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4장, 35-48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강론

(강론 7분: 15:21 ~ 22:04)

강론

강론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성경에서 죄는 윤리적인 잘못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 안에 살게 되고,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느님과 단절된 채 탐욕의 자아 안에 머물 때 죄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이르는 모든 일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섭리임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하신 수난 예고와 부활이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세상의 악에 대한 승리가 선포되고, 죄의 용서가 선포되었음을 믿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시기까지 하는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 파스카 신비의 증인들로 파견되었습니다. 구원은 생각이나 상상만이 아니라, 현실로 드러나는 회심의 체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정 죽음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죄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하느님 없이 사는 우리 삶을 하느님께 되돌리는 회심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죄에 대해 묵상해봅시다. 죄를 짓고 “살그머니 아무도 모르게 걸어 나가고”싶은 유혹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무엇이 죄를 고백하지(회개) 못하게 막고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죄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이건 죄인데…이건 혼나야 되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랑을 경험한 일이 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죄를 넘어서 주님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
.
.
.
.
.
.
.

———————————–
부록 동영상, 오늘의 묵상
———————————–

오늘의 묵상
신학교에 입학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앞으로 4년 뒤면 신부가 될 터인데, 지금처럼 살아도 될까? 아직 아무런 하느님 체험도 없고, 하느님도 알지 못하는데 하느님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성 생활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와 함께 시작되고, 영적 독서를 끝내는 순간 끝난다. 먼저 성경을 읽어라.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라. 그 찾은 말씀을 되새겨라.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라.” 그래서 다음 날부터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종이에 써서 그 말씀을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성당으로 가는 시간뿐 아니라, 수업을 듣기 전에 노트에 그 말씀을 가장 먼저 썼습니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되뇌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되새기며 살다 보면 그 말씀과 꼭 맞아떨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면 그 말씀대로 살아 보고자 더욱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고 외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깨달음이 올라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계시는구나! 그냥 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 바로 곁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구나! 그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을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고 새김’으로써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오늘의 묵상
‘회개, 화해, 속죄’는 주로 사순 시기에 어울리는 듯한 단어이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본기도의 내용에서 부활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어두운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의인들, 그리고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뜻밖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난을 포기하시거나 거부하셨더라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패배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끝까지 받아들이신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온갖 조롱과 박해를 묵묵히 받아들이신 그분은 참임금이셨고, 승리자셨고, 메시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그분 덕분에 이제는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와 용서가 선포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기쁨과 평화와 생명에 참여하려면 먼저 회개하여 그분의 용서를 받고 동시에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그분 생명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출저: https://maria.catholic.or.kr/)

♣복음말씀의 향기♣ No3827
4월14일[부활 제3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HPJjWw6NfmQ
[서울대교구 박명근 클레멘스(항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 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생선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nTHd8G3hUc

++++++++++++++++++

<나에게 새겨진 부활의 증거: 사명>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처럼 당신을 믿지 못하는 사도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당신의 실제 부활을 증명해내십니다. 부활을 믿는 사도들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도록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이는 ‘사명’이란 것이 예수님의 부활과 별개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꿈이나 목적, 사명이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사명이 없으면 생존이 목적이 되고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인생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빅터 프랭클도 지옥과 같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자신이 연구한 것을 책으로 내겠다는 신념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에는 리자 앨런의 사례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16세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했고 항상 비만에 시달렸습니다. 어떤 직장에서도 1년 이상 버틴 적이 없고 항상 빚에 쪼들려야 했습니다. 수치와 무기력감에 걸핏하면 심하게 화를 냈고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렸습니다. 급기야 남편도 더 이상 그녀와 살 수 없다며 이혼하자고 하여 절망에 빠졌습니다.

남편의 이혼 통보를 받고 리자는 마지막 통장을 털어 이집트 카이로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피라미드를 직접 보고 죽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호텔을 나온 리자는 택시를 타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를 달렸습니다. 이때 광활한 사막을 보며 묘한 욕망이 솟구쳤습니다. 사막을 한번 횡단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녀는 1년 뒤 사막을 걸어서 횡단할 결심을 합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리자는 담배를 끊고 조깅에 매달렸습니다. 덕분에 식습관이 바뀌었고 일을 대하는 자세와 잠을 자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덩달아 통장에는 돈이 쌓여갔습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시작했고 집을 마련했으며 다른 남자를 만나 약혼까지 하였습니다.

리자 앨런이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였을까요? 아닙니다. 11개월 후 다시 돌아온 리자는 6명의 여행객과 함께 에어컨은 물론이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잔뜩 싣고, 천막과 지도, GPS와 송수신 겸용 무전기까지 설치된 대형 자동차로 즐거운 마음으로 사막을 횡단하였습니다.

리자 엘런을 통해 우리는 삶의 목표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자세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막을 횡단하겠다는 욕구는 자기 안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생존 욕구 외에 자기를 이기고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욕구는 결코 저절로 생겨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도, 직장에 취직하고 싶은 마음도 다 나에게 사랑을 준 누군가에게서 그 욕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감사해서 그 욕구를 대신 충족시켜주며 사는 게 인간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러한 목표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보답하고 칭찬 받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가 되고 그래서 또 의미를 잃습니다.

김미경 강사가 그런 예입니다. 김미경 강사가 일 년에 수십억을 벌고 TV쇼까지 하며 가장 잘 나갈 때 가장 심한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렸습니다. 논문 표절 의혹으로 강의가 없어져서 무작정 걷기만 할 때 자기 내면에서 “괜찮다, 사랑한다!”라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이후 그녀의 삶은 같지 않았습니다. 같은 고생을 하지만, 자기를 위한 고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목소리 주인공을 위한 고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NBA 2013~2014시즌 MVP를 차지한 케빈 듀런트의 수상 소감을 들어봅시다. “아무도 우리가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을 때도 엄마는 끊임없이 믿음을 주셨고 길거리에 노숙자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혀주시고, 식탁에 음식을 차려주시고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을 때도 엄마는 배부르다며 너희들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굶주린 배로 잠이 드셨죠. 어머니는 저희를 위해 항상 희생하셨어요. 어머니가 MVP이십니다.” [출처: 포크포크, 세계를 감동 시킨 어느 MVP 선수의 레전드 수상 소감]

케빈 듀런트처럼, 축구 선수 메시도 골을 넣은 다음에 자신을 믿어주었던 할머니에게 기도를 올립니다. 그에겐 할머니가 살아있습니다. 그의 사명이 곧 할머니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목적이 있으면 그것을 주신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할 때 그는 이미 부활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2024년 4월 2일에 ‘산티아고 꼼뽀스텔라’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신문에 성지순례 안내 광고를 냈습니다. 40여명의 순례자가 신청했습니다.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산티아고’는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도 산티아고 순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다른 순례와는 달리 산티아고는 보는 순례가 아니라 걷는 순례입니다. 매일 3시간 이상을 걷기에 큰 어려움 없이 순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제게 산티아고 순례는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2월 13일에 인사이동이 있었고, 저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소임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새로운 소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는 새로운 임지로 떠났습니다. 그동안 준비하였던 산티아고 순례는 후임 신부님이 가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아쉬움을 아셨는지 새로운 방법으로 산티아고에 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는데, 전임 신부님이 인사이동으로 한국으로 갔습니다. 자연스럽게 제게 성지순례를 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새로운 본당으로 온지 몇 달 되지 않았기에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님이 다녀와도 된다고 하였고, 전임 신부님이 같이 가기로 했었기에 저도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주로 성모님 성지를 다녀오는 것인데, 그 길에 ‘산티아고’ 순례도 있었습니다. 온전히 산티아고 순례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제게 산티아고 순례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없다.’ 이는 시간은 흘러가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아이는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노년이 됩니다. 저는 이제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행복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친구를 만나 기억과 추억의 한 점이 됩니다. 이것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머무는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축제’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흘러간 물로 다시 방아를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에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다시 한 번’이라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회개와 희망이 만나면 ‘기회’는 현실이 됩니다. 교회의 전례는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절이 매년 돌아오듯이 성탄과 부활은 매년 돌아옵니다.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저는 2024년 ‘부활’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맞이했습니다.

신앙인들은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순환하는 시간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회개하고 기쁜소식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의 강을 건너서 있는 먼 미래가 아닙니다. 부활은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다른 주일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신비”로 이끌어주고 있다. 부활의 신비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성령의 힘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보여주신 그 무한한 사랑과 권능만이 아니라, 정치-종교적 범죄로 단죄되어 난폭하고도 무자비한 폭력으로 죽음에 처했던 그 행위가 어떻게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위가 될 수 있었고,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35-48: 틀림없이 나다!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도 스승을 잃은 실의와 좌절에 잠겨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나누시고 구운 생선을 잡수시면서 당신의 부활을 증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서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그분을 만져보았고, 잡아 보고 그분 숨결을 느끼고 확신했다. 그들은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마시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임을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b) 부활사건은 환상적인 사건이 아니다. 부활을 상상조차 못 하고 실의와 의문에 차 있던,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소식도 믿지 않고 두려움에 차 있던 제자들에게 실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이렇게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신 것은 당신 안에서 죽음을 이기셨고 육체의 부패를 떨쳐 버렸음을 증명하신 것이다. 당신의 부활하신 몸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몸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자 하셨다. 이렇게 하시려고 그분은 문 닫힌 방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이 행적을 통하여 당신 안에 신성과 인성이 나뉘지 않고 결합되신 분임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말씀하셨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즉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산증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47절)하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하셨다. 바로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사도로 선택된 이들이 행해야 하며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신비를 알고 체험하는 우리가 증인으로서 전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같이 체험하고 전하여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제 매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그 체험을 이웃에 전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알았다면,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당신을 바치실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이웃 사랑과 자신의 희생을 통해 세상의 변화와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 신비를 확산시켜야 한다. 우리가 이미 “부활한 자녀들”(루카 20,36)라면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 세상에서 희망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치유하고 군중들이 목격한 기적적인 일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믿음을 잃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죄를 용감히 물리치기를 권고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항상 준비하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부활의 신비 안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참된 변화를 우리가 가지며 부활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승천 이야기 바로 앞에 등장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본문은 이미 부활 팔일 축제 기간에 읽었는데, 오늘 다시 읽는 이유는 승천을 준비하며 강조되는 내용, 곧 ‘증언’이 이야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신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자신의 책 1부에 해당하는 복음서를 ‘증인이 될 것’에 대한 촉구로 마무리하고(48절), 2부인 사도행전은 그 증인들의 ‘증언’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첫 기적 이야기로서, 베드로가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3,2)을 고쳐 준 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신(케리그마) 예수님을 선포하고 이를 증언하는 것이 사도들의 임무임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세 번 되풀이되는데, 이러한 앎이야말로 그분을 ‘우리 죄를 변호하여 주시는 분’, ‘속죄 제물이 되신 분’으로 증언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어 주기를 당부하십니다.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 함께 나누었던 빛나는 기억을 전하는 것, 수난과 죽음마저 받아들이신 사랑을 증언하는 것, 사도들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일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왜 증인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여기서 “……을 해야 한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 정해져 있었던 어떤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일의 증인이다.”는 “이 일을 증언하여라.”입니다. 신앙인은 메시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그 증언이 곧 복음 선포(‘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신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마태오복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과 예수님에 관해서 ‘가르치는 일’은 사실상 하나의 일입니다.>

1) 왜 증언해야 하는가? “그냥 조용히 성당에 다니면서, 나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는가?” 안 됩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나 하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벅차고,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힘들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사목자들이 ‘증언해야 한다. 증인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만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증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증언을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서 압박과 강요로 보일 때도 있는데, 그것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마태 23,4) 바리사이들 같은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 덕분에 ‘모든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는 생활입니다.(마태 11,28-30) 예수님 때문에 무거운 멍에에 묶이고 힘든 짐을 지는 생활이 아니라…… 이유도, 목적도 모르면서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증언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증인이 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내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눔’은 곧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입니다. 따라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은(선교활동은) 모든 신앙인이 당연히 실행해야 하는 본분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의무감으로(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이든 선교활동이든 무엇이든 모든 일이 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 안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것을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인생 전부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의무감만으로는 선교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자기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빈말’을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살다 보면 고난과 시련을 겪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기쁨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모습 자체가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변하고 흔들린다면, 아무것도 증언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말’과 ‘삶’이 다르면 거짓 증언이 되어버립니다. <남에게 신앙을 권고하면서 내 믿음이 더욱 단단해지고, ‘신앙의 기쁨’을 나누면서 내 기쁨도 더욱 커지고, 주님의 사랑을 나눌 때 내가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선교활동은 남을 위한 일이면서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고, 자기 자신에게 먼저 공로가 되는 일입니다.>

=====================

[광주대교구 김진모 펠릭스 신부님]

<이젠 정말 시간이 없어요.>

주님께 외람되지만, 예수님은 은근히 장난꾸러기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센 풍랑이 일어 잔뜩 겁에 질려있던 제자들에게 굳이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오시어 사람을 놀라게 하시고(마태 14,22-33) 오늘도 갑자기 제자들 가운데 ‘짜잔~’하고 나타나시어 간이 열 개라도 모자라게 만드십니다.

그러시고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고 구운 물고기 한 마리까지 맛있게 잡숴 보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깜짝쇼에 제자들은 매번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하며 겁에 질리곤 했습니다.

이 ‘유령’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 뭔가 흐늘거리고 물체도 그냥 막 통과해 버리는 바로 그 ‘유령Ghost’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 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부활을 믿으시나요? 사실,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수행했던 제자들마저도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토마스 사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졸지에 ‘의심쟁이’가 되고 말았지만 저는 그런 ‘의심-놀람-확인-증거’의 과정이 믿음을 완성해 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의심할 여지도 없이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추종하는 것은 자칫하면 잘못된 길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 깨달음과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진정으로 ‘주님 알기를’ 청하고, ‘주님 닮기를’ 청한다면 주님께서는 또 한 번 장난꾸러기처럼 우리를 놀래키시고 확실한 증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마침내 ‘주님의 사랑’에 대한 훌륭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루카 24,48 참조)

그런데 ‘부활’이 대체 뭔가요? ‘기쁨’이고 ‘희망’이잖아요! 그런데 여전히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그리고 이 세상 안에 그 기쁨과 희망이 충만치가 않고, 불의와 파괴와 상처와 미움 따위가 만연하다면 우리는 또다시 크나큰 과오(1독서 참조)를 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주님을 몰랐을 때 하던 철없는 행동을 멈추고 ‘정말로 사랑을 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사랑하고 지키는 일에는 양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고, 사람은 가끔 용서하고, 지구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사랑’ 외에는 해답이 없고, 그 정답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이젠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고 우리 모두 ‘주님 부활의 훌륭한 증인’이 됩시다.

=====================

[대구대교구 이지훈 안드레아 신부님]

<동행하시는 예수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큰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합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씀들은 그들의 기대감을 더욱 크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시고 서로 배려하고 종이 되어주라고 당신 스스로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기대와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을 잘못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이분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의 실망감은 훨씬 더 컸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생각과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그들은 엠마오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이 길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당신에 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말씀을 해주시며 제자들이 당신에 관한 오해나 헛된 기대에 대해 바로잡아 주십니다. 더 나아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는 비로소 주님을 알아보게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미사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쁜 부활 시기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

[춘천교구 이기범 요셉 신부님]

<나는 그분을 안다?>

리쌍이라는 힙합 듀오가 부른 ‘내가 웃는 게 아니야’ 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또 내가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야~” 이미 오래전 고음 불가의 목청이 되었기에, 요즘 신세대 노래는 언감생심 흉내조차 내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 소절만큼은 ‘내가 아는 게 아는 게 아니야~’ 라고 고쳐서 흥얼거리다 보면 오늘의 독서 말씀이 좀 더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고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런 세상입니다. 젊은 친구들은 각자의 열정과 패기를 무기 삼아, 또 연세 드신 분들은 나름의 인생 경륜을 무기 삼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네가 아는 게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잘난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부정하는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기에 조금은 조심스럽습니다.

언젠가 ‘머리는 기억을 하고 마음은 경험을 한다.’ 라는 내용의 기사를 접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문자, 문장 혹은 내용이다. 하지만 진정한 앎이란 기억하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 2독서 사랑의 복음사가 요한의 첫째 편지의 말씀을 더욱 수긍(首肯)케 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실천(=계명 준수)하지 않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 자는 거짓말쟁이고 또 진리가 없는 자일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실천의 문제는 동서고금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까지의 ‘최후의 심판’ 말씀도 그러하듯, 주님께서는 정론(正論)이 아닌 정행(正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 베드로 사도께서 주님의 고난을 말씀하시며 설파한 회개는 머리와 가슴의 회개뿐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진정성 있는 회개(turn again)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 24장 42~43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도화지(圖畫紙)에 그린 물고기가 아니라 실재(實在)의 물고기를 잡수셨습니다. 이 말씀은 ‘뜬구름(=물고기 그림) 잡는 영성,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영성보다는 실천적(=구운 물고기) 영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그분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닥친 삶(=현실)을 고민하고 연대하고 또 나아가 투쟁할 수 있으면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시인이 젊은 시절 파리에 머물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매일 정오에 젊은 여인 한 사람과 함께 산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한 할머니가 항상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손만 앞으로 내밀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돈을 주면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것을 챙겨 넣을 뿐이었습니다. 릴케와 함께 산책을 하는 여인은 항상 동전을 준비하고 있다가 그 할머니에게 건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릴케는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평소 따뜻한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여인이 이를 궁금하게 여겨 릴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저 할머니가 불쌍하지 않으세요? 왜 아무것도 줄 생각을 하지 않죠?” 릴케는 한참을 묵묵히 걷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저 할머니의 손에 돈을 쥐어 주지만 나는 저 사람의 가슴에 무언가를 주고 싶소.” 며칠이 지난 뒤, 여느 날처럼 나온 릴케의 손에는 하얀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윽고 할머니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할머니의 손에 장미를 조심스럽게 쥐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장미를 쳐다보았고 릴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나 그의 손에 입을 맞춘 뒤 장미를 챙겨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할머니는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동냥을 시작했습니다. 릴케의 연인은 할머니가 동냥을 하지 않은 며칠 동안 어떤 힘으로 먹고 살았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이에 릴케가 대답했습니다. “장미의 힘으로!” 하얀 색 장미는 꽃 가게에만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장미입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가 받은 장미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장미였습니다. 이 안에는 릴케의 따뜻한 애정과 사랑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릴케는 이 장미에 다음과 같은 마음을 담아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동냥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 뜻을 할머니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동안 눈이 가려져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릴케가 장미에 담아낸 애정이 할머니의 차가운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떠나는 두 명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이들이 천사의 발현과 시신이 사라졌음을 증언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찬찬히 설명해주십니다. “내가 바로 그 예수다.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다그칠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제자들이 점차 주님을 알아보도록 배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저녁때가 되어 식탁에 함께 앉으시는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식사 자리에서 마침내 극적인 사랑의 표지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빵은 이전까지 그들이 먹어 온 평범한 빵이 아닙니다. 인류를 위해 몸소 생명을 바친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즉 자신의 몸을 직접 떼어 나누어주시는 극진한 사랑의 징표인 것입니다. 이 만남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작용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의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한 순간 강렬하게 들어오지 않고 천천히 우리의 마음을 적셔준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선언하지 않고 성경 전체의 역사를 눈이 가려진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 모습이 이를 증언합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치 유령처럼 우리 삶과 동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주변에 계십니다.

주님이 느껴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의 한 복판, 때로는 주님을 선명히 바라볼 수 있는 기쁨이 가득한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사랑을 나누어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의 이러한 사랑이 미사의 성체성사 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미사 안에서 행하는 의무적 관례가 아닌 주님의 몸을 직접 나누어 받는 사랑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사를 통해 다시금 신앙에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이 초라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복음은 완벽한 해피 엔딩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손수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신앙을 일깨워 주시는 예수님,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며 신앙의 눈을 다시 뜨게 되는 제자들. 이 말고 더 이상 행복한 결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이 우리의 곁에 계시고 우리는 지난 어려운 시간을 보낸 뒤 이렇게 다시 모여 주님의 몸을 나누어 받을 수 있으니 어찌 오늘 기뻐하며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범죄학자 조지 켈링과 정치학자 제임스 윌슨이 명명한 ‘깨진 유리창 이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리창이 깨진 차를 방치하면 이곳의 법과 질서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로 읽혀서 강력범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을 사회학적으로만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깨진 유리창처럼 형편없어지면 어떨까요? 점점 더 자기 마음의 상태가 무너지고 맙니다. 자기 비하가 계속 심해지면서 자존감 하락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의 수리는 얼른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또한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배가 갑작스럽게 아프면 어머니께서 “엄마 손은 약손”이라면서 배를 문질러 주셨습니다. 배를 쓰담는 그 손이 제 배의 아픔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나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손이 필요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나의 ‘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보면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깨진 마음이 아닌 아주 건강한 마음이 되어 이 세상에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은 다락방에 문을 걷어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들립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기뻐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숨어 있는 자기들 모습이 떳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불안한 마음, 완전히 깨어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마디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놀람에 자기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까지 보여주시면서 유령이 아닌 육체의 부활임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십니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부활임을 그들 앞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또 깨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프고 깨진 마음을 고치기 힘들지만, 전지전능하시고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충분히 정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분이기에 우리는 주님 말씀처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증인의 바람>

루카 24,35-4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증인의 바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앞선
당신 계시어

여기
나 있듯이

뒤선
나 있으니

여기
당신 계시소서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허물은 기억하지 않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아니 그 허물과 잘못을 없애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크신 사랑을 가슴에 품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옛말에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두지 말고 혹 새기려면 모래에 새기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돌 판에 새겨 잊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빨리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되씹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신을 내맡기신 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구세주라고 생각했건만 어찌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그를 피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언제 어느 때 그 불똥이 튈지를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자들도 도망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과거의 허물을 묻지 않으시고 두려움을 넘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당신을 유령을 보는 줄로 알고 놀라며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손과 발을 만져 보라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며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길에서 겪은 일, 즉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 풀이를 해 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졌던 일,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체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내로 참아 주시며 눈높이 사랑, 맞춤 사랑으로 마음을 열어주시며 일깨우시는 예수님을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미사의 말씀 전례 안에서 주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성찬 전례를 통해 마음 안에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체험을 합니다. 따라서 자주, 정성껏 미사 참례를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니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왜 몰라봤을까요? 예수님께서 누누이 예언한 바대로 되살아나셨는데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무엇으로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 있으면 아직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유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자기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만 크게 되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허물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를 평화와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푼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여 돌 판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분이 행한 방법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은 평화를 얻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증거하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마땅히 선포되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오늘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지금 삶의 자리에서 나의 것이 되어야 하고, 또 전해져야 합니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하고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옛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께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제발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기억하고 남의 허물은 잊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의학, 신학, 법학, 수학, 천문학등 다양하게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직자로서 죽음을 앞에 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을 따라 그의 묘지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오른쪽 강도에게 주신 용서(구원)를 원할 뿐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산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님 앞에서의 용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용서를 얻어야 하고 또 그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누구의 허물을 기억하기 전에 주님 앞에 나 자신의 흠 없는 삶을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으로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저놈은 나를 배신한 놈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인데…손해를 끼친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아픔들이 나를 지배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24,47). 고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큰 품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

“평화가 너희와 함께!”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주리이까? 주님, 저0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시편 34,7)

2008년도 시작된 왜관수도원 계간지 “향기로운 길, 분도”가 16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니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2012년 봄호 18호에 실린 ‘산중한담(山中閑談)’란 ‘문(門)과 벽(壁)’이란 글이 앞부분을 나눕니다. 벌써 12년전 글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창문 좋은 방이 제일이다. 내 집무실이나 성당 내 자리에 지극히 만족하는 것은 좋은 창문 때문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창밖 풍경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그림도 없다. 굳이 그림이나 꽃꽂이가 필요없는 성당이고 집무실이다.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행복감을 느낀다. 창밖의 푸른 하늘을 그대로 하느님 마음 같기도 하고 얼굴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창밖을 보며 써놓은 시도 부지기수다. 예전에 써놓고 흡족해 했던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그림,사진…
대부분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 보다 더 좋은
임 만드신
창문 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4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자다.”

12년전 그대로의 환경에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문과 벽’이란 위 글은 34년전 1990년 부활 제2주일 강론 제목에서 착안한 글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라는 강론이었는데 제목의 신선함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강론이요, 그 이후로도 참 많이 생각했던 주제이고, 오늘 다시 사용하는 강론의 제목입니다. 영적 삶의 여정에 중요한 세요소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만남의 삶입니다.
만남들로 이뤄진 우리의 삶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의 만남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니 우리 영적 삶은 말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주님 부활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입니다. 지난주는 요한복음이었는데 오늘은 루카복음입니다. 분명 문은 닫혀 벽뿐이 방이었을 텐데 제자들의 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입니다. 임재(臨在)하니 이 말마디를 너무 좋아하신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제가 대구가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만남과 더불어 벽은 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평화입니다. 주님의 만남과 더불어 선사되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의 절망과 슬픔, 두려움에 닫혀 벽같이 되었던 마음도 활짝 열린 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평화와 더불어 기쁨의 선물이요 닫힌 벽같은 마음도 활짝 열린 평화의 문, 기쁨의 문이 됩니다.

둘째, 회개의 삶입니다.
만남과 더불어 회개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부활의 증인이 된 베드로의 열화같은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도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이제, 형제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요, 무지보다 인간에게 큰 걸림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이나 비극은 바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탐욕, 교만, 질투 모두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마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인간이라 정의할만 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 역시 인간 무지를 반영합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은 주님과의 만남에 이은 전적인 회개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게 돌아서는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죄는 지워지고 무지에서 점차적인 해방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무지의 벽은 변하여 지혜의 문이 될 것입니다. 온갖 내적 벽이 변하여 문이 되는 것 역시 회개의 은총입니다. 새삼 회개의 선택, 훈련, 습관을 위해 평생 매일 바치는 영성훈련이 공동체가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증인의 삶입니다.
사도들처럼, 성인들처럼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믿음고 사랑과 희망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이렇게 살도록 해줍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자 사도들이 참 좋은 주님의 증인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부활의 증인, 회개의 증인, 용서의 증인으로 이웃에 활짝 열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베드로의 힘찬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인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얼마나 장쾌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감동적 고백인지요!  예전에 주님을 부인하던 그 나약하고 겁많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샘솟는 용기의 사도,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 베드로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때, 교황님의 가르침의 주제도 용기(fortitude)였습니다. 현명(prudence), 인내(patience,) 정의(justive)에 이은 용기(fortitude)란 주제였습니다. 은총으로 유지되는 용기가 날마다 우리를 도우며 해결을 강화하고 장애를 극복함을 강조했으며, ‘용기없는 신자들은 무용한 신자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 역시 부활의 증인이자 용기있는 사도로써 베드로의 진짜 후계자답습니다. 부활의 증인, 요한 사도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누구든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에게는 진리가 없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그분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의 계명을, 말씀을 지키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에 항구할 때, 말그대로

무지의 벽은 지혜의 문으로,
두려움의 벽인 평화의 문으로,
미움의 벽은 사랑의 문으로,
슬픔의 벽은 기쁨의 문으로,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불신의 벽은 믿음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바로 “벽이 변하여 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내외적 벽들이 활짝 열린 하나의 문, 주님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은 벽이 없는 온통 문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10,9)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의 증인이 되기까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시고,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도들이 그 증인이 된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사도들이 증인이 될 자격이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증인인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증인이 되기엔 어림없는 겁쟁이이고 의심쟁이입니다. 증인이 되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너무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 착각을 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것처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조차도 유령으로 보는 겁니다.

증인이 되려면 또한 한 점 의혹이 없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라고 꾸짖으십니다.

이런 그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갖은 애를 쓰십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의혹에서 벗어나라고 구운 고기를 그들 앞에서 드시고,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이 노력이 즉시 사도들에게 통했을까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도들이 즉시 문을 열고 증언하러 나갔던가요? 일거에 모든 것을 다 깨닫고 주님 부활을 완전히 믿게 되었던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한 자리에서 그리고 말씀 한마디로 깨닫게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무릇 모든 깨달음은 인생의 여러 과정을 거쳐 얻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교만 때문에 자신을 과신하고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그래서 지금까지 바보처럼 살았고, 잘못 살았고, 헛똑똑이로 살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한 것이 실패로 끝났을 때입니다. 욕망과 욕심이 좌절되고 불행해진 뒤에 좌절감과 허무감이 덮칠 때입니다. 교만 때문에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안다고 착각하다가 큰코다친 다음입니다. 자기 한계를 모르고 내 힘으로 승리하고 성공하려다가 패배하고 실패한 다음입니다

이런 다음에야 진리와 진실을 깨닫게 되고,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되는데, 이런 다음 결정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은 역시 성령이십니다.

요한복음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신 다음 성령을 보내주실 텐데 성령께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리(一理)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우리가 긍정해줄 때도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라고 얘기해주는데 이 말은 네 말은 ‘말도 안 돼’ 보다는 긍정해주는 것이지만 실은 네 진리는 모든 진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인데 우리는 종종 하나를 아는 것일 뿐인데 마치 모든 진리를 알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려면 이런 교만의 착각이 깨진 다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이신 주님 안으로 이끄셔야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성령을 받고 먼저 깨달은 사도들이 이제 증인이 되어 우매한 군중에게 증언을 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무지를 아는 것, 무지를 깨는 것, 진리를 아는 것, 진리를 증언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과정이요 완성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물론 이것뿐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 곧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서간은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깨달음의 완성이요 증언의 완성임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부활의 증인인 회개!>

오늘 복음(루카24,35-48)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무척이나 기뻐해야 할 제자들이 오히려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을 직접 보여주시고, 또 그들 앞에서 음식도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도 아니고, 당신의 부활이 온전한 영과 육의 부활임을 확증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6-48)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 나의 부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 ‘회개가 곧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3,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2,2)

이것이 우리가 부활해야 하는 결정적 근거이며, 우리가 부활의 삶인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또 한번 죽이는 것입니다.

부활 제3주일입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차분히 살펴볼 때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죽이지 말고, 나의 회개와 나의 부활의 증인으로 예수님을 살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aRma_v0UqAc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 39)

떨리는 부활의
순간은 믿음의
더운 체온으로
다시 구체화됩니다.

생명을 만드시는 분도
생명을 떠받쳐주시는
분도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다시 만나게되는
뜨거운 주님의
생명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체온으로 다시
구체화됩니다.

예수님의
생기와 온기로
척박한 우리 마음이
다시 풍요롭게됩니다.

부활은 정녕
거짓말이 아니라
가슴 뛰는 우리의
현실이며 사실입니다.

어떠한 힘도
그분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부활은
되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옵는 우리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절망과
아픔을 당신의
체온으로 치유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체온또한
부활을 전하는
따뜻한 표징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따뜻한 마음
더운 체온에서
생명은 더더욱
부활의 구체적인
순간이 됩니다.

온기와 생기
사랑과 눈물을
나눕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Yahoo Mail: Search, Organize, Conqu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