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0장 27-38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모임 주의사항

– 나눔은 남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는 시간이 아니라 모임 전체를 주관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 묵상 나눔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의미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눔을 비판하거나 토론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이해력과 지식을 자랑하는 나눔은 바람직하지 않다.
– 이웃 안에 함께 계시면서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의 은총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나눔을 경청하고 마음에 새긴다.
– 개인적 성격을 띤 나눔 내용은 그룹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다. 모임에서 나눈 개인적 이야기는 외부에 퍼뜨리지 않는게 형제애의 실천이다.
– 발표할 때는 반드시 단수 1일칭(나)으로 해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3인칭(그 또는 그들) 이나 복수 1인칭(우리)으로 객관화 시키지 않도록 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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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38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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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복음에 담겨 있는 매우 독특한 이 표현은, 죽음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지상에서 죽는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는 믿음,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줍니다.사실, 예수님 시대 때 바리사이들은 부활과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혼 불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부활과 영혼 불멸에 관하여 자주 논쟁을 벌이고는 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오경의 구절을 근거로 설명하십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두고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데,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한다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하느님 앞에서 당연히 살아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논리에 따르자면 지상에서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맞지만, 그 영혼은 하느님 앞에서 계속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우리의 영혼이 종말 때 완전히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부활을 믿는 이들은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일곱 형제와 어머니처럼 진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마저 내어놓습니다. 십자가를 피하는 이는 결코 부활을 믿지 않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부활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우리가 지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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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1.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이야기를 해봅시다.

2. (악한 일에 하나된 사두가이들) 나는 예수님을 비판하고 의심하며 지내는지 예수님을 높이는 일에 하나가 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신앙생활을 하며 나는 군중에 의해, 분위기에 의해 예수님(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한 경험이 있는지 이야기 해보고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이야기 해봅시다.

3. “십자가를 피하는 이는 결코 부활을 믿지 않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에서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한 경험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나의 십자가는 어떤 통로로 왔으며, 나는 어떤 자세로 나만의 십자가를 짊어졌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아직 짋어질 기회가 없었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짊어질지 이야기 해봅시다.

4. 결심: 오늘 말씀을 토대로 나는 어떤 생활을 해야 될지 이야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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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동영상/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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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로 시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오늘의 삶이 어제의 결과이고, 또 오늘 삶의 결실이 내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 우리 안에 엄습합니다. 내가 나이 들어서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 내가 병들었을 때 누가 나를 챙겨 줄까? 그리고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죽음에 대해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시각과 감정, 또는 두려움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까지 이어지지만, 사실 우리는 그 이후를 경험해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곳의 셈법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습관적으로 이 세상의 삶에 비추어 하늘 나라를 그려 보지만, 그곳의 시간은 여기와 어떻게 다른지,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만나게 될지, 하느님께서는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 주실지 두려운 마음을 떨치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의 모습은 이 세상의 셈법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에 참여한 이들은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그리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알려 주시며, 다시 우리의 시선을 ‘오늘’로 돌려 주십니다. 오늘을 성실히 살며,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면, 부활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실 것이고, 이 확신으로부터 신앙인은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