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1장 5-19절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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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5-19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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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두매아 출신으로 유다의 임금이 되었던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기원전 20년경 성전을 증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솔로몬 성전을 능가할 계획으로 성전이 산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큰 성전 지대를 건설하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는데, 그 성전 지대의 크기가 어마어마하였습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가 죽은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예수님 시대를 지나 기원후 64년까지 이어집니다.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보았던 성전도 여전히 증축 중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원후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은 티토가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는 제1독서 말라키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참이었습니다.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건을 전후로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대립이 커지기 시작하였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도 좀 더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 복음서 마지막에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하고 권고하셨습니다. 박해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생명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시련이니, 그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로 삼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늘 종말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 때와 시간을 아무도 모르기에 언제나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가끔씩 종말을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종말을 잘못 이해하여 불안에 떨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호도하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종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교리가 넘쳐 나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종말을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로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종말은 우리에게 파멸이 아닌, 구원의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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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이야기 해봅시다.

2. 거짓을 분별할 바른 지혜를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또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구원과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신앙으로 인한 환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신앙생활 중 겪은 어려움이 나중에 기쁨으로 변했는지, 아니면 아픔으로 남았는지 나누어 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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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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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종말에 대한 말씀은 묵시 문학적 표현으로 다소 어렵게 느껴집니다. 종말은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구원과 희망의 대상입니다.
천지창조에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입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사랑의 계약을 맺으셨고, 또한 그 계약에 끝까지 충실하십니다. 반면 인간은 그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고,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구원자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분께서 오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마지막 때를 여시고, 이어서 모든 생명이 충만함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하나 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은 거저 오거나, 우리와 관계없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마치 외부에서 주어지는 마술 행위나 기계적 행위처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시대의 징표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징표를 알아듣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우리의 노력으로 이 구원 사업에 직접 참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중심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있고, 그 안에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의 편을 가르는 모든 벽이 다 허물어져, 완벽한 그분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적들에게 승리하고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는 여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충만함에 이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 죽음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으로 받아들인 죽음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가장 위대한 사랑이 실현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복음말씀의 향기♣ No4410
11월16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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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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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f1p5sDAdJ0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ACN 한국지부 지부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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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십시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인 동시에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살아생전 얼굴이 그립습니다. 그분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이 있었는데, 바로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난민들, 이주민들, 재소자들, 환자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

이런 분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고 동반하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의지가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총애하시는 당신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바로 오늘,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5년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의회 연설에서 강대국의 횡포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 상하원들은 마음 속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설이 끝나고 교황님과 함께 하는 만찬이 준비되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교황님과 찍은 ‘인생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연설이 끝난 후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었을까? 미국 대통령? 아니면 미국 주교단?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300여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간소한 점심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작은 이들의 사목자요 동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 노숙자들을 만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저도 이민자 가족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는데, 그곳은 교도소였습니다. 거기서 재소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여러분, 걷다 보면 누구나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잘 씻기 바랍니다.”

이혼 후 재혼한 가정과 그 자녀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적 배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수와 죄악은 단죄돼야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해받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현대 가정의 실제 삶과 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단죄하기보다는, 이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위해서 교회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합시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 하는 우리는 오늘 주변을 유심히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이 시대 가장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이 시대는 가난에 대한 개념이 점점 확장되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당연히 가난한 이들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난민들, 이주민들 역시 가난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심리적, 정신적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이들입니다. 아무런 기쁨이나 희망이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이들입니다. 철저하게도 자신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이들입니다. 삶의 의미나 가치를 상실한 사람들 역시 가난한 이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수많은 명언들 가운데, 가장 제 마음을 흔들었던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교회의 보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십시오. 가난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그 안에서 성체는 완전해진 자들에 대한 포상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한 치료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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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2uHmCKt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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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법: 그리스도의 말을 하라>

영화 ‘게임 플랜’(2007)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조 킹맨은 영화 내에서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입니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선수들을 믿지 않고 독립적인 플레이를 계속해 우승 트로피는 따내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파티를 즐기며 솔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딸이라며 한 아이가 찾아옵니다. 예전에 이혼했던 아내는 딸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조는 크게 당황합니다. 딸 매디슨 페티스는 어머니가 갑자기 아프리카에 봉사하러 가서 어머니가 아빠 집에 있으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조 킹맨의 메니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는 인기 절정의 미식축구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조 킹맨도 갑자기 나타난 딸의 존재로 생활에 균열이 생기게 되어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페티스는 아빠 조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또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고 당장인 인기와 돈과 명예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페티스는 언론 앞에서 아빠를 옹호하는 말을 해주기도 하고 그러는 가운데 조도 페티스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자 조금씩 더 솔직해집니다. 페티스 때문에 애인과 헤어질 위기에 처하자 조는 페티스가 엄마와 똑같다고 말합니다. 항상 불평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페티스는 엄마의 말을 전합니다. 아빠는 언제나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다고.

페티스가 울자 조는 기타를 쳐 주며 페티스를 위로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다”를 외우며 이상한 복장을 하고 딸이 원하는 발레도 같이 해 줍니다.

그러다 일이 발생합니다. 아이가 분명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는데도 디저트에 땅콩이 들어간 것을 모르게 페티스가 그것을 먹고 알레르기 발작을 일으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다행히 딸이 안정을 되찾자 페티스의 이모가 찾아옵니다. 사실 엄마는 6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뒤였고 아프리카에 간 것은 이모였습니다. 이모는 페티스를 미식축구에 미친 아빠에게 맡길 수 없다며 아빠의 양육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페티스도 아빠의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아 이모의 집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조는 점점 진지해집니다. 딸의 양육권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제 딸보다 사랑하는 건 없습니다. 축구를 포기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슈퍼볼 경기가 열리는 당일 매니저는 만약 경기에서 이기면 기자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할 때 “전 이제 패니 버거를 먹으러 가겠어요”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패니 버거가 스폰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페티스 생각에 좀처럼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던 조는 결국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이번 경기를 포기하려고 할 때 페티스가 나타나 아빠에게 힘을 줍니다. 아빠는 솔직하게 말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딸 페티스를 만난 것이라고. 그리고 경기에 나가 우승합니다. 기자의 질문에 “우리 딸을 데리고 집으로 갈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조 킹맨의 삶은 그 자체로 거짓이었습니다. 그가 솔직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딸을 받아들여 아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더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때에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까요? 프랑스 속담에 험담꾼은 듣는 이들이 만든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기에 재림예수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교리를 몰라서 사이비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뱀의 거짓말에 넘어갔을까요? 그들이 거짓말쟁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왜 재산의 절반을 교회에 바쳤음에도 죽었을까요?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을 받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아는 사탄의 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 뜻대로는 예, 아니요, 말고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는 것 외에는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조 킹맨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진실할 수 없었고 남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진실 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임에도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면 인간으로 하는 모든 말은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45)

우리의 말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변한 나의 정체성으로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는 말이 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더욱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진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진리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마지막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면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이 되면 그들의 말은 거북해서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되는 길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내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사라질 때 세상은 거짓 예언자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지금 사이비를 공부할 때가 아닙니다. 성체성사로 내 가 진리에 참여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를 버리고 그분의 말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좋은 공부는 없습니다. 내가 말하며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조금씩 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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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회당에서 성서 말씀을 읽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가난한 이들에게 동정을 베푸신 분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로 사신 분이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처럼, 세상 한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이를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이 있었고, 예수님 자신도 가난한 분이셨습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는 ‘매점’에서 봉사했습니다. 매점은 1층 이발소 옆에 있었고, 과자와 음료수, 세면도구, 담배를 파는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단순한 봉사였지만, 그곳에서 저는 가난의 지혜와 나눔의 기쁨을 배웠습니다. 매점에서 일하면 매일 외출이 가능했고, 한 달에 만 원의 활동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사람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오는 신학생들, 부탁을 하는 교수님들, 전용 매점을 이용하는 부제님들 사이를 오가며, ‘주고받는 기쁨’과 ‘작은 봉사 속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이 경험은 제 사제 생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신학교 인연으로 군종병으로 복무했고, 교구청에서는 신협 이사로 봉사하며 사제들과 직원들의 어려움을 도왔습니다. 뉴욕에서는 신협을 통해 본당 재정을 관리하고 공동체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모든 출발점은 신학교 매점에서 배운 작은 경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경험을 통해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달라스로 부임한 뒤 본당의 재정을 살펴보니 대부분의 예금이 일반 예금이었습니다. 일반 예금은 이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자금만 일반 예금에 두고, 나머지는 이자가 있는 정기 적금으로 옮겼습니다. 작은 변화였지만 본당 재정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일을 하며 깨달았습니다. 가난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눌 줄 모르는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재물은 악이 아닙니다. 재물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의 아픔을 덜어줄 때, 재물은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통사고로 다친 형제님을 위한 모금, 루게릭병 형제님의 전동 휠체어 마련, 뇌경색으로 쓰러진 형제님의 귀국 모금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머물렀습니다. “진정한 부는 소유가 아니라, 나눌 수 있는 자유에서 시작된다.” 이 말처럼, 가난한 이들을 향한 나눔은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일한다는 것은 단지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기신 삶의 책임을 성실히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동의 결실이 이웃의 기쁨으로 흘러갈 때, 우리는 비록 가난해도 가장 부요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단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 안의 가난을 발견하고, 나눔의 기쁨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눈물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들의 손길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그들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이 조금 더 가난해지고,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본당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세상도 조금 더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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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몇 년 전 교우들과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루카 16,19-31 참조) 복음 나눔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우 한 분이 이 둘의 관계를 ‘구원의 파트너’라고 하면서, 그렇지만 서로 그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나눔을 하였습니다. 저도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부자에게 보내신 구세주였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던 라자로를 외면하였습니다.

부자가 라자로의 비참한 상황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주었다면, 라자로는 위로를 받고 부자는 이기적인 무관심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구원의 파트너’를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하였습니다.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둘 사이에 커다란 구렁이 가로놓여 있다고 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한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오늘 교회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지냅니다. 2007년 농촌 지역의 자그마한 본당에 주임 신부로 있을 때였습니다. 11월에 추수 감사 미사를 드렸는데 들어온 곡식이 풍성하였고, 제대 앞을 온갖 곡식(쌀, 콩, 들깨 등)과 커다란 호박으로 꾸몄습니다. 헌금도 평소 주일 헌금의 세 배나 들어왔습니다. 그날의 헌금을 지역 내 무의탁 노인 시설과 장애인 시설에, 그리고 암으로 투병하시는 할머니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바로 우리 마음을 바꾸어 줄 예수님이라는 것을, 사람은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만 배는 더 행복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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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1. 종말은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날
오늘 전례는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야훼의 날’, 곧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안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날을 묵상하게 한다. 말라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불처럼 타오르는 날이 온다. 교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어,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태양이 떠올라, 그 날개 밑에서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다.”(말라 3,19-20) ‘불’은 단지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정화와 심판, 동시에 구원의 빛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날의 불은 각 사람을 불태울 것이다. 그러나 불의 성격은 다르다. 불의는 벌을 받고, 의인은 정화된다. 하느님의 불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Enarr. in Ps. 37,3)

2. 성전의 파괴 예고: 역사와 믿음의 분기점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의 중심이라 할 만큼 장엄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6절) 이 말씀은 단순히 건물의 멸망 예고가 아니라, 구약의 종교 체계가 완성되어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시대가 열릴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성전의 파괴는 그리스도 자신이 새로운 성전, 즉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중심이 되심을 가리킵니다(요한 2,19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주님께서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은 단순히 파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성전, 곧 당신의 몸을 세우시기 위한 서곡이었다.”(Hom. 75,1)

3. “때가 가까웠다.”는 미혹: 거짓 그리스도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8절) 종말론적 공포와 불안은 언제나 사람을 거짓 메시아와 허황한 예언으로 이끈다. 오늘날에도, 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을 종말로 해석하는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보다 두려움에 뿌리를 둔 신앙이기 때문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교회는 마지막 시험을 거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짓 메시아의 환상에 현혹될 것이다. 그 거짓 메시아는 종교의 탈을 쓴 거짓 구원이 될 것이다.”(675항) 참된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에서 자란다. 성 이레네오는 “거짓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느님을 잃고, 세상을 구원하려던 하느님의 사랑마저 거부한다.”(Adversus Haereses V,25,1)고 말했다.

4. 박해의 시대: 증언의 기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변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13-15절) 역사 속에서 교회는 늘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전해 왔다.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라,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증거이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순교는 믿음의 최고 증거이다. 순교자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며,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다.”(2473항)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순교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분의 수난 안에서 그분을 닮아야 한다.”(Epistula ad Romanos, 6,3)

5.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종말의 덕, 희망의 완성
오늘 복음의 절정은 다음 말씀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 이 구절은 종말론적 덕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단순히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 안에서 서 있는 힘을 뜻한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인내란, 폭풍 속에서도 하느님을 붙드는 영혼의 닻이다.”(Hom. de grat., 2) ‘인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구원을 붙잡고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인내는 사랑의 완성이며, 그분의 인내 안에서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6.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깨어 있는 현재
바오로 사도는 종말을 기다리며 세상을 외면하는 이들을 꾸짖는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2테살 3,10) 참된 기다림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적극적 사랑의 행위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손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일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Homiliae in Evangelia, Lib. I, Homilia I, n.1)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은 ‘하늘나라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안의 성화’에 있다. 사목 헌장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지상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행될 때, 그 결과는 하늘나라에 그대로 반영된다. 세속의 활동은 하느님의 나라와 분리될 수 없다.”(사목 39항)

7. 결론: 깨어 있음의 신앙
종말론적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기다림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을 예언하거나 계산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날을 매일의 충실함 안에서 준비하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묵시 3,20) 그분은 이미 매 순간 우리 문 앞에서 계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의 책임과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을 맞이하는 종말의 자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그날은 먼 훗날이 아니다. 주님이 오늘 내 안에 오신다면, 그것이 나의 종말이요 완성이다.”(In Io. Ev. tract.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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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사람의 이름은>

루카 21,5-19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그 사람의 이름은>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속이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은
믿음입니다

속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도
믿음입니다

믿음은
속이거나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이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은
희망입니다

속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도
희망입니다

희망은
속이거나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이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속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도
사랑입니다

사랑은
속이거나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이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은
섬김입니다

속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도
섬김입니다

섬김은
속이거나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이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은
살림입니다

속지 않는
그 사람의 이름도
살림입니다

살림은
속이거나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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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의 날’이 모두에게 ‘재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0-19)

1) 성경에서 종말의 상황을 ‘재난’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큰 ‘재난’이 일어나면 그 일을 ‘종말’로, 또는 ‘종말의 표징’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느님 나라가, 즉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이라는 시간은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재난 자체가 종말이나 종말의 표징인 것은 아니고, 회개하라는 경고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종말의 날’은 기쁜 축제일이 될 것이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에게만 끔찍한 재난이 될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억압하던 제국의 몰락이, 억압당하면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맞이하는 기쁜 일이 되고, 망하는 제국 쪽에만 비참한 재난이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가 탄핵되었을 때, 그 일이 시민들 쪽에는 기쁜 축제가 되고, 독재자와 그 추종 세력들에게만 재난이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말과 재림 때, 또는 임종을 맞이할 때,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아니면 심판받을 죄인으로 서게 되는가? 바로 그 점입니다. 그 순간이 기쁜 축제가 될 것인지, 무서운 재난이 될 것인지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성전 정화’ 때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 2,19) 또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마르 11,17)

‘강도들의 소굴’은 허물어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때가 곧 종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9절의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종말의 표징’이라고 생각할 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겠지만, 그런 일들이 ‘종말의 표징’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종말이 아니었음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가짜 메시아들과 가짜 재림 예수들과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사람들을 속이는 일은 옛날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전쟁, 자연재난, 기근, 전염병 등은 인류 역사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실제로 종말처럼 보이는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때가 있는데, 그런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에게는 그 재난이 종말과 같겠지만, 사실 그런 일들은 인류 전체가 힘을 합쳐 극복해야 하는 ‘사랑의 과제’이고, 그냥 ‘지나가는 일’일 뿐입니다.

3) 예수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시는 것은, 박해를 받아도 흔들리지 말고 신앙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박해가 아무리 심해도 박해 자체가 종말은 아닙니다. 신앙인들의 처지는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양들’과 같은 처지이고(루카 10,3), 그래서 박해와 유혹이 신앙을 흔들어대는 상황을 늘 견뎌야 합니다. 그런 상황을 잘 견디고 신앙을 지킨 사람은 진짜 종말의 날이 왔을 때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를 ‘신앙을 증언할 기회’로 삼아라.”라는 뜻입니다. <박해를 견디면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마태 28,20) 살다 보면 우주 한가운데에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런 때일수록 더욱더, ‘항상 함께 계시는 주님’의 보호와 도움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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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한수 안토니오 신부님]

<죽음 후 경험하는 일곱 단계>

교우 여러분! 지난주에는 ‘우리 모두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에 대해 임사(臨死) 체험자들의 증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의 ‘현실’임을 기억하며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1. 유체이탈 : 우리 몸 안에 깃들어 있던 영혼이 분리되어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영적 존재로서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벽을 통과하기도 하고, 보고 싶은 가족들을 위해 ‘현기증 나는 속도로’ 순식간에 자기 집으로 날아가기도 합니다.

2. 터널을 통과함 : 엄청난 속도로 어떤 터널 같은 데를 통과하여 ‘이 세상이 아닌 어디’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3. 다른 영적 인간들을 만남 : 그곳에서 자신보다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다른 영적 존재들을 만납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생각을 알고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4. 큰 빛을 만남 : ‘백만 개의 태양’이 있는 것처럼 밝지만 눈부시지는 않은 ‘빛’(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빛에서 무한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 빛은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랑 자체로서, 바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

5. 지나온 삶을 되돌아봄 : 하느님께서는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다오.”라고 질문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들을 전부 되돌아보고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이나 천국으로 묘사됐던 곳으로 가게 되는데, 평생 해왔던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즉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따라 우리 자신이 지옥 혹은 천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6. 평화와 고요를 맛봄 : 지복(至福), 곧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온전한 행복의 상태에서 충만한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7. 되돌아옴과 삶이 변화됨 : 임사 체험자들은 ‘지상으로’ 돌아오기를 망설입니다. 그만큼 그곳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지못해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후 ‘삶이 절대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단언하며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시길 빕니다. 우리 모두 그분께 희망을 두고 끝까지 인내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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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임종을 앞두고 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녹음한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들들은 어머니가 주신 테이프를 들었다. 그 테이프 안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분은 오랫동안 직접 복음서를 읽어서 녹음했다.

그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남겨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남은 자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녀들은 떠듬거리며 성경 말씀을 읽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왜 그 테이프를 유산으로 남겨 주셨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오늘 복음(루카 21,5-19)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한 마디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11월은 위령성월로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보내는 은총의 시기이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우리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죽음을 자주 묵상하도록 권고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빛나고 분명해지는 이치이다. 세상 종말과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를 고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셨다. 또한 유다인의 기대처럼 예수님은 결코 세속적인 왕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고 죄인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겸손의 왕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열광했던 유다인들이 실망해서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주님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생명이 죽음을, 선이 악을 결국 이긴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다. 이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이다. 부활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주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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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수도회 강병완 브루노 신부님]

<늘 천국의 시민처럼>

다음 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끝으로 구원 역사를 1년 주기로 기념하는 전례 주년이 마무리되고, 대림시기와 함께 새해가 시작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루카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을 암시하는 ‘그날’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그날의 특징에 대해서도 이르셨는데,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며, “하늘에 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21.10-11)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을 상상하면 당장이라도 세상의 끝이 다가오는 듯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늘의 제1독서인 말라기 예언서는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3,19)라고 전하며, 그날의 공포스러움을 더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재난의 여러 표징이 일어나고, 최후의 심판처럼 묘사되는 이 날은 심판의 무서움을 전해주는 무시무시한 날이 아닌 우리가 미사 때마다 사제의 기도를 통해 함께 기억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실현되는 복된 희망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 며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제2독서인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2서를 보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늘 기쁘고 성실하게 살아갔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사도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날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종말 사상으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지 않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권고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할 수 있고, 바오로 사도께서도 그날까지 묵묵히 일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최초의 예루살렘 공동체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파스카의 신비를 충실하게 기념하도록 초대받았으며, (<가톨릭교회 교리서> 1200항 참조)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며 깨어 기다리도록 권고 받았습니다. (2612항 참조)

2세기 무명 교부의 신앙 해설인 《디오그네투스에게》는 “이 지상에 살면서도 그들의 시민권은 저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비롯되지 않습니다.”라고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하며 지금은 지상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높여주신 지위에 따라 살아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우리 역시 지상의 삶을 전부로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을 희망으로 기다리며 활기찬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서울주보》 제25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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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쌍둥이 형제인 두 태아가 어머니 자궁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너무 멋져! 이곳에서의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드디어 빛 속으로 나가 노래하고 춤추고 맘껏 먹을 수 있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태어난 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고 누가 그래? 먹고 춤을 춘다고? 웃기지 마! 우리 음식은 탯줄에서 나오는데, 걸어 다니고 춤추기에는 탯줄이 너무 짧단 말이야.”

“뭐 굳이 따지고 들자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태어난 후에 삶이 없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주 간단해.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모두가 엄마 얘기를 하지만, 엄마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과학적으로 말하면, 전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

지금의 우리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과학적으로 죽음 이후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직접 부활하신 것입니다. 태아 상태에서 지금 삶을 이해할 수 없듯이, 이 세상 삶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알게 되었고, 굳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더욱 성실하고 충실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라면서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가 이루어집니다. 제자들은 이 충격적인 사건이 언제 일어나고, 또 그 표징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세상은 늘 전쟁, 재난, 거짓 가르침으로 혼란스러울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서 두려워하거나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받는 박해를, 복음을 ‘증언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비록 순교의 위협과 가장 가까운 이들의 배신을 겪을지라도, 하느님의 궁극적인 보호하심(“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을 신뢰하며 ‘믿음의 인내’로써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세상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믿지 못하면서, 믿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무시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 믿음의 인내가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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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가을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 벌써 가을이 저만치 밀려나 있음을 피부로 느낍니다. 이렇듯 우리 삶도 떨어지는 낙엽처럼, 움켜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인생의 가을이 물러나겠죠. 하지만 우리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맙시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기에 더 이상 슬퍼하지 맙시다. 다만 윤동주 시인이 자신에게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하였는지 물어볼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라는 노랫말처럼, 우리 또한 우리 자신에게 사람들을 사랑했고,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저런 열매를 맺었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대답은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하면,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성찰은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이제 자신은 회복되고 성령의 행복과 위로를 받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교회 전례 주년은 대림 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예전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도입하기를 바라시면서, “전 세계 공동체가 가장 작은 이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 사랑의 더없이 훌륭한 구체적 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선언하셨기에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변경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양한 형태의 빈곤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하느님의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권고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서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귀담아 잘 들어주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 187항에서)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의 취지를 마음에 새기면서, 여행을 좋아했던 저는 가끔 여행 에세이를 즐겨 읽기도 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좋아하며 추천하고 싶다고 말한 책인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여타의 여행 에세이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 책은 세계의 11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작가의 시선을 모은 글들인데, 이 장소들을 관통하는 표제어(key word)가 ‘폐허’입니다. 이 책의 몇 대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고대 유적에서 배우는 가장 간단한 교훈은, 뭐든 수직으로 세운 것은 (…) 훗날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수평적인 것들이 주는 매혹에 저항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 언젠가는 남은 유적들이 모두 사라져 사막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평선을 방해하는 수직 기둥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이 시간에 대한 공간의 최후의 승리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지적인 훈련과 야망들이, 심드렁했던 나태함 그리고 실망감 때문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 나에게는 목적도 방향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삼십 대 때보다 훨씬 적게 생각한다는 것, 나 스스로 빠른 속도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인용한 이 대목은 작가인 다이어를 여행으로 이끈 것이 바깥의 폐허일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의 폐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 폐허는 과거를 떠오르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보는 이를 미래로 안내하죠. 거의 어떤 예언 같은 느낌입니다. 미래는 결국 이런 모습이 될 거라는 예언이요. 미래는 늘 이런 모습으로 끝났습니다.』라는 부분에 도달하면 독자들에게 지금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의 안팎의 폐허와 화해를 꾀하도록 초대합니다.

지난 안식년 동안 북유럽과 남유럽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점은 성전의 외부의 크기보다 내부의 화려함과 소박함의 차이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후 조건의 차이에서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그보다는 북유럽의 교회들은 대부분이 루터 교회였고, 남유럽은 전부 다 가톨릭교회(=대항해 시대의 부를 누린 국가)였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정말이지 남유럽의 내부는 화려함과 함께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에, 몇몇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라고 성전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은 이미 미카, 예레미야, 에젤키엘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 있었으며,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전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재건된 제2성전을 두고 하는 말씀이며, 기원전 19년부터 헤로데 왕에 의해 확장되어 예전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로마군은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제2 성전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부분은 오직 서쪽 벽(=통곡의 벽)의 일부로서, 지금도 유대인들의 희망과 순례의 중심이 되고 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복구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자 그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런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21,7)라고 묻자,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21,8)하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당부 요지는 결국, 내가 그리스도다, 고 선언하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조선 말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와 위기 속에서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자처하는 사이비 교주와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떠벌리는 인간은 늘 상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이비 예수와 거짓 메시아가 누구인지 식별할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표징들, 곧 민족과 민족 간에, 나라와 나라 간에 전쟁;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 박해와 미움 등을 언급하셨으며, 사실로 지난 2,000년 동안 이 모든 일이 거듭거듭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직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참된 신앙인은 그때가 언제인지 어떤 표징이 일어날 것인지 관심하기보다 다만 지금 주어진 현실을 깨어 살면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참된 준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카 사가는 묵시문학이 전하는 종말은 이미 왔기에 갈팡질팡, 우왕좌왕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삶의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당신의 참다운 미래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앙인인 저희가 주인으로 행세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지 않고 미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날은 더디 오려니 하고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며 자기 할 바를 다하는 사람답게”(2테3,11.12참조) 살라는 권고를 마음에 새기면서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현재 조건이 고통스럽고 암울할지라도, 삶에서 부대끼는 조건이 어둡게 보이고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희망과 기쁨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때론 세상에서 하느님의 미래를 앞당겨 살다 보면 “더러는 죽음을, 더러는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8)라는 말씀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미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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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나무를 지키는
나무의 뿌리처럼
뿌리는 생명을
지키는 참된
힘입니다.

인내는 생명을
지키는
중심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이끄는
정화의 과정이며
마음의 진실한
힘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돌보십니다.

무너지지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뿐입니다.

하느님만을
붙잡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무너짐의
메시지는
파괴가 아니라,
우선적인 희망의
선택입니다.

모든 혼란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참된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은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진정한 마음의
힘입니다.

인내는
주님과 함께
흐르는 삶의
지혜입니다.

억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고,
삶을 깊게
깨닫게 하는
생명의 힘이
인내입니다.

인내는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인내와 생명은
단순한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깊은 연결 속에서
서로를 완성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선택이 바로
인내입니다.

생명을 누리는
인내로
오늘을 살아가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인내는 생명의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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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계철 라파엘 신부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막바지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현존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전쟁과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생기고,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이 일어나며, 믿는 이들이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가까운 이에게까지 미움과 위협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종말에 관한 표현을 ‘묵시 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 문학은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온, 박해 시기에 성행하던 표현 양식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데도 축복보다는 고통을 받고, 권력자들은 악과 타협하며 세상의 승리자처럼 보이는 불의한 현실에서 시작된 표현입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악의 상황을 인내하고 이겨내면 새 세상을 맞이하리라는 현재에 대한 성찰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세상 것은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끝이 절망은 아닙니다. 믿음은 끝으로 망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희망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새 세상의 희망의 날까지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연중 제33주일은 선종하신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신 날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시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복음의 중심이라고 자주 말씀하시며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이들은 가장 작은 이들이고 취약한 이들로서 사회 공동체 밖으로 버려진 이들입니다. 그리고 사회 안에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이들입니다. 이들은 사회 공동체원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들 편에서 그들이 다시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오늘날 가난한 이들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셨습니다. 노숙자·중독자·난민·토착민, 점점 소외당하는 노인들, 이민자들이 이 시대 가난한 이들이며, 인신매매의 희생자들, 불법 공장이나 매춘 조직에서 일하는 이, 구걸에 이용되는 어린이들, 불법 노동착취를 당하는 이들, 배척과 부당한 대우와 폭력의 상황에 시달리는 여성들, 자신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는 무죄한 태아도 가난한 이들이며, 나아가 경제적 이윤과 무분별한 착취에 휘둘리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피조물과 자연도 가난한 존재에 포함하였습니다.(「복음의 기쁨」 210~215항 참조)

그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사회 공동체에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다면, 결국 모두가 공멸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무너져가는 생태계와 오염되고 있는 자연환경까지 가난한 이들 안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적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거저 내려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닮고, 스스로 늘 가난과 벗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신앙 성숙의 결과이며 성화로 나아가는 도구입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는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 정신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cpbc 이계철 신부의 생활속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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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인택 바오로 신부님]

<신앙의 마이크로 브레이크>

얼마 전 라디오에서 도시의 삶에 지쳐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자 일을 그만두고 시골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모처럼 만의 삶의 여유를 느꼈고, 어머니와 라디오를 들으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시 도시로 돌아갈 마음을 접게 되어, 시골에서 일을 알아보고 있다는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라디오 앵커는 이 이야기를 듣고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무작정 시골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바쁜 일상에서 쉼과 여유의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일하는 법도 배워야 하지만, 사실 쉬는 법도 배워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잘 쉬지 못한다.

최근 라디오에서 ‘마이크로 브레이크(micro-break)’라는 말을 들었다. ‘아주 짧은 휴식’을 뜻하는 말로, 5~10분 정도 쉼의 시간·스트레칭·잠시 걷기·창밖을 보거나 먼 곳 바라보기·깊게 호흡하기·눈을 감고 1분 동안 휴식 혹은 멍 때리기·커피나 차 마시며 생각 비우기·좋아하는 음악 1~2곡 듣기 등 신체적·정신적 활동이 그 예다. 이러한 쉼은 두뇌를 리셋하여 집중력 및 생산성 향상·스트레스 감소·신체 건강 개선·창의성 증진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의 빈 공간을 스마트폰이 점령해버렸고, 그러는 사이 우리 뇌는 하루 종일 쉼 없이 무언가에 집중하여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며 멈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 일상은 피곤하며, 짧은 휴식을 자주 취해 힘과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쉼과 휴식이 더디 가고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더 멀리 더 효과적으로 가는 길이다.

이와 함께 ‘영적 마이크로 브레이크’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음이 허전하고 고독감이 느껴질 때,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대화로 초대하시는 때다. 나의 지친 영혼을 쉬게 하시며 새롭게 힘을 차릴 수 있도록 활력을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나는 하루 동안 얼마나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하며 살고 있는가?

‘신앙의 마이크로 브레이크’로 묵주기도나 성체조배, 혹은 잠시 상본을 보며 바치는 화살기도가 있겠다. 매일미사 앱으로 ‘오늘의 강론’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음만 있으면 일상 가운데 주님과 함께하는 쉼의 자리를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사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쉼과 휴식은 불가능하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우리는 삶을 종종 무거운 짐으로 느낀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오리무중 속에서 헤맬 때도 있다. 바로 그때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자.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무게를 잘 알고 계시며 공감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가 약하고 지친 존재, 휴식이 필요한 존재임을 잘 아시기에,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우리를 당신의 안식으로 초대하여 쉬게 하신다.

주님께서 쉬러 오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음의 쉼과 휴식이 필요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께 다가서는 단 한 걸음이다. 그리고 주님께 가기 위해 일을 잠시 멈추는 용기다.

쉼을 바라는 우리 영혼에 귀 기울이자.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자. 힘든 짐을 내려놓고 그분 품에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자. 그럴 때 우리는 조금씩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며, 주위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주고, 주님께 그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cpbc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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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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