성화되는 길이고, 외로움과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빠져 나오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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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말로만’ 말고, 실제로 ‘형제자매’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41-52)

1)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뽑으신 거룩한 백성, 즉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이니, 신앙인들의 가정은 당연히 성가정입니다. <최소한 성가정이 되려고 노력하는 가정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ㅠ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나름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신자들의 가정들 가운데 일부 망가진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부의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체의 모습인 줄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고, 특히 신앙인들의 삶을 너무 깎아내리기만 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보다 착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그래서 이 세상이 그런대로 돌아갑니다. 신앙인들도 대부분은 착하고, 또 열심히 살고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겨도 우리 교회 공동체는 그런 일들을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성가정’을 본받는 것은, 또는 성가정을 이루는 일은, 도달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누구든지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가정이니,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니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자만심에 빠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너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정을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겸손하게 부족한 점을 살펴서 바로잡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또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2)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라고 묻는다면, “누구에게나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는 교회”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가정이 좋은 가정인가?” 라고 묻는다면, 모든 식구들이 안식처로 생각하는 가정, 지치고 힘들 때 쉴 수 있고,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가정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너무 거창하게 높은 목표를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식구들이 서로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사목의 방향을 ‘가정의 복음화’에 맞추고, 그것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1인 가정’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부족한 모습이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독거노인들도 많고, 어려 가지 이유로 젊은 사람들이 혼자 사는 경우도 많은데, ‘가정의 복음화’를 강조하면서 그렇게 혼자서 사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외롭게 사는 이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어 버리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의 성가정은, 요셉 성인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 식구가 함께 살았던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십오 년이 안 될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뒤에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따라다니셨다고 해도 사실상 혼자서 지내셨다고 말할 수 있고, 승천하신 뒤에는 사도들이 성모님을 모시긴 했어도 혼자서 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도 ‘1인 가정’의 생활을 꽤 오래 하셨던 셈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이고, 각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두 공동체는 따로 떨어져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실 하나의 공동체이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나는 당신을 나의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실제로 형제자매로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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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송양업 토마스 신부님]

<머무르고 싶고, 가고 싶은 ‘거룩한’ 집 ‘성가정’>

힘이 빠지고 지쳤을 때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여러 생각이 들겠지만 많은 경우에 그리고 저의 경우에도 ‘집’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힘들면 입버릇처럼 한숨과 함께 “아! 집에 가고 싶다.” 혹은 “아! 집에 가야지,”라는 말이,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뱉어집니다. 집이라는 곳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또 나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내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집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상황과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중에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잘 아는 루카 복음에 등장하는 ‘돌아온 둘째 아들’도 그러했습니다.

삶의 끝자락을 마주하는 듯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곳이 ‘아버지께서 계신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소년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집’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으셨나 봅니다. 결국 ‘집’이란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 가장 가고 싶은 곳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그 ‘집’과 ‘뜰’을 ‘가정(家庭)’이라 부릅니다.

머무르고 싶고, 가고 싶은 집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먼저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가르칩니다. 그리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가정의 각 구성원들에게 당부합니다. 독서의 말씀들은 표현에 있어서 지금 시대와 꼭 맞아 떨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뜻은 어느 시대와 세대를 막 론하고 이루어야 할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고자 기도하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나자렛의 가정이 ‘거룩한 가정’인 성가정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머무르고 싶은 집, 가고 싶은 집을 이루려 노력하셨고, 그것을 이루어내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거룩함’이란 그저 멀리 있어 가까이 갈 수 없고,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히 머무를 수 있고, 편히 갈 수 있고, 언제나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것이 ‘거룩함’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한 주간 ‘거룩한 우리 집’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노력 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거룩한 우리 본당’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 나의 아버지의 집에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ἐν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

그리스말 본문에는 ‘집’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직역하자면, ‘나의 아버지의 그것들 안에’인데, 보통 ‘그것들’을 ‘집’이나 ‘일들’정도로 번역합니다.

집이든, 일이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 안에 계신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늘 아버지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역시 매사에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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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의정 바오로 신부님]

<성가정, 세상의 작은 교회>

성탄 후 첫 주일이자 2024년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며 가정의 참 의미에 대해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린 예수님을 사흘이나 지나서야 되찾으신 후,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도 그저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묵상하는 모습, 바로 여기에 성가정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각자가 개인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위로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 가정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불편한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에 가정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관계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조건 없는 사랑의 관계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 줍니다..가정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경험하는 장이자 세상의 작은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정이 보여 준 성가정의 참 의미를 깊고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고 주일미사에 충실히 참여한다고 해서 성가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 배우자, 부모를 대할 때 자신의 바람과 기대를 투영하는 대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성가정을 이루는 기초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이들, 혹은 가정에서 배제된 이들에게도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저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타국에서 지내다 보니, 자신의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아주고 신경 써주는 현지인들의 배려가 얼마나 큰 위로와 감동을 주는지 체험하곤 합니다.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 초대되어 베풀어지는 따뜻한 식사 한 끼는, 지치고 경직된 마음을 모두 녹여주고 충만한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곤 했습니다. 언어와 문화, 생김새가 다름에도 얼마든지 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직접 느끼는 체험이었습니다. 이렇게 기꺼이 이웃에게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열린 성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주는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 됩니다.

성가정 축일과 가정 성화 주간을 맞아 여러분의 모든 가정이 주님의 충만한 축복 속에서,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는 가정, 다른 이들에게도 손을 내밀어주는 열린 가정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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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2,34,35)

성가정에서 태어난 한 아기를 보고 있습니다. 미래를 품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진’ 미래를 품고 있는 아기입니다. 불의에 상처를 받고 진리이기 때문에 표적이 될 미래입니다. 성가정은 모든 불의를 이겨내게 아기를 양육합니다.

성가정에서 자란 내면의 아기를 보고 있습니다. 과거를 품고 과거에게 미소를 짓는 내면의 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었던’ 우리 내면의 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가정은 우리 내면의 아기가 받은 상처를 치유의 선물로 변화시켜 줍니다.

미래를 모르는 한 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낼’ 아기를 보고 있습니다. 성가정은 칼에 찔린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물로 세상을 구원할 미래의 아기를 양육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 내면의 아기를 보고 있습니다. 과거를 아는 내면의 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었던’ 아기를 보고 있습니다.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성가정의 아기입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아픔을 겪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운명과 같은 미래가 있고 과거가 있는 내면의 아기입니다. 두려움이 앞을 가려도 걸어야 할 길을 가도록 용기를 주는 곳은 성가정입니다.

성가정은 우리가 반대의 표징이 되어 쓰러져도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지도록 양육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찔려서 아프더라도 성가정은 우리를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예수 마음을 닮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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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주님을 가정의 중심에 모시고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다짐을 되새기는 날이지요. 세상살이가 각박해지고 나만 생각하는 개인주의가 만연해짐에 따라 가정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이라는 유대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오해하고 반목하여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남’보다 못한 ‘웬수’가 되어버렸지요.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내 ‘식구’이기에, 세상 모두가 나를 비난해도 끝까지 내 편에 서 줄 든든한 버팀목 역시 가족 뿐이기에, 우리는 가정생활을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난관들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가정이 지닌 참된 의미와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 속에서 나자렛 성가정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이 좋은 모범이자 이정표가 되어줄 겁니다.

오늘 복음이 진행되는 상황적 배경은 ‘파스카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이 축제 때가 되면, 전국 각지 심지어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감사와 속죄의 예물을 바쳐야했지요. 예수님이 열 두 살 되던 해에 그분의 가족들도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축제가 끝난 뒤 다시 고향인 나자렛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께 간 일행 중 누구도 예수님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일행을 알아서 잘 따라다니고 있으려니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대충 넘어간 것이지요. 가족들 사이에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안일함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래서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관심있게 지켜보며 제대로 대화를 나눠볼 생각은 하지 않고, ‘괜찮겠지’, ‘설마 별 일 있겠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대하다보니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관계가 소원해지고 마는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당장 진지한 얘기 꺼내기가 불편하고 어색하다며 대충 넘어가거나 적당히 무마하려고 들면 서로의 관계가 멀어지고 틀어진 그대로 굳어져버려 돌이킬 수 없게 되지요.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즉시’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도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즉시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사흘 밤낮 동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헤맨 끝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삶의 전부였기에, 예수님이 그들 삶의 중심이었기에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며 그분을 찾아다닌 겁니다. 그런 모습에서 두 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지요. 아들 예수를 향한 두 분의 큰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비난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마 다른 부모였다면 가족들 품에서 벗어나 제 멋대로 행동함으로써 큰 걱정을 끼친 자식을 호되게 나무랐겠지요.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회초리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먼저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또한 자기들이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부모가 이런 식으로 자녀들을 존중하며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오해나 갈등이 생기는 일도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걱정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 때문에 반항하려고 하신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바람직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려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집, 곧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품 안에 온전히 머무르려면 그분께 대한 믿음이 그리고 그분 뜻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지요.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니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간직하며 따름으로써, 나 또한 그분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가정이 성가정으로 점차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세상살이가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따로 시간을 내어 ‘외딴 곳’에 머무르며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라는 신앙적 가치는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 즉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나와 다른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즉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행하는 ‘하느님 사랑’이 세상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구체적, 실질적으로 실현되며 참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 신경쓰느라 정작 가족들을 등한시하고 그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성가정’이라는 가치는 머리 속에서 ‘뜬 구름’ 같은 관념으로만 머무르다 금새 흩어져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자렛 성가정의 구성원들도 서로를 향한 사랑을, 가족으로써 해야 할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먼저 아들 예수님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를 답답하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분들 뜻에 순종하십니다. 또한 성모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말을 ‘어른의 관점’으로 섣불리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하나도 빠짐 없이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그 의도와 뜻을 찬찬히 되새겨 보시지요. 오늘을 살아가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렇게 대할 수 있다면, 우리 가정은 이해와 존중, 배려와 사랑이 넘치는 참된 행복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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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의 부모는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2,50~51)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1921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그 배경은 20세기 말부터 유럽에 시작된 산업 사회는 인류의 기본 공동체인 가정의 가치를 훼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 환경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자각한 교회는 성탄 후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현재 가정의 붕괴는 더욱 심각한 상태입니다. 2024년 3월에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2023년 혼인과 이혼 통계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혼인 건수는 194,000건, 이혼 건수는 93,300건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이혼 사유는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실제로 경찰청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222,046건이었고, 매년 20만 건 이상 꾸준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배우자가 가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41.2%의 청소년들은 가정이 더 이상 안정과 따뜻함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의 52.9%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열심히 일은 하지만 단지 실망의 대상이요 배척받는 대상일 뿐이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참 안타까운 통계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학교가 무너진다, 도덕이 무너진다, 경제 기반이 무너진다는 소식을 통해 각종 문제가 돌출되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클린턴 가드너라고 하는 사회학자는 정말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정이 있으면 아직 다 잃은 것이 아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져도 가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삶의 의미나 살아야 할 이유도 무너지고, 삶의 목표도 무너집니다.

예전에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는 날 한 기자가 물었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가장 긴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테레사 수녀가 웃으면서 답했답니다. “기자 선생께서 빨리 집에 돌아가셔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계 평화도 좋고, 사업 성공도 좋고, 출세도 좋고, 이름을 날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면서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없어진 줄 알고 사흘 동안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성전에서 찾게 된 후에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당연한 질문을 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2,48) 마리아는 예수님의 행동에 질책보다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선입견에서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지평을 넓히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말이 바로 ‘네 아버지와 내가’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보다는 남편 요셉을 더 우선시하는 배려는 자녀에게도 적용됩니다. 사실 가정에서 가장 먼저 위해 주어야 하는 순서가 있다면 부부가 첫째요, 부모님들이 두 번째요, 아이들이 세 번째라고 봅니다. 하지만 요즘 가정에서는 첫 번째도 아이이고, 두 번째도 아이이며, 세 번째도 아이이고, 네 번째가 부부요, 다섯 번째가 부모입니다. 이처럼 가정 안에서, 위해 주는 순서가 올바르지 않기에 참으로 행복한 가정,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 들으면 예수님의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라는 답변을 오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배우지 못한 어머니라고 무시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답변은 심리적인 측면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물론, 신앙을 깊이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먼저 모든 아이는 때가 되면 자의식을 갖게 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바로 육체적인 탯줄만이 아닌 심리적 탯줄을 끓게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홀로 서는 시기가 되면 부모는 지금껏 고분고분했던 자녀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나누는 것을 오해해서, 말대꾸한다고 착각하고 지나치게 과민 반응을 하거나 격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예수님의 표현을 보면, 그 답변 밑바닥에는 바로 부모님이 제게 그러한 삶,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도록 본을 보여 주셨지 않았습니까, 라는 응답입니다. 부모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익힌 교육의 결과, 이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디서 찾아야 하고 보이지 않은 하느님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참된 삶의 교육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깨달았지요. ‘하느님은 성전뿐 아니라, 사랑의 움직임이 있는 곳 어디에나 현존하십니다. 나 또한 거기에 머물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그리고 훗날 알게 됩니다. 가족 안에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가정의 모습에서 볼 때, 가정은 가장 작은 기초적 사회이며 공동체입니다. 가정 안에서 갓 태어난 생명은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감으로써 삶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배우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고,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예의와 공중도덕 등 기초지식을 배웁니다. 사람이 가정 안에서 이러한 기초지식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 때,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거나 낙오자가 되기 쉽습니다. 가정은 또한 작은 교회입니다. 작은 수도원이고 작은 신학교입니다. 가정 안에서 기도를 배우고 하느님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가정 안에서 하느님을 알고 기도를 배웠을 때, 그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은총과 진리를 실천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본을 보여 주신 분들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부모는 인생의 스승이며 신앙의 교사입니다.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교수인 스티네트 박사는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조사 연구한 결과 그 가정들에서 다음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첫째, 감사입니다.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헌신입니다. 나보다 가족 전체의, 나보다 서로의 행복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셋째, 의사소통입니다. 부부가, 부모 자녀가 서로 자주 대화한다는 말입니다. 넷째,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가족 간의 사랑을 키워간다는 말입니다. 다섯째, 정신적 건강입니다. 서로 축복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칭찬하면서 그 가정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가정이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여섯째, 극복의 능력입니다. 가정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가족들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아서 위기를 발전의 기회로 만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 여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영적인 하나 됨을 추가합니다. 온 가족이 하느님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이룩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서로 일치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과연 우리 가정이 사회의 기초 공동체로서나 작은 교회로서 충실했는가,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고 신앙인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했는가를 반성하면서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 가정이 작은 교회로서 살고,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살고, 하느님의 뜻과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살아가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사랑과 일치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가정의 모든 구성원을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그리고 성 요셉처럼 살아가도록 합시다. 성가정 축일을 축하드리며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가정이 되길 바라며 축복을 빕니다. 가정이 모든 것입니다. “주님 모든 가정을 축복하여 주시고, 당신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던 것처럼 가족 구성원 사이에 먼저 사랑하고 배려하며, 서로 섬기고 희생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계셔주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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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아는 청년들과 야구장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경기는 흥미로웠고, 역전에 역전을 거쳐 응원하던 팀이 이겨서 너무나 기분 좋은 경기였습니다. 함께했던 청년들도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재미있는 경기였는데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요? 야구 규칙을 하나도 몰랐고, 그날이 야구를 처음 본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미식축구를 저는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예전에, 교구청에서 생활할 때,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님이신 고(故)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함께 미식축구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주교님께서는 너무나 신나셨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위해 친절한 설명도 계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졸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이런 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르면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모르면 신앙이 재미없고 지루하게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신앙이 지루하다면서 주님을 멀리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계속 모르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가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하면서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서 부모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고,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요? 그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이 말에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통은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한 자녀를 혼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보통은 가족 모두가 성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면 성가정이라고 하지만, 더 큰 의미를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봉사함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과연 성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로를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또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사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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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품에>

루카 2,41-52 (예수님의 소년시절)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품에>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 품에 나
나의 품에 하느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 품에 너
너의 품에 하느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나의 품에 너
너의 품에 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 품에 우리
우리 품에 하느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 품에 모든 이
모든 이 품에 하느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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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나라의 사정이 혼돈 속에 있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라는 시메온의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했고,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19) 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신뢰와 순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 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3,13-14)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 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화목함이 무너집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의미와 공허와 비인간화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게끔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집회 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 3,15.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 삼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가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 127,1)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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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로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이초록,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가정’이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무대임을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집회 3,6)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신앙공동체 구성원의 신분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곧 하느님의 호의를 입은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선택받은 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으로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화, 감사로 제시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풍부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 3,16)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시고,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바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준재임을 말하면서도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명하고 지냈다.”(루카 2,51)고 전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곧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으며,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불우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거나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뿐만 아니라 주인이 되어 계시는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요, ‘그 말씀이 품은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머무르게 하되, “말씀”이 주인으로 머무르게 할뿐만 아니라, ‘주인이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순명과 섬김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순명으로 섬기고, 섬김으로 순명하며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평화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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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으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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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고의 예술작품, 사랑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
-실현시켜야 할 꿈-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해마다 성가정 축일 미사때 부르는 화답송 후렴은 늘 들어도 흥겹습니다. 이런 성가정교회공동체인 주님의 집에 사는 자들은 참 행복합니다.

“희망과 친절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어제 BBC방송을 통한 교황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의미와 희망을 준다!”
교황님이 제47차 유럽 테제 젊은이들 모임에 주신 메시지입니다.

“꿈은 마냥 기다려야 할 신기루가 아니라, 나의 실천으로 이루어질 현실이다.”
다산 정약용이 주는 말씀입니다. 실현시켜야할 꿈이 바로 성가정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주일은 늘 연말 성탄축제중 맞이하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부터 한주간은 성탄축제와 동시에 겹쳐지는 ‘가정성화주간’이기도 합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가정에서 사회로 국가로 세계로 계속 확장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궁극에는 온 인류가 하느님의 성가정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며 하느님께서도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시야는 가정을 넘어 온 세계로 향해야 함을 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모두가 한가족, 한식구의 성가정 인류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이든 하느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중에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오늘 축일은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입니다. 어떻게 성가정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겠는지요?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있다하여 공동체가 아닙니다. 같은 피의 혈연만의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명실공히 작든 크든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여야 합니다. 바로 그 원형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때마다 예루살렘에 갔던 참 하느님 중심에 충실했던 성가정 공동체였습니다. 참으로 다양성의 평화공존의 관대한 공동체도 하느님 중심에서만 가능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의 부모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아냈을 때 한 말씀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에 투철한 소년 예수님의 삶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마리아 성모님의 마음도 그대로 하느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닮았습니다. 거대한 침묵의 산 배경처럼 느껴지는 요셉 역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분임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즈음엔 이미 타계한 요셉 양부같으나 그의 하느님 중심의 충실한 삶은 남은 예수, 마리아 성가정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봅니다.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요셉 양부같습니다. 이런 성가정교회공동체에서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랑의 총애도 더하여 갔음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는 그대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말씀을 특히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의 한몸 성가정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냥 저절로 이뤄지는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부단히 치열한 사랑의 수행을 통해, 즉 기도와 공부, 찬미와 감사, 평화의 훈련을 통해 이뤄지는 성가정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완성을 향해 가는 순례 여정중 공동체입니다.
완성된 성가정 공동체는 없습니다. 시련없는 온실속의 평탄한 공동체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얼마나 산전수전 다 겪어낸 수난의 공동체였는지요!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내면 깊이에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감사와 평화, 희망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의 소년시절도 부모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이집트 피난시절의 고통과 시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한결같이 희망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며 각자의 책임에 한결같이 충실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평생 순례여정과 함께가는 사랑공부에 사랑실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 더불어의 순례여정입니다. 더불어의 구원이지 혼자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기서 언제나 빛나는 모범은 주 예수님입니다. 다음 평생 공부할 과제가 부여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1.동정과 2.호의와 3.겸손과 4.온유와 5.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런 사랑은 주님을 그대로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공부만으로도 턱없이 부족한 인생인데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이런 사랑을 입으십시오. 역시 부단한 훈련에 습관화해야 하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의 수행이자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없습니다. 우리의 부단한 노력과 함께 가는 은총의 선물이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부단한 노력의 합작품이자 최고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각자의 자리와 몫, 책임에 충실한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영역, 차이, 거리를 존중하는 예의와 존중, 섬김과 배려의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적절한 충고를 그대로 나눕니다. 비단 가정공동체에서만 아니라 순종과 사랑, 관대한 마음은 분별의 지혜이자 가정밖 어디서나 필수적 덕목임을 깨닫습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가정교육의 전통이 단절된 무례와 불손, 무질서와 혼란의 적자생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야만의 시대에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든 덕목들을 전통에 자리에 대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작금의 난세입니다. 집회서의 말씀 역시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이런 예의와 배려의 정신은 언제어디서나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것과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그대로 모두를 보고 배우는 젊은 자녀들입니다. 부모에게 극진히 잘한이들 치고 자녀들이 잘못되는 적,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날로 고령화되는 현세에 적절한 조언입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죄에 자책할 것이 아니라 죄를 상쇄할 배려와 섬김의 실천적 사랑에 더욱 박차를 가함이 구원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성가정 축일! 참 많은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사랑의 수행에 결코 지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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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 시대의 성 가정>

우리 시대는 혼밥, 혼술의 혼족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도 아니 혼족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혼자 사는 족속 또는 혼자 사는 가족이라는 뜻이지요.

제가 한심해하는 것은 신생아 수가 줄어든다고, 이러다가는 인구 소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 걱정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나 혼자 산다.’와 같은 프로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세태이니 아무 가정이라도 많아지면 좋겠다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성가정 운운하는 것이, 과연 통하는 얘기일지 의문이 들면서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패배주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는 성가정의 의미를 제대로 또 적극적으로 살아, 다시 말해 우리 가정을 먼저 복음화하여 온 가정을 복음화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가정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널리 풍기는 것이지요. 가능하다면 성가정 TV도 만들고 그럴 수 없다면 ‘나 혼자 산다’는 프로에 대항하는 프로그램을 기존 평화방송에 마련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금을 모으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받아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지원하고 홍보도 하는 사업도 벌이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많은 신자 가정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고, 그런 성가정을 모범 사례와 희망 공동체로 매체를 통해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가정이 모범이 될 성가정입니까? 그것은 삼위일체 공동체와 요셉, 마리아, 예수의 성가정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성령의 사랑이 가정의 중심이 되는 가정입니다.

방금 저는 성령의 사랑을 언급했는데 성령의 사랑을 좀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다양한 가운데서 일치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르지만 하나를 이루고,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일치가 조화를 이루고, 한마디로 사랑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유는 최고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인데 그러나 우리는 조화를 이루는 데 보통 실패하여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보통은 자유를 선택하고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데 혼족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자유롭고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자유롭기를 자기가 바라는 만큼 상대에게도 자유를 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바라는 사랑을 하기에 실패합니다.

나는 자유롭기를 바라면서 너는 내가 바라는 너이길 바라는 겁니다. 꼭 대가를 바라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면 너도 나를 사랑하기를,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면 너도 그만큼은 사랑하기를, 내가 이런 사랑을 했으면 너도 그런 사랑을 하기를, 내 사랑을 받은 만큼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어떤 때는 그 이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고약한 바람도 있습니다. 나만 사랑하기를, 내 곁에만 있기를 바라며 사랑의 구속을 하고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슬플 때는 위로가 되어주고,
내가 힘들 때는 힘이 되어주고, 만사 귀찮을 때는 적당히 거리를 떨어져 있어 주고, 내가 말할 때는 언제나 맞장구쳐 주고 수시로 사랑을 표현해주기를 바랍니다.

상대방도 슬프고 힘들 때가 있는데도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라는 것이 모두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없는 성령의 사랑을 가족 서로 실천하는 성가정이 많아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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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다시 시작하자!>

오늘 복음(루카2,42-52)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말씀’, 곧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성탄 팔일 축제 제5일째’인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입니다.

‘성가정’은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가정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가정’을 말합니다. 때문에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입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지금 나의 가정이 성가정의 모습인지를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삶의 모습도 이루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가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사랑을 충만히 받지 못한 것이 문제이고, 예수님을 중심에 놓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지 못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고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다시 부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너를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이 다시 부활하여 사랑이 충만한 성가정의 모습을 이루는 것이 ‘참부자가 되는 길’이고, ‘성공하는 길’이고, ‘건강하게 사는 길’입니다. ‘이제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집회 3,2-6.12-14)와 제2독서(콜로 3,12-21)가 전하는 말씀은 ‘성가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해야 할 마땅한 도리’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 살아야 할 신자다운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는 데에 초석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번 한 주간은 ‘가정 성화 주간’입니다.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다시금 깊이 깨닫고, 나의 가정이 성가정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 안에서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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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 51)

하느님에 대한 순종으로
가정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모든 공동체의 주인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셨기에
그 어떤 공동체도 쉽게
말하여 질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주인인 체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성탄은 가정 공동체의
또 다른 탄생입니다.

가정 공동체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주고 받으며
보살피는 관계를
배우게됩니다.

삶의 도리와
올바른 가치관을 배워
건강한 삶으로
나아가게됩니다.

순종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관심입니다.

성가정은 살면서
겪게되는 수많은 갈등을
기도와 대화로
풀어나갑니다.

가족들의
약함과 약점까지
하느님께 올려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들이
함께사는 곳이
가정 공동체입니다.

순종과 효도
섬김과 사랑
기도와 감사는
성가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성가정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성가정안에서
성장과 행복
존중과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사람은 가정을 통해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성가정에는
거룩한 책임또한
함께함을 우리는 압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아름답고 따뜻한
성가정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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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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