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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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35ㄴ-43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35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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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심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선포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다윗이 당신의 조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그러한 만물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받으십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께서 아무것도 아닌 당신 백성에게 조롱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아주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왕권, 예수님의 통치는 세상의 왕권과는 무엇인가 다른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 사도는, 만물의 임금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물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신 것은, 오로지 당신 피로 모든 이의 죄를 대신 기워 갚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십자가는 바로 세상 창조 때부터 진행된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된 장소였습니다.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만물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으심으로써 참된 임금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오늘,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예수님의 왕직에 동참합시다. 곧,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하여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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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예수님은 자신을 미워하고 비웃는 이들을 위해서도 용서를 빕니다. 나는 신앙생활 중 주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었던 순간이 있었는지 돌아보고,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정체성 유지).
3. 나는 신앙생활 중 내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단죄한 적이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태도가 복음을 전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판단과 복음의 태도).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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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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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416
11월23일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주간)/연중 제3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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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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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JzNzpLTT7E
[서울대교구 이주형 세례자요한(사를리청년성서 모임 사목국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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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무나 은혜롭고 감동적인 우도 직천당 사건!>
축구시합을 할 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주 극적인 경우를 봅니다. 막판 뒤집기입니다. 경기가 거의 다 끝나가는 순간입니다. 후반전 남은 시간은 1분, 스코어는 1:0 우리가 지고 있습니다. 우리 팀의 패배가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나 가끔 기적 같은 일이 생기지요. 막판에 젖 먹던 힘을 다합니다. 정규 시간이 끝나는 순간 우리 편이 한 골을 넣고 동점을 만듭니다. 그리고 심판이 준 추가시간이 2분, 한 골 넣은 여세를 몰아 종료 직전 한 골을 더 넣습니다. 극적인 역전승이지요.
그 순간의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입니다. 선수고 코치며 감독까지 다들 너무 좋아 얼싸안고 경기장 위에 쓰러집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극적인 ‘막판뒤집기’ ‘인생 역전’이 오늘 복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우도였습니다. 그는 정말 행운아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이제 정규 게임은 끝나고 추가 시간에 막판뒤집기를 성공시킵니다.
우도는 너무나 죄스러웠고 송구스러워, 차마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지만,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아룁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런 그는 누구였습니까? 좌도에게 자신의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형 중에 가장 극형으로 손꼽히는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형은 예수님처럼 무죄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과오로 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나라에서도 몇 번 기회를 줬겠지요. 그러나 번번이 그는 그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이런 그였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막판에 용기를 냈기에, 늦었지만 예수님 안에 긷든 하느님의 신성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명확히 신앙을 고백했기에 이런 정말 놀라운 상급을 선물로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도 직천당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저는 우리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몸으로 확인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구원의 대열에 합류한 우도의 신앙을 묵상할 때마다 저는 크나큰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얻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문을 열어놓고 계시는 인자하신 아버지, 그분의 사랑 앞에 감격할 뿐입니다. 행복할 뿐입니다.
적대자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 그 이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철저하게도 수동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셨습니다.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포박당하십니다. 헤로데 앞으로, 빌라도 앞으로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십니다. 이제 더 이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메시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엄과 지혜로 가득 찬 영광의 왕으로서의 모습도 더이상 없습니다.
무기력한 메시아, 한갓 말단 군인으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왕인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이상 놀라운 기적도, 가슴 뛰게 하는 치유 활동도, 감동적인 강론도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을 느낀 군중들도 떠나갑니다.
정녕 모든 것이 끝나버린 걸까요?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상 위에 높이높이 매달리신 예수님, 무거운 십자가를 저 밑에서도 부터 골고타 언덕 끝까지 지고 오시느라 체력도 다 고갈되신 예수님, 무수한 채찍과 못 박힘으로 인한 출혈로 모든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예수님,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이셨지만, 그 절박하고 고통스런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당신이 행하셔야 할 마지막 사도직을 또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 사도직은 바로 회개하는 우도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사도직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 가시면서도 한 인간의 구원, 그것도 가장 몹쓸 인간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시는 하느님께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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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UDZkovTJ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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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는 시험하는 기도인가, 기억하는 기도인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은자』에는 아주 기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딴섬에 세 명의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글도 모르고 교리도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손을 모으고 이렇게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당신도 셋, 우리도 셋,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느 날 그 섬을 방문한 주교가 이 기도를 듣고 혀를 찼습니다. “어허, 그렇게 기도해서는 하느님께 닿지 않습니다. 제가 정식 기도를 가르쳐 드리지요.” 주교는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그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노인들은 머리가 나빠 외우는 데 한참이 걸렸지만, 주교는 뿌듯해하며 배를 타고 섬을 떠났습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세 은자가 물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배전에 매달려 소리쳤습니다.
“주교님! 죄송합니다. 주교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거룩한 기도문을 그새 까먹었습니다. 처음 구절이 ‘하늘에 계신…’이었는데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부디 다시 가르쳐주십시오!”
주교는 물 위를 서 있는 그들을 보며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십자 성호를 그으며 말했습니다. “어르신들, 당신들의 기도는 이미 하늘에 닿았습니다. 제가 당신들에게 배울 뿐, 더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하던 대로 기도하십시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완벽한 기도문을 외우지만 왕의 능력을 모르는
주교와, 교리는 서툴러도 왕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물 위를 걷는 은자들. 과연 누가 하느님을 살아있는 왕으로 모시는 사람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가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지, 아니면 단순히 내 소원을 들어줄 해결사로 여기는지는 ‘기도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옛이야기에 두 거지가 나옵니다. 왕이 행차할 때마다 한 거지는 “우리 왕 만세!”라고 외쳤고, 다른 거지는 “왕의 선물 만세!”라고 외쳤습니다. 왕은 자신을 사랑한 첫 번째 거지에게는 빵 속에 보석을 숨겨 보냈고, 선물만 바란 거지에게는 그냥 빵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거지는 빵이 무거워 팔아버렸고, 선물만 찬양하던 거지가 그 빵을 사서 횡재했습니다. 언뜻 보면 선물을 바란 자가 이긴 것 같지만, 결국 왕은 진실을 알고 첫 번째 거지를 궁으로 불러들여 식탁에 앉혔습니다. 선물만 바란 거지는 평생 구걸을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의 전략을 이렇게 폭로합니다. “인간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뜻이 사실은 ‘내 뜻’과 일치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어라. 그래서 만약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하느님이 계약을 위반한 것처럼 분노하게 만들어라.”
이것은 명백한 ‘시험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당신이 진짜 왕이라면 내 병을 고쳐보십시오.
내 자식을 합격시켜 보십시오.” 이것은 간청이 아니라 거래이며,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런 화법을 쓴 존재는 광야의 사탄뿐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시오.”
사탄은 끊임없이 “If(만약 ~라면)”라는 조건을 달아 하느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런 태도를 엄중히 꾸짖습니다. “자매들이여, 왕이신 분께 고작 썩어 없어질 돈이나 명예를 달라고 조르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지나 하는 짓이지, 왕의 자녀가 할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청해야 할 양식은 오직 하느님의 뜻, 그리고 성체이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시험하는 기도’를 멈추고,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는 ‘기억하는 기도’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의 판관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 양털이 젖게 해달라고, 다음엔 마르게 해달라고 두 번이나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당신이 나의 왕이심을 확신하고 싶습니다”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배우 최강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우울증과 중독의 늪에서 바닥을 쳤을 때, 그녀는 체면을 버리고 짐승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녀는 응답이 올 때까지, 자신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이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기도는 결국 그녀에게 “하느님이 나를 살리셨다”는 확신을 주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삶에 왕의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확신이 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혼을 태우는 ‘불(Fire)’같은
체험이 찾아옵니다. 천재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그 뛰어난 이성으로 신을 증명하려 했지만 끝내 공허함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1654년 11월 23일 밤, 기도를 멈추지 않던 그에게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 체험을 양피지에 적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불(FEU)! 철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확신, 확신, 기쁨, 평화.”
그는 더 이상 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의 불을 ‘기억’하며 자신의 모든 지성을 왕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증명이 끝난 곳에서 확신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 시절, 이와 똑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전까지 제 기도는 온통 “이것 좀 주십시오, 저것 좀 해결해 주십시오”라며 당신이 주님임을 증명해 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체 조배 중에 주님의 벼락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께서 제 영혼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다 주었다. 생명도, 살도, 피도 다 주었다. 더 무엇을 증명해야 하느냐?”
그 순간 저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미 생명까지 다 주신 분께, 고작 사탕발림 같은 위로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분의 압도적인 ‘다 주심’을 깨닫는 순간, 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청할 염치조차 없었습니다. 이미 다 받았는데 무엇을 더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제 기도는 오직 하나, ‘주님의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다 주신 분의 뜻이라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왕을 시험하는 기도는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 떼를 쓰지만, 왕을 인정하는 기도는 “이미 다 주셨음을 기억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기도할 때, 다른 화려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수없이 반복하다가 날을 샜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신다는 그 사실 하나가 가슴 벅차게 차올라, 감히 다음 구절로 넘어갈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기도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쳤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기드온처럼, 최강희 씨처럼, 그리고 파스칼처럼 확신이 들 때까지 매달리십시오. “주님, 당신이 왕이심을 제 영혼이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십시오. 그래서 마침내 “아, 그분은 나에게 다 주셨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날, 여러분은 더 이상 청원 목록을 들고 계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가 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왕께서는 이미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 안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대관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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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가족 미사’를 하였습니다. 2년 전에는 ‘작은아버지 부부, 외삼촌 부부’가 함께 했는데, 이번에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고령으로 몸이 불편하여서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새 가족이 함께하였습니다. 작년에 결혼한 조카의 아내가 가족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이어져 오듯이, 저희 집안의 신앙도 6대째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혼자서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역사는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작은아버지는 베드로 사도와 같았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질문에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 사도처럼 작은아버지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앙’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작은아버지의 말이 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양 조씨라는 성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교라는 신앙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작은아버지에게 배운 것입니다.
외삼촌은 바오로 사도와 같았습니다. 유교의 가풍을 이어받은 외삼촌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누나인 어머니가 천주교 집안으로 시집와서 신앙인이 된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 외할머니가 마리아로 세례를 받았고, 외할아버지도 요셉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제야 외삼촌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늦게 시작했지만, 외삼촌은 바오로 사도처럼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사목회에서 봉사했고, 레지오에서 봉사했습니다. 제가 외삼촌이 있는 성당에서 ‘특강’을 했을 때는 무척이나 좋아하였습니다. 늦게 신앙을 시작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본당 사제의 좋은 점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본당 사제의 부족함이 있을 때는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외삼촌은 조상들을 모신 선산에서 미사하고 싶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선산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외삼촌은 조상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 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명의 죄수가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한 명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율법을 많이 알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나라의 왕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로마의 총독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회개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은 우주보다 크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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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마카베오기 상권 1-4장에 나오는 역사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 원정에 나서 넓은 영토를 손에 쥡니다. 그는 열두 해를 다스린 뒤 부하 장군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 주고 죽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왕조의 후손 가운데 성전을 약탈하고, 이스라엘의 율법과 풍습을 금지하며 우상을 세운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 전쟁에서 계속된 패배 소식을 듣고는 실망하여 죽어 가는 임금입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악의 전형적 모습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바로 남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힘으로 강요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다름과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마구 짓밟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사제 마타티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은 용감히 일어나 율법과 성전에 대한 열정으로 맞서 싸워 침략자들의 군대를 몰아냅니다. 비록 적은 수였지만 그들은 이집트를 치신 하느님의 놀라운 힘과 업적을 기억하고 의지하였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에 달렸다고 굳게 믿은 것이지요. 마타티아스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는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듭하여 마침내 성전의 치욕을 벗겨 냅니다. 역겨운 우상의 제단을 허물고 율법의 규정대로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봉헌합니다.
자신의 힘과 군대만을 믿었다가 좌절하고 절망하여 죽음에 이르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와, 오직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며 외세를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여 봉헌하는 유다 마카베오는 뚜렷이 대조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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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3,35-43: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1. 전례의 완성: 십자가에서 드러난 왕권
오늘은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 곧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절정을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당신 안에서 새롭게 하셨다.(에페 1,10) 그분의 왕권은 세속의 권세나 무력의 지배가 아닌, 사랑과 자비, 그리고 십자가의 봉헌에서 나온 왕권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십자가이며, 그분의 왕관은 가시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시의 왕관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영광의 상징이다.”(De Fide II,16,133)
2. 십자가 아래에서 드러난 왕의 모습
오늘 복음은 역설적이다. 왕의 모습이 아니라 패배자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그러나 그 안에서 참된 왕권이 드러난다. 지도자들과 군인들이 외친다. “이자가 하느님의 메시아라면,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루카 23,35-37) 그들의 조롱은 세속적 왕권의 논리에 기반한다. “왕이라면 힘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왕”이시다. 그분의 힘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능력, 그분의 통치는 자비로 다스리는 다스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왕으로서 다스리셨다. 그분의 못박힘은 그분의 승리이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다.”(Sermo 218,2)
3. 두 강도: 왕을 알아본 믿음의 눈
복음의 중심은 두 강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조롱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십자가 위의 왕을 알아본다. 그는 회개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이 고백은 단순한 두려움이나 구원의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왕국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즉시 대답하신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이 ‘오늘’은 단순한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구원의 결정적인 순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열린 하느님 구원의 오늘이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렸다. 회개한 죄인이 낙원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죄인을 구원하는 자비의 왕권임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 강도는 열쇠도, 공로도, 선행도 없었으나,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열었다. 주님은 그를 왕국의 첫 시민으로 맞이하셨다.”(Hom. in Lucam 23)
4. 그리스도의 왕국: 사랑과 자비의 질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콜로 1,12-20)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콜로 1,13) 이 “아드님의 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천상 왕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사랑과 은총의 질서이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으로서, 모든 피조물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신다. 모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분을 향해 존재합니다.(콜로 1,16)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은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분은 새로운 아담이시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 통치를 다시 세우신 분이시다.”(Adv. Haer. III,2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주적 재창조의 질서, 곧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시는 사랑의 권능이다.
5.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의 통치를 드러내는 몸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왕권을 교회를 통해 드러내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분은 그 머리이시다(콜로 1,18).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명의 힘을 교회 안에 흘려보내시며, 모든 구성원을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 이 통치는 강제나 권력이 아닌, 사랑과 섬김, 그리고 화해의 봉사로 실현된다. 교회 헌장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진리와 생명의 임금으로 오셨듯이, 신자들도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세상을 봉사로 다스림으로써 그분의 왕직에 참여한다.”(36항)
6. 결론: 낙원의 약속, 오늘의 부르심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초대의 말씀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 그리스도의 왕국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이미 그분의 낙원 안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위의 임금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비를 믿고, 그분 사랑의 통치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은총 안에서 세상을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강제의 왕권이 아니라 초대의 왕권이다. 그분은 우리를 억누르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왕국을 따르는 길은 오직 하나, 십자가의 길, 자비의 길, 사랑의 길이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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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를 위한 나와 나를 위한 너>
루카 23,35ㄴ-43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그때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너를 위한 나와 나를 위한 너>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7)
너를 위한 나만이
나를 위한 너를
만날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만이
나를 위한 너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만이
나를 위한 너를
믿을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만이
나를 위한 너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만이
나를 위한 너를
품을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만이
나를 위한 너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만이
나를 위한 너를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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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왕들의 왕이신 분’을 모시며 사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35ㄴ-43)
1)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찾았습니다.(마태 2,1-2) 그 일은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임금”이라고 선포한 일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메시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 어떤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라고 고백했습니다.(마르 15,39) 그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고 선포한 일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지상 생애의 처음과 마지막에 메시아로 선포되신 분입니다.
요한 사도는 묵시록의 시작 부분에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묵시 1,5)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 라는 말에서 ‘왕들의 왕’이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인간 세상의 권력은, ‘모든 왕들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주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2) 예수님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콜로 1,13-14)
이 증언은 ‘아드님의 나라’가 ‘어둠의 권세’를 이미 물리쳤다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 보면서, 예수님이 패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믿는 우리는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을 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 일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이미 망해버린 ‘어둠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들입니다.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이미 승리한 ‘아드님의 나라’에서 ‘속량’을(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드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속량’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노력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3)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와 아드님의 나라는 ‘같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이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이미 시작된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서, 또는 내 안에서 완성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만 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에 있는, 또는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나를) 위한 일입니다. 우리가(내가) 협력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나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4)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으니,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베드 1,22-2,2)
‘사랑 없고 이기적인’ 세속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금방 말라버리는 풀꽃일 뿐이고, 그 끝은 허무한 멸망입니다. 신앙인은 믿음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왕들의 왕’이신 예수님의 왕권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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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명동대성당 주임) 신부님]
<낙원의 약속>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주간을 지내며 전례력으로 다해를 마무리하고, 대림 제1주일부터 가해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시절이 되면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며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살피게 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좌우에 매달린 두 죄수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올바른 방향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다른 죄수는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루카 23.40)라고 말하며 하느님을 떠올리는 ‘회개’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어서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23,41)고 말하며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는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라고 겸손하게 청원을 드립니다. 이러한 ‘회개-자기 성찰-신앙고백-겸손한 청원’을 보이는 그 죄수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고 약속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우리도 낙원을 약속받은 그 죄수처럼 ‘회개-자기 성철-신앙고백-겸손한 청원’의 차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감사할 세 가지 일들을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또 그 일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여 보았으면 합니다. 직접 전하기가 어려우면 마음으로 기억하며 기도 안에서 기억하도록 합시다. 또 상처 받은 일,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도 떠올려 봅시다. 그 일에, 그 사람에 매몰되어 더 깊은 상처의 늪에 빠져 헤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 사랑의 도움으로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의 용서라는 커다란 용기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시고,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화해시켜 주신 분(콜로 1,18-20 참조)이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가해’라는 새로운 한 해의 도화지를 아름답게 채워가려는 마음을 봉헌하도록 합시다. (《서울주보》 제2586호 ‘생명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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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한 해 동안 걸어온 여정을 돌아보며, 성찰에 필요한 실마리를 성경 말씀에서 찾습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이제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주시며 그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한편 제2독서의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입니다. 성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기에, 성자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해서 창조되었으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빈정대는 유다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는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며 그분을 모독하지만, 다른 이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의 후손, 메시아 임금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무력과 권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만물을 화해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웃과 화해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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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명현 미카엘 신부님]
<나의 절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림절을 한 주 앞둔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세계에서 날로 확산되어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제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democracy) 또는 ‘민주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입니다. 즉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입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 선거는 다수결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가장 진보된 정치제도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민주주의적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도 어떠한 정책을 수립하거나 무슨 큰 사업을 할 때 교우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민주적으로 추진한다는 면에서는 민주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격상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명과, 신약시대에 주어진 성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이 민주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계시종교입니다.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님께서 전해주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운영과 사업은 민주적이어야 하지만, 교회의 신앙과 교리체계는 민주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과 교리까지도 민주적이라면, 다수결로 교리를 바꾸는 것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된다면 교회는 더이상 계시종교일 수 없습니다.
신자들과 대화를 해 보면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배워온 잣대로 교회를 평가하는 분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의 중심이 되어 세상의 그릇된 이념과 죄상을 비판하고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존재가 신앙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유일한 절대자로 믿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연중 시기를 마치는 이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골고타산 위 십자가에 처참한 모습으로 외로이 달려 계신 예수님.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해보라지.”라며 빈정거리는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한 겸손한 죄수가 고백합니다. “예수님, 선생님, 선생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라는 백부장의 고백도 들려옵니다.
2천여 년이 흐른 오늘,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회개한 죄수의 마음으로, 그 백부장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왕’이시라 고백합니다. 긴 연중 시기를 마감하는 오늘 우리도, 우리를 미혹시키는 세속의 어떤 사상과 물질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임금, 절대자로 고백하는 대축일이 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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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동창 신부 중 한 명이 자기 어렸을 때 미사 가지 않고 놀다가 걸려서 홀딱 벗겨져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저의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자주 그런 협박성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옛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더 엄격했었습니다. 조과만과를 바치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밥을 주지 않았었고, 기도 때 졸면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이도 공소회장 앞에서는 쩔쩔맸고 무조건 순종했으며, 찰고 때는 회초리를 맞으면서 교리 문답을 외웠다고 합니다. 파공 참례(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축일에 노동을 쉬고 미사 참례하는 것)을 지켰고, 대축일에는 몇십 리 길을 걸어 본당에서 미사 참례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너무 맹목적이고 과도한 것이 아니냐고 현대인들은 말할 것 같습니다. 그냥 먼 옛날의 일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이 아니라 공포에 의한 것이라면서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편안하고 쉬운 신앙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맞지 않으면 주님을 원망하고 또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거센 유혹 속에서 주님께 진심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35절), 군사들(36절), 죄수 하나(39절)입니다. 그들의 조롱 내용은 광야의 악마 유혹과 비슷합니다. “네가 ~라면, 너 자신을 구원해 보아라.”라는 것입니다.
왕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권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세상의 왕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을 살리고, 군림하며 힘을 과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살리고,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용서와 구원을 베푸시는 진정한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왕을 어떻게 모셔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 옆에 있었던 회개하는 죄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합니다. 그 누구도 하지 않는 모습이며, 진정한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께 진심인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서만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었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왕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이와 함께 있어 주는 참된 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왕을 맞이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우측에 있었던 도둑이 보여준 것처럼,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번 주일이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올 한 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를 떠올리며, 새로운 한 해를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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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
어느 날 신자 분이 뜬금없이 “신부님, 십자가 위에 붙어 있는 저 글자, 곧 ‘I.N.R.I’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제게 질문하더라고요. I.N.R.I는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의 약자로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뜻입니다. 연중 마지막 주일인 오늘을, 교회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는 그 배경과 이유를 생각하면서 오늘 대축일을 뜻깊게 지내도록 합시다.
오늘 축일을 정확히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께서 회칙 「과스 프리마스 Quas primas」를 통하여 제정하였습니다. 1925년은 325년 가톨릭교회의 첫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경을 선포한 1,600주년의 해였습니다.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무참하게 파괴된 참담한 세상을 니케아 신경을 바탕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습니다. 교황은 우주와 세상의 참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안정된 질서란 오직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절대적인 통치권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선포하려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현세적으로만 생각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본디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10월 마지막 주일에 지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부터 오늘과 같이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기념함으로써 우주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길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중개자이심을 고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성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 자네가 이곳에 살다 간 덕분에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풍요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이라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삶은 단 한 사람의 행복과 풍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기를 두고 세상 종말이 오는 그날까지 모든 사람에게 미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분은 온 세상 사람들의 참된 사랑의 왕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금으로 자처하신 적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금 대접을 받은 적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임금으로 자처하신 적이 분명히 없습니다. 빌라도가 집요하게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마태27,11/요18,33)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비켜 가시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18,36)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임금이 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후, 사람들이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요6,15) 물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는 군중들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이스라엘 임금님은 복되시어라.”(요12,13)라고 환영받으셨지만 이내 돌변한 군중들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19,15)라고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는 뜻은 우리의 주님께서 임금이 되길 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조롱받으신 주님을 우리가 임금으로 받들겠다는 뜻이고 우리는 그분의 충성스런 신하가 되고 백성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세상의 대통령들처럼 고작 역사책의 한 줄로 기억되는 이 세상의 임금이 되고자 하셨겠습니까? 그런 임금이시라면 저는 그분의 백성이 되지 않으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으로 모시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힘과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임금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왕으로 모시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오히려 저희를 모든 짓눌리고 묶인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롭게 구원해 주신 임금이십니다. 그래서 백성인 우리도 그분처럼 여러 삶의 상황에서 짓눌리거나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우리가 왕으로 모시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어떤 얘기도 듣지 않는 그런 일방통행의 임금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왕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간절한 외침과 아픈 소리를 즐겨 들으시고, 백성을 아끼고 돌보시는 임금님이십니다. 그래서 백성인 우리도 즐겨 이웃의 하소연을 듣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기도를 통해서 임금님께 아룁니다. 우리가 왕으로 모시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자기 배 채우려고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 임금이 아닙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고달픈 우리에게 차고 넘치는 상床을 차려주시고 무엇보다 말씀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백성인 우리도 굶주리는 이들의 일용할 양식을 같이 걱정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따듯한 위로를 건넵니다. 우리가 왕으로 모시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빈부 차이, 성과 인종 차별, 종교와 이념의 갈등으로 불목과 불화를 조장하고 분열시켜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는 임금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공평과 정의로 평화롭게 하시고 사랑과 용서로 사람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려 하신 생명이신 임금이십니다. 그래서 백성인 우리도 세상이 평화롭도록 평화의 사도가 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사랑과 생명의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한 우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최초로 구원의 확답을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이로써 사랑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은 이미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낙원을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낙원으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 세상 모든 사람과 공유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의 왕이신 주님을 어떻게 따라왔고 따를 것인지 생각하면서, ‘하한주 신부’의 시에 ‘신상옥’이 작곡한「임 쓰신 가시관」을 마음으로 노래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시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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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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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십자가에서 건네주신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다스림>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대축일은 단순히 한 해의 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절정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왕(임금)’은 대체 어떤 왕인가? 이를 오늘 <본기도>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그리스도의 왕’과 ‘그분의 왕권’에 대해 이렇게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2사무 5,2)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자’는 하느님께 적용된 호칭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결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 23,1-3)
그러니 ‘목자’는 명령하고 군림하는 이가 아니라 돌보고 생기 돋우어주고 이끌어주고 살려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백성이 임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의 임금들에 비추어 본다면,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는 이를 이렇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을 위하여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이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요한 10,11 참조)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왕’ 모습입니다. 제2독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를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곧 그분의 ‘왕’의 모습을 생생히 드러내줍니다.
바로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밝혀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대체 그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인가?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이’, 곧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선언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이 하늘 나라는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건네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다스림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왕좌는 십자가이며, 그분의 왕관은 가시로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가시의 왕관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영광의 상징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와 자비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처럼, 용서와 자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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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